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장 핏빛 긍지 6화 로크라테의 반격
7. 로크라테의 반격 下
“흠, 그것이 전서인가.”
은근히 비협조적인 영주가 기실은 아군 모르게 세레즈와 내통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의심을 지우지 못한 채 영주의 집무실로 내달려온 호텐은 아무 저항 없이 서한을 저에게 건네는 영주의 태도에 조금 민망해져 공연히 헛기침을 했다. 항복을 선언하고 투항한 영주가 기실 이적행위를 하고 그 증거를 인멸하려 하였다면 훗날 성급한 결단에 대해 대장군께 처벌을 받는 한이 있더라고 이 자리에서 영주의 목을 베어버리라 작심하고 있었던 그로서는 당황스러울 만큼 순순한 태도였다.
하지만 영주가 건넨 서한의 내용은 유순한 콜틴의 태도와 달리 과격하고 충격적인 것이었다. 다름 아니라 그것은 부사령관 클리어트의 이동을 기회 삼아 첸트로빌 공략 부대를 일소하고 이동하는 클리어트의 부대를 급습하기 위하여 아나브릴 방어대의 군세 5만이 진군해오고 있으니 로크라테에서도 군세를 일으켜 내응해 달라는 청이었던 까닭이었다. 서한을 쥔 호텐의 손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남 일 구경하듯 지켜보고 있던 영주가 나직하게 운을 떼었다.
“언제까지 그리 서 계실 요량이오? 펜데스칼에 계신 라콘 대장군께 알려야 하지 않겠소? 아니면 현재 이리로 오고 있는 부사령관 클리어트 장군에게 전령을 띄우던가. 내 보기에는 한시가 급한 일로 생각되오만.”
태평하기까지 한 영주의 발언에 호텐은 쌍심지가 서서 버럭 소리를 치고 말았다.
“그리 한가롭게 말할 일이 아니잖소! 로크라테의 주둔하고 있던 병력의 대부분을 펜데스칼의 본영으로 보낸 것을 알고 있는 마당에 어찌 그리도······!”
“허면 내가 달리 어찌하겠소?”
“그 무슨 망발이오! 역적으로 낙인찍힌 마당에 세레즈군이 로크라테를 수복하면 영주인 그대가 무사하리라 보는가?”
호텐의 짜증 섞인 음성이 집무실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그러나 콜틴의 차분한 얼굴은 하등 변화가 없었다.
“그럴 리가. 전시에 이적행위를 하였으니 본보기로 백성들을 다 모아놓은 광장에서 처형당하겠지. 수도로 끌려가서 온갖 수치는 다 당한 뒤에 효수될 수도 있고.”
“그걸 알면서 어찌 그리 태연자약한가?”
“태연해 보인다니 그것참 유감이오. 나도 내 목숨이 귀한 줄은 안다오. 그러나 코네세타를 돕고 싶어도 나로서는 도울 방도가 없으니, 더 늦기 전에 대장군께 원병을 위한 전령을 급파하라 조언하는 것이 아니겠소?”
“대장군께서 전면전을 준비하시는데 원병을 요청하라니,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호텐이 책상을 쾅 하고 내리쳤다. 그러나 콜틴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현재로서는 세레즈의 대군과 맞서 싸울 수 있는 병력이라고는 투항을 선언한 로크라테의 상비병들뿐일 텐데, 그들을 무장해제시킨 건 내가 아니고 그대들이오. 나와 로크라테가 아무 조건 없이 대장군께 항복하고 지금껏 물심양면으로 코네세타를 위해 일해왔으며 지금도 이렇듯 장군께 적의 동태까지 이리 주저 없이 알려줘도 그대들은 나를 믿지 못하니, 내게 달리 무슨 방도가 있겠소?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 본영에 원병을 요구하는 게 현명해 보이는군. 아니면 급습을 당하여 괴멸당하기 전에 대비할 수 있도록 부사령관께 알리든지.”
얄미울 만큼 침착한 태도였다. 하지만 천상 무인인 호텐으로서도 영주의 지적에 반박의 여지가 없음은 자명해 보였다. 물자든 군사든 원하는 만큼 징발할 수는 없어 불만스럽기는 해도 로크라테는 보급로가 길어 치명적인 아군에게는 매우 중요한 거점이었다.
지금 로크라테를 잃으면 설혹 대장군께서 전면전에서 기세를 잡아도 아군의 30만 대군은 쫄쫄 굶으며 싸워야 한다. 설령 본국에서 해상으로 보급품을 보낸다 할지라도, 워낙 그 양이 많아 운송에 시간이 상당히 걸릴뿐더러, 그 또한 적의 공격을 받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보급 없이 한 달도 버티지 못하리라는 것을 명약관화, 다소의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현재로서는 로크라테의 상비군을 이용하는 것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영주인 콜틴조차 완전히 신임하기 어려운 마당에 백성들이나 군사들을 믿을 수 있을지. 호텐으로서는 그것이 가장 커다란 고민이었다.
“지금 당장 상비군을 무장하라 지시하시오. ”
고민 끝에 결단을 내린 호텐이 씹어뱉듯이 말했다.
“같은 피를 가진 세레즈와 싸우려 할지 모르겠소만, 로크라테의 영민들은 그대를 꽤나 흠모하는 듯하니 그대가 지시하면 어느 정도 말을 듣겠지. ”
호텐의 말에 로크라테의 영주는 실소했다.
“장군은 보기보다 순진하군. 백성들은 나를 흠모하는 게 아니오. 농작물과 목숨을 지켜준 것에 고마워할 뿐, 그들을 지키는 자가 세레즈가 아니라 코네세타여도 그들에겐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라오. 그대들이 백성들을 위협하지 않고 지금처럼 질서를 지켜준다면, 로크라테의 영민과 군사들은 기꺼이 코네세타를 위해 충성할 거요. 그대들이 이기고 있는 한, 본인과 가족의 생사가 그대들 손에 달려있음을 잘 알 터이니.”
그 말을 끝으로 영주는 몸을 일으켰다. 그것이 로크라테 상비병의 출군 준비를 위해서라는 점을 잘 알면서도 호텐은 으름장을 늘어놓았다.
“분명히 알아두시오. 허튼 수작을 하면 그대의 목부터 날아갈 테니.”
그 말을 내뱉은 채 먼저 돌아선 호텐은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콜틴의 두 눈이 의미심장한 기운을 드리우는 것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아무 말 없이 호텐을 따라 집무실을 나선 영주는 성의 수비대장인 게오르규 베틴 장군을 불러 상비병의 무장을 명했다. 각 병과의 분대장들로 하여금 병사들을 성의 연무장에 집합하게 한 후에, 영주는 호텐 장군과 함께 병사들을 한 눈에 굽어볼 수 있는 연대 위에 올라섰다. 호텐이 오만한 태도로 영주에게 턱을 약간 올려 보였다. 올라가 장병들에게 코네세타를 위하여 세레즈에 맞서 싸우도록 설득하기를 종용하는 몸짓이었다. 그의 방약무인한 태도에 수비대장과 근위대의 총관의 안색이 변했으나, 영주는 엄한 눈빛으로 자제를 명한 뒤 느릿느릿 연단 위에 자리 잡고 섰다.
“로크라테의 상비군에게 새삼 무장을 명한 까닭은 영지가 현재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아나브릴에 주둔 중이었던 레니크 라 밀시언 장군 휘하의 세레즈의 5만 대군이 현재 하크스 영지를 떠나 대본영으로 이동 중인 플라노크 클리어트 장군 휘하의 코네세타 군의 배후를 습격하기 위해 이리로 진군 중이다. 양군의 이동속도와 진군행로를 고려하였을 때 양군의 격전지는 최종적으로 우리 로크라테의 영내가 될 터, 영민의 안전과 영지의 파괴를 방지하기 위하여 우리 상비군도 출격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
여기까지 말한 뒤 콜틴은 찬찬히 늘어서 있는 장병들을 쭉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는 심호흡을 한 뒤에 한 손을 들어 올렸다. 드디어 거짓 항복과 배신 놀이를 끝낼 때가 왔다.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므로 로크라테의 아들들이여! 진군 중인 아군을 도와 클리어트의 부대를 격파하라!”
”이놈······!“
호텐은 장검을 채 뽑기도 전에 장창 하나에 등을 꿰뚫린 채 피를 토하며 주저앉았다.
”쿨,럭······!“
성의 수비대장인 베틴이 호텐의 머리를 잡아 그의 목을 베어냈다. 그와 동시에 무장한 근위대가 성에 주둔 중이던 코네세타의 군사들을 일제히 공격했다. 검날을 따라 여기저기에서 피가 분수처럼 치솟았다.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으나 그를 지켜보는 콜틴의 안색은 예상하고 있었던 듯 평온했다.
로크라테와 하크스, 펜데스칼과 그레안 영지는 세레즈의 굴지의 곡창지대였다. 코네세타의 진군행로를 따라 국가의 곡물 수요를 상당 부분 감당하고 있는 영지 전부가 파괴되면 최종전에 승리한다 하여도 전후복구가 힘겨워지는 것은 당연지사, 하크스의 영주 로엘과 로크라테의 영주 콜틴은 코네세타의 침공 전에 밀약을 맺은 바 있었다.
군사력이 강하고 무기제조가 활발한 하크스에서 저항을 계속할 테니 로크라테에서는 거짓 투항으로 적당한 때가 올 때까지 병력과 식량을 비축해두기로. 상인 출신인지라 군략에 재능이 없는 콜틴 본인을 배려한 담합이었기에, 수치를 감당하기 어렵노라 떼를 쓸 수도 없었다. 적의 압도적인 30만 대군 앞에서 군사 방면에 무능한 콜틴이 맞서봐야 처참하게 깨질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이었다. 수치를 견디며 때를 기다린다. 그것은 상인이자 정치가인 그로서도 능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군의 조정마저 감쪽같이 속이면서까지 코네세타에 붙은 콜틴은 온순한 태도로 적정을 탐지하여 기회를 보아 하크스에게 전해주었다. 적의 사정에 훤한 콜틴의 눈에도 지금이 공격의 적기라는 하크스 영주의 판단은 옳아 보였다. 파죽지세로 밀어붙이던 코네세타군이 펜데스칼에서 진군이 멈춘 지 오래였다. 카르테의 함락과 해상에서 보급부대가 공격받은 이래 코네세타군의 기세는 예전과 같지 않았다. 기나긴 원정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보급문제와 후방의 불안정이 한 번에 불거지며 사기가 꺾인 탓이었다.
멈춰버린 진군과 보급문제로 계속된 사기 저하를 우려한 적의 대장군은 현재 전장의 흐름을 바꾸기 위하여 전면전을 준비하고 있었고, 현재 아군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서는 후방의 부대 중에서 가장 주력이라 할 만한 클리어트의 본진 합류를 무조건 저지해야 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콜틴은 하크스 영주와 더불어 후방을 안정시킨 후에 전면전에 돌입한 코네세타의 대본영의 배후를 치고 싶었다.
”로크라테의 인고는 이제 끝났다. 항복과 굴종으로 인한 수치스러운 오명은 나, 지그프리트 레 콜틴의 이름자 앞에만 한정될 것이니, 로크라테의 장병들이여, 세레즈의 형제들이여! 적을 무찌르고, 적의 압제에 신음하는 남부 영지를 탈환하라!“
적의 침공 이래 일 년 넘도록 그 한 마디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병사들이 들고 있던 창과 칼을 들어 올리며 일제히 함성을 터트렸다. 병사들로 가득찬 성 전체가 울릴 정도로 크나큰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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