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해우(解憂) (8)
하인들이 금고 곳곳에 미리 밝혀두었던 등불 덕분에, 들어서는 사람의 모습을 안쪽에 있는 모두가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허억... 허억... 허억.”
금고로 진입한 이는 역시 강도진이었는데, 그가 몰아쉬는 숨이 상당히 가빴다.
그런데 불길한 전조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벽에 의지하여 걸어오는 그가, 몇 걸음 떼지도 않았는데 검은 피를 왈칵 쏟아낸 것이다.
식은땀에 이마가 촉촉한 강도진이 양소선을 노려보며 외쳤다.
“우웈! 이 년... 네 이년! 도대체 나한테 무엇을... 커헉... 먹인 것이냐?! 쿨럭, 쿨럭!”
"호호호! 그 한 병을 다 마시고도 아직 숨이 붙어있다니! 참으로 대단하구나!"
말을 덧붙이며 자리에서 일어선 그녀의 표정은, 경멸에 가까운 냉소를 머금고 있었다.
“네 놈 시체는 잘 수습해서 오래오래 요긴하게 써줄 것이니 영광으로 알거라!”
“이... 이 교활한 ㄴ... 으읔!”
그녀의 예리한 단도가 그의 몸에 깊숙이 박혔다.
- 푸욱! 촤아악~!
거칠게 뽑혀진 칼은 시뻘건 피를 한 사발 흩뿌려 한쪽 벽면을 도배했다.
“대, 대체 이 무슨...!!!”
날벼락 같은 현 상황에 벙벙해진 이들은 제대로 된 사리판단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활짝 열려진 금고문으로 유유히 들어오는 영환도사들과 강시들로 인해, 거의 반강제적으로 제정신을 차렸다.
“오호호호호! 네놈들도 슬슬 독이 퍼질 때가 됐겠구나! 그래도 너흰 이놈처럼 병째로 마시지 않았으니까, 시간이 그럭저럭 남았을 것이다.”
양소선의 친절한 설명은 9명의 청중에겐 가히 청천벽력이나 다름없었다.
“뭐? 뭐요? 독?! 아까 그 술병에 모두...!!!”
“사, 살려주십쇼! 우린 그저 시키는 대로 따랐을 뿐입니다!”
- 웅성웅성.
그들은 간청하면서도 자신들을 에둘러싼 강시들이 두려워 그녀 가까이에 다가갈 엄두를 내진 못했다.
“호호, 그래그래. 그럴 테지. 하여 아량을 베풀어 해약이 있는 독을 사용했다.”
“...해, 해약?!”
해약이라는 말 한마디의 파급력은 대단했다. 행수들은 탁자 위에 올려진 조그만 도자기 약병을 보며 온몸의 신경들을 최대치로 곤두세웠다.
- 탁. 탁.
그런데 양소선은 해약만을 꺼낸 것이 아니었다. 얼마전 방명야가 자결을 위해 챙겼었던 단도 또한 약병 옆에 나란히 놔뒀다.
“호호호, 내가 가진 해약은 오로지 한 명만을 살릴 수 있는 양이지. 하지만 너희는 아홉이고.”
“......”
부자들의 눈빛이 복잡 미묘해지는 사이, 닥치는 대로 값비싼 귀품들을 포대자루에 쓸어 담던 영환도사들의 행위가 마무리됐다.
그들이 양소선에게 욕심껏 다 챙겼다는 신호를 보내자, 그녀는 강도진의 몸뚱이를 과하다 싶을 정도로 힘차게 발로 걷어차며 말했다.
“이놈은 좋은 재료가 될 것이다! 이 사체는 반드시 챙기도록!”
“예!”
영환도사와 강시들은 그녀의 분부를 받들어 금고를 유유히 빠져나갔다.
- 끼이이...
그렇게 금고문이 거의 닫혔을 때쯤, 양소선이 안쪽에 남겨진 9명의 부자들을 향해 말했다.
“우리는 이만 떠날 터이니, 서로 잘 합의해보도록 하거라~. 오호호호!”
- 텅! 드르륵... 드르르르륵. 철컹!
"......"
"......"
"......"
남의 목숨으로 제 욕심을 채우며 살아온 자들. 그들에게 있어서 합의와 양보란, 절간의 염불보다도 생소한 헛소리에 불과했다.
"비, 비켜! 내꺼야!"
"이 미친놈이! 내가 왜 너 대신 죽어야 하는데!!!"
"놔! 놔! 이 새끼야!"
"넌 살만큼 살았잖아, 이 망할 노친네가!"
"이야야아아아!"
이 지저분한 참상을 설명하는 데엔 아비규환이란 사자성어만큼 꼭 어울리는 표현을 따로 찾기가 어려울 터였다.
* * * * *
새날이 밝음과 동시에 곡소리가 편가 대객주 저택을 중심으로 온 마을에 두루두루 퍼졌다.
지난 참사로 생긴 무덤들의 흙이 제자리를 잡기도 전이라 그런지 많은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물론 곡소리 내는 모든 사람의 두려움이 영환도사들과 강시들에게 향해 있진 않았다. 더러는 앞으로 불어닥칠 파란을 염려하고 있었다.
제아무리 백년 묵은 구렁이라도 제 머리를 잃으면 한낱 들짐승들의 양식에 불과하듯, 날벼락 같은 편가 대상단 핵심인물들의 단체 절명은, 대내외적인 조직붕괴와 풍비박산으로 이어질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었다.
허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어느 깊은 야산의 작은 공터에선 늦은 오후부터 잔치가 벌어지는 중이었다.
“우리는 이만 떠날 터이니~, 서로 잘 합의해보도록 하교랑~. 오홍홍홍!”
“으쒸! 내 말투가 언제 저랬어요?!”
“언제 그랬긴, 아까 그랬지!”
황춘섬이 직접 손질한 두툼한 소고기와, 여민구가 건너 마을에서부터 공수해온 과실주들은, 흥겨움에 풍미를 더해줬다.
특히 항상 그늘져있던 방 부인의 얼굴에서도 작은 기쁨이 언뜻언뜻 엿보였다.
“어흐! 내가 못살아 진짜!!! 딱 말해 봐요, 오라버니들! 이걸로 몇 달이나 놀려 먹을 건지! 오라버니들은 나 놀리는 재미에 살잖아요!”
“겨우 몇 달? 야야야! 이건 몇 년짜리라고!”
약오른 양소선의 발언에, 여태껏 그녀를 흉내냈던 영환도사가 목청을 한껏 높이며 과장된 몸짓을 취했다.
“아잉잉잉~, 울 자기 옆이 쩨~일 안죤~하단 말이야아앙~!”
"헉! 그, 그건 또 어떻게 알아요?!!!"
"만약을 대비해 하인들 틈에 숨어들었었지~. ...아이챰~, 냄들이~ 보쟌아오요옹홍~♡."
“푸하하하하!”
“이씨! 막내 오라버니! 거기 안 서욧!!!”
시작된 살벌한 추격전을 관망하던 다른 영환도사가 강도진에게 술잔을 권했다. 이전의 불편함 따윈 취기에 좔좔 녹여버린 모양이었다.
“자자, 매제! 내 잔도 받으셔!!!”
“잉? 매제요?”
“에이~, 사람 참~! 쌩뚱맞게 순진한 척하기 있기, 없기? 그래, 어디까지 가셨소?! 젊은 남녀가 며칠 합방을 했으ㅁ...!!!”
눈빛이 유난히 능글맞던 영환도사의 이야기는 아름답게 끝맺지 못했다.
"둘.째. 오.라.버.니."
귀신처럼 뒤에서 등장하여 등골을 오싹하게 만든 양소선이, 그의 옆구리살을 섬뜩하게 공략해왔던 것이다.
- 꽉! 꾸그그그그그....
"으읔!"
“우리 둘째... 오라버니께오선... 술이... 매우... 과하셨던 거... 같네요.... 술 좀... 깨셔야겠어요!”
독사에게 물린 개구리가 경련을 일으킨 듯한 장면에선, 과거 어느 땐가의 손다임과 손우빈의 모습이 살포시 투영됐다.
“엌! 소선아, 내가 잘못했... 아아아아악! 노, 노, 농, 농담! 장난이야! 아!!! 우엌!!!”
유독 손다임만 쓸쓸히 섞이지 못한 이 유쾌한 잔치는, 참석자들이 모두 곯아떨어질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 * * * *
이튿날 강도진과 손다임은 마을 어귀에서 방씨 가족과 인사를 나눴다. 참고로 이들의 작별인사는, 날이 밝고 보는 눈들이 많아지기 전에 일찌감치 채비하여 떠나간 영환도사들을 배웅한 뒤였다.
“방 부인,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도사님들을 따라가셔서 그곳에 새 둥지를 트시는 편이 더 좋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강도진의 염려에 방명야는 차분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이 마을은 먼저 떠난 그이와의 삶이 깊은 곳입니다. 배고픔과 팍팍한 살림살이를 이겨내며 좋은 날을 꿈꾸던... 그런 따뜻한 추억들이 많지요. 싫은 기억도 생기긴 했으나, 그래도 이곳에서 아이들과 다시 시작해보려 합니다.”
“그렇군요. 분명 잘 해내시리라 믿습니다.”
“강 대협과 도사님들 덕분에 갈취 당했던 재산 대부분을 되찾았으니,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녀의 단단한 의지를 느끼던 강도진은 돌연 무언가 떠오른 표정을 지었다.
“아, 혹시 황춘섬 씨를 하인으로 고용해보심은 어떨는지요? 비록 그의 신분은 미천하나 심성은 이 마을 누구보다 순하니, 앞으로 하실 일에 든든한 보탬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그 사람도 망나니로 사는 것보단 백 배 천 배 좋은 일이니 쌍수를 들고 환영할 테고요.”
“예, 그리하겠습니다.”
이번에 강도진은 아쉬운 기색이 역력한 아이들과 눈을 마주하기 위해 웅크리고 앉았다.
“운비야, 너는 아버지처럼 상인이 될 거라고?”
“네! 저는 마을에서 으뜸가는 큰 상인이 될 거에요!”
“흐흐, 그래. 너는 총명하니까 꼭 이 지역... 아니, 아니지! 이 나라에서 손꼽히는 거상이 될게다!”
“감사합니다!”
“음~, 보자~. 우리 초린이도 똑같이 유~명한 상인이 될 거니?”
“아니요, 전 아저씨한테 시집갈 거예요!”
- 푸픕!!! 콜록! 콜록!
돌아서서 물을 한 모금 마시던 손다임이 갑자기 사레가 들려서 기침을 몇 번했다.
“하하하, 초린아~. 그건 아주~ 아주~ 나중에~ 다시 생각해보자꾸나.”
“몇 밤 자고나면요?”
“음... 백 밤씩 백 번?”
양손을 펴 손가락 접으며 세어보던 초린은, 쉽게 계산되지 않는 모양인지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히잉... 그렇게나 많이요?”
“아휴, 그럼~. 그건 이루 말할 수 없이 매우 중요한 일이거든~. 그때까진 엄마 말씀 잘 들으면서 예쁘고 착하게 사는 거다? 알았지?”
“으음... 넹, 아저씨!”
흡족한 마음을 웃음으로 표출하던 강도진은, 이내 곧 그들과 이별을 고했다.
그렇게 그는 길을 걷고 걸으며 맹영단으로 돌아갈지, 아니면 세아 공주가 있는 장비원성으로 향할지를 잠시 고민했다.
- 헤헥, 헥. 헥. 헥...
그런데 길목 저 멀리서 치달려오는 늑대 한 마리가 눈에 띄였다. 벌건 대낮에 홀로 길 위를 박차고 달리는 늑대의 정체는 보나마나 뻔했다.
"어? 너는...?"
- 아르르르...
"어허, 이 녀석이 뜬금없이 왜 이래?"
엄청 먼 길을 뛴 것으로 추정되는 늑대강시가 다짜고짜 강도진의 바짓가락을 물고 끌었다.
"...이, 이거 피가 굳은 거잖아?"
강도진은 늑대의 이곳저곳에 딱딱하게 뭉친 털을 확인하자마자, 불길한 예감이 소름처럼 그의 온몸에 바싹 돋아남을 느꼈다.
"...그래, 가자꾸나."
간담이 서늘해진 강도진은, 그 즉시 늑대를 앞세워 부리나케 뛰기 시작했다.
* * * * *
두 시진 전.
- 땅그랑~. 땅그랑~.
영롱한 이슬이 풀잎을 촉촉이 적신 이른 시각. 사람보다 사람 아닌 것들이 더 많은 1백하고도 팔십의 무리가 험준한 산맥을 넘고 있었다.
젊은 도사들에게 선두지휘를 맡기곤, 무리 중간에서 느긋하게 걷던 조도일 장로가 곁에 있는 양소선을 향해 물음을 던졌다.
“애야, 왜 자꾸 뒤를 돌아보는 것이냐?”
“아, 아니에요. 장로님.”
“허허허.”
“왜, 왜 그러세요!”
“아니다. 아무 것도. 허허허!”
“......”
조 장로는 마치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표정으로 흡족히 웃었다. 그리고 이를 본 도사들 중 한 명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가까이 다가오더니, 미리 준비했던 두루주머니 하나를 양소선에게 디밀었다.
“자, 받아.”
“어? 둘째 오라버니, 이거 뭐에요?”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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