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해우(解憂) (7)
* * * * *
일찌감치 일어나 방안 창문을 활짝 열고 마주앉은 강도진과 양소선은,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음, 그건 근거 없는 소문이었군요.”
“맞아요. 소리를 이용한 조건반사와 암시훈련만 잘 해놓으면, 강시들을 하루 종일 부려도 아무 문제가 없죠."
"호오~."
"그냥 편의상 그대로 놔두는 것뿐이랍니다. 세상 사람들의 편견 때문에 드러내고 나다닐 수 없는 저희로썬, 백성들 사이에 잘 퍼진 괴담들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거죠.”
깨어나는 아침 태양 아래. 강도진은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음을 뜻하는 신호를 응시하며, 반쯤 혼잣말처럼 말했다.
“나쁜 소문을 역이용한다라... 세상엔 여러 가지로 배울 게 참 많습니다.”
양소선 또한 성읍을 빠져나가는 강시들의 등에 걸린 흰색 깃발을 확인하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저는 편견부터가 마음에 안 들어요. 누구 덕분에 해부학이랑 외과술이 이만큼 발전할 수 있었는데?!!! 뭘 잘 알지도 못하는 인간들이 외적인 것만 두고서 판단하는 꼴은 정말이지! 전 그게 몹시 불쾌해요!”
“푸흐흐...”
강도진이 웃음을 작게 터트리자, 양소선이 발끈했다.
“왜, 왜요?! 왜?!”
“겉모습만 보고 저를 망나니로 치부하신 분께서, 그런 말씀을 하신다는 게 좀...”
“아니 뭐라구욧?! 그거랑 이거랑 같아요?!”
“흐흐, 농담입니다. 농담! 자~, 계획대로 손님들이 오시는 모양인데 슬슬~ 표정관리 들어가시지요~.”
창밖 멀리서 시끌벅적하게 몰려오는 부자들을 본 양소선은, 입술을 씰룩 거리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본연의 연기에 충실하기 위해 강도진의 무릎 위에 다소곳이 앉으려 했다.
“음... 소선 낭자. 안 피할 테니 저를 한 대 때리십시오.”
“?”
그녀를 잠깐 멈춰 세운 강도진이, 본인의 뒷머리를 머쓱하게 긁적이며 말했다.
“아무리 연기라지만, 낭자를 몸 파는 여인들처럼 대하는 게 많이 미안해ㅅ......”
- 짝!
양소선은 깜박했던 감정이 반짝 떠올랐는지, 마치 벼르고 벼르던 사람처럼 그의 귓방망이를 세차게 후렸다.
“작작 좀 만지세요! 쫌!”
“아... 그게... 성격 제멋대로인 인간이... 예쁜 애인에게 적당히 하는 모습은... 아무래도 남들 보기에 이상할 거 같아서...”
“그, 그렇지만 창피하고 부끄럽단 말이에요!”
자신의 몸을 더듬던 강도진의 손길을 공연히 되새긴 그녀의 뺨이 화들짝 붉어졌다.
“저어.. 그럼 한 대 더 때리시...”
- 짜악-!
그의 말이 끝마쳐질세라, 보통 사람이었다면 고막이 찢어졌을 소리가 방안에 퍼졌다.
“흥!!!”
* * * * *
“아이고~, 돈 많고 똑똑하신 분들께서 왜들 이러십니까?!”
"대협, 부디 어떻게... 저희 사정 좀..."
넓지 않은 방 끝끝내 비집고 들어와 통사정하는 부자들을 상대하는, 강도진의 너스레가 여간 대단한 게 아니었다.
"허허~, 그러게 왜! 영환도사들의 물품에 손을 대셔서! 이 큰 화를 부르신 겝니까?!"
"아니, 우린 진짜 아무 것도 몰랐소! 그런 내용이 압류한 장부에 따로 적혀 있는 것도 아니었던 데다가..."
"뭐, 그건 몰랐다손 치십시다. 근데 남의 물건 꿀꺽 했다가 탈 난 것을, 어째서 나한테 와서 하소연하시느냐~ 이 말입니다. 제 말은."
본래 더 아쉬운 사람이 숙이는 법. 대표격으로 말하는 이를 비롯한 모든 소행수들은, 마치 고위 관리들을 상대하는 것처럼 강도진에게 굽실거렸다.
“하하, 아니... 그래서 이렇게나 간곡히 청하는 거 아니겠소이까?”
“에이휴~, 한 번 더 말씀드릴까요? 나도 현상금 욕심에 강시들 상대했다가 후욱~ 갈 뻔했다니까 그러시네!"
"......"
"헌데 뭐요? 예?! 여기 모두 보호하라고? 와~ 나 같은 놈이 네댓 명 이상 있으면 모를까! ...안 해, 안 해! 이건 못해! 내가 목숨이 여러 개도 아닌데, 미쳤다고 그 짓거릴 왜 합니까?!!!”
강도진은 답답해 돌아가시겠다는 태도로 뒷짐을 지며 반대편으로 돌아섰다.
못된 놈들 골려먹는 재미가 상당히 쏠쏠했기에, 그는 한편으로 이게 혹시 천성에 딱 맞는 일은 아닐까란 생각도 했다.
'오호라~, 이제야 행차하셨구만!'
강도진은 방문 밖에서 살금살금 나타난 기척 하나를 눈치 챘다.
호흡이 일정치 않고 노쇠하기까지 하다는 기운의 특징에서, 여태껏 기다리던 인간이 드디어 도착했다는 지레짐작을 할 수 있었다.
『 일이 계획대로만 흐르면, 혼자 살겠다고 내뺀 대행주가 바닥에 떨어진 입지를 수습하려 엥간한 무리수는 서슴지 않을 것이오. 강 대협은 그저 적당히 부추겨만 주면 되는 것이외다. 』
강도진은 조도일의 지시와 열심히 연습했던 대사들을 후루룩 되짚으며 때를 기다렸다.
“대협, 부탁드립니다. 너무 단호하게 거절만 반복치 마시고... 이제 이 근방에서 믿을 수 있는 분이라곤, 대협 밖엔 안 계시다는 것도 익히 아시잖습니까?”
“에헤이~, 이렇게까지 말이 안 통하셔서야... 솔직히 뉘신데 친한 척 하십니까? 전 여기 계신 분들 성함도 모릅니다. 그리고 제 이름은 아십니까?”
“하하, 차차 통성명하기로 하시고. 일단 돈은 대협이 달라는 대로 드릴 테니...”
금전이 언급되자, 강도진은 적기가 도래했다고 판단하여 본격적으로 낚싯대를 후렸다.
“허... 거참... 이왕 말 나온 김에, 어디 물어나 봅시다! 본인들 목숨 값으로 대체 얼마나 생각하고 계신 겝니까?"
"저흰 대행수가 제안했었다던 금액의..."
그가 상인들이 주판을 튕기는 수작을 단숨에 잘랐다.
"하하하! 미리 언질드리건대 나는 무지하게 비싼 놈이오! 이런 일의 경우는 금 삼백 냥! 그 밑으론 전혀 관심 없소이다!”
“헉, 금전 300냥?!!! 듣기론 지난번엔 금 30냥이라고 하셨...”
강도진은 이번에도 소행수들의 앓는 소리를 똑 끊어버렸다.
“아휴~, 그때랑 지금이랑 같습니까? 예?! 관병들도 꽁무니를 빼고, 아쉬운 대로 끌어 모았던 현상금 사냥꾼들 또한 무더기로 나자빠진 판인데?"
"......"
"나 역시도~ 귀한 목숨 걸어야 할 거 같은데~, 그 정도는 되어줘야~ 없던 의욕이 생기겠지요! 아니 그렇습니까?!”
소행수들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자신들이 가끔 운 좋게 일부 품목을 독과점 했을 때마다 향유하던 행패를, 역으로 고스란히 당해보니 복창이 터질 지경이었다.
‘세상에! 이 놈 완전 날강도잖아?!’
‘아오... 돈 먹은 고관 중 한 놈이라도 살아있었으면, 이딴 녀석한테 굽실거릴 필요 없이 관군으로 어떻게 해결했을 텐데...’
‘...이, 이, 이!!! 에잉, 그냥 배타고 도망쳤어야 했어!’
부자들이 피눈물 흘리든지 말든지, 강도진의 물오른 연기는 계속 되었다.
“...에... 그리고 전부는 못 지킵니다."
"?!!!"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사람 수는 단 3명! 여기서 가장 금액을 높게 제시한 세 분의 안전만은, 내가 확실히 책임져 드리겠습니다!"
"아니! 그 뭐 말도 안 되는?!!"
"참고로 절반은 선불이외다~.”
“.........”
강도진이 부른 값은 편가 객주 한 달 총 순이익에 근접한 금액이었다. 더욱이 이 안에 모인 여덟 명과 경쟁하려면, 그보다 훨씬 큰 비용을 각오해야함이 당연했다.
장사꾼들이 아무리 사는 게 급선무라다곤 해도, 악착같이 불려온 재산의 일부를 뚝 떼줘야 하는 일은 선뜻 결정하기 힘들었다.
이때 외부에서 엿듣던 이가 이 망설이는 분위기를 파악하고 방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 벌컥, 끼이익.
“금 이천 냥을 내리다!”
강도진은 물론, 다른 소행수들의 눈동자들도 뻔뻔하게 들어선 마른 체구의 노인을 응시했다.
“흐음... 뉘십니까?”
“편가 대객주를 맡은 사람이올시다. 편재영이라 하오.”
“아~, 전에 심복들을 시켜 내 똘마니를 두들긴 그 어르신이로군요!"
"어흠흠..."
"덕분에 잘 부려먹었던 녀석이 그날로 도망치는 바람에, 여러모로 많이 불편하던 참이었습니다.”
“큼큼! 서로 지난 일은 묻어두기로 하고, 이 거래부터 마무리 지읍시다.”
“뭐... 좋습니다. 금으로 2천 냥이라면, 내 기억도 흐릿해질만 하니까요.”
다른 행주들의 못마땅한 시선을 의식한 대행주는 서둘러 강도진에게 협상을 걸었다.
“나는 당장 선금으로 절반을 낼 용의가 있소! 허나, 여기 있는 전원을 보호해준다는 일이 전제가 되었으면 하외다.”
“흐음... 그건 돈을 떠나서 좀 어려운 이야기인데...”
지루하게 긴 무작위 전투에서 홀로 아홉 명을 보호한다는 일은, 상식적으로도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난감해하는 강도진도, 또 그 모습에 애가 닳아서 으름장 놓는 대행주 편재영의 무리한 행위도 이상치 않았다.
“이 모두를 살릴 수 있다면! 내 무엇이든 협조하리다!”
“정히 그러하시다면야... 혹여 내가 말하는 특정 조건에 부합된 장소가 있다면, 한 번 고려는 해보겠습니다.”
“좋소, 어서 말해보시오!”
강도진은 조도일 장로가 사전에 일러준 장소를 두루뭉술하게 묘사하기 시작했다.
* * * * *
그날 저녁 대행주의 저택.
“와~, 대단하다. 대단해. 캬~ 이건 또 뭐야? 요런 건 진짜 처음 보는군.”
땅을 깊이 파내어 만든 지하금고를 열고 들어선 강도진은, 금고 이곳저곳에 빡빡히 진열된 귀한 보화들을 주물럭거리며 감탄했다.
그와 함께 들어선 다른 행주들도 이곳엔 난생 처음 와봤는지, 쩍 벌어진 입 안으로 군침을 꿀꺽 삼켰다.
“어떻소? 이만하면 대협이 원하던 장소라 할 수 있겠소?”
“하하하, 솔직히 기대 이상입니다!”
강도진은 손에 들었던 '백옥불상'을 제자리에 올려놓곤, 군데군데를 살피며 감탄을 주르륵 뽑았다.
- 둑! 두둑!
“외벽은 두께만 세 치가 족히 넘는 현철로 사방 둘러져 있고, 금고문 또한... 오우~, 세상에! 이게 다 백련정강이라니?! 게다가 들어오고 나갈 수 있는 길이라 해봐야, 두 사람도 나란히 걷기 힘든 이 통로가 유일하고~! 좋네요, 좋습니다! 아니, 더없이 훌륭합니다!”
그제야 비로소 편재영 대행주는 좌불안석 같았던 마음이 안정됐다.
'휴우... 됐군. 저 무림인이 방패역할만 잘 해주면, 내 입지에 영향은 크지 않겠어.'
그가 땅에 떨어진 대행수로서의 체면을 앞으로 어떻게 회복할지 고민하는 동안, 그의 하인들은 매우 분주하게 움직이느라 바빴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금고 안을 밤새 훤히 밝혀줄 여분의 등불까지 들여왔을 때, 무리에 함께 섞여온 양소선이 강도진 품으로 찰싹 안겼다.
"쟈기야~, 나도 왔지요~!"
“이그~, 위험하니까 내가 오지 말라고 했잖니~.”
"이이잉~, 우리 자기 옆이 제~일~ 안전하단 말이에요~."
"으하하핫!"
한껏 끼를 부린 양소선은 챙겨온 보따리를 앙증맞게 풀며 말했다.
“ 쨘! 이거 보세요! 내가 울 자기가 좋아하는 과실주를 가져왔지용~.”
그녀가 건넨 술병 하나를 벌컥벌컥 삼킨 강도진은, 오른팔로 그녀의 허리를 스윽 감았다.
“크흐~, 하여간 울 예쁜이는 하는 말도~, 하는 짓도~ 아주 그냥 내 맘에 쏙 든다니깐?!”
그의 손이 은근슬쩍 저고리를 타고 올라가 파렴치하게 움직이자, 양소선은 그를 살짝 밀치며 교태를 부렸다.
“으으응~, 아이참~. 남들이 보잖아요~.”
물론 금고 안의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한 그녀의 눈동자에선, 돌아가면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는 의지가 불꽃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하하, 이거 나만 마시기 미안하군요! 같이 한잔들 하시겠습니까?!”
"지금 이 상황에서 술이 넘어갈 리가..."
"에이~, 누가 뭐래도 긴장 풀 때는 이게 으뜸 아닙니까?"
그가 새로 따서 건넨 술병을 처음 거절했던 행수들도, 이내 못이기는 척 목을 축였다. 강시들이 몰려올 시간이 차츰 가까워지자, 너무 긴장한 나머지 입이 바싹바싹 타들어갔던 것이다.
‘이 장난도 슬슬 마무리할 때가 됐군.’
그렇게 부자들이 모두 술을 한잔씩 걸친 모습과, 겁에 쫄린 하인들이 금고에서 후다닥 빠져나가 내달리는 광경을 끝까지 확인한 강도진이 으스대며 움직였다.
“날이 밝으면 다시 열어 줄 테니, 다들 안에서 기다리십쇼! 이쁜아~, 이따가 보자~.”
“호호호~. 네에~.”
밖으로 나온 그는 복잡한 기관장치를 이용해 금고문을 굳건히 닫았다.
- 끼이이이익. 텅! 드르륵... 드르르르륵. 철커덕!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매 시진 때마다 울리는 종소리마저 닿지 않는 지하금고 안이라 그런지, 대략의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손 치더라도, 밤이 다 지났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는 시각에 금고문의 잠금장치가 다시 해제되는 소리가 잔잔히 울려 퍼졌다.
- 철컥! 드륵, 드륵, 드르륵. 끼이익!
- 작가의말
별다른 태풍 피해가 없으시길 기원합니다.
다음 화는 13시입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