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거상의 자격 (1)
* * * * *
혜국 이려지방 어느 산맥.
해는 떠서 밝긴 했지만 심술 난 듯 찌뿌둑한 구름이, 안개처럼 부옇게 보이는 가랑비를 꾸준히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화창한 날일지라도 인적이 없을 법한 산중을 열심히 헤집는 무리가 있었는데, 어림잡아도 4백이 족히 넘는 인원들이었지만 장대하고도 험한 산맥을 수색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 삐익-! 삑-! 삐이익-!
깎아 지르는 절벽 밑. 오(伍)와 열(列)이 길게 늘어진 무덤들을 발견한 이가 호각을 힘껏 불었다. 신호를 듣고 사방에서 모여온 이들은 곧바로 삼삼오오 나뉘어 무덤을 조심스레 파헤치기 시작했다.
작업이 어느 정도 진척되고 있을 때 서른 명의 또 다른 무리가 나타났다. 이에 모든 이들은 손을 멈추고, 맨 앞에 선 중년인을 향해 너나 할 것 없이 무릎을 꿇었다.
“왕야께 인사 올립니다!”
“신경 쓰지 말고 계속 진행하라.”
“예!”
왕야라 불린 이는 말없이 서서 비단옷이 가는 비에 축축이 젖어오는 것도 개의치 않은 채, 그대로 우두커니 작업을 계속 관망했다.
그런 왕야 뒤에 있던 젊은 여인은, 이를 보고 나서서 무슨 말을 아뢰려다가 다시금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여기 발견했습니다!”
부하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중년인의 발이 성큼성큼 움직였다. 그가 옮겨간 장소에 미리 도열해 있던 수하들은, 자신들이 지금 막 찾아낸 명패를 주군에게 공손히 바쳤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정작 물건이 아닌, 다소 부패가 진행된 뒤편의 시체를 향해 있었다.
“......조 장로.”
중년인은 걸치고 있던 외투를 벗어 사체 위에 직접 덮어주었다.
- 으드득.
그리고 잠시 살짝 숙였던 허리를 펴는 그의 입에선, 이빨이 뿌득 갈리는 소리와 섬뜩한 명령이 함께 밖으로 튀어나왔다.
"...찾아라."
그의 치솟은 살기에 비례하여 뿜어져 나오는 내력이 어찌나 사나운지, 그 곁 2장 내에 있던 이들은 일순간도 버티지 못하고 몇 걸음 뒤로 물러날 정도였다.
“이 사태의 원흉을 찾아내라. 내 손으로 직접 처단할 것이다.”
한자 한자 절제하여 말하고 있었지만 떨림이 가득찬 중년인의 말투엔, 눈대중으로도 가늠하기 힘든 분노가 서려있었다.
여기서 말을 한 마디 잘못 놀리면 목이 떨어져 나갈 것이 자명했기에, 인근의 누구도 감히 나설 용기를 내지 못하고 고개 숙여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러던 그때. 아까 전에 말을 건네려다 그만뒀던 젊은 여인이 앞으로 나와 장읍하며 왕야 뜻을 거슬렀다.
“불가합니다. 다시 고려해주십시오.”
"듣기 싫다."
주위로 흩어지던 살기가 여인에게로 집중되자, 그녀의 몸이 심하게 벌벌 떨렸다. 안간힘으로 견디는 그녀에게 중년인은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물러가라.”
“매우 중요한 시기입니다. 왕야께서 타국에서 장기간 체류하시며 이 일을 주관하시는 건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제아무리 딸아이라 하여도, 이 이상의 언행에 예외는 두지 않을 것이다. 잠자코 내 명에 따라라.”
“이는 핏줄과 상관없는 충언이옵니다. 속히 환국하시어 오랫동안 준비해온 거사를 도모하심이 옳을 줄로 압니다.”
"갈(喝)-!"
그가 돌아서서 내뱉은 함성에 가득 실린 엄청난 내력은, 그 앞에 있는 모두를 강제로 억눌러 무릎 꿇게 만들었다.
하지만 젊은 여인은 크게 한번 휘청거렸을 뿐, 이것을 악착같이 버텨내며 바득바득 아뢨다.
“...으읔... 조도일 장로 또한... 이와 똑같이 아뢰었을 것입니다.”
“......”
여인에 설득에 중년인의 극으로 치달았던 기운이 어느 정도 사그라졌다.
"소녀의 이야기가... 으윽... 틀렸사옵니까?"
"......"
이윽고 그녀의 꿋꿋한 눈빛을 얼마간 응시하던 왕야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네 충언을 받아드려... 이대로 환궁토록 하겠다."
"감사합니다."
"허나!“
“......”
”네가 말을 꺼냈으니, 그 책임 또한 져야할 것이다!"
"...하명하십시오."
여인은 포권을 취하며, 이어지는 왕야의 명령을 귀여겨들었다.
“너는 이 사태의 원흉을 명명백백히 밝혀내야만 할 것이다. 향후 이 일을 조사하는데 있어서 나는 그 어떤 행위라도 묵인해줄 것이고, 또한 금전이 얼마가 소비되든 전부 지원해줄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을 마칠 때까진! 환궁은 아예 어불성설임을 명심해야 한다!”
“소녀, 왕야의 명을 받드옵니다.”
중년인은 고개 숙여 답하는 딸아이를 뒤로하고, 썩은 냄새 진동하는 조 장로의 시신을 직접 양손으로 들어 품었다. 그리곤 돕고자 움직이는 자들을 눈짓으로 뒤로 물리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 ...뭐, 뭐요? 고향땅 수복하는 걸 우리더러 도우란 말이오리까? 허허~, 이 거렁뱅이나 진배없는 왕족께오선 십 수 년간 무공 대신 배짱을 연마하셨나 봅니다?! 껄껄껄! 』
가슴 시린 왕야의 귓가엔 과거 조도일을 찾아가 처음 대면했을 당시의 그 비아냥거림이, 마치 당장에 직면한 현실처럼 생생히 맴도는 듯 했다.
* * * * *
혜국 장비원성.
“언니~, 거기 예쁜 언니! 노리개 하나 드려가! 내 원가로 싸게 드릴께!”
"아뇨, 더 돌아보고 올게요."
"에이~, 와서 구경만 하고 가! 여기가 제일 싸다니깐?!"
“삼치, 조기, 간고등어~. 아따, 아줌마! 너무 조물딱 하지 좀 마쇼! 거 오징어가 놀래는 거 안 보이오?!”
"이미 뒈진 녀석이 놀래봤자지 뭘! 새삼스레 유난 떨지 마요!"
"아휴, 그럼 쫌 손자국 남긴 것들을 싸악~ 사가시던가?!"
언뜻 듣기만 해도 시끌시끌하고 어질어질한 장날이 찾아왔다. 목 좋은 사거리는 사람 물건 할 것 없이 어찌나 그득그득한지, 잠깐이라도 딴생각하면 서로서로 마구 부딪치는 게 예사였다.
하지만 이런 날마다 심부름 다니는 순이는, 그 뒤에서 졸졸 따라다니는 진영후가 무척 신기해할 정도로 억척같이 잘도 비집고 돌아다녔다.
그렇게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드디어 마음에 드는 걸 찾았는지 어느 약재상 앞에서 멈춰 섰다.
“아이쿠~, 뭘 드릴깝쇼?”
“요거요거 천궁이랑 시호 각각 얼마씩 해요?”
“헤헤, 한 됫박에 70전, 60전입지요~.”
“에잉~, 너~무~ 비싸다~. 아까 저 모퉁이에선 60전이랑 55전에 팔던데......”
“아휴, 아가씨! 우리 물건을 질 떨어지는 다른 것들이랑 비교하심 무지 섭섭하죠~.”
“확실히 때깔은 좋긴 한데... 그냥 둘 다 55전씩 해서 주면 안 되나요?”
“어이구~, 그렇게 팍 깎아서 팔면 저희도 남는 게 없어요!”
“아이잉이잉~, 그러지 말고 쪼매 깎아주세요~. 제가 담에도 또 올게요~. 예?! 아저씨잉~, 쫌 싸게 팔아줘요~. 네~?!”
야물딱진 붙임성으로 끝내 약재상과의 실랑이에서 만족스런 승리를 이끌어낸 순이는, 모처럼 기분이 좋아졌는지 싱글싱글 거렸다.
“형개는 아까 샀고... 맥문동은... 창고에 남아있던 거 확실히 봤궁...... 히히, 다 샀네요! 이제 돌아가면 됩니다. 이따가 손질만 쪼매하면 되니깐, 내일 아침부터 바로 일서국 마마님께 탕제 올려드릴 수 있겠네요!”
“하하, 감사합니다. 그거 이리 주세요. 제가 들겠습니다.”
“에이~, 됐습니다. 이거 별로 안 무거워요. 그리고 높은 분께서 이런 거 주렁주렁 들고 다니고 그러면, 남들 눈에 없어 보이고 별로 안 좋아요.”
“하하하, 아닙니다. 애초에 짐꾼노릇하려고 쫓아온 겁니다. 제 안사람 건강 정성껏 살펴주시는 귀하디귀한 의녀님을 마구 부려먹을 수야 없지요~.”
순이는 한사코 거절하는 자신의 손에서 장바구니를 결국 빼앗아 걸어가는 진영후를 바라보며 입을 쭉 벌렸다.
“옴마야~, 나도 홀랑 반하겠당~. 참말로 인물 훤~하지~. 사랑하는 아내가 태기가 있다는 말에 행하는 요요 온갖 지극정성하며~. 사적인 일은 아랫사람 시키는 거 아니라고 직접 나서는 반듯한 인품에다~! 진짜 일서국 공주님이 홀딱 넘어갔을만해요!”
“어이구, 평가가 매우 후하십니다.”
“후하긴요! 뭔가 한두 개씩 부족한 누구들하곤 정말 천지차이에요!”
순이가 언급하는 그 누구들에 대해선 진영후 역시도 상당히 잘 인지하고 있었다.
“철진이는 몰라도 도진이 놈보단 제가 좀 낫긴 하지요. 하하하.”
“히힛, 그나저나 금방 올 것만 같던 도진 오빠는 감감무소식이네. 어데서 또 말썽부리고 있는 건 아닌가 모르겠어요.”
“그 놈은 의외로 자기 입에서 나온 말 하나는 굉장히 잘 지키는 구석이 있으니, 때가 되면 알아서 올 겁니다.”
“하긴 어쩌다 한 번씩은 듬직하긴 해요.”
“그렇죠. 다만 그게 아주 가끔이라 문제이지만요. 하하.”
“히히, 맞아요! 맞아!”
서로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그들은 어느새 정신 사나운 북새통 시장바닥에서 빠져나오게 되었다.
드디어 이제 좀 살겠구나 싶어졌는데, 어느 대형 전당포 앞에 우글우글 모인 사람들이 이 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야, 저기 안에 저 새끼 끌어내고 소금 확 뿌려! 어디서 원... 재수 없게시리 별 놈이 다... 여기가 전당포지, 지 질문에 답해주는 데야?!!!”
“예! ......어이, 너 말 들었지! 좋은 말할 때 당장 나가! ......야!!! 아나~ 이 시끼가 귓구멍에 #$%을 박았나?!”
“니미... @%발! 니들은 뭐야... 구경났어?! 썩 안 꺼져?!!!”
어깨에 힘주며 가게로 성큼성큼 들어가는 인간, 가게 정문 쪽에서 서성이는 구경꾼들을 쫓아내고 문 굳게 걸어 잠그는 인간.
험상궂은 가게 종업원들은 윗사람의 지시를 받자마자 늘상 해오던 역할대로 능숙하게 나뉘어 움직였다.
- 뚜둑! 퍼퍽! 쿠앙!!!
그런데 안으로 향했던 종업원의 몸뚱이가, 포탄처럼 단단히 잠긴 문짝을 부수며 쏘아져 나왔다.
“헛!”
- 휙-!
“엄마야!”
진영후가 재깍 반응하여 순이를 낚아챘기에, 날아온 종업원 몸뚱이와 그녀가 부딪쳐 다칠 뻔한 불상사를 면할 수 있었다.
- 저벅저벅. 끼이익.
이후 뼈대만 흉흉하게 붙어있는 정문을 열고 살기등등하게 나온 흑의인이 있었다. 그는 다짜고짜 겁먹고 움츠린 전당포 주인의 멱살을 덥석 움켜쥐었다.
“이, 이보시오! 정말로 난 아무 것도 모르...”
- 콱!
“크윽! 이것 좀 놓고, 우리 말로... 아악!”
- 뚜벅뚜벅.
질질 끌려간 모습을 보며 심히 두려워진 구경꾼들이 관아에 신고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는 가운데, 순이와 진영후는 다른 의미의 식은땀을 삐질 흘리는 중이었다.
‘...도진 오빠야...’
- 작가의말
퇴고하다 보면 간혹 한자 깨짐이 발견되는데... 제가 미처 수정 못한 게 있다면 알려주십시오. 깨진 한자들은 ‘?’로 표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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