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 충각사(忠覺寺) (1)
“아~나~, 이거... 인마가 쳐 돌았나!”
- 스르릉~.
떡대 좋은 장정 한 명이 칼집에서 꺼낸 커다란 거치도를 어깨에 걸친 채 밖으로 걸어 나오며 중얼거렸다.
“어흠...”
그러던 그는 자신에 뒤이어 몇 명이 따라 나오려는 낌새를 느꼈는지, 싹싹하게 돌아서서 너스레를 떨었다.
“아아, 사형께서 나서실 필요 없습니다. 이 밤톨만한 놈 버르장머리는 제가 고쳐놓지...?!!!”
물론 덩치꾼 좋을 대로 편히 놔둘 여민구가 아니었다.
- 슈슉! 까깡!
“아니, 근데 이 새끼가?!!!”
갑자기 미간을 노리고 날아온 비표(飛鏢)를 가까스로 튕겨낸 사내는, 있는 대로 윽박을 지르며 여민구를 향해 무기를 휘둘러댔다.
- 쉬리릭!
뚜껑열린 사내가 펼친 도법은, 의외로 그 성미와 괴리감이 크게 느껴질 정도로 깔끔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초식이 대단히 정갈하여 도(刀)법으로 운용해도 대쪽 같은 위력을 동일하게 발휘할 수 있다는 풍령세가의 일정검법(一頂劍法)의 명성을 증명이라도 하듯 상대를 다각적으로 압박해나갔다.
- 휘익, 휙!
하지만 이와 맞서는 여민구의 대응도 만만치 않았다. 사내의 도신이 미치지 않는 거리에선 비표와 나한전(羅漢錢)을 날려 상대의 급소를 노렸고, 예상치 못하게 간합이 부쩍 좁혀졌을 때는 단검을 뽑아 오히려 용감하게 더욱 파고들어 공격력을 절감시켰다.
숱한 실전 속에서 쌓아올려진 여민구의 효과적인 몸놀림은, 마치 자신보다 덩치 큰 먹잇감을 사냥하는 맹수처럼 보였다.
“우라질! 이 쥐똥만한 놈이!”
“하하하, 왜? 한 대도 못 때려서 약 올랐음?”
“이 노옴!!!”
“크크크... 에라이~!”
- 팍~!
“악! 내 눈!”
“좋았어!”
바닥을 구르며 초식을 피한 여민구는 손에 잡힌 모래 섞인 좁쌀가루를 사내의 얼굴에 확 뿌렸다. 내심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큰 효과를 본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단검을 역으로 거머쥔 채로 사내의 양 어깨를 내려찍었다.
그런데 여민구의 무기가 사내의 몸에 닿으려는 찰나, 객잔 안에서 분출된 장력이 그보다 먼저 그의 명치부근에 적중됐다.
- 퍼억!
“우컥!!!”
- 쿠당탕탕!
이미 좀 전에 한 번 맛봤던 통증을 또 느끼게 되다보니, 얼얼한 가슴께를 매만지는 그의 입에선 쌍욕부터 나왔다. 방금 공격은 보나마나 기생오라비 같은 인간이 날린 것임에 틀림없었기 때문이었다.
“으으... X발...”
아니나 다를까. 널브러진 여민구가 노려보는 객잔 입구엔, 팔자걸음으로 천천히 느긋하게 걸어 나오는 청포무인이 있었다.
“거기까지.”
“퉷! 괜히 질 거 같으니까 비열하게 기습이나 하고! 명문 좋아하시네!”
“푸핫! 어이가 없구만! 난 그냥 잠자고 지켜보고 있자니 하도 볼썽사나워서 싸움을 마무리지어줬을 뿐이다.”
“흥, 거짓말을 하려면 입에 침이나 바르고 하시던가?!”
“쯧쯧, 역시 현상금이나 노리는 삼류들 아니랄까봐 수법뿐만 아니라 주둥이까지도 야비하구나. 에잉~, 품위 없게...”
이 말을 들은 여민구의 눈깔이 하얗게 뒤집어졌다.
“품위? 푸우움위이이이?!!! 이런 썅! 그래!!! 우린 어떻게든 이기는 것 외엔 관심 없는 삼류다! 그런 나 같은 삼류조차 제대로 상대 못해서! 대낮에 보란 듯이 뒤통수치는 명문제자 연놈님들은!! 퍽이나 품위 넘치시네!!!”
“입이 참 걸걸해. 허접한 출신다워.”
“지는 얼마나 고결해ㅅ....”
- 빡!
좀 전까지 다퉜던 덩치꾼 사내의 주먹이 여민구의 턱을 기습적으로 강타했다.
“커흡!”
“이게 정녕 뒈질라고 어디서 자꾸 나불대!”
여민구를 흙바닥에 파묻듯이 쓰러트린 그는, 바로 청포무인을 향해 장읍하며 말했다.
“험험, 현길(晛洁) 사형! 제가 아직 미숙하여 수고를 끼쳤습니다! 죄송합니다!”
“됐다. 덕산(德山)아, 그거나 마저 정리하거라.”
“예!”
“끄으윽... 니미... 엿이나 쳐 드...!”
힘차게 대답한 덕산은 입만은 아직 살아있는 여민구를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 퍽! 퍼벅! 뻑!
“어엌! 으어업...!”
일방적인 구타가 심각한 지경으로 치닫자, 여민구의 동료들이 덕산이라 불린 사내의 양팔에 각각 달라붙어 말리려했다.
“여보쇼, 그만하면 됐잖소!”
“이러다 사람 진짜 잡겠소!”
“아니, 이것들이 쌍으로 지랄이야?!!!”
허나 덕산이라 불린 사내의 완력이 얼마나 막강한지, 그들은 그의 한손에 한 명씩 멱살잡혀 내다꽂힐 뿐이었다.
- 으득! 꿍! 쿵!
“오냐! 단체로 멍석을 말아주마!”
주위 구경꾼들도 너무하다 싶은 생각만 했을 뿐, 누구 하나 대담하게 나서질 못했다. 더욱이 무인들끼리의 다툼은 관졸들도 수수방관하는 사안이니만큼, 단순히 정의로움만으론 끼어들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 텁!
“?”
크게 휘두르려던 오른팔을 붙잡힌 덕산이 고개를 돌려보니, 자기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7척 거구의 흑의사내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 그만하지?”
“응? 넌 또 뭐야?! 이거 안 놔?!!! ......이이잌... 이익...!!!”
덕산은 여민구의 멱살을 잠시 움켜잡았던 왼팔까지 동원해 낑낑 애써봤지만, 흑의사내를 조금도 떨쳐내지 못했다.
“가, 강 대협!”
“오래간만이오. 여 형(兄). 음... 차마 그간 강녕하셨소란 인사는 못하겠구려.”
“헤... 에헤헷...”
맞아서 퉁퉁 부운 눈으로 흑의인을 알아본 여민구가, 인사를 건넨 강도진을 향하여 핏물 흥건한 이빨을 드러낸 채로 실실 웃었다.
하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강도진의 손에 붙들린 자는 아우성을 고래고래 쳐댔다.
“이, 이거 놔! 새끼야!!!”
“네놈은 날 언제 봤다고 무턱대고 반말이냐?”
“뭐 이런 개 같.... 으아아아아!”
- 꾸드드드드드....
강도진 그가 손에 힘을 가한 순간을 기점으로, 덕산이란 사내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격한 고통을 호소했다. 아마 여기서 조금만 더 힘이 가해지면 뼈가 으스러질 상황 같았다.
“칫!”
이를 보던 장현길은 더는 안 되겠다 싶어졌는지, 여민구에게 날렸던 것과 동일한 수법에 공력을 두 배로 담아서 또 한 번 전개했다.
- 팡!
그런데 이어진 결과는 앞선 2번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강도진이 대충 휘저은 듯한 손바닥 안에서 그의 8성 공력이 실린 장력이 산산이 와해되었던 것이다.
“....어헛?!”
장현길은 자기 눈으로 직접 똑똑히 보면서도 실로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그리고 눈앞의 강도진과의 대화를 나눌수록, 올해 들어 본인이 저지른 실수 중에 가장 어리석은 행동이었음을 차츰 깨달아갔다.
“음? 가만... 이건 풍령세가의 무공인데?”
“......나, 나는 위명 높은 풍령세가의 수제자 장현길이다!”
“흠... 처음 보는 얼굴인데...”
“.......”
강도진은 귀에 낯선 이름에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그러다 문득 장현길을 어떤 식으로 처우하면 좋을지 가려낼 명확한 기준이 떠올라 그에게 물음을 툭 던졌다.
“내 딱 하나만 물읍시다. 장현도보다 위요? 아래요?”
“...대, 대사형을.... 어찌...... 아십니까?”
“허허~, 장현도가 대사형?”
“...예...”
이 대답 하나로 판단이 내려진 그는, 더이상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듯 피식 웃었다.
“엎드려.”
* * * * *
- 부르르르...
“끄응... 끄응...”
체벌 받는 이들도 고통스러워보였지만, 객관적으론 바닥에 뒤집어 놓여 그들의 체중을 지탱하고 있는 작은 술잔이 더 괴로워보였다.
시간이 차차 더 흐르며 그들의 꼼지락거림에 술잔에 실금까지 자잘자잘 생기기 시작했으나, 그들의 다섯 걸음 앞 탁자에서 음주를 즐기는 강도진과 여민구 무리의 한담은 그칠 줄 몰랐다.
“우하하하하! 당대제일로 손꼽히는 운태벽라본원 이서백옹의 수제자이시라니요! 으와~, 진짜 몰라 뵀었습니다! 그간 결례를 용서해주십쇼~, 강 대협!”
“에이~, 그래봤자 뭐합니까? 지금은 그냥 떠돌이인데요, 으흐흐흐! 그나저나 무리하지 마십쇼. 그러다 탈나면 어쩌시려고... 진심으로 걱정되어 그러니, 이따가 의원한테 한번 보이시는 게...”
강도진의 우려에, 여민구는 술기운을 빌어 너스레를 크게 부렸다.
“아휴~, 겨우 이 정도 다쳤을 때마다 의원한테 가서 얼굴 보였으면, 서로 일찌감치 정분이라도 났을 겁니다! 우헤헤헤헷!”
“파하하하!”
“요런 멍쯤이야, 요 날달걀로 문질문질해주고~ 자기 전에 된장으로 떡 발라주면 며칠 안으로 쑥 가라앉습죠! 속 탈 난거야 탁주로 요래~ 요래~ 소독해주면 그만이고요! 자자, 제 잔 한 번 더 받으십셔~!”
양껏 가득 채운 탁주사발이 한데 모여 부딪치는 소리가 무척 경쾌했다.
- 팅~!
이후 벌컥벌컥 시원하게 들이켜 잔을 탈탈 비운 강도진은 소매로 입가를 스윽 닦아내며 탄성을 터트렸다.
“캬~, 이거 꽁술이라 그런지 더 답니다. 달아!”
“헤헤, 수중에 가진 돈이 시원찮아서 대접할게 겨우 요정도인데, 이렇게 기쁘게 즐겨주시니 천만다행입니다!”
“아뇨~, 아뇨~! 시원찮다니요! 이만하면 더없이 훌륭한 진수성찬 아닙니까?!”
“그리 여겨주시면 진심으로 감사합죠! 아오, 내 그 도둑년한테 사기만 안 당했어도!!! 강 대협을 2차까지 거하게 모셨을 텐데 말입니다. 으이휴~.”
“...사기요?”
“아... 왜 예전 그때... 엄청 두둑하게 챙겼을 때 말입니다. 사실 전 그 이후 밥벌이 삼던 현상금사냥을 때려치웠었습니다. 그길로 고향에 내려가서 집이랑 논밭사고 여우같은 마누라 얻어 남부럽지 않게 살려고 했습죠. 아휴~, 그런데... 이... 씨이... 니미럴......”
“?”
여민구는 멍든 속아리보다 더 쓰린 기억이 떠올랐는지 말을 하다말고 입안으로 술을 쑥쑥 들이부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동료가 그런 여민구를 놀리듯 강도진에게 설명을 보태주었다.
“하하, 이 녀석이 여우같은 마누라를 얻은 게 아니라, 그냥 ‘여우’를 마누라로 들였었지 뭡니까요?! 크하하핫!”
“아......!”
하산하며 떠도는 가운데 이런저런 곡절을 간접적으로 경험해본 강도진은, 옛날과 다르게 그 말뜻을 이해하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여간 집문서고, 땅문서고, 정말 살뜰하게도 박박 긁어서 도망쳤더랍니다! 크크크, 그래서 저희랑 다시 붙어서 손잡고 일하게 된 게지요!”
“아오, 썅! 진짜 내 손에 걸리기만 하면...!”
- 쁘드득!
입속의 생니를 바득바득 갈며 주먹 불끈 쥐는 여민구의 표정에서, 화제를 얼른 바꿔야겠다고 생각한 강도진은, 그의 빈 잔을 다시 꿀렁꿀렁 채워주며 물었다.
“에... 그나저나 이 동네엔 어인 일이십니까? 뭔가 짭짤한 현상금이라도 떴나보죠?”
“응? 우리 강 대협께서도 귀마회 살수들을 토벌하러 오신 게 아니셨습니까요?”
“......”
- 작가의말
다음 화는 11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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