13장 충각사(忠覺寺) (3)
“회주님, 가장 쉽고 확실한 방법은 정면 돌파입니다."
"그야... 뭐... 제가 그걸 모르진 않는데..."
"저와 류 선배님이 실력 뛰어난 부하를 딱 10명씩만 뽑아서 직접 이끈다면, 주변 정찰 중인 인력을 손쉽게 제거하는 것은 물론, 본거지 고수들이 몰려오기 전에 충분히 빠져나오고도 남습니다.”
“헛?! 그건 안 됩니다! 절대로 안 됩니다!”
"......"
심광천의 제안에 화들짝 놀라 오른손을 머리와 함께 단호히 도리도리 내저은 강도진은 한숨을 푹 쉬며 말을 이었다.
“저도 제 성질머리 같아서는 그러고 싶습니다만, 이번 일에 한하여 살인만은 불가합니다! 대량살육으로 인해 일이 여기서 더 붉어지면, 이에 원한 품은 문파들이 온통 헤집고 다닐 게 뻔합니다."
"...그게 저희로선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상입니다. 회주님."
"그러다 자칫 제가 귀마회와 연결이 되었다는 사실이 퍼지기라도 한다면... 어후~, 정말 뒷감당 못합니다! 안 돼요, 안 돼! 그 방법은 무조건! 무조건 전 반대입니다.”
“....회주님, 저희가 혹시 부끄러우신 겝니까?”
경험해본 적 없는 종류의 당혹감은, 강도진의 입가에서 침 튀기는 흥분으로 진화했다.
“아니, 아니! 그게 아닙니다! 단지... 그게 그러니까... 아오, 내가 말주변이 없어서 진짜 뭐라 잘 표현이 안 되네!”
“......”
“아! 그러니까 제 스승께오선 세상에 둘도 없는 의협이시온데, 전인의 자리도 박차고 나간 제자 녀석이 귀마회 우두머리가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시는 날엔! 전 그날로 끝입니다, 끝!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어떻게 좀 설명이 됐겠습니까?”
“외람되오나 솔직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강도진과 마주한 두 사람은 가장 편한 길을 열렬히 거부하는 그의 고집 덕분에 매우 난처하기 이를 데 없었다.
구린 뒤를 캐는 놈이건, 엄한 소문을 퍼트리려는 놈이건, 조직의 앞길에 장애가 되는 인물 따윈 자비 없이 제거하는 방식이 귀마회의 오랜 전통이기 때문이었다.
"크흠..."
그러니 류성우가 심광천과 더불어 이토록 안절부절 못하는 강도진의 사고체계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물론이었고, 심지어 한편으론 가공할 무공만 제외하면 본회의 회주로써 자질이 충분치 않다는 불만까지 언뜻 생기기도 했다.
다만 강도진에게 일찍이 충성을 맹약한 그들이었기에, 자리를 박차고 불평을 토로하기 보단 그의 뜻을 따르기 위해 타개책을 강구하는 쪽으로 노력을 기울였다.
잠시 후, 찻잔의 온기가 식었을 때쯤 생각을 정리한 류성우가 강도진 앞에 다른 제안을 내놓았다.
“회주님.”
“네, 말씀하십시오.”
“저희를 따라오실 적에 말씀하시길, 충각사와의 인연이 있다고 하였었지요?”
“에... 인연이라기 보단 응어리를 좀 풀어야 할 게 있습니다. 참고로 고개 숙여야하는 쪽은 접니다.”
"흐음..."
그는 강도진의 의중을 재차 두드려가며 말을 이었다.
“다시 한 번 확인하겠습니다. 이번 일에 살인은 결단코 불가이십니까?”
“진짜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만, 저는 꼭 그리 하고 싶습니다.”
“...알겠습니다.”
류성우가 약간 뜸을 드리매, 그에게서 희망의 그림자를 발견한 강도진이 자신 있게 이야기했다.
“뭐든 일러만 주십시오. 제가 다소 불편해지는 일이 있다손 치더라도 전혀 상관없습니다.”
“음... 적대적인 이들에겐 언제나 전통적인 귀마회의 방식을 고수해왔으나, 회주님께서 이토록 완강하시니 방침을 달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제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요?”
이에 류성우는 정말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간단합니다. 회주님께오서 모든 이목을 집중 받으시면 모든 일이 해결되옵니다.”
“...예?”
* * * * *
사흘 뒤 우곡성.
“뭣이?! 천경의 고수?!”
“본단으로 전서구 띄워! 조화경의 고수가 나타났다고 알려야 한다! 이 정보가 딴 놈들보다 늦어선 안 돼! 서둘러!”
“지금 당장 진위를 확인하여 즉각 보고해! 비번이라 쉬는 놈들도 죄다 불러들여서 투입시켜!”
성내의 소식통이란 소식통들이 정신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도진이 조화경의 고수라는 첩보가 우곡성 방방곡곡에 쫙 퍼진 이후, 현재 일반 백성보다 무림인의 수가 더 많은 장내는 경이로움과 혼란 속에 허우적댔다.
“어디냐?! 어디?!!!”
“방금 충각사로 향하고 있다는 첩보를 받았습니다!”
“앞장서라!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할 것이다!”
“예!!!”
충각사로 이어지는 길목 양옆이 많은 인파로 바글바글했다. 이 조화경의 고수에 대한 소식은, 무림인들은 물론 일반 백성들에게 있어서도 더없는 자극적인 화젯거리였기 때문에, 귀마회측에서 고의적으로 퍼트린 풍문을 지나가다 무심코 들은 행인들마저도 호기심에 들떠서 우후죽순 몰려와 있는 형국이었다.
- 느릿느릿.
이제나 저제나, 아니 오시면 어쩌나. 퀭한 피로 달래며 두 눈 빠지게 기다리던 군중들의 시야에 기골이 장대한 흑의사내가 마침내 드리워졌다.
“와, 왔다!“
"저런... 사람이...? ...진짜...?"
“앗?! 아아...“
덥수룩한 산발머리, 질감이 해질 대로 해진 시커먼 옷차림새. 거기에 세월아 네월아 걸는 와중에 이쑤시개로 방금 전 식사 이후 입안에 남은 잔재들을 쩝쩝쩝 청소중인 그의 첫인상은, 거짓말로도 눈부신 권위가 넘친다고 평할 수가 없었다.
특히나 일서국 진영후와 같이 ‘문무를 겸비한 절세미남’ 귀공자를 희망하며, 상상의 나래를 장황하게 펼쳤던 여인들로서는 충격의 그 정도가 보통을 넘어섰다.
“으으... 아니야, 이건 아니야! 누가 거짓말이라고 해줘!”
심지어 까치발과 실눈으로 눈여겨보던 젊은 처자들 중에 더러는, 분명 사람을 오인한 것이라며 눈앞의 현실을 철저히 외면하기도 했다.
“아니, 저기 뒤따르는 자는?! 풍령세가의 장현도가 아닌가?!”
“분명 풍령세가와 인연이 있는 자라고 했으니, 저자가 틀림없이 천경의 고수일 것이다!”
하지만 은사국 사대호협(四大豪俠)으로 유명한 장현도를 알아본 사람들은, 다른 누군가를 강도진 뒤편에서 열심히 살피던 그녀들에게 매정한 진실을 깨우쳐주었다.
“나무아미타불.”
“처음 뵙겠습니다.”
미리 마중 나와 문지기처럼 지키고 서있던 무승 10여 명의 합장에, 강도진은 정중히 포권을 취하며 답례했다.
“강가 도진이라 합니다. 그리고 본관은 운태벽라본원입니다.”
"아, 어느 귀인이신가 했었는데, 그 덕망 높으신 이서백옹의 제자셨군요."
이후 그가 대화를 자연스럽게 이어나가려하자, 그 중 가장 수행이 깊어 보이는 중년 스님이 한 걸음 나서서 강도진을 정중히 응대했다.
“저는 충각사 칠직(七職) 중 호법을 맡은 생원(生願)이라합니다. 저희에게 힘을 싣고자 찾아주신 강 시주의 걸음에 사찰을 대표하여 감사 올립니다.”
“아닙니다. 무림의 탯줄과도 같은 충각사에 미약하나마 도움이 되고자함은, 저 또한 이곳에 모인 여러 무림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시주의 겸허함에 제 고개가 절로 숙여집니다."
충분한 통성명이 끝났으니, 그 다음으로 넘어갈 차례였다.
"저어... 생원대사님. 그런데 오늘 이렇게 찾아뵌 것에는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허면 또 무슨 일로 본 사찰을 찾아계시었는지요?”
“혹 결례가 되지 않는다면, 주지스님을 뵙고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이 일은 사실 썩 자랑스럽지가 않아서 그렇습니다.”
“흐음... 때가 때인지라 현재 사찰 내의 외부인 출입을 엄금하고 있습니다만... 강 시주께 중한 일인 듯하니, 주지스님을 뵙고 한 번 여쭙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여기서 기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예, 물론입니다. 감사합니다.”
* * * * *
그로부터 한 식경이 조금 지났을까? 강도진은 주지 스님의 허가를 받아온 생원 스님의 안내를 받아 정문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동행을 강하게 희망하던 장현도를 적당히 설득시킨 그는 홀로 호법의 뒤를 따랐다.
강도진은 입구를 시작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가파른 오르막길을 걸으면서, 어째서 단순히 허락을 구하고 오는 데에 그만한 시간이 필요했는지를 충분히 이해했다.
그만큼 주지 스님이 기거 중인 상단으로 향하는 길목은, 말로만 길이었을 뿐이지 그냥 험하고 굽이진 산길 자체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더불어 산중턱 중간 중간마다 자리한 전각들에게서 받는 느낌 또한 대충 이와 엇비슷했다.
과연 무공을 일상수행으로 삼는 절간답게 다른 계통의 법전에서 의레 볼 수 있는 번쩍번쩍한 화려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대신 험준한 산세를 가감 없이 그대로 유지한 채 단단히 쌓아올린 건축양식과 구조물들에 녹아있는 자연 그대로의 웅장함이 매우 인상 깊었다.
- 캉! 파앙! 팡-!
이와 같은 운치를 감사하며 부지런히 오르는 사이, 멀리서 미약하게 울리는 금속음과 둔탁한 마찰음이 있었다.
이 소리에 강도진을 안내하며 데면데면하고 어색한 행보를 거듭하던 생원 스님이 적막을 깨고 나지막이 운을 띄웠다.
“오늘따라 허락받지 않으신 시주님들의 걸음이 잦군요.”
일찌감치 부딪치는 여러 기운들을 감지하고 있었던 강도진이 그 말에 사과를 표했다.
“수고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제가 원인이지 싶습니다.”
“허허허, 한낱 세간의 호기심에 불과하거늘, 어찌 시주님의 잘못이라 탓하겠습니까?”
“그리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아... 그런데... 저... 외람되오나 간방 1리(里) 부근에는 추가 지원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
생원 스님이 그의 이야기에 의문을 가짐과 동시에, 강도진이 지적한 방향에서 다급한 호각소리가 울려왔다.
- 삐이익-! 피익!
“헛...! 그, 그렇군요.”
강도진과 함께 걷던 무승들은 그 먼 거리의 상황도 훤히 꿰고 있는 강도진의 기감에 내심 놀라워했다.
이어 생원 스님이 곧바로 옆에 있던 한 무승에게 눈짓하자, 같이 동행하던 인원 중 절반이 합장을 올린 뒤에 경공을 펼쳐 떠나갔다.
* * * * *
“나무아미타불. 귀한 걸음을 하셨습니다, 강 시주.”
강도진과 남은 무승들이 거친 산세를 제외하면 가히 절경이라 말할 수 있는 풍경을 거슬러 올라와 부처와 보살상이 모신 상단에 도착하니, 뜰 안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노승이 그들 반기어 인사를 청했다.
‘저분이 주지 스님이신가보군.’
남들과는 색이 조금 다른 승복과 지긋한 연륜이 느껴지는 풍모. 그리고 그 뒤에 두런두런 무리지은 고승들에게서 노승의 신분을 확신한 강도진은, 그의 발치 가까이로 가자마자 큰절부터 올린 뒤 무릎을 꿇었다.
물론 영문을 모르는 노승과 나머지 사람들은, 이 난데없는 강도진의 행위에 몹시 당혹스러워했다.
“헛?! 이, 이 무슨......”
주지 스님이 황급히 그를 일으키려 다가오매, 강도진은 이마를 땅에 가져다대며 꾸벅 예를 갖춘 채로 말했다.
“죄인 강도진. 충각사에 뜻하지 않았던 결례를 범했기에, 용서를 구하러 왔습니다.”
“허허... 시주께오선 무슨 연고로 이렇게까지 하시는 건지...”
“주지스님께오선, 최근 항간에 충각사의 무공으로 말썽을 피우며 다닌다는 자에 대해 알고 계시는지요?”
“음... 물론입니다. 상세한 답변을 요구하며 신원을 따지러온 세력이 왕왕 있었기에 익히 잘 알고 있지요. 저희도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사방으로 알아보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분명 살파랑이란 예명이 붙은......"
불현듯 질문의 요지를 깨달은 주지스님의 말끝이 흐려졌다.
"아니... 혹시 설마하니..."
“예, 제가 바로 그 자이옵니다.”
“크흐음....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작가의말
다음 화는 11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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