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회우(會遇) (2)
* * * * *
장정들이 자리를 잡고 빈틈없이 쭈욱 누우면 스무 명은 족히 포용할 법한 굴 안쪽, 그 중심를 차지한 작은 모닥불이 잔가지를 소로록 삼켰다.
- 탁. 타닥.
양반다리를 한 강도진이 보였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둥글게 옹기종기 모여앉은 아이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싸구려 지필묵도 없어서 잔가지를 붓 삼고 흙바닥을 종이삼은 광경은, 객관적으로도 정말 궁색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또랑또랑한 태도로 임하는 아이들의 의욕과 열의까지 감안한다면, 매우 훈훈하고 보기 좋은 풍경이라 단언할 수 있었다.
“저... 선생님...”
“‘응? 왜 그러느냐?”
이들 중 비교적 나이 많아 뵈는 아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헌데 자신있게 말을 잇진 못했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음... 저기...”
아무래도 자신의 쓸데 없는 물음으로 인해 글공부의 맥이 끊길까를 염려한 표정이었다.
“흐흐, 생뚱맞은 질문을 해도 괜찮으니까 어서 말해 보거라.”
“저기... 그게 다름이 아니고요. 저는 이제... 천자문도 다 뗐으니까... 저도 다른 아저씨들처럼 같이 수련하면... 안 될까 싶어서요.”
질문한 아이의 눈동자는, 저녁을 먹자마자 괴로운 신음을 뱉으며 수행 중인 반대편 어른들에게 흘끔 향해 있었다.
"네가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저어... 한시라도 빨리 강해지고 싶습니다."
“흐음... 빨리 강해지고 싶다라...”
대답을 곱씹는 강도진의 머릿속은, 문득 떠오른 스승 이서백과의 추억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후훗... 그래. 나도 어렸을 때, 너와 비슷한 물음을 스승님께 던진 적이 있었었지.”
미소 짓던 그가 둘러앉은 아이들을 주루룩 훑어보니, 이 사내아이만 유별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 스윽, 스윽.
강도진은 작은 막대기를 집어 글자 하나를 땅에 적었다. 그것은 그가 기억하는 어릴 적 스승의 모습을 그대로 똑같이 흉내낸 행동이었다.
“이 글자가 무엇이더냐?”
“검을 현(玄)입니다.”
“그래, 맞다. 또 그 외에 다른 의미는 무엇이 있지?”
“고요하다, 깊다, 짙다입니다.”
“또?”
막힘 없던 아이들의 응답속도가 슬슬 더뎌지기 시작했다.
“음... 또... 오묘하다란 뜻도 있습니다.”
“또?”
“에.... 어... 음...”
“심오하다, 아득하다, 통달하다, 빛나다 등등 더 있지.”
“아... 네...”
아이들은 선생의 의도가 무엇인지 도통 짐작조차 못하겠단 표정이 되었다.
반면 강도진은 지긋이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자, 그럼 질문 하나 더! 명지 대사께서 충각사로 끌려가시기 전, 맹영단에게 몰래 남기신 비급 구결 중에 왕왕 나오는 요 현(玄)이란 글자의 뜻은 무엇일까? 그냥 검다는 뜻일까?”
“음... 그건 아닐 것 같아요.”
“흐흐, 맞다. 불가에서의 현(玄)은 ‘부처의 가르침’을 의미하기도 한단다. 그리고 너희도 언젠가 나중에 비급을 잘 읽어보면, 그 글자가 나올 때마다 전부 똑같은 의미로 쓰이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될게다.”
“......”
아이들의 눈과 귀는 강도진의 설명에 최고로 집중된 상태였다.
“정리하자면 내가 너희에게 밤에는 글공부를 시키는 이유는~ 첫째, 무공의 구결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소학정도까지는 떼어야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며~, 둘째! 이렇게 한 글자에 담긴 여러 의미를 배우면서 하나의 초식을 익힐 때마다 좀 더 다양한 시각에서 해석할 수 있도록 생각을 훈련시키기 위함이란다~.”
“아...”
“...라고~ 내 스승께선 과거에 그리 말씀하셨었지! 으흐흐흐~.”
“히힛~.”
아이들은 강도진의 소탈한 웃음소리에 덩달아 같이 실실 웃음지었다.
“그리고 여기에 내가 하나 더 덧붙이자면, 아직 뼈가 자라고 있는 아이들은, 저쪽에 있는 사람들처럼 밤낮으로 험하게 굴리면 안 된다는 것이 내 지론이기도 하단다."
"왜요?"
"타고난 체질부터가 남다른 소수의 인간이 아니면, 뼈와 장기가 어느 정도 다 자랄 때까진 충분하게 몸을 쉬게 하면서 기본을 다지는 편이 길게 봤을 땐 더 좋기 때문이지."
"끄응... 조금 어려워요."
"농사꾼이 씨뿌리기 전에, 논밭을 잘 고르고~, 거름을 듬뿍 주는 거랑 같은 이치란다."
"아하!"
"그러니까 너흰 몸을 괴롭게 수행하는 건 아직 낮에만 해도 충분하니, 밤에는 몸을 고르면서 글공부를 하는 것이다. 다들 알간?”
“히히, 네!”
“흐흐, 좋아. 좋아. 어... 아까 어디까지 하다 말았었지? 아아, 잠깐잠깐~."
여기까지 말한 강도진은 손에 묻은 먼지를 탁탁 털며 이야기했다.
"일 나갔던 사람들이 돌아오는 모양이다~. 가서 짐 좀 들어주러 가자꾸나.”
“넹~, 선생님.”
아이들은 그의 말에 주섬주섬 일어나, 입구 쪽으로 힘차게 뛰었다.
* * * * *
- 찌릿!
뜻밖의 만남이 항상 정겨우리란 법은 없었다.
“아하하... 오, 오랜만입니다. 소, 손 낭자. 여기는 어떻게 아시고...”
“가아앙 대에에혀어업..."
- 쁘드드득...
손다임이 이빨을 과도하게 힘주어 갈며 말하는 터라 발음이 많이 부정확하게 들렸다.
"자암시... 저어랑 이야기 조오옴... 하시지요오오!!!”
하지만 식은땀 흘리고 있는 강도진의 심정을 사면초가로 만들기엔, 도리어 적절한 효과를 발휘했다.
“어... 음... 하하... 그냥... 여기서 말씀하시는 건... 어떠실런지..."
- 찌릿! 찌릿!
"아... 그러면 제가 곤란하겠군요.”
흉흉한 그녀의 눈빛에 꼬리 내린 강도진은, 손목을 덥썩 붙잡힌 채로 담담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이후로 야영지로부터 1리(里)가량이나 떨어진 장소로 이끌려오는 내내, 그는 특별히 저항하지 않았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쉽게 뿌리칠 수 있는 손다임의 손이었지만, 본인이 지은 죄를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이만큼이나 왔으면 이제 괜찮겠지요."
불현듯 멈춰선 그녀가, 홱 돌아서서 쌍심지를 켰다.
“자, 변명할 기회를 드릴 테니 어디 한번 해보세요. 어째서 맹영단이 저희 회영문의 절기를! 그것도 수제자들에게만 전수되는 비전무공을 알고 있는 거죠? ”
“...비, 비전?"
갑자기 걷잡을 수 없이 커진 죄의 무게는, 그를 상당히 당혹케 했다.
"허걱?! 미, 미안합니다! 그런 게 회영문의 비전무공인지는 정말 몰랐...”
“어머! 뭐, 뭐라고요? 방금 ‘그런’ 거라고 하셨나요?!!!”
‘아뿔사! 내가 무심결에...’
강도진의 두뇌는 올해 들어 최고조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거 조금이라도 어설프게 변명했다가는 진짜 뒷감당이 안 될 것 같은데... 정신 바짝 차리고 단어 하나를 고를 때도 매우 신중해야만 한다!'
지금 한쪽 구석에 몰아세워진 상황도 상황이었지만, 첫만남 이후로 본 적 없던 손다임의 매서운 눈초리가 문제의 심각성을 아주 잘 대변했다.
'아우씨, 며칠만 늦게 오지! 안 그래도 확인할 것만 확인하고 나면 곧장 떠날 작정이었는데!!! 빼도 박도 못하게 딱 걸려서 얼렁뚱땅 발뺌도 못하겠고...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란 소리인데... 먹힐까?’
강도진은 일평생 지어본 표정 중에서 가장 진지한 얼굴이 되어,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 풀썩~.
“......지,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목소리 또한 최대한 착 가라앉히며, 자신의 미안함을 표현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
“전혀 몰랐다고는 하나, 큰 잘못을 저지른 제가 더 무슨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겠습니까? 손 다임 낭자, 고개 숙여 사죄드립니다.”
“이, 이런다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고요!”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여전히 공격적이었지만, 어투는 좀 전보다 확연히 누그러져 있었다.
‘토, 통했다!’
과연 사람은 배우며 성장하는 동물. 지난날 순이에게 된통 혼나면서 마음에 새겼었던 교훈이 빛을 발했다.
'역시... 진심 화가 난 지인에겐, 이실직고만이 살 길이야!'
강도진은 이 궁지에서 벗어날 희미한 활로를 발견한 것 같아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리고 그 활로를 움켜쥐기 위해 진중한 대화를 신중히 이었다.
"손 낭자도 아시다시피 저는 지금 본문에서 반쯤 내쫓겨진 몸입니다. 저는 제 고집으로써 스승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떠돌이 생활을 자처한 못난 놈이지요."
"네, 그건 저도 미랑이에게 전해 들었어요."
"그렇다면... 그러한 제가 북천문의 무공을 누군가에게 가르치는 행위는, 곧 파문으로 이어지게 된다는 것도 아실 겁니다."
"흐, 흥!!! 그게 저희 회영문의 비전을 저들에게 가르치신 변명으로는 불충분합니다!"
"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부디 헤아려 주십시오."
"......"
"저는 홀로 버려졌던 저를 지금껏 길러주신 아버지와 다름없는 분과 영영 갈라서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 마음은 추호도 없기에... 본의 아니게 크나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유년부터 함께 자란 녹미랑이 보증하는 바와 같이, 진중함이란 도통 찾아보기 힘든 강도진이었다.
그런 그가 무릎까지 꿇고 머리 숙여 정중히 사과하는 모습은, 이유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이쯤 되고나니, 손다임 역시도 분노보다 호기심이 앞서졌다.
"저희 가문의 비전임을 몰랐다고 쳐요. 근데 왜 저들에게 무공을 무리하게 전수하셔야 했죠? 그 무슨 상관이 있다고..."
“저 사람들에게 삶의 이유를 주고 싶었습니다.”
“...네?”
강도진은 절절한 사죄와 함께, 애절한 사연을 읊었다.
"저기 야영지에 있는 이들은 얼마 전 친구와 혈육을 잃었습니다. 대부분은 바로 코앞에서 살해장면을 목도해야 했지요."
"...어... 으음..."
"그런 그들에게 생기를 다시 불러일으키려면,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슬퍼할 여력도 없게끔 말도 안 되게 힘든 훈련으로써, 그들의 복수를 도와주는 일 외엔 달리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
"더불어 무언가 색다른 절기를 가르쳐서 주위를 환기시킬 필요성도 느꼈습니다. 헌데 본문에서 접한 것 외에 아는 무공이라고는 회영문의 무예 밖에 없는 저로써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하여 명지대사께서 남기신 비급을 통해 불가의 무학을 익히는 동안, 어쩔 수 없이 회영문의 무공을 가르쳤던 겁니다."
"부, 불가의 무학?!"
강도진의 입에서 튀어나온 특정 단어는, 그녀를 푹 젖은 감성에서 깨어나게 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의 욕심으로 이어지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도출해냈다.
"부디 너그럽게 용서해주시길 청합니다. 손 낭자."
“좋아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오오, 하해(河海)와 같은 마음으로 용서를 해주신다니 정말 감사드...”
어려운 난관을 어물쩍 잘 넘겼다며 스스로 흡족해진 그가, 무릎의 먼지를 기쁘게 털어내며 일어날 때였다.
“하지만 책임은 져주셔야겠습니다.”
“...예? 어떤 책임을 하시는 건지......”
강도진이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그녀의 얼굴을 반사적으로 올려다봤다.
“나도 가르쳐줘요.”
“......”
"문파 간의 교류! 운태벽라본원은 주기적으로 풍령세가를 비롯한 사대기주분들의 본가들과 이것저것 나누잖아요? 그거 비슷한 거라고 생각하시면 되겠네요!"
"...끄으으으응..."
최초 의도에서 조금 멀리 비껴간 결과를 맞이한 그는, 좀처럼 표정관리가 쉽지 않았다.
- 작가의말
다음 게시글은 15시로 예약해뒀습니다. 아무래도 3연참은 힘들 것 같습니다.
예전에 쓴 걸 수정하는 건데도 뭐 이리 고칠 부분이 많고 손도 많이 가는지 원... 퇴근 후에 작업을 시작하면 시간이 아주 살살 녹네요. 꼴값 아닌 닉값이 아주 제대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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