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각자의 길 (1)
* * * * *
은사국(殷斜國) 별궁.
창창한 오후. 한적한 안뜰에서 연기가 작게 피어 올랐다.
그 담벼락 위로 흐리게 솟은 연기는, 마치 청동재질의 향로를 절구통만하게 제작한 듯한 항아리에서 시작되고 있었는데, 상복(喪服)을 입은 소녀가 그 앞에서 우두커니 자리잡은 모습과 한데 어울렸다.
- 타탁, 탁. 타탁.
막 약관에 이르른 듯한 소녀가, 이따금씩 잡다한 물건을 그 향로 안에 하나둘씩 넣어 태우는 광경은 참으로 을씨년스러웠다.
눈동자 대부분을 차지한 이 소녀의 그리움은, 그녀가 귀중한 누군가를 떠나보낸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음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이런 그녀와 약 1장정도 되는 거리에선, 허리춤에 장검을 찬 여인이 사방을 경계하는 중이었다.
주인의 흔들리는 눈과 마주하지 않으려 뒤돌아 있는 그녀의 배려는, 이 호위무관의 충직함의 크기를 지레 짐작할 수 있게 했다.
- 스륵.
이윽고 소녀가 거의 마지막인 것 같은 의복가지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을 곧바로 잿불 위에 올리려던 그녀의 몸짓이 주춤거렸다.
그 예복에 묻은 추억을 좀처럼 쉽게 떨칠 순 없었던 탓인지, 그녀는 옷가지를 차마 항아리 안에 던져 넣지 못하고 제 가슴에 한가득 품었다.
그렇게 문득 아련함이 꾸욱 밀려와, 이미 붉어져 있던 눈시울에 망울이 지려하는데, 문득 뒤편에서 그녀를 지키던 호위무관이 몇 걸음 다가와 나지막이 아뢴 까닭으로 슬픔이 끝내 옷감을 적시진 못했다.
“도착한 듯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소녀가 슬쩍 한쪽 손으로 눈가를 훔치며 들었던 옷가지를 다시 내려놓을 때쯤, 문가에 그림자 하나가 드리워졌다.
"찾아계시옵니까? 옥주(玉主)."
"어서 오게. 위(魏) 총관. 긴히 논할 일이 있어 불러 청했네. 이리 가까이 오시게나."
“예, 옥주.”
위 총관이라 불리운 여인은, 공주의 호위무사와 똑같은 장검을 문기둥에 얌전히 세워놓곤, 공주 곁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말씀하옵소서. 소녀, 귀를 열고 경청하겠나이다."
"으음..."
공주가 무언가 말을 꺼내려다가 불현듯 주위를 살피자, 그녀의 호위무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4장 이내에는 들을 귀가 없으니, 괘념치 마옵소서.”
“...고맙네. 곽 총관.”
이어 공주는 품에 숨겨온 조금 낡은 책 두 권을 꺼내보였다.
“위 총관, 이것이 무엇인지 아시겠는가?”
『 혜강천경(慧剛千經). 』
위 총관은 공주의 손에 들린 책을 금새 알아보았다.
“예, 제목으로 짐작컨데 20여 년 전, 저희 문주께서 황후마마께 진상 올린 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바로 맞았네. 외조부께서 황실과의 혼례를 기념코자 손수 집필하여 건네신 비급이지. 그럼 혹 이 비급이 한 권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는가?”
“소녀, 그저 본문 무공의 정수(精髓)라고만 들어봤을 뿐, 상세한 건 알지 못하옵니다.”
이에 공주는 비급 중 한 권을 펼쳐 무심히 몇 장을 천천히 넘기며 말했다.
“음... 그렇겠지. 내용이 내용인 만큼, 외조부께서 어마마마께 직접 건네셨기에 궁궐 내에 이를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었다네."
"예, 저도 그리 들었습니다."
"참고로 이 ‘혜강천경’은 총 3권. 기초심법과 보법이 기록된 상편, 권·장·각·검 초식이 담긴 중편, 그리고 내력운행과 상승구결의 풀이가 수록된 하편으로 되어 있지.”
“......”
위 총관은 공주의 의중을 알지 못하였기에 말을 아꼈다. 반면, 공주는 아직 잿불이 강하게 살아있는 항아리 쪽으로 몸을 가까이 옮겨가며 말을 이었다.
“선종하신 황후께선 한동안 이 책들을 은밀하게 고이 보관해오시다가, 내가 비급의 한 글자도 빠짐없이 외우게 된 5여 년 전부터는, 만일을 대비하여 상하편을 내게 맡기시고 오직 중편만을 보관해 오셨다네.”
"...그렇군요."
여기까지 말한 공주는 잠시 말을 멈추고 손에 들린 책들을 바라보았다.
“분명 이것이 왕실은 물론, 위 총관과 곽 총관의 사문에서도 둘도 없는 보물임을 내 잘 알고 있네. 허나 지금은 부득불 이렇게 해야만 함을 이해해주게나.”
"?"
- 툭.
말을 마친 그녀는 그 중 책 한 권을 항아리에 통째로 던져 넣었다.
"헉! 마, 마마!"
공주의 이 돌발행동에, 위 총관은 반사적으로 비급을 향해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것을 훤히 예상한 곽 총관이 슬며시 막아서며, 그녀를 향해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한편 공주는 방금 던져 넣은 책이 잘 타도록 손수 불쏘시개까지 들어 이리저리 흔들어댔다.
- 타다닥, 타탁...
마침내 불이 책 전체를 삼키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다른 한 권을 아무렇게나 넘기며, 중간 중간 한두 장씩을 따로 찢어 불 속으로 던졌다.
책이 절반 정도로 허룩해지자, 그제야 공주는 손을 멈추고 나서 몸을 다시 위 총관을 향해 돌아세웠다.
“위 총관, 아니... 사은(似誾)아!”
“......”
멍하니 본문의 절학이 재로 화하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위 총관은, 공주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려지자 번뜩 제정신이 돌아왔다.
왕실의 법도를 중시했던 황후의 뜻에 따라 수년전 태자가 정식으로 책봉되고, 그녀가 태자의 호위로써 임관된 후부터는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까닭이었다.
위사은이 고개를 돌려 공주를 바라보니, 그녀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 모습을 통해 무언가 큰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혜강천경 중편이 사라졌다.”
“?!”
‘이건 또 무슨 말인가’하는 표정이 위사은의 얼굴에 드리웠다.
“아니. ‘도난당했다’고 하는 편이 더 맞겠지. 내 오늘 직접 황후마마의 유품을 정리하러 갔을 적에, 곽 총관이 이미 누군가의 침입흔적을 발견했으니 말이다.”
“어... 어찌... 그런...”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이제부터라... 사은이 너조차 알지 못하였듯이, 도둑 또한 비급이 한 권이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야.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알아채겠지.”
위사은은 골똘히 생각했다. 아무리 타계하였다고는 하나 엄연히 황후마마의 침소.
더욱이 황후의 사인(死因)에 의문을 품은 공주의 명으로 의금부에서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기에, 그곳을 태연히 들락날락할 수 있는 자가 많을 리 없었다.
아니, 그보다 지금은 이 사안과 연결된, 방금 전 공주의 행위에 더 큰 의문이 들었다.
“사은아, 타버린 비급이 그리도 안타까운 게야? 내 머리 속에 고스란히 꿰고 있으니 염려치 말거라.”
“아.. 저... 소녀는 그런 게 아니옵고...”
“호호, 농이다. 너무 진중한 표정이라 농 한번 던져 보았다. 필시 내가 왜 이런 상황에서도 비급을 온전히 다 태우지 않고, 그 일부를 남겨 놓았는지를 의아해 했겠지.”
“......예, 마마.”
위사은은 속마음이 쿡 찔려 식은땀이 흐르는 것마저 느껴졌다. 심지어 소매로 입을 가리며 미소 짓는 공주의 모습 위로, 돌아가신 황후마마의 자태가 잠시 겹쳐져 보이기까지 했다.
“그 연유는......”
“마마, 누군가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갑자기 손까지 들어 보이며 공주의 말을 중단시킨 건 곽 총관이었다. 이어 위사은 또한 인기척을 느꼈는지 공주에게서 물러나 자신의 장검을 찾아 급히 손에 쥐었다.
한편 공주는 아까 한편에 두었던 예복을, 아직 타고 있는 비급 위로 서둘러 올려 보이지 않게 만들곤 옷가지를 태우는 시늉을 했다.
* * * * *
“태자저하 납시오!”
밖에서 들려오는 뜻밖의 외침.
공주와 곽 총관은 위사은에게 가벼운 눈짓으로 의문을 던졌으나, 위사은 또한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급히 가로저었기에, 그들은 일단 문을 향해 바로 서서 자세를 낮추었다.
잠시 후 뜰 안으로 열 살 남짓한 사내아이와, 그의 시종시녀들로 보이는 이들이 줄지어 안으로 들어왔다.
“으헤헤헷! 저 왔습니다! 세아(歲娥) 누이~.”
어린 사내아이가 양팔을 크게 벌리고 이빨이 보일만큼 한껏 웃으며 공주 앞으로 다가서는데, 입고 있는 상복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소 어색해보였다.
“태자저하를 뵙습니다!”
“신 곽우희(郭尤喜), 태자저하께 인사 올립니다!”
거의 엎드리다 싶을 정도로 예를 갖추는 무사들과는 달리, 세아 공주는 무릎만 가볍게 굽혔다 펴며 태자를 반겼다.
“태자저하.”
태자의 차림새를 위아래로 쓰윽 훑어본 그녀는, 속으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후... 이런...’
어린 태자의 눈높이에 맞춰 한쪽 무릎을 꿇은 세아 공주는, 태자의 살짝 엉크러진 옷매무새를 단정히 고쳐주었다.
“태자저하, 아직 바람이 찹니다. 비록 상중이긴 하오나 의관을 더 두텁게 신경 쓰셔야 하옵니다.”
“넵! 덥지만 앞으로는 조금 참고 그리하겠습니다!”
어미를 일찍 여읜 탓일까? 세아가 씩씩하게 대답하는 태자의 한쪽 어깨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는 모습은, 오누이보단 자식 챙기는 어미에 가까워 보였다.
“호호, 어제까지만 해도 풀이 죽어계시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그새 좋은 일이 있으셨나 보옵니다.”
“히~ 아바마마께서 찾아계시었기에, 조금 전에 침소에 들려 뵙고 오는 길이옵니다.”
태자의 말에 세아가 뜻밖인 듯 되물었다.
“어머, 폐하께서요?”
“예, 아바마마께옵선 제가 계속 슬픔에 머물러 있으면..."
그의 말에선 울컥 오른 슬픔이 머뭇머뭇 느껴졌다. 살짝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눈물을 펑펑 쏟을 모습이었으나, 용케도 이야기를 끝까지 또박또박 이어갔다.
"어마마마께서... 소자가 걱정돼 극락으로 발길을 옮기지 못하실 터이니... 편한 걸음하실 수 있도록... 필히 강건해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 쓰흡.
태자는 자신도 모르게 흐르는 콧물을 쭉 들이켜고는, 오른 팔을 들어 울컥 고인 눈물방울도 재빨리 쓸어내었다.
“...하여 더는 울지 않고 웃을 것입니다. 으헤헤헤~.”
공주는 다시 힘껏 웃어 보이는 태자를, 저도 모르게 꼭하니 안아줄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대견하십니다! 분명 어마마마께서도 이런 태자저하의 모습을 매우 장하다 여기실 것입니다!”
"...으응..."
태자가 몹시 부끄러운 듯, 슬그머니 세아의 품을 빠져 나와 용건을 전했다.
“아! 아바마마께서 누이도 찾아계시옵니다.”
“저도... 말씀이십니까?”
“예, 어전으로 들라하셨습니다. 그걸 전하러 여기 온 것입니다.”
“아휴~, 그런 일은 아랫사람을 시키셔도 될 터인데, 태자께서 예까지 친히 걸음 하시다니요.”
“헤헤, 사은이도 여기 있다하고, 누이도 뵙고... 또... 겸사겸사... 그냥 그리하고 싶었습니다.”
태자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음 지었다.
“혹 폐하께서 다른 언질은 없으셨는지요?”
“흐음... 그 외에 딱히 별다른 말씀은 아니 계셨습니다.”
짧게나마 머리를 굴려보던 세아는, 거짓을 담지 못하는 태자의 성품을 익히 알기에 그 이상의 생각을 그만뒀다.
“...예, 그럼 저는 이만 서둘러 채비를 해야겠습니다.”
태자를 부드럽게 바라보며 여기까지 말한 세아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위사은에게 명했다.
“위 총관, 태자저하를 태자궁으로 모시게.”
“존명(尊命)!”
위사은이 짧고 강하게 대답했다.
- 작가의말
참고로 시즌1의 내용은, 구 소설의 개정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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