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여름에 이는 봄 향기 (4) - 完
조효린은 당혹감을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수 초간 강도진의 전음을 귀담아 들었다.
반면 이성민이란 자는, 당장이라도 성낼 기색이 역력했던 그녀가 아무런 호응도 없이 눈만 끔벅거림에 이상함을 느꼈다.
“허허, 경계가 지나치십니다. 너무 팍팍하게 그러지 마시고...”
“경계가 지나침은 제가 아니라 그쪽인 것 같군요.”
“하하하, 무슨 말씀이신지...?”
“그대가 아니라 그 뒤에 서계신 분께 이야기하는 겁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준비된 함정 따윈 없습니다.”
“.........”
눌러쓴 삿갓에 가려졌어도 바깥으로 드러나는 놀람이 있었다.
- 스륵.
잠시 후 뒤편에 있던 이가 손짓하여 앞선 이를 뒤로 물리고 나섰다. 그리곤 삿갓을 풀어 무기더미에 던지며 작은 미소를 뗬다.
“호호, 이렇게 빨리 알아채실 줄은 몰랐네요.”
“다음부턴 기운을 속이려 하실 땐, 주위 수하들과 현저한 차이를 두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방금 전처럼 의구심이 들기 딱 좋으니까요.”
“......”
조효린은 한방 먹은 듯 미간이 조금 일그러진 상대의 표정을 바라보며, 첫 기싸움에서 밀리지 말라며 귀띔해준 강도진이 속으로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호호호, 듣던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하시군요. 다시금 인사 올리지요. 저는 귀마회 소회주 진세연(陳洗練)이라 합니다.”
“......자리에 앉으시지요.”
조효린은 자신을 진세연이라 밝힌 여인을 천천히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나와 비슷한 동년배로 보이거늘, 소회주의 지위에 있다고?’
그녀가 느끼기에 진세연은 같은 여인으로써도 좀처럼 흠 잡을 구석 없는 또렷한 이목구비를 지니고 있었다. 다만 그 안에 품은 의중 때문인지 입가와 눈매가 새삼 차갑고 매섭게 와 닿긴 했다.
‘실력이 곧 서열이라는 귀마회 내에서... 과연 천하는 넓구나! ...그나저나 귀마회에서 조금 높은 지위에 있는 인물이 올 것임은 예상했지만, 갑자기 소회주가 직접 나설 줄이야! 아아, 이런 대응은 우리가 아닌 대협의 고강함을 경계한 것이다!’
조효린이 귀마회의 속내를 헤아리는 동안, 마주 앉은 진세연이 먼저 말을 건넸다.
“호호, 이번에 약간의 오해가 있었다들었습니다
“흥! 그러한 짓을 하고도 오해라 말하다니! 뻔뻔하기가 이를 데 없군요!”
퉁명한 조효린을 상대하는 진세연은 전혀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로써 일관했다.
“최근 저희 뒤를 샅샅이 파헤치려는 움직임이 있다 보니, 몇 주 전부터 새로운 거래에 일절 응하지 말라는 지령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이 아랫것들이 그 명령을 과하게 해석하여 큰 결례를 범했나 봅니다. 못난 것들의 지나친 대응방식에 대해 너그러이 용서를 청합니다.”
“.........”
“응당 말만으로는 성의가 부족한 듯하여, 작은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진세연이 품에 손을 가져가자, 박신혜를 비롯한 조효린의 수하들의 칼끝이 그녀를 겨누었다.
- 채챙!
이에 진세연은 그들을 향해 찡끗 눈웃음을 치곤, 좀 전보다 조금 더 천천히 움직였다.
- 스윽.
“여기 조익현 왕야의 장녀께서 알고 싶어 하신 정보입니다. 사과의 뜻으로 아무 비용청구 없이 제공토록 하겠습니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기나 하십니까?”
“혜국 이려지방. 영환도사. 그리고 불의의 참사... 아니십니까?”
“......”
정곡을 찌른 대답에 조효린은 두 눈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보이지 않았을 뿐이지 귀마저 번쩍 뜨이며 움찔한 강도진의 놀람은 그녀보다 더 컸다.
“아, 한 가지 덤으로 알려드리면, 우려하시는 하건국과 저희와의 거래는 아직 없습니다.”
조효린은 진세연이 탁자 위로 내민 몇 장의 보고서를 펼쳤다. 읽어 내려갈수록 영환도사 무리의 이동경로와 수까지 거의 정확히 꿰고 있는 그들의 정보력에 그녀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생소한 지칭이 정보 마지막 부분 곳곳에서 심심찮게 언급되는 것이 매우 거슬렸다.
“...살파랑?”
“영환도사들이 동평성 길목을 차단하며 큰 소란을 일으켰기에, 수집 가능한 정보가 현저히 적어 서로 어떤 관계인지는 명확하진 않습니다. 허나 살파랑이라 불리는 자가 이번 일의 중심에 있음은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딱 잘라서 단정은 못하겠으나... 정황상 그가 사건의 진범일 가능성이 크지요.”
- 꾸깃.
조효린은 자신이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구겨진 종이를 다시 내려다보며 곰곰이 생각했다. 보고서 자체를 그냥 무시하기에는 이미 몇몇 알고 있던 사실들과 맞아떨어진 부분이 많았고, 그렇다고 진세연의 호의를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어딘가 석연찮은 기분이 들었다.
“굉장히... 확언하시는군요.”
“어디까지나 저의 사견이 그렇다는 것뿐, 거기에 쓰인 정보만 놓고 판단하셔도 됩니다.”
“.........”
“이 자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더 알고 싶군요. 비용은 얼ㅁ...”
진실을 명명백백히 밝히라는 왕야의 명을 떠올린 그녀가 거래를 청하려 했으나, 중간에 말을 뚝 자른 진세연에게선 의뢰 자체를 받을 생각이 없어보였다.
“아, 당분간은 조금 어렵겠네요. 현재 귀마회는 대외적인 활동을 잠정적으로 중단했습니다.”
“왜죠?”
“외부인에겐 말 못할 속사정이 있습니다.”
“제 심복들의 목숨을 앗아가려던 일에 대한 제대로 된 보상차원에서 요청합니다.”
“후훗, 이미 충분히 해드렸잖습니까? 오늘 이렇게 소회주인 제가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찾아뵌 것도 이례적인 처사라 여기십시오.”
진세연이 불쾌감을 대놓고 드러냈으나, 그녀가 제공한 정보량은 심복들이 당했던 고초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라고 생각하는 조효린 또한 이미 신경이 긁혀진 상태였다.
“실망입니다. 경솔한 판단은 저작거리 소상인보다 못하고, 제멋대로인 품행은 동네 왈패들과 다를 게 없군요.”
“조익현 왕야의 장녀께오서 주제넘은 언행을 거침없이 내뱉으시는군요.”
“명성 자자한 귀마회에 일말의 희망을 품고, 그렇게나 힘겹게 접선을 시도했었는데 그게 고작 한낱 낭비에 불과했었......”
- 스아악!
그녀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 더 이상 인내하지 못한 진세연의 잔상이 일었다. 삽시간에 조효린 곁에 붙어선 진세연은, 소매 안에서 튀어나온 쌍비조(雙飛爪)의 날카로운 한 끝을 그녀의 천돌혈을 겨눈 채로 경고했다.
“좀 더 자중하시죠. 지금 누구와 마주하고 있는지를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그 말. 그대로 돌려드리지요.”
“......!!!”
조효린의 태연한 눈짓에 뒤를 돌아본 진세연은 화들짝 놀랐다. 처음 들어서면서 문가에 던져놓았던 검날이 자신의 신주혈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천천히 주위로 눈동자를 돌려보니, 본인은 물론이고 다른 수하들 역시 코앞에서 위협을 당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어기비행(馭氣飛行)이라니... 그것도 한 명도 아닌 다수에게?!’
공중에 정지된 듯 붕 떠있게 유지할 수 있는 신기는, 어쩌다 볼 수 있는 어검술 따위가 아님을 잘 아는 그녀였기에 식은땀이 절로 흘러나왔다.
‘보고됐던 것보다 훨씬 엄청난 고수가 숨어있었구나. 어쩌면 회주와 필적한 실력자일지도 모른다. 본회의 문제가 일단락되자마자, 망을 총동원해서라도 알아봐야겠어. 쯧. 분하지만 오늘은 이쯤에서 물러난다.’
* * * * *
꼬리 내린 진세연이 다음을 기약하고 얌전히 물러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강도진이 컴컴한 모퉁이 구석에서 조효린 일행 앞으로 다가왔다.
“낭자, 한 가지 묻고 싶소이다.”
“네, 대협.”
“낭자와 영환도사. 무슨 관계이시오? 어째서 뒤를 캐고 있는 겝니까?”
“그, 그런 건 어이하여......”
- 뚜득.
“확실히 선을 긋고 싶으니, 우선 답부터 해주시오.”
그의 무겁고 강인한 기운과 더불어 세차게 말아 쥔 주먹에서 튕긴 울린 소리가 범상치 않음을 깨달은 그녀는, 차분한 말투로써 그에게 응답했다.
“영환도사들은 제 친부이신 왕야의 세력 하에서 오랫동안 충성해온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저는 왕야의 명으로 그들에게 일어난 봉변에 대한 진실을 규명하려 조사하는 중입지요.”
“그렇군요.”
“그럼 저 또한 여쭙겠습니다. 대협께서는 저희 사람들과 어떻게 연관되시었습니까?”
“시간이 별로 없으니 거두절미하게 말하리다."
"예."
"내가 바로 그 종이에 살파랑이라 적힌 사람이오.”
"!"
- 채앵-!
강도진의 한 마디는 그녀의 부하들이 칼을 뽑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조효린이 그와 수하들의 사이를 서둘러 가로 막아섰다.
“이게 뭐하는 짓이냐?! 무기를 당장 거두어라!”
“하, 하지만 아가씨! 저 자는!”
“나는 칼을 거두라 명하였다! 생명의 은인께 이 무슨 결례란 말이더냐?!!!”
“.........”
수하들을 다그친 그녀가 돌아서서 키가 큰 강도진을 올려다보았다. 설명을 간절히 보채는 그녀의 눈빛을 읽은 그의 입술은 금방 열려졌다.
“나도 낭자와 마찬가지로 그 살육을 벌인 원흉을 찾고 있소이다.”
- 딸랑~ 딸랑~.
“치, 칠랑...?”
- 그르르르르릉......
이와 동시에 강도진은 은방울을 흔들어 숨어 있던 늑대강시를 불러들였다. 그리곤 화들짝 놀라 있는 그녀에게 방울을 건네며 재차 이어 말했다.
“흠... 이 녀석 이름이 ‘칠랑’이였군요. 어쨌든 이 방울은 비록 짧은 인연이었으나 좋은 벗이었던... 양소선 낭자의 유품이오. 부득이하게 지금까지 잠시 맡아왔지만 다시 돌려드리리다.”
“대협, 그간의 설명을 해주시겠습니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으나, 방금 전 그 귀마회 무리들을 뒤쫓으려면 당장 떠나야 함을 이해해주시오.”
“이, 이대로 대협을 그냥 보내드릴 순 없습니다.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조효린의 손이 강도진의 소맷자락을 꼬옥 붙잡았다. 그녀의 애절함에 어쩔 수 없음을 느낀 그는, 애꿎은 불알친구를 또 한 번 우려먹기로 결정했다.
“흠, 장비원성으로 가서 해동(海東)객잔을 찾으시오. 그리고 왼쪽 무릎을 저는 늙은 점원을 만나 강도진이 보낸 사람이라고 하면, 내 친우가 반드시 기별할 것이외다. 일단 아쉬운 대로 그 녀석에게 사정을 들었으면 좋겠소. 나머지 이야기는 내 돌아와서 들려드리리다.”
“대협의 친우 분이라 하오시면...”
“일서국 연일위 진영후라고 하면 아실까 모르겠소.”
“아...!”
무공을 익힌 사람치고, 그 위용 높은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때문에 진영후란 이름과 강도진의 거짓 없는 눈동자에 불안했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진 조효린은, 그제야 꼭 쥐고 있던 그의 옷자락을 스르륵 놓아줄 수 있었다.
“강 대협께서 일러주신 대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밤이고 낮이고 대협께서 오실 날만을 손꼽아 기다릴 것이니... 이 소녀, 조효린을 꼭 다시 찾아주십시오.”
“내 저것들을 끝까지 추격하여 원흉을 찾아내겠소. 약조하리다, 효린 낭자.”
“저는 오로지 대협만... 믿겠사옵니다.”
맑디맑은 그녀의 눈망울에, 여름철 때 아닌 봄빛이 만연해 있었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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