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장 피고 지다 (4)
* * * * *
- 또옥~, 퐁!
동굴 천장에서 떨어진 물방울 하나가 신월군의 이마를 똑 가격했다.
‘윽!’
비몽사몽간에 정신을 차린 그는, 무심결에 상체를 움직이려다 가슴팍의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이처럼 따끔하고도 괴롭기 이를 데 없는 아픔이 온몸에 찌릿하게 퍼지며 그의 다른 감각들도 온통 일깨웠는지, 주변 상황이 점점 더 선명하게 파악되기 시작했다.
‘동굴? 하는 수없이 까마득한 폭포로 몸을 던지고... 어찌어찌 뭍으로 기어오른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 딱. 딱. 딱. 극, 극, 극.
너른 바위에 돌멩이 내려치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한세아가 이상한 풀떼기를 갈아서 즙을 내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어?!’
하지만 제대로 회복된 시야로 다시금 쳐다보니, 곁에 있는 그녀는 분명 한세아가 아니었다.
“너는... 누구냐?”
“힉!”
난데없이 동굴에 잔잔히 퍼져나간 물음으로 인해 깜짝 놀란 여인은, 엉덩방아를 '쿵' 찧으며 해괴한 소리를 질렀다.
“큼큼!”
그러다 그녀에게 어떤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는지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무, 무엄하도다.”
“뭐, 뭐라?”
안 그래도 신월군은 괜한 헛짓거리를 목숨 걸고 한 것만 같아서 기분이 언짢은 상태였는데, 거기에 얼토당토않은 소리까지 듣게 되니 짜증이 물밀듯이 쏠려왔다.
“다시 말해봐라. 뭣이? 무엄하도다?”
“가, 감히 본녀에게......”
“옘병.”
“어, 어디서 그, 그런 무례를......”
“지랄.”
“......”
“처음 보는 얼굴이군. 넌 누구냐?”
“저, 저기 어디의 뉘신지......?”
“으휴... 나도 몰라보는 인간을 대역으로 세우다니...”
허탈감에 기운 빠진 그는 무어라 길게 대답하기도 귀찮아졌다.
“신월군."
"...!!!"
"네가 알란가 모르겠다.”
“...히익!!!”
- 히익~, 히익~, 히익~.
기겁하여 내지른 순이의 추임새가 동굴 내에서 왕왕 메아리쳤다.
* * * * *
‘사시나무 떨듯 하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보통 사람이 추위나 두려움에 휩싸여 몹시 견디기 어려워함을 표현할 적에 사용되곤 하는데, 지금 너른 바위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내려다보는 신월군을 앞에 둔 순이의 모습이 딱 그러했다.
“그래서 세아 년이 어디 있다고?”
“모, 모르옵니다.”
“허허, 모른다? 그런데 왜 나는 네가 모른다는 말이 온통 거짓으로 들리는 게지?”
“진짜, 진짜로 모르옵니다.”
“어쭈? 요거 봐라?”
- 스릉~.
그녀의 태도에 흥미가 생긴 신월군은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나더니 장검을 빼들었다. 그리곤 동굴바닥에 머리를 맞대고 엎드린 순이의 목에 검 끝부분을 가져다 댔다.
“흐읔!”
이에 두 눈 땡그래진 순이의 몸은 신월군이 움직이는 칼끝을 따라 자동으로 천천히 일으켜졌다.
“자, 네가 결정하기 쉽게 도와주마. 이제 네 목숨을 저울추에 올려놓거라. 그리고 내 두 번 묻지 않을 것이니, 잘 생각해서 대답해라.”
“......”
“세아 년은 지금. 어디에서. 무슨 짓거리를. 벌이고. 있는 것이냐?”
순이는 쇠붙이 특유의 감촉을 자신의 목 부근에서 꺼림칙하게 느껴졌지만, 지금 그것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었다.
“바른대로 고해라! 어서!”
두려움에 파르르 떨리던 순이의 입술은, 신월군의 겁박 어린 재촉 끝에 힘겹게 떼어졌다.
“...대, 대역.”
“응?”
“이, 이 천한 것은 오, 옥주님의 며, 명에 따라 대, 대, 대역만 했을 뿐입니다. 아, 아는 것은 하, 한 개도 없, 없습니다요.”
“진정 죽고픈 게냐?”
“소, 소녀는 아는 것도 없고, 설사 안대해도 절대로 말 못합니다.”
“크흐흐흐흐... 파하하하하하하!!!”
- 치잉~, 탁.
신월군은 장검을 도로 회수하며 싱겁게 웃어젖혔다. 그리고는 ‘끄응’ 작은 신음과 함께 바위에 다시 걸터앉으며, 실로 기특하기 짝이 없는 순이를 향해 물었다.
“고것 참... 크크크, 네 이름이 무엇이냐?”
“예? 예. 저, 저는 수, 순이라고 합니다.”
“궁노비(宮奴婢)더냐?”
“아, 아닙니다. 노비는 아니옵고, 의, 의녀입니다. 며칠 전까지 견습 나인이었습니다.”
“뭐? 의녀? 흐음... 그러고 보니...”
그는 폭포로 뛰어내리기 직전, 미처 피하지 못했던 심장 부근의 자상을 살폈다. 깊이만 세 푼, 찢어진 길이가 세 치가 넘는 상처는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추측되는 실로 얌전히 꿰매져 있었다.
그에 이어서 화살 맞았던 어깻죽지도 떠올라서 손으로 더듬어봤는데, 처치가 아주 말끔하게 잘 되어 있었다. 대체 순이가 무슨 약초들을 어떻게 배합해서 발랐는지는 모르겠지만, 상처의 크기에 비하면 통증이 꽤 견딜만한 수준이었다.
“이 동굴로 들어온 지는 얼마나 됐느냐?”
“한나절 가량...입니다.”
“으음... 한나절이라.... 치료는 여기 와서 시작했고?”
“예, 천만 다행이도 평소 지니고 다니는 침통이랑 의료용 조각칼을 잃어버리지 않아서......”
“훗, 제법이구나.”
동굴 밖 태양의 기울기로 짐작하건데, 지금부터 한나절 전이라 하면 컴컴한 밤중이었다. 분명 등불 하나 없이 오직 달빛에만 의지했을 터인데, 마치 대낮에 행했다 해도 곧이곧대로 믿을 만큼 솜씨가 괜찮았다.
더욱이 아무 것도 없는 이 열악한 환경조건까지 고려한다면, 여느 어의 못지않은 실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세아 년이 의외로 인복은 좀 있군.”
“예?”
“신경쓸 거 없다. 혼잣말이다.”
신월군의 순이에 대한 흥미가 호감으로 변했다. 매서운 협박에도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그녀의 심지와, 빼어나다 못해 출중하다고 평가할 수 있는 높은 수준의 의술이 썩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괜히 생고생했다는 억울함을 훌훌 던져버리곤, 한세아가 진짜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세웠던 계획을 크게 변경했다.
“슬슬 움직여야겠다. 끄으으응차......”
“아, 아직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그가 장검을 지팡이 삼아 일어서매, 순이가 제대로 아물지 않은 부상을 염려했다. 그러나 곧이어 되돌아온 그의 말은 매우 담백했다.
“됐고. 지금 우리가 쫓기고 있는 상황정도는 알고 있겠지?”
“...네, 압니다.”
“그럼 살고 싶으면 당장 일어나서 날 따라라.”
“......예.”
참고로 그의 본래 계획은, 순이가 한세아의 대역임을 모르는 추격자들에게 그녀를 미끼로 던져놓고 이곳을 유유히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 * * * *
사룡방 본관.
“뭬야?! 재준이가 보내오던 기별이 끊겼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죄, 죄송합니다, 인재준 소두령으로부터의 소식은 더 이상 올라오지 않고 있습니다.”
“설마 그 놈마저...... 이런 제기랄! 무리를 좀 하더라도 장원이마저 함께 딸려 보냈어야 했어!!!”
대두령 염세욱의 속이 바짝 마른 그의 입술만큼이나 타들어갔다. 은사국 황손들의 납치는 그가 실행중인 계획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었다.
하여 인재준 소두령을 포함한 사룡방 최고수들을 무려 3달 동안이나 궁궐 잡역꾼으로 위장시켜가며 공을 들이지 않았던가?!
하지만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올 때가 훨씬 지났음에도, 그들의 소식은 여태까지 함흥차사였다. 염세욱은 투입시켰던 모든 인원이 생환하리라곤 기대했던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소두령까지 하나 끼어있는 상태에서 아무 소득 없이 전멸하리라곤 조금도 예상 못했던 것이다.
“은사국 공주는 어떻게 됐나?!!! 그 뒤로 50명씩이나 추격대로 덧붙여줬잖아! 그리고 그중에 열 놈이나 뒈졌다는 보고를 했으면! 나한테 뭐라도 가져왔어야 하는 거 아니냐?! 어?!!!”
“저... 그게... 간밤에 소나기가 심하게......”
- 쾅! 와지끈!
“헉!”
분노를 주체하지 못한 대두령의 장력이 서재의 벽면을 허물어뜨렸다. 이런 염세욱 앞에서 보고 중인 수하는, 자칫하면 자신의 몸뚱이도 저기 가루가 된 벽처럼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바짝 긴장했다.
“거, 걱정하지 마십쇼! 의외의 복병이 나타나긴 했습니다만, 그 놈도 적잖은 치명상을 입은 상태입니다. 이젠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자정.”
“......예?”
“금일 자정까지 은사국 공주를 내 앞으로 끌고 오지 못할 경우, 내 친히 네 모가지를 비틀어 그 책임을 묻겠다.”
“......!!!”
“시체라도 상관없다! 가서 공주의 수급이라도 당장 들고와!”
“예!!!”
보고하러왔다가 졸지에 목숨이 오락가락하게 된 수하가 염세욱의 서재에서 재빨리 물러났다. 그런데 수하가 떠나감과 동시에 부두령 황보혁이 허겁지겁 당도했다.
“큰일, 큰일입니다!”
“그렇게 허둥대는 꼴이라니, 너답지 않구나.”
“크, 큰일입니다! 이번 소행의 원흉이 저희라는 사실을 은사국 황실측에서 알았다고 합니다!”
“뭐, 뭣?”
염세욱의 눈동자가 전에 없이 휘둥그레졌다. 짙은 당혹감에 젖은 목소리마저 평소와 달라졌다.
“무, 무슨 소리야? 그것들이 어떻게? 무슨 수로?!!!”
“귀마회측에서 정보를 넘겼다고 합니다.”
“귀마회? 웬 헛소리야? 그놈들은 봉문하다시피 했다고 하지 않았느냐?! 앞으론 최소한의 활동만 한다며?! 이번 일을 진행하기 전에 내가 직접 그놈들 지부장을 만나서 확인까지 했었다! 그때 부두령 너도 옆에서 같이 들었잖느냐?!”
“예. 똑똑히 기억합니다. 하지만 형님. 범상치가 않습니다. 이건 비사문의 관계자라며 찾아온 사람에게서 전해들은 것입니다. 비사문이 귀마회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건 형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비사문에서 우리랑 귀마회의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수작은 아니겠지?”
그가 귀마회와 비사문의 앙숙관계를 떠올리며 의심했지만, 황보혁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저도 그런 의심이 들어 확인하고 오는 길입니다. 일단 형판의 낌새가 수상합니다. 아직 이조판서의 귀에까진 전달되지 않은 모양이지만...... 그래도 만약을 대비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앙심을 품고 황후 측에 붙어서 자기네들을 쳐내려고 했다는 걸 알아채면, 절대로 그냥 넘어가진 않을 겁니다.”
“망할.”
외마디 욕설을 내뱉은 염세욱은 서재 내의 비밀공간을 급히 열었다. 그리곤 이조판서와의 거래장부를 찾아 그의 발목을 묶을 내용을 추리기 시작했다.
* * * * *
무언가를 열심히 만들던 신월군이 고개를 슬쩍 들었다.
“왜? 뭐? 할 말 있냐?”
“아, 아니옵니다.”
“하고픈 말 있으면 해봐. 참으면 병 된다.”
“어... 저... 정말로 황족이 맞으신가 해서요.”
“치, 난 또 뭐라고. 새끼 꼬는 거 첨보냐? 자! 어떠냐?! 이만하면 참 훌륭한 새끼지? 크크크!”
아쉬운 대로 볏짚대신 막 뜯어낸 왕골 풀을 다듬던 그는, 자기만 재미있는 농담을 던지며 픽하고 웃었다.
“아, 아니 그게 너무 능숙하셔서......요.”
“별 거 아니다. 사람은 며칠 배곯으면 뭐든 다~ 하게 되니까.”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시온지......”
“권력농간과 모함으로 황후였던 어미가 사약 받아 세상 등지고, 또 그 때문에 덩달아 폐위되어 최전방으로 유폐된 세자에겐 누구 하나 먹을 것을 챙겨주지 않더구나.”
“......”
“햐~, 다시 생각해보니깐 어떻게 살아남았나 몰라? 백정 자식 놈이 날 동정했을 정도였었는데 말이지.”
“죄, 죄송합니다.”
“뭐가? 내 스스로도 진절머리 나는 과거를 떠올리게 해서?”
“그게... 일부러 들추려 했던 것이 아니오라.....”
“크크크크크!!! 요거요거 당황하는 표정보소?! 아으~, 이거 놀려먹는 재미가 무지 쏠쏠하네!”
“......아하하...”
강도진이 똑같이 했으면 벌써 몇 대 얻어맞았을 상황이었으나, 천지차이 나는 신분으로 인해 차마 그러지 못하고 있는 순이는 웃음만 쓰게 머금었다.
- 투욱.
“?”
그때 그런 그녀의 품으로 신월군이 막 완성된 신발 한 켤레를 던지며 말했다.
“휴식 끝. 다시 이동한다.”
“이, 이건...”
“대충 만든 거지만 그냥 신어라. 발바닥이 그나마 덜 아플 게다. 버선발보다야 몇 갑절 낫겠지.”
“......”
“야, 솔직히 치명상 입은 나보다 더 밍기적거린다는 게 말이 되냐? 응?!”
“죄, 죄송. 아, 아니. 마, 망극하옵니다.”
순이가 뜬금없는 배려에 눈가 촉촉해져 허리를 꾸벅 숙이자, 이 때문에 왠지 모를 머쓱함이 몰려온 신월군은 그것을 본척만척하며 앞장서서 걸었다.
“망극은 개뿔. 후딱 신고 따라오기나 해.”
- 작가의말
드디어 연참대전이 끝났습니다. 다시 정상적인 주기로 연재토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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