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맹영단(甿領團) (1)
* * * * *
광시지방 금성읍 어느 객잔.
겨울막바지의 거센 눈발을 헤치며 객잔으로 들어선 4명의 무인을, 끔벅 졸고 있던 점소이가 열렬히 반겼다.
“어후, 춥다. 추워! 이게 웬 팔자에도 없는 생고생이람?”
“후... 누가 아니래? 미친! 그림 한 장 떨렁 그려주고는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사람 찾아오라니... 아오...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 달 내내 사방으로... 지가 뭐! 단주면 다야? 새파란 새끼가... 역시 그놈보다는...”
“으후흐흐.... 허~, 역시 안은 뜨듯하니 좋구먼. 그딴 건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뭐라도 좀 먹음세.”
“에고고~, 어섭셔~!”
무인들은 싹싹한 점소이의 안내를 받아 따듯해 보이는 안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제법 허기졌었는지, 앉으려고 의자를 지익 끌면서 음식을 주문했다.
“갓 만든 만두랑 두툼한 수육. 그리고 국물 뜨끈한 거 아무거나 사람 수대로 가져오게.”
“예예~, 준비 되는대로 후다닥 가져다드리겠습니다요.”
“아아, 그리고 잠시만.”
“예?”
그들 중 한 명이 품에서 초상화 꺼내어 점소이에게 보여주었다.
“혹 이렇게 생긴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키가 거짓 7척에 육박하는 거구라고 하던데...”
“...글쎄요, 나리. 워낙 많은 분들이 왔다 갔다 하셔서... 에헤헤...”
“음... 알겠네.”
약간 실망한 표정의 사내에게 점소이가 다시 굽실거렸다.
“그 초상화를 잠시 제게 맡기시렵니까? 다른 손님들 중에 혹 알아보는 분이 있는지, 제가 대신 물어봐드리겠습니다요.”
“오, 그래준다면 정말 고맙지. 자자, 여기 있네.”
“헤헤.”
* * * * *
같은 객잔 2층 객실.
“후우~, 후우~.”
유철진이 뜨거운 닭죽을 숟가락으로 반쯤 떠서 호호 불었다.
"자, 아~."
그의 수저는 본인의 입이 아닌, 이불을 돌돌 말고 앉아 얼굴만 빠끔히 내민 침상 위의 미나에게로 향했다.
“아~앙~.”
“뜨거우니까 조심조심히... 옳지~, 옳지~.”
- 끄덕끄덕. 우물우물.
뭐가 그리 좋은 걸까? 그렇게 마주보는 두 사람의 입꼬리는, 온종일 제자리로 돌아올 것 같지 않았다.
이 알콩달콩한 광경은, 침대 바로 앞 탁자에 앉아서 탕면을 후루룩 우적이던 강도진을 멈칫하게 했다.
“캬~, 눈꼴셔서 못 봐주겠다! 철진아~, 이 형님 보는 앞에서 꼭 그래야겠냐?”
“흐흐, 어따 형님. 좀 봐주십쇼. 환자 아닙니까!”
그가 참다못해 젓가락을 틱 내려놓으며 딴죽을 걸었건만, 아우 유철진의 방어도 만만찮아 보였다.
“야... 이... 그 여독이 싹 빠진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그러는 게 내 도무지 이해가 안가서 그런다!”
“에이~, 의원님이 원기가 회복이 안 되어 허약한 상태니~ 두어 달은 방심해선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자칫 한기라도 들면 큰일 아닙니까?”
“으와~! 아버지께 허락받고 약혼까지 하더니만, 이 형님 따윈 더는 안중에도 없나보구나!”
“히히, 형님. 거 이리 주십쇼. 제가 탕면을 호호 불어드리겠습니다.”
“됐어, 이 놈아! 내가 다 징그럽다!”
“흐흐, 질투 그만하고 이리 내시라니까요!”
“크크크!!! 아, 임마! 됐다고 쫌!”
“으흐흐흐흐!”
미나는 비록 이 둘 사이에 오가는 말을 반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피부로 전해지는 정겨움만큼은 확실히 읽을 수 있었다.
그렇게 얼마간 물끄러미 지켜보던 그녀는, 눈치껏 기회를 노려 강도진에게 더듬더듬한 대륙어로 물었다.
“아주보? 음... 아주버...님? 나 질문 있었습니다?”
“아아, 제수씨. 말씀하세요.”
“아주버님, 정말? 세아 공주씨를 알아? ...입니까?”
“아휴, 그럼요~. 저만 믿으세요!”
미나는 그의 호언장담을 찰떡같이 믿고는 싶은데, 솔직히 온전하게는 믿겨지지가 않았다.
사실 그것도 그럴 것이 한평생 촌구석에 처박혀 살던 무인이, 이 나라의 황손과 친분이 있다고 자랑할 적에 그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나... 너무 꼭 만나야 하답니다. 진담입니다.”
“흐흐, 염려 콱 붙들어 매세... 음... 잠시...”
이쪽 방으로 다가오는 기척을 인지한 강도진이 너스레를 하다말고 중간에 끊었다.
- 똑똑.
“헤헤~. 저기~, 잠깐 실례하겠습니다요. 나으리.”
강도진이 미닫이문을 드르륵 열어, 복도에서 멋쩍게 웃음 짓고 있는 점원을 반겼다.
“아아, 괜찮소. 근데 무슨 일이라도?”
“저어... 고것이... 다름이 아니오라... 좀 전에 가게를 찾은 손님 분들이 누군가를 열심히 찾고 계신 모양인데, 인상착의가 나리와 아주 흡사해서 말입니다요."
"?"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행여나 도움이 될까 싶어서리 알려드리려고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에헤헤.”
“음? 그래요? 허허... 아는 사람도 없는데 별일이군요. 혹 관졸이었습니까?”
“아, 아니요. 그냥 무림인들로 보였습니다. 요게 그분들이 갖고 있던 초상화입지요.”
“어디 좀 봅시다.”
- 파라락~.
점소이가 얌전하게 건넨 둘둘 말린 종이를 펼쳐본 강도진은, 자신의 특징을 세세히 담고 있는 그림을 보며 심심한 감탄을 표했다.
“허... 참... 진짜네?”
“어디어디요! 우와~, 이건 형님 얼굴을 그냥 빼다 박은 건데요? 흠... 혹시 우리 몰래 어디서 사고라도 치신 건 아니죠?”
“야야, 네가 곁에 쭉 붙어서 봐왔듯이 난 조용히 술만 퍼마시면서 지냈잖느냐? 험험, 여하튼 바쁜데 여까지 직접 찾아와 알려줘서 고맙소. 자자, 약소하지만 감사의 뜻이오.”
“아이쿠, 뭘 이런 걸 다...”
점소이는 도진이 찔러주는 답례가 생각했던 것보다 짭짤하기에, 허리를 연신 위아래로 굽실거리며 다시 1층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문을 천천히 닫았다.
“헤헤헤. 고맙습니다요. 나리. 저는 이만. 아무쪼록 편히 쉬십쇼~!”
근방의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지자, 강도진이 유철진을 향해 거드름을 피웠다.
“에헴, 봤냐? 스승님께서 ‘사람을 부릴 땐 넉넉해야 한다.’고 하셨던 가르침을 이렇게 써먹어서 나쁠 게 하나 없다니까? 다음부턴 객잔 점원한테 미리미리 몇 푼 찔러준다고 타박하지 마라. 알긋냐? 아우야~?”
“치이~, 알겠습니다. 앞으로는 고정도는 제가 양보하도록 하겠습니다. 형님.”
아우의 수긍에 의기양양했던 강도진의 얼굴은 곧 호기심으로 변했다.
“그나저나... 어떤 인간들이 나한테 관심을 두는 거지?”
“지난번 일서국에서 한바탕하셨다는 그때 일 땜시 복ㅅ... 아니, 찾는 거 아닐까요?”
유철진은 ‘복수라도 하려고’란 이야기를 덧붙이려다가, 혹 말이 씨가 될까 싶어 뒷말을 슬그머니 흐리고 넘겼다.
“흐음... 그게 제일 가능성이 있지만, 그땐 얼굴을 완벽하게 가려서 특징을 알 턱이 없었을 텐데...? 이후에 뒤처리도 야물딱지게 했고...”
“혹 누가 찔렀을지 또 압니까? 쫄병 대부분은 형님께서 그냥 살려주셨다면서요? 어쩌면 진짜 형님 찾는 걸 수도 있는데, 그냥 퍼뜩 짐 싸서 떠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크흠... 그것도 그런가...?”
수 초간 미간의 주름을 만들며 고민을 하던 강도진은, 돌연 생각하기도 귀찮다는 표정으로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어기적 일어섰다.
“하~, 내 주제에 생각은 무슨...”
“혀, 형님! 어디 가십니까?”
“응? 어디가긴 1층에 가지."
강도진은 아주 당연하다는 대꾸와 함께 말을 이어 보탰다.
"여 잠깐만 기다리거라. 밑에 가서 정말 나 찾는 게 맞는지 직접 물어보고, 진짜 맞으면 연유도 좀 알아보고 올 테니까.”
“어? 형님?! 형님!”
낭군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성큼성큼 방을 나간 강도진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미나의 궁금증으로 이어졌다.
“아아... 쫌... 하... 진짜...”
“탈루딤. 우리 아주보어님, 왜 어디 나갑니까?”
“에휴~.”
유철진은 약혼녀의 물음에 한숨으로 선답하고서 말을 이었다.
“확인할게 있다고 내려갔는데... 혹 사고라도 칠까 쪼매 걱정이에요. 일서국에 다녀오신 뒤론, 전에 없던 냉랭한 성질까지 살짝꿍 생기셔서...... 이거 원.... 참...”
“저... 탈루딤, 나 잘 이해 못가요. 은사국 말. 긴 문장 아직 매우 어려워요. 듣는 거요.”
그녀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은, 유철진의 헝클어진 기분을 파릇파릇하게 환기시켜줬다.
“흐흐, 울 각시는~. 그냥 나랑 같이 겉옷 좀 잘 챙겨 입고~. 봇짐을 자알~ 꾸리면 되요~. 여차하면~,바로 떠나야할 수도 있으니까요~.”
“히히, 네에~.”
미나는 자신을 위해 한껏 과장되게 움직이며 크고 천천히 말하는 유철진의 행동에서, 이곳을 떠날 채비를 하자는 대략의 의미를 깨닫고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이후로 행장을 착착 챙기고 난 미나와 유철진이 서로의 옷매무새를 수줍게 매만져주고 있을 때였다.
- 우당탕탕!!!
- 쿵! 와지끈!
“꺄아아악!”
아래층 물건들이 신명나게 박살나는 소리와, 사람들의 비명이 화음을 이루며 고막을 때렸다.
“아으씨!!! 쫌! 아! 쫌!!! 또 뭔데?!!! 내가 제명에 못 산다, 진짜!”
* * * * *
한편 같은 시각, 혜국의 수도 장비원성(長肥原城).
으레 살림이 빠듯하기 마련인 겨울이 매섭게 지나가고 있음에도, 이 도읍만큼은 어느 곳보다 넉넉해 보였다.
오래 전부터 붙여진 지명 그대로, 넓고 비옥한 땅이 매해 곡식을 따박따박 풍성히 내놓기도 했으나, 이것이 주요 원인이라 하기엔 많이 부족했다.
최근 세계 무역이 점차 육로에서 해상으로 중심이 옮겨가면서 급부상 중인 항구도시, 바로 ‘향양(響陽)’과의 거리가 도보로 닷새도 안 되는 이유가 훨씬 더 크다고 하겠다.
하지만 왕실 내의 긴장과 설움 섞인 공기는, 권력다툼이 한창인 다른 나라와 별반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것은 해상무역의 주도권을 두고 시비가 붙은 나하국와의 분쟁이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형태로 커지면서, 궁궐 안팎으로 주변 대소 국가의 왕실 자손들을 볼모로 끌어들인 까닭이었다.
그나마 서럽게 끌려온 각 국의 왕자와 공주들에게 다행스러운 점을 꼽으라면, 혜국이 전장의 전리품으로써 그들을 취급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국빈으로써 나쁘지 않은 대우를 받고 있다는 점이었다.
특히 은사국과 일서국의 경우에는, 북쪽과 서쪽의 별궁을 개축하여 거처로 내어줄 둘 정도로 대접에 각별히 신경을 쓰는 상황이었다.
속사정이야 어쨌든, 이들이 중앙대륙에서 영향력이 상당한 나라의 왕실 직계혈육들임에는 틀림없었기 때문이었다.
“전(前) 직학사 구선웅이 보내온 소식은 여기까지입니다.”
북쪽 별궁 일서국 온성태자의 처소에선, 무관으로 짐작되는 사내가 태자에게 보고를 올리는 중이었다.
“음, 그렇군요."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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