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서장
* * * * *
은사국(殷斜國) 초개(初改) 재위 32년. 대서지방의 어느 산골.
늦은 해가 산자락에 뉘엿뉘엿하는 시각, 한 사내가 산 중턱에 자리를 잡았다.
비록 상투를 틀 길이가 되지 않아 산발한 머리 모양에 색이 살짝 바랜 흑의를 걸친 모습이었으나, 강인한 7척 체구의 사내에게선 용장(勇將)조차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피해갈 위세와 풍모가 느껴졌다.
흑의 사내는 산 중턱 너른 바위 위에 걸터앉아 마을을 지긋이 내려다봤다.
그리 유별날 것도 없는 촌락의 저녁 풍경이건마는, 집집마다 크고 작게 내뿜는 연기를 하나하나 자신의 눈에 새기듯 아련히 구경했다.
- 꼬르륵...
신선노름도 뱃속이 든든해야 가능한 법. 제법 깊이가 느껴지는 소리가 자신의 위장에서부터 울려 퍼지고 있음이 인지되자, 사내는 오른손으로 아랫배를 문질문질하며 뒤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성진아~, 네 잘난 사형이 허기져 쓰러지실 것만 같다~. 이제 그만하면 안 되겠냐?"
사내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본래 빼빼마른 나무 몇 그루만이 듬성듬성 있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인영(人影) 하나가 스르륵 드리워졌다.
“와~ 둘째 사형, 진짜 대단도 하십니다. 제가 마음먹고 기척을 숨기면, 대사형조차도 일각은 족히 눈치를 못 채시는데... 허참, 이건 뭐 숨자마자 형님한테 딱 걸린 거 같아 기운이 쏙 빠집니다!”
흑의 사내는 성진이라 불린, 청색 의복 청년 양손의 심히 빵빵한 보따리를 가리키며 적당히 말을 끊었다.
“흐흐... 그때는 이렇게나 맛깔난 향내를 안 풍겼었나 보지.”
무성의한 대꾸에 기가 찬 성진은, 흑의 사내와 마주 보며 앉는 가운데 자신의 코를 꾸러미 중 하나에 가져다 대고 킁킁 거리며 한 마디 했다.
"참나~. 신경 써서 이래 꽁꽁 싸맸는데, 이게 맡아진다 말입니까? 캬햐~ 일수네 강아지가 울고 가겠습니다!"
"에라이~ 이놈아, 그래도 사형인데 개가 뭐냐? 그만 툴툴 거리고 이리 좀 내놓거라. 아침 댓바람부터 굶었더니, 뱃가죽이 등에서 떨어질 생각을 안 한다."
흑의 사내는 앉은 채로 엉덩이를 질질 끌며 성진 앞쪽으로 어기적 오더니 보따리를 하나 풀었다.
"크크크, 저보다 이게 더 반가우십니까?"
"와~, 진짜 둘둘 싸맸네! 이 천대기들을 싸그리 모으면, 적어도 내 옷 한 벌은 만들겠다."
그가 호리병 몇 병과 갖가지 안주들을 허겁지겁 늘어놓기 시작하자, 성진 또한 그런 그를 따라 나머지 내용물들을 바닥에 주르륵 늘어놓았다.
그렇게 둘이서 싸매놨던 것들을 얼마간 이것저것 다 꺼내어 놓고 보니, 어느새 제법 흐드러진 술상이 차려졌다.
“이~야~, 이거~이거~ 야물딱지게도 챙겨왔구나! 여윽시~ 날 이렇게 생각해 주는 건 너 밖에 없어! 너무 감동해서 눈물이 막 폭포처럼 쏟아지려 한다!”
사내는 소매로 눈물 닦는 시늉을 하고나선 엄지손가락까지 치켜세워 보였다.
그러자 성진은 징그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호리병 하나를 들어 사내 앞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으이그! 됐습니다! 아, 그리고 술잔은 깜박했으니 그냥 병째로 드셔야 합니다.”
이에 사내는 술병을 집어 들어 귓가에서 흔들어 보였다.
“흐흐, 괜찮다. 오히려 내 성격에는 이게 더 잘 맞거든.”
사내와 청년은 술병을 서로 부딪쳐 가며 식사를 즐겼다. 그렇게 소소한 시간이 흐르고, 뱃속을 어느 정도 달랜 사내는 성진에게 조심스럽게 물음을 던졌다.
“에... 성진아, 스승님은 어찌하고 계시더냐?”
“음... 좀처럼 방에서 나오시지 않으십니다. 그 날 이후로 끼니도 그냥저냥 하시고... 아무래도 이래저래 상심이 크신 모양입니다.”
사내는 성진의 대답에 다소 시무룩해졌다.
“...그렇군.”
“대사형은 어떤지 안 궁금하십니까?”
“......”
성진은 사내의 묵묵부답에, 천천히 술을 한 모금 마시고나서 말을 이었다.
“......아까 하동댁이 몇몇 아낙네들을 모아 백곡단을 잔뜩 만드는 것을 봤습니다. 물어보니 대사형의 부탁으로 엊그제부터 만들기 시작했다고 하더군요.”
“그래, 어제 나도 보았다. 필시 폐관수련을 준비하시는 거겠지.”
“예, 맞습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아주 단단히 마음먹으신 것 같더군요."
여기까지 이야기한 성진은, 흡사 허깨비를 본 사람처럼 머리를 한 번 부르르 털면서 말을 이었다.
"항상 너그럽기만 하던 대사형의 얼굴에서 그렇게 살벌한 표정을 보는 건... 와~ 진짜 처음 봤다니까요!”
“대사형은 본래 자존감이 무척 강해. 분명 수련이 몇 년 늦은 내게 뒤쳐졌다는 사실이 꽤나 못마땅하신 거겠지. 스스로 인정하기 싫은 거야.”
성진은 괜스레 술을 한 모금 더 넘겼고, 사내는 입맛을 씁쓸하게 다셨다.
그러다 성진은 칙칙하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바꿔 화제를 은근슬쩍 돌렸다.
“아, 그나저나 어디로 가실지는 정하신 겁니까?”
이 물음에 사내의 입에선, 대답보다 피식거리는 웃음부터 먼저 나왔다.
“흐흐, 글쎄... 어디가 좋으려나? 내 무작정 떠날 생각만 했지. 그 외에는 딱히 고민을 안 해봐서리... 아하하하!”
“하아...... 우리 둘째 사형 대책 없는 건 진~짜~ 알아줘야 합니다. 그리 고강해지셨음에도 성향은 도무지 답이 없네요.”
“에이, 무인이 싸움에만 능하면 됐지. 무얼 더 바라냐? 머리 굴리며 살 거였으면 내 선비를 했겠지. 안 그러냐? 으핫핫핫!”
성진은 배짱어린 사내의 논리에 어이가 없어져서 딱히 반박하고 싶은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벌써부터 철진이가 불쌍해지려고 합니다.”
“잉? 철진이가 왜?”
사내가 되묻자 성진은 좀 전보다 더 어처구니 없는 표정이 되었다.
“거 몰라서 물으시는 겁니까? 철진에게 있어 둘째 사형은 친형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열이면 열 사형을 따라나서겠지요! 그리고 무대책인건 둘이 꼭 닮았으니 생고생이야 보나마나 훠~언~합니다.”
“음... 그건 염려말거라. 내 엊그제 잘 타일렀으니 말이다. 인정하는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는다만... 좀 전의 네 말이 완전히 틀린 게 아니거든. 게다가 그 녀석은 이곳에서 아직 배울게 더 많기도 하고.”
성진은 사내의 말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인으로서는 본문에 남는 것보다, 스승조차 오르지 못한 경지를 불과 20여년 만에 훌렁 넘어선 사형을 따르는 것이 보다 이성적인 선택이기 때문이었다.
사내는 성진의 표정에서 이런 마음을 눈치 챈 듯, 곧 설명을 덧붙여줬다.
“너처럼 후대 전인되어 본문의 비전을 얻고자 하는 게 아니라면, 나를 따라다니는 게 나을 수도 있겠지. 물론 나도 적적하지 않고 말이다. 아니, 오히려 즐겁고 좋지.”
“......”
“...하지만 내가 봐도 그 녀석은 심성이 어수룩하고 너무나 착한 놈이야. 날고 긴다는 인간들이 넘치는 세상에 나를 따라나섰다가는 낭패 보기 십상이지. 차라리 여기 남아 스승님께 세상사는 지혜를 배웠으면 하는 바람이기에 녀석을 단호하게 말렸다.”
사내의 속내를 듣고 나니, 성진은 그제야 수긍할 수 있었다. 더불어 친형제보다도 더 두터운 우애가 내심 부러워지기까지 했다.
성진은 이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싶었다. 하여 그는 사내에게 남은 술을 권하며, 없는 술잔대신 안주를 서로 정겹게 주고받았다.
"허어~, 어따~ 배부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서로 취기가 은근하게 올라오려할 때쯤, 멀리서부터 산기슭에 메아리치는 소리가 불현듯 들려왔다.
- 혀엉~님~! 도오~지인~ 형님~!
낯익은 목소리의 주인공을 똑똑히 인지한 사내는, 격하게 당겨오는 뒷목으로 손을 가져다댔다.
“아후우......”
반면, 성진은 그 모습을 보며 깔깔거렸다.
“푸핫, 어째 둘째 사형 희망처럼 편히는 못 가실 거 같습니다?! 크크크!”
메아리는 점점 크고 가까이 들려왔다.
- 아~ 도진 형니이이임! 아! 쫌!!! 나도! 아으씨이!!! 나도 쪼옴!!!
사내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떨궜다.
“하... 저 화상.. 진짜......”
* 강도진(상)과 이성진(하)
- 작가의말
실질적으론 준비가 덜 됐으나, 일단 저지르고 보겠습니다.
극소수의 취향이자 인기 폭망으로 예상되지만, 작가 개인의 만족을 위해 연재합니다.
위와 같은 사유로, 어쨌든 다짜고짜 1부 시즌1 시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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