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장. 가지 않았기에 걸어야 할 길. (1)
한 권이 끝날 때, 가슴에 남는 글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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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2050년 11월 20일, 불과 7일간의 전쟁을 마무리하고 잔존 세력의 소탕도 마친 아샤르 제국은, 북한의 완전 병탄을 선언하고 관련된 인물의 죽음도 더불어 알렸다.
“면담은 잘 끝내셨습니까.”
총재의 물음에 황제는 마뜩찮은 웃음을 지었다.
“그럭저럭...”
“결과는 알 것 같군요.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만... 협조는 좀 얻어낼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기대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나?”
“그건 그렇지만, 적어도 한 나라의 정점에 올랐던 이들입니다. 무능과는 거리가 있을 것 아닙니까.”
21일. 일본 총리 엔도 야스히토, 그리고 한국 대통령 정의찬이 황궁에 불려왔다. 부랴트 대통령 네프스키도 올라와야 했지만, 하필이면 지독한 감기에 걸리는 바람에 다음으로 미루어졌다.
엔도 총리는 동경대 출신으로, 집권당인 자민당에서 지난 정부에서는 간사장까지 했던, 이른바 엘리트 코스를 그대로 밟아온 위인이다.
지역 선거구 대물림의 병폐는 여전하여, 드디어 5대 연속 의원이 나오는 경우도 있었던 일본 정치판이었던지라, 그도 고베 출신으로 4대에 이은 정치가였다.
남과 다투지 않는 무난한 이. 또한 그것으로 끝이라, ‘회색 총리’라는 빈정거림을 섞은 별명이 붙어 있었다.
정의찬 대통령은 지난 정부에서는 경제부총리까지 했던 경험이 있다. 각료로 있을 때는 나름 유능하다 평해졌으나, 국가원수의 자리는 그 누구든 유능을 무능으로 바꾸는 마성의 자리였다.
두 사람 다 능력 여부에 상관없이 정치적 관계에 휘말려 무능으로 빠져드는, 어찌 보면 나쁜 구조의 희생양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타인의 위에 서는 자는 그런 변명이 허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이들도 일단은 필요했다. 가진 세력도 사람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총리든 대통령이든, 각국을 대표했던 수장들인지라 그들에게는 충분한 예우가 주어진다. 대표적인 것이 이번에 신설되는 황제자문회의 공동위원장 자리이며, 작위는 내리지 않지만 대우는 귀족급이다.
물론 단순히 기존 지위만 생각해서 내리는 예우는 아니다. 아샤르는 인구도 많지 않았고 로사가 있어 정부가 큰 편은 아니었다. 장차 정부 규모를 늘릴 예정이나 한동안은 행정공백을 각오해야 한다. 기존 정치인의 협조는 필요하다.
“협조라...”
황제는 거듭 실소하며,
“이건 능력보다는 마음의 문제라서. 두 사람 모두 민의에 의해 민주적으로 뽑힌 지도자들. 그러니 혈통에 의해 옥좌에 있는 짐이 그리 곱게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잠시의 면담이지만 약간은 실망했지.”
“어떤 의미의 실망...입니까?”
“서로가 우방이면서 적국이었네. 서로의 자존심도 좀 부딪혔고, 또 모두가 평등한 나라면서도 기득권자이기도 했으니 그런 자부심도 엿보였지. 덕분에 많은 말을 이끌어내진 못했지만, 그래도 짐은 꼭 받아야 하는 질문이 하나 있었어. 하지만 아무도 하지 않더군.”
황제는 불편한 한숨을 감추지 않았다.
“국제연합 총장에, 미국 대통령에... 그런 여러 정치가들과 마찬가지로 저들 역시 묻지 않았다네. ...장차 아샤르의 지배를 받으면 이 땅의 민중들은 어찌되는 겁니까. 세라비 칼스 카이. 당신이 옥좌에 있으면, 내 나라에 살던 뭇 사람들이 좀 더 배부르고 편할 수 있는 겁니까. ...그런 질문 말일세.”
“...알만 합니다.”
총재는 거듭 혀를 찼다.
“그런데도 자문위원회를 만들고 그들을 수장으로 앉혔으니, 장차 귀찮은 일이 끊이지 않을 것 같군요.”
“지상 통치를 위해선 어쩔 수 없지. 또, 나라에 인재가 없는 경우는 없지. 단지 드러나지 않을 뿐. 그러니 장차 충분히 가리고 가려서 유능한 자로 대체해 나갈 것이다. 아무튼, 자문위원회는 물론 여론과도 당분간 충돌이 잦겠지만, 부디 조정이 흔들리지 않길 바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여론 문제라면...”
총재는 조금 짓궂은 웃음으로,
“차비마마가 지상인에, 마침 손에 넣는 영토 출신이시니,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일본 쪽에서는 호의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또한 그런 의미에서, 타국에서 귀찮은 제안을 해오기 전에 미리 골고루 후궁을 뽑아도 좋을 겁니다. 다만 본국 신민들의 자존심을 위해서, 후비 서열 1위는 반드시 아샤르 내에서 뽑으시는 것도...”
“그만둬 두게. 누굴 종마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나라의 안정을 위해 군주는 스스로를 희생해야 하는 법. 사실 말입니다. 황족이 고작 셋만 남은 그 때부터... 폐하께서 종마 처지가 되신 것도 사실이지요.”
남이 들었으면 기겁할 정도로 격식 없는 대화지만, 새로운 황제는 오히려 까다로운 격식을 싫어한다.
총재는 편안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 신영토에 미녀가 많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아무리 정치적 목적이라 해도, 아무나 들여야 한다면 폐하가 가련하니까요.”
“남들이 보면 통합 방책으로 고작 이런 것만 생각했다 하겠군.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황거의 방문 신청은 어떻게 됐지?”
일본 국민, 특히 관료가 덴노를 만나기 위해서는 궁내청의 허가가 필요하다. 반대로, 일본 황실의 어떤 행동에도 궁내청의 허가가 필요했다.
이는 덴노도 예외가 아니라, 10가지를 신청하면 10가지를 다 거부하는, 꽉 막히기로는 일본 사법부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아샤르 조정에서는 파악하고 있었다.
“문제없습니다. 재빨리 꼬리를 내리더군요.”
날짜까지 일방적으로 통보했는데 거의 고민이 없었다. 힘 있는 주인이 생기니 바로 태도가 달라져버렸다.
방문일은 11월 24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역시 걱정은 숨길 수 없는지, 22일 당일 히사히토 덴노가 엔도 총리를 불러 칼스 황제가 어떤 인물인지는 물어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밀 면담이었으므로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무려 침략자의 황제, 그것도 승자가 직접 만나러 온다. 분명 무척 긴장하고 있겠지.
루이코도 바짝 긴장했다. 본의 아니게 역사적 현장에 있게 되었고, 또한 온 세상에 자신의 이름이 드러난다.
이미 얼어붙은 그녀에게, 출발을 앞두고 차를 나누던 황후가 말했다.
“너무 긴장하면 곤란해. 너는 이제 황족이고, 그에 대한 자각이 필요하다고.”
루이코는 허탈하게 웃었다.
“역시 저는 신분 같은 것은 익숙해지지 않나 봐요. 당장 시녀장만 해도 쉽게 대하지 못하잖아요.”
엄마뻘인 여자에게 명령하기란 정말 쉽지 않았다.
황후가 옅게 웃었다.
“네가 당당하지 못하면 폐하께도 실례야. 르아냐에서의 패기는 어디로 간 거야?”
“그 때는 아무 것도 모르는 천둥벌거숭이였고... 뭘 알게 된 지금은 오히려 어렵네요.”
“그래도... 이 점에 대해서는 자각을 가지도록 노력해. 그리고... 앞으로 네가 받을 평가도 네 행동에 달려 있어. 두려워하는 만큼 이겨내려는 의지도 강할 너인데... 미리 위축되면 곤란하겠지?”
“...그렇네요.”
나는 그와 함께 한 이후부터 이미 한 배를 탔다. 기쁘게 그를 받아들였고 앞으로 즐겁게 가려 한다.
황후의 말이 옳다. 루이코는 배사했다.
“충고 감사합니다. 즐겁게 다녀올게요.”
11둴 24일 정오, 도쿄 중심부에 위치한 황거가 개방되었다. 평상시에는 1년에 2번, 신년 1월 2일과 덴노의 생일 때만 공개되지만 이 날은 또 달랐다.
평소의 개방일에 황거를 찾으면, 일본에서 덴노의 위치라는 것이 어떤 것임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갖은 극우파들이 몰려와서 울고불고 하는 것도 있고, 수많은 인파에 화답하는 덴노 일가에게 만세를 외치며 환호하는 모습을 보면 말이다.
혹자는 이를 군국주의의 망령이 진하게 남아 있는 가장 극명한 증거로 보지만, 군주가 백성들에게 지지와 사랑을 받아서 나쁠 것이 없다.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항상 문제인 셈이다.
회견 장소는 정전(正殿)이다. 말 그대로 중심 건물로 소나무의 방(松之間), 대나무의 방(竹之間), 매화나무의 방(梅之間)이라는 3개의 방으로 나뉜다. 신년축하, 공을 세운 자에 대한 훈장 수여 및 궁중 행사가 열리는 것은 물론, 외국 국가 원수를 접견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 모든 방이 개방된 가운데, 국가원수를 대하는 의례대로 대나무의 방에서 만남이 이루어질 것이다.
황제 기함인 전함 카라카스와 황제 호위 분함대가 동경만에 내리고 이어 셔틀이 분리되어 황거로 향했다.
그들이 내린 곳은 장화전(長和殿)의 동쪽 정원으로, 평상시에 덴노와 일본 국민들이 발코니에서 만남을 가졌던 곳이다.
접대는 간소히 해달라고 아샤르가 요청을 했지만, 역시나 꽉 막힌 궁내성은 마지막 체면이라도 차리려는 듯 무척 거창하게 준비했다.
국가 원수를 대하는 의장대의 사이. 황제는 익숙하게 걸어가도 루이코는 그렇지 않았다. 뒤에는 제이낙 대장인 알리사를 포함한 셋. 총 다섯 명이 일행의 전부다.
루이코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오오, 떨린다. 생각보다 훨씬 떨린다.
하지만 황후의 당부를 생각한 그녀는, 최대한 다소곳이 허리를 펴고 걷는 데만 신경을 집중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차에 태워져 있었다. 짧은 거리지만 이걸로 이동할 것이다.
옆자리의 황제가 피식 웃었다.
“차비마마. 부디 얼굴을 좀 펴시죠. 그렇게 뻣뻣해서는, 모처럼 짐이 이 얼굴로 얻어놓은 호감을 마마가 다 깎아먹는단 말입니다.”
“...꼬집어도 돼요?”
“남들이 다 본다. 돌아가서 꼬집혀주지.”
아무리 옥체라지만 그 정도는 용납하고 있다.
“그나저나... 일행 명단도 안 넘기시고 그냥 간다고만... 그거 무례에요.”
“말했지? 너는 중요한 패라고. 네 존재를 미리 밝혀서 무슨 의미가 있다고...”
“어떤 식으로 쓰실 것인지는 말씀이 없으셨잖아요. 행여 장난치실 요량이시면, 남이 보든 말든 꼬집어버릴지도 몰라요.”
“걱정 마. 나도 진지할 때는 진지하다고.”
과연 이 장난꾸러기를 믿어야 하나.
하지만 이번에는 진지한 그 옆얼굴에, 루이코는 긴장 속에서도 흥미를 느꼈다.
“어서... 오십시오. 아샤르 마리칸 폐하를 뵙습니다.”
대나무의 방에는 이미 덴노가 일어서 있었다.
그들의 습관을 존중해 신발을 벗고 올라선 황제는, 이어 아샤르 식으로 손을 모으고 들어보였다.
“아샤르 황제 세라비 칼스 카이, 히사히토 덴노 폐하를 뵙습니다.”
빳빳한 긴장이 드넓은 다다미방을 가득 채운 가운데, 서로는 천천히 마주 걸어갔다.
과거와 미래, 승리와 패배가 만나는 순간이었다.
수고하셨어요.
- 작가의말
힌트를 드리자면 황제는 아키라 이전에는 한국인, 그 이전에는 중국인 인생이었답니다. 1부 2권에서 언급했었습니다만 한국인 인생은 1964~2028년까지... 중국인 인생은 그 전이었죠.
내일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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