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만개일화(滿開一花) (4)
* * * * *
“이럇!”
“이랴!”
“하앗!”
황급히 올라탄 기수의 다그침은, 말이 땅을 박차는 소리마저 요란하게 만들었다.
- 이히히히힝~,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그러나 여기서 조금 떨어진 출발지에서 퍼지는 고함들은, 이보다 한층 더 시끄러웠다.
“도, 도둑이야! 도둑!”
“도둑놈 잡이라!”
“추격해라! 어서! 절대 놓쳐선 안 된다!”
하지만 저마다 성깔 부리며 외치는 소리들은 오로지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미리 여물에 약을 풀어놨었기에, 말들이 설사를 해대며 나자빠졌던 것이다.
“으휴~, 이쯤 되면 됐다. 갈 길이 머니까 이제 말들의 체력을 좀 아끼자꾸나.”
“......”
“......”
한참을 앞서서 말을 몰던 이가 속도를 줄이며 뒤를 바짝 따르던 두 사람에게 이야기를 건넸다.
그런데 다른 두 사람은 속도만 앞선 이에게 맞출 뿐, 둘 다 뚱한 표정으로 누구 하나 대꾸하지 않았다.
“에이~, 이 놈들아! 내 진짜 미안하다. 그만 속 좀 풀어라! 정말 몰랐다고!"
"......"
"따지고 보면 나도 피해자 아니냐?! 너희 어미가 잔소리로 달달 볶아댈 걸 방금 상상만 잠깐 했는데도, 벌써부터 온몸이 섬뜩해져온다!”
이와 같은 구선웅의 변명을 들은 손우빈이 대뜸 버럭 대었는데, 그의 한탄은 뭔가 다른 부분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숙부님! 지금 이게 미안하다고 끝날 일입니까?”
“아, 진짜 몰라서 그랬다니까 그러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너희가 나한테 강 대협이 그런 고수란 건 둘째 치고, 하다못해 연희가 점찍은 사람이라고 귀띔한 적 있었냐? 앙?!!!”
“으으... 저는 그런 건 모르겠고요! 도대체 왜! 이 조카를 북문으로 보내지 않으신 겁니까?!!! 아오... 그랬다면 지금쯤... 능소옥 낭자와 단둘이...”
“...엉?”
“하읔... 소문으로만 들어본 능소옥 낭자! 아아아~, 너무 만나보고 싶었는데...”
"......아니, 뭐 이런..."
능소옥. 그녀는 단순히 구선웅의 친우인 능청운의 여식이기만한 게 아니었다.
그녀는 만 명의 미녀들 속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여인이라 하여, 백성들 사이에서는 ‘만개일화(滿開一花)’란 별칭까지 붙은, '일서국 제일미'로 꼽히는 그런 절세가인이었다.
“욘석아! 만에 하나 너나 다임이가 붙잡히면, 회영문은 하루아침에 먼지로 화하게 될 수도 있는 노릇이거늘! 내가 제 정신에 너흴 보낼 것이라 생각하느냐?!”
구선웅이 냉혹한 현실을 짚었으나, 그것은 천운을 잃고 억울해하는 손우빈에겐 터럭만큼도 닿지 않았다.
“아우으으!!! 숙부님! 다름 아닌 만.개.일.화! 천하제일미를 다투는 능소옥 낭자라니까요! 나라를 오가는 장사치들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그런 최고 미인인데!!! 겨우 그 정도 위험따윈 저는 충분히 감내할 수 있었습니다!”
“...허허, 한 집안의 장손이라는 녀석이...”
“와~, 진짜 생각할수록 환장하겠네!”
* * * * *
쾌속! 지금 강도진이 성읍을 가로지르는 모습은, 그 외의 다른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웠다.
‘흐흐, 더 빨리~ 더~ 더~ 더~.’
눈 위를 걸어도 흔적이 남지 않기에 ‘답설무흔(踏雪無痕)’.
들풀을 딛고 그 위를 달린다하여 ‘초상비(草上飛)’.
물의 표면을 밟고 달린다는 ‘등평도수(登萍渡水)’.
각 경지를 딱 부러진 단어로 정의하기 좋아하는 이들이, 이래저래 가져다 붙여 만든 용어들도 그의 신법에는 적절하지 못했다.
현재는 달린다기보다 거의 날아다니고 있는 모습이므로, 아마도 구태여 붙여야만 한다면 ‘능공허도(凌空虛渡)’가 가장 근접한 표현이 아닐까 싶었다.
“허걱!”
“저, 저기 잠시만!”
그의 신법을 가까스로 알아챈 두 명의 무림인이 식겁했다.
그것도 강도진이 실수로 잘못 들어선 갈림길을 되돌리느라 잠깐 멈춰 선 것을 목격한 터였기에, 그들의 정신적인 충격은 이루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들은 우연히 만난 초인에게 말이라도 걸어보고자 했으나, 몇 걸음도 채 못되어 허탈하게 놓쳐버렸다.
그저 혹시라도 잊을까, 강도진의 생김새를 계속 되새기기만 했다.
‘뜨끈뜨끈하게 갓 만든 걸 기다리느라 조금 지체됐군. 뭐... 그래도... 우헤헤~.’
강도진은 앞선 두 무림인의 아쉬운 마음은 전혀 모른 채, 능소옥이 한 식경 전쯤에 언급한 육포와 만두가 포장된 꾸러미를 품에 뜨듯하게 끌어안고, 실실거리며 계속 내달릴 뿐이었다.
'으흐흐흐...'
그녀의 수줍은 미소만 떠올려도 더없이 가슴 벅찬 강도진이 그렇게 달리고 달려서 도착한 곳은, 깊은 산중 조그만 토굴을 이용해서 만든 움집이었다.
원래 이곳은 인근마을의 사냥꾼들이나 약초꾼들이 한 겨울 폭설에 오도 가도 못할 때 사용하는 임시 거처였는데, 아직은 때가 아니라 그런지 찾는 인적이 전혀 없었다.
'음, 도착하셨군.'
강도진은 움집 안에서 한 사람이 아닌 네 사람의 기운을 느끼고 잠깐 긴장했으나, 움집 한 귀퉁이에 약속된 표시를 발견하곤 헛기침을 했다.
“험험, 강도진입니다. 예정보다 무척 일찍 오셨군요. 구 대인.”
“쓰흡... 어머, 금세 오셨네요. 도진 오라버니. ...(훌쩍)..."
안에서 가장 먼저 나와서 그를 맞이한 건, 눈가의 눈물자국이 범상찮은 능소옥이었다.
“헛?! 소옥아! 너 울었어? 뭐야? 무슨 일이야? 어떤 놈이 우리 소옥이를 울렸어?!!!”
“아아, 어서 들어오시...게.”
“어서 오ㅅ......요.”
“강 대...”
갑자기 맹수처럼 포효하는 강도진의 모습에, 다른 세 사람은 말문이 절로 막혔다.
“...오라버니. 이제 저... 어떡하면 좋아요. 흑흑...”
“으구으구~, 소옥아~ 그만 진정하고 이 오라버니한테 차근차근 이야기 좀 해보거라. 응? 무슨 일인 게야?”
“......”
"......"
"......"
능소옥이 서럽게 흘리는 눈물은, 구선웅이 탁차운 대감의 금고에서 이중장부와 함께 훔쳐온 서찰 및 문서들 때문이었다.
구선웅이 이것들의 내용을 파악하는 와중에, 능청운의 죽음에 대한 진실이 우연찮게 더불어 드러난 것이 보다 구체적인 원인이었다.
왕명을 받들어 일부 권력자들의 뒤를 캐던 능청운이 느닷없이 역적으로 몰려서 죽게 된 이유는, 중간에 이를 눈치 챈 탁 대감이 농간을 부린 탓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여지껏 능소옥과 구선웅이 믿어왔던 것처럼, 이미 한창 계획중이던 온성태자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음모에 그가 덤으로 엮어 누명 씌워진 게 아니었던 것이다.
간략히 요약하면, 어느 건국축일에 능소옥을 보고 음욕을 품은 대정왕이, 그녀를 후궁으로 들이고자 측근들과 함께 짜고 친 믿기 힘든 수작질이었다.
만약 능청운이 온성태자 편에 선 인물이 아니었더라면, 하다못해 정치적 중립을 지킨 인물이었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그런 비극이기도 했다.
하지만 욕정에 눈 먼 자들에 의해 이 참극은 기어이 실행됐으며, 그들의 계획대로 역적의 후손이된 능소옥은 관비로서 궁으로 들어갈 날만 기다려야 하는 신세가 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 끄드드득.
구선웅으로부터 상세한 설명을 듣던 강도진의 오른 주먹에선, 쇳덩이가 우그러드는 소리가 났다.
흐느끼는 능소옥을 토닥이던 그의 왼팔도 잠시 부르르 떨렸다.
“...그랬기에 탁 대감이라는 인간이 왕에게 진상할 요량으로 우리 소옥이에게 손을 대지 않고 고층 누각에 가두고 있었다...는 이야기로군요.”
“설마 왕이란 작자가 그렇게까지 할 줄이야. 만일 탁 대감이 후일을 위해 옥쇄가 찍힌 서신을 태우지 않고, 금고에 고이 모셔놓지 않았더라면... 영영 알 수 없었겠지.”
대정왕의 날인이 된 서신은 처음부터 능청운의 숙청에 초점이 맞춰진 계획임을 여실히 나타냈고, 그동안 구선웅이 모아온 기록들과 탁 대감 장부의 내력들은 그것을 낱낱이 뒷받침했다.
- 훌쩍.
강도진의 한쪽 어깨 맡에서 작게 터진 능소옥의 울음소리는, 실로 엄청난 기폭제와 다름 없는 효과를 발휘했다.
“...이 짐승만도 못한 놈을 내 당장!”
“이보게, 강 대협! 지, 진정하시게나!”
당장이라도 박차고 나가려는 강도진 앞을, 구선웅이 절절하게 막아섰다.
“아니, 지금 진정하게 됐습니까? 탁 대감인지 영감탱이인지, 그 왕이란 놈이랑 함께 구천을 떠돌게 만들겠습니다! 비키십시오. 구 대인!”
“제, 제발 마음 가라앉히게. 내 자네의 무력을 무시하는 게 아니야. 자네가 덮어놓고 그들을 제거한다면, 더 큰 문제가 야기되기 때문에 말리는 걸세.”
“...예?”
“아직 온성태자저하의 세력이 터무니없이 약해. 그나마도 양분된 판이야."
구선웅은 강도진에게 당금의 일서국 정치 형국을 설명해줬다.
"태자저하께서 약관에 이를 때까지 기다려야 대의명분이 명확하게 선다는 온건파와, 강탈당한 왕권이기에 조금도 지체할 수 없다는 강경파. 이 두 개로 나뉘어져 있다네."
"그게 뭐 어떻단 말씀이십니까?"
"지금 당장 대정왕을 없애봤자 제2, 제3의 대정왕 같은 놈이 권력의 중심으로 들어선다는 뜻이지. 혹여 자칫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혜국에 볼모로 붙들려가신 태자저하의 안위에 치명적인 위험이 생길 수 있어!"
"......"
"먼저 간 내 친구 녀석도, 그건 원치 않을 것이네.”
그의 설명에 이번엔 능소옥이 물음을 던졌다.
“아저씨. 그럼 어찌해야 하나요? 저는 이렇게 아비를 죽게 만든 년으로 평생을 숨어 살면서! 철천지 원수들이 나라 꼭대기에서 활개 치고 떵떵거리며 사는 걸 넋 놓고 봐야만 하나요?”
“옛말에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고 하지 않더냐.”
“저는 앞으론 하루가 1년 같이 느껴질 것 같아요. 아저씨, 그들을 철저하게 무너뜨릴 별다른 방도가 없을까요?”
“아주 없는 건 아니다만..."
구선웅의 표정이 급격히 어둑어둑해졌다.
"어서 알려주세요!"
"아아, 그건 나중에 따로 자세히 이야기하기로 하고... 얘야, 일단 지금은 탁 대감부터 옭아매는 것부터 고민해보자자꾸나.”
무언가 속 시원하게 털어놓지 못한 구선웅이었다.
* * * * *
전술의 기초 중의 하나는 바로 ‘기만’이다. 이 전술적 행위는 오직 적군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적들에게 자신이 만만치 않다는 허세를 부리며,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부풀려 두려움으로부터 아군의 눈을 가려야만, 승리에 한발 더 가까워지는 이유와 같다.
하지만 이런 기만전술은 매우 근시안적이고, 다수를 대상으로 군중심리를 일으키는 경우에만 큰 이득을 얻을 수 있는 단점이 존재한다.
하기에, 오랫동안 가깝게 지내온 이들에겐 가급적 사용을 자제한다. 자칫 상호간의 신뢰관계가 어긋나게 될 수도 있거니와, 경우에 따라선 단편적인 진실 하나가 오히려 개인의 마음을 보다 효과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마치 지금 사헌부의 하가건을 대하는 구선웅의 모습처럼 말이다.
- 쾅!
구선웅으로부터 지난 사정을 전해 들은 하가경은, 그것을 허튼 소리라 치부하며 홧김에 탁자를 신경질적으로 내리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나 하시려고, 제게 따로 긴히 만나자 하신 겁니까?”
"자네에게 헛소리나 하자고, 이런저런 핑계로 8천의 군사들의 행군을 멈춘 것이 아니네."
"......."
하가경과 구선웅이 마주앉은 언덕 아래. 약 50여 장 떨어진 곳에선, 많은 군사들이 이른 저녁식사 준비를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수일 전 대정왕을 알현한 구선웅이 그의 진노를 부추겨 탁차운 대감을 실각시킬 목적으로 급파된 토벌대와, 이를 지원차 동행하는 사헌부의 정예들이었다.
- 스윽.
“자네라면 이것들만으로도 충분하리라 믿네. 하지만 그래도 의구심이 든다면, 내 다른 증거들도 차후에 보여주도록 하지.”
“......”
구선웅이 내민 몇 장의 서신들과 기록을 얼마간 내리훑은 하가경의 얼굴엔, 이루 말할 수 없는 찹찹함이 격하게 드리워졌다.
“이런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을 굳이 제게 전하신 연유가 무엇입니까?”
“두 가지를 부탁하고 싶네. 가능하겠는가?”
“......말씀하십시오. 먼저 듣고 난 이후에 결정하겠습니다.”
정치적 중립을 자처하던 하가경의 입장이, 온성태자 편으로 기우뚱해진 순간이었다.
- 작가의말
연참대전 버튼이 뜨네요. 누를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클릭했습니다. 어차피 주6일 연재이니... 겸사겸사 완주기념 배지나 좀 받아볼까 합니다. 하하.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