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장. 진정한 승리. (2)
한 권이 끝날 때, 가슴에 남는 글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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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아미에는 어두운 방에 연금되어 있었다.
입구는 잠겨 있었지만 딱히 손발이 구속되어 있지는 않았다. 눈물도 이제 멈추었고 몸도 마음도 젖은 솜과 같았다.
침대에 누운 채로 눈을 감은 그녀. 하지만 잠들 수는 없었다. 바로 오늘 자신의 아버지가 부하의 총구에 목숨을 잃고,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파놓은 함정에 목숨을 잃었다.
지나간 과거를 회상하듯, 그리고 다가올 미래를 각오하듯, 그녀는 그저 누워만 있을 뿐이었다.
바람이 살짝 불어오고 이내 뺨에 작은 감촉이 느껴졌다.
“...오셨네요.”
비로소 눈을 뜬 그녀는 살포시 웃었다.
아아, 이 손길을 얼마나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가.
“...문이 잠겼는데 잘도 오셨네요.”
“...통풍구. 일부 깨부수긴 했지만...”
누운 그녀의 옆에 앉은 이.
비록 군복은 먼지에 더렵혀지고 원수의 전포도 없었지만, 그 계급장은 어둠 속에서도 강하게 반짝인다.
그 손의 주인은 이미 목숨을 잃었을 칼스였다.
그런데 그는 이 자리에 있다.
아미에는 깊은 한숨으로 안도했다.
“다행이네요. 무사하셔서.”
“그러게...”
그도 옅게 웃었다.
“...아무리 나라도 공간이동을 그렇게 연속으로 쓰지는 못해. 거리가 멀어도 문제가 되었었어. 은폐형 비행정도, 다른 수송선에 도피 수단도 준비했지만... 설마 이렇게 비상수단을 쓰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그렇죠. 그러니 혹시나 싶을 경우를 대비해, 제가 바네타에게 이야기해 최대한 근접하라고 했죠.”
대화를 나누던 아미에가, 어느 사이에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눈을 깜박임에 그도 눈치를 챘다.
아샤르에도 후에 지구의 모스 부호와 같은 긴급용 기초통신부호가 있다. 군속이지만 아미에도 알고 있다.
위험. 남몰래 내게로.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도 망설이지 않았다.
목숨을 살릴 뿐만 아니라, 그녀에게 반드시 물어야 할 것이 있었다.
“...왜 그랬어? 배신은 당연히 아닐 거잖아...?!”
“...당신을 위해서 그랬다면, ...믿어주실 거에요?”
칼스는 이해할 수 없었다. 뛰어난 두뇌를 지니고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방법도 생각해낸 그였지만, 이것만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아미에는 어둠 속에서 다시 웃었다.
“제 아버님을 설득하는 것은 실패... 아버님은 저를 보내주셨지만 바네타에게 잡혀버렸어요...”
그녀는 짧게 사정을 설명했다.
“잡혀버린 제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요구를 거부하고 그 자리에서 죽던가... 아니면 이렇게 도박을 하든가... 그 정도가 고작이었어요. 연락을 취할 수도 없고... 그러니 어쩔 수 없이 그가 말하는 대로 따를 수밖에...”
“그랬나...”
바네타 이 자식...! 칼스는 이를 갈았다.
“그래도... 그렇다면 그 때 연락했을 때, 구해달라고 말을 했어야지..!”
“아무리 당신이라도 무슨 수로요? 그렇게 말하는 순간 제 목숨은요...? 짐이 되지 않도록 죽는대도 제 시체가 짐짝이 되어버리는 셈이고, 그게 아니더라도 저를 구한답시고 또 싸움이 벌어지고, ...많은 사람들이 죽겠죠. 제가 잡혔으니 당신은 미친 듯이 분노하여 쳐들어올 것이고... 그건 너무 위험하잖아요...”
“내 위험이 대수였어? 네가 죽을 판이었는데?”
“그럼 어떻게 하실 건데요? 다 이긴 싸움을 저 때문에 망칠 생각이셨어요?”
그녀는 슬픈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님의 문제도 있어요. 이대로는 동족을 죽인 학살자. 하지만... 그 과오를 뉘우치고 모든 속죄를 하시며 항복하시려는 찰나, 무언가 어설픈 머리를 굴린 딸과 그토록 믿었던 불의한 부하의 손에 돌아가신 거에요. 그만큼 아버님의 죄는 덜어지는 거고요.”
“...그런...! 그러면 너는 네 부친이 죽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단 말이야?”
“알고 있었어요. 바네타의 인성은 빤하잖아요. 제가 따르든 거부하든, 녀석은 아버님을 죽였을 거에요.”
태연스레 말하는 그녀의 입술은 고통의 분화구다.
“그리고, 당신 가족의 시신도 여기에 있었어요. 제가 배신한 것을 감추기 위한 증거로 돌려보내자고 했고... 덕분에 무사히 돌아갔잖아요?”
그는 금방 사태를 파악했다.
아미에는 자신뿐만 아니라 아버지도 바네타도 모두 속였다. 스스로가 배신자가 되는 대신 아버지에겐 동정의 여지를 남겼고, 바네타의 손에서 살아남는 한편 녀석을 천하의 개자식으로 만들었다.
가족의 시신을 돌려줌은 덤인 셈이다.
칼스는 거듭 탄식했다.
그 긴박한 상황에서 이렇게까지 잘도...!
하지만 차라리 그녀가 바보였으면, 그때 제발 살려달라고 말했다면...!
“...일단 돌아가자. 가서 사정을 설명하면...”
듣고 보니 정상참작의 여지는 충분하다. 하지만 아미에는 어깨를 틀었다.
“안 돼요...!”
“어째서?!”
“이대로는 전하는 배신자를 감싸는 것이잖아요. 반역자의 딸만으로도 부담일 텐데, 이제는 혼자 살려다 아버지를 죽게 만든 여자에요. 어떻게 감당하실 거에요?”
“무슨 걱정이야? 사실은 그런 거 아니잖아?!”
“그 누가 믿어주죠? 증거는 제 말 하나인데? 아무리 전하라도... 이렇게 만인이 보는 앞에서 당신을 배반하고 죽이려 든 저를... 그 누가 믿어줄까요?”
“...쉽진 않겠지만... 그래도 이 전쟁으로 늘어난, 내 입지는 상당해. 그걸 모두 써서라도...!”
“무리해서 저를 감싸다 자칫 일이 틀어진다면, 정치 생명은 사실상 끝이라고 봐도 무방하죠. 그럼 전하의 대의는요? 미래는요? ...그리고...!”
그녀는 더욱 힘주어 말했다.
“힘이 빠진 당신 없이, 내전의 뒷수습을 홀로 해야 하는 아리칸 전하는요? 가족을 잃고도 원수 같은 여자를, 그래도 오라비의 여자랍시고 올케로 모셔야 하는 우현왕 전하는요?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넘어서서... 지금껏 죽은 병사들과 당신 가족의 복수는요? 내전으로 상처 입은 국민들은요? ...모두 감당하실 수 있나요?”
칼스는 차마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 말대로, 그녀 하나를 건져주려면 여러 사람이 상처를 입게 된다.
...그래도 이건 아니야...!
“저는요? 사정을 설명한다 해도, 목숨에 연연해서 적에게 붙어 아비를 죽이고 살아남은 딸이잖아요?”
점점 꺾이는 그의 고개. 그 뺨을 쓰다듬으며 아미에는 비로소 조금 울먹였다.
“그리고 전하는 언젠가는 제게서 떠나갈 사람... 그러니 그렇게 무리하실 이유가 없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어떤 경우라도 나는 너를 버리지 않아...! 알면서 왜 그래?”
“당신 마음을 못 믿겠다는 것이 아니에요. 하지만 당신은 부모를 죽인 자의 딸과 살면서, 또한 죽은 이를 마음에 안고 그 간극에 평생 고통 받으며 살겠죠. 그런데도 저와 평생을 아무 문제없이 살아갈 수 있나요?”
칼스는 그렇다고 말해야 했다.
하지만 처음으로 이 질문을 받아본 지금은,
...그리 쉽게 말하기 힘들다.
아니다, 아냐...!
“나는 견뎌낼 수 있어. 그렇지만 혼자서는 안 돼. 네가 같이 있어야 가능해...!”
“저는... 그런 당신의 아픔을 보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당신 이전에 제가 그럴 자신이 없어요.”
“...너...?!”
“그러니 모두를 위하는 길은... 여기서 저를 버리시고 돌아가셔서 승리를 쟁취하시는 길이죠.”
질끈 눈을 감은 그는 연방 고개를 저었다.
“난 못해. 네게 모든 것을 덮어씌우고, 나는 돌아가서 영웅놀이나 하라고? 아무 죄도 없는 네게 할 짓이야?”
“저는 죄가 많답니다... 죄책감을 느끼실 필요는...”
“무슨 헛소리...! 네가 무슨 죄가 있다고...?”
아미에는 지금껏 참아왔을 눈물을 왈칵 터트렸다.
“용서하세요... 아니, 용서하지 마세요...! 제가 전쟁을 일으킨 거나 다름없어요...!”
어이없는 그가 더 묻기도 전에 아미에가 신음했다.
“그때 제가 조금 더 신중했다면...!”
“...무슨 소리야...?! 말해 봐!”
“아버님이 물어오셨어요...! 당신이 저를 아내로 맞겠다고 말씀하신 그 날...”
천하의 왕세자가 하필이면 내 딸을 골랐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래서 말해버리고 말았어요. 당신과 폐하가 감시 건으로 사이가 벌어지고... 또...”
아미에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유키나 전하와 당신이 다툰 일, 그리고... 당신과 아리칸 전하의 일도... ...혹시나 싶어 지나가듯 물으신 것에도 유연하게 넘어가질 못했으니... 아마, 아니 확실히 눈치 채셨을 거에요. ...반란에는 아마 그 이유도 있어요. 철없고 생각 없는 황태녀가 금단의 사랑에까지 목을 매고 있다는 것... 그런 사람이 황제가 되면 안 된다고... 아버님은 무척 강직한 분이셨으니...!”
그동안 침묵을 지켜왔던 그녀는, 가장 중요한 순간에 입을 다물지 못했던 셈이다.
“하지만 아버님은 그 어떤 일이라도 제 편이셨고... 지금껏 속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제겐 의미가 너무 달라서... 차마 속이지 못했어요...!”
칼스는 멍한 뇌리 속에서도 생각했다. 이건 아미에를 온전하게 탓하기도 힘들까.
물론 그녀는 그저 아버지가 물었으니 답한 정도일 것이다. 신뢰했고 입이 무거운 아버지가, 설마 그 이야기를 반란의 결심, 그 재료로 쓸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칼스는 탄식했다.
순간 원망이 없진 않았다. 하지만 원수 앞에서 젊은 패기를 드러냈던 자신도 만만치는 않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끝이 없다.
황제가 지상인 여자를 평생의 반려로 사랑하지 않았다면, 아픈 아버지와 결함이 있는 어머니의 사이에서도 그녀가 사랑의 결실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내가 지상에 내려가지 않았었다면, 그녀를 그저 범용하고 조금은 현실을 모르는 이로 내버려두었다면, 어설픈 관계를 묶고 풀어헤칠 시간이 조금만 더 우리들에게 주어졌었더라면...
정말 사소한 일이 엮이고 엮어, 이렇게 큰 결과를 만들어낸 셈이다.
“죄송해요...! 정말, 정말 죄송해요...!”
그녀의 눈을 가린 손바닥이 흠뻑 젖어갔다. 칼스는 급히 엎드려 그녀를 덮듯이 껴안았다.
마치 닥쳐올 모든 고통에서 그녀를 지키겠다는 듯, 그는 그리 안았다.
“...온전히 네 책임만은 아냐... 나는 더 큰 책임이 있어...! 그러니...!”
“아뇨, 아뇨...! 함부로 입을 놀려 당신의 가족을 죽게 만들었고, 아버님에게 죄의 계기를 만들어준 셈이고... 무엇보다 혼자만의 욕심에... 당신을 사랑하는 당신의 여자에게서, 역시 그녀를 사랑하는 당신을 뺏은 셈이니까...! 그분에게는 죽어도 죄를 다 갚지 못해요...! 저는 고통 받아 마땅해요...!”
세리사를 말하는 것인가...? 칼스는 정신이 아찔했다.
“무슨 헛소리야?! 나는...!”
“아뇨! 전 알고 있었어요. 당신은 몇 번이고 부정했지만, 그래도 마음 속 깊이 그분이 있다는 것을...!”
“말도 안 돼, 무슨 근거로...?!”
“바보...! 자기 마음도 모르는 바보...!”
그녀는 신음하듯 낮게, 하지만 강하게 소리쳤다.
“당신은 그 분의 눈물을 보기 힘들어서 제게 온 거에요. 마음이 없었다면 당신 성격에 그렇게 떠났을까요? 회피했을까요?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저는 당신을 끝까지 돌려보내 못했고, 그저 작은 욕심에 잠시 방황하던 당신을 운 좋게 낚아챈 것 뿐...!”
“...아미에...”
“그러니 이제 가세요... 저 따위에 미련은... 안 돼요.”
망설이는 그 팔을 그녀는 힘주어 떼어냈지만, 아직 그는 움직이지 못했다.
“그래도 거리껴지신다면, 하나 더 말씀드릴까요?”
두 눈이 질끈 감겼다.
“바네타가 그냥 저를 믿었다고... 그리 생각하시나요?”
“무슨...?”
“제가 함부로 떠벌리지 못하도록... 배신의 증거로 그가 요구한 것이 하나 있답니다... ...제 몸요...”
“...아미에...?!”
“죄송해요...! 하지만 그러니 그가 믿은 거에요...!”
세페토스로 돌아가는 길에 바로 범해진 그녀는 역겨움과 구토를 참으며 아버지를 만났었다.
앞이 캄캄해진 칼스는 어금니를 부딪쳤다.
바네타 이 새끼, 잘도...!
하지만 순간 하나의 생각이 머리에 스쳤다.
...그녀도 거부하고 싶었겠지만, 그것은 바네타를 기만하기 위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그녀에게 남은 정을 쉽사리 떼어 버리도록... 어쩌면 그런 것이 아닐까.
자신이 세리사의 옆을 떠나기 위해 당일로 그녀를 안았듯이 그녀 또한, 삶에 대한 스스로의 미련과 공포를 스스로 떨쳐버리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바보 같은 여자...!
“이미 더럽혀진 몸이니... 그러니...”
“그런 것 따위 상관없어...! 네 잘못도 아니고...!”
“착한 사람...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될 텐데...”
아미에는 별안간 기쁜 웃음을 뿌렸다.
“당신은 원래 제 것이 아니었고, 전 과분한 사랑을 받았죠. 이미 차고 넘쳤으니, 남은 것은 당신과 그분께 돌려드릴 거에요. 대신... 가능하면 당신 손으로 죽여줘요. 저는 절 낳고 키워주신 아버지와 같이 갈 거에요.”
아미에의 얼굴에 그의 눈물이 떨어졌다. 가족의 죽음 이후로 눌러왔던 눈물이 다시 솟아올랐다.
“왜 내가... 이 모든 것을 알면서... 너를 죽여야 하는 거야? ...그럴 순 없어...! 내가 돌아가서 어떻게든 할 테니까... 약한 마음은 먹지 마...!”
“하셔야 해요.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아버님의 명예는 다시 실추되고, 전하는 정에 휩쓸려 국민을 버린 이가 되고, 아리칸 전하를 다시 홀로 두게 되어요. 누구보다 외롭고 괴로운 처지였음에도... 저를 위해 무릎까지 꿇은, 당신만을 사랑하고 누구보다 선량한 그 분을... 저는 더 이상 두고 보지 않을 거에요... 그러니 저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그렇게... 해주세요.”
칼스는 절로 신음을 흘렸다.
바네타가 그녀를 구속하고 죽이려고 들지 않았다면 아미에는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가서 목을 따버리고 싶지만, 아미에는 그의 팔을 다시 붙잡았다.
“경거망동은 하지 마세요. 이곳에서 날뛰면 당신도 무사하지 못해요. 대신, 당신이니까 빠져나갈 방법은 생각하셨겠죠. 그렇지 않나요?”
“...유키나가 오고 있어... 그래도 같이...!”
“아뇨. 그 기술... 사람을 하나 안고는 제약이 심하다고 하셨죠. 그러면 탈출할 수가 없잖아요.”
“어떻게든 할게...! 가능할지도 몰라...!”
“괜찮아요... 무리하지 마세요. 오히려 저를 당신 손으로 죽이게 하는 것이, 그에게는 확실한 분풀이거든요.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오히려 안전하죠...”
새롭게 흐른 그의 눈물을 손을 뻗어 닦으면서 아미에가 생긋 웃었다.
“주제넘게도... 잠시의 욕심을 넘치도록 채웠으니... 비록 이렇게 꼬인 운명이지만, 당신을 한 번 더 볼 수 있었으니 기쁘게 받아들이도록 할게요... 울지 말아요...”
죽음을 앞두고 있는 그녀였지만, 오히려 그를 달래기 위해 미소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전에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다음에 만날 그 때는, 꼭 부탁대로 해 주세요. 그러기 위해... 저는 반드시 살아남을 테니. ...아셨죠?”
“무슨 뜻이야...?!”
손을 뻗어 칼스의 머리를 끌어당긴 아미에. 이어진 몇 마디 귓속말에 그는 눈을 크게 떴다.
“...진짜야?”
슬픔 속에서도 옅게 웃는 그녀. 그는 신음했다.
“...이렇게 되면, 나는 너를 더더욱 못 죽여...!”
“아뇨. 그러니까 저도 이 구차한 목숨, 굳이 붙여서 당신을 한 번 더 만나려 한 거잖아요... 그러니 어떻게든 해주세요. 그렇게만 된다면... 저는 죽어도 죽지 않은 것일 테니... 두렵지 않을 거에요... 아셨죠?”
“아미에...!!”
세상 모든 짐을 진 것처럼 그가 그녀의 몸 위로 꺾일 때, 아미에는 그런 그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이제는 다시 느끼지 못할 이 온기.
...하지만 이것으로 충분해.
이것으로, 이것만으로도 아무리 춥고 괴로운 곳이라도 따뜻하게, 즐겁게 갈 수 있어. ...그럴 것 같아.
“잘 가세요. 이제 그 분에게 돌아가세요. 사랑해 주세요. 그리고, 부디 이 일은 영원히 비밀로 하시고... 혹시나 절 구하겠다고 당신이 망가지면... 전 구차하게 당신 옆에서 사는 것보다 더 힘들 테니까... 아셨죠?”
품안에서 흐느끼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던 그녀의 손길이 떨어졌다.
그가 영원히 잊지 못할 말을 그녀는 속삭였다.
“잘 가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 짧았지만 행복했고 고마웠어요. ...이제 당신은 자유에요.”
바네타는 기겁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느린 수송선이라, 만약을 위해 자신의 함대도 대기시켜 놓았다. 하지만 머지않아 합류하려는 차에, 눈 깜짝할 사이에 적임이 분명한 강습전함대가 일제히 수송함을 둘러쌌다.
미리 준비한 것이 틀림없는 규모. 또한 이 속도는, 그야말로 주기관이 폭발할 각오로 전속력으로 온 것이다.
바네타는 꿀꺽 침을 삼켰다.
일제 포격 한 번이면 자신은 죽은 목숨이다. 게다가 칼스가 죽은 마당이니, 잡아놓은 공녀도 더는 인질의 가치가 없을 터.
하지만 놀랍게도 강습전함대는 그저 수송함의 주변을 맴돌았다. 설마 이 마당에 복수에 불타서 공격하지는 못할망정, 이게 대체 무슨 짓일까?
한동안 그렇게 둘러쌌던 강습전함대가, 갑자기 빠르게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영문은 모르지만, 기회다 싶어 전 속력으로 도망하는 수송선에서 부하가 소리쳤다.
“적 함대에서 통신!”
쏴도 모자랄 판에 통신을 하는 이유는 뭐냐.
하지만 이유를 알기 위해서라도 받아야 한다.
“이것은 저승에서의 통신이다.”
바네타는 기절 직전의 정신을 억지로 가다듬었다.
절대로 보고 싶지 않은 어떤 얼굴이 화면 속에 있다. 죽음 앞에서도 여유로웠던 그 얼굴은, 오히려 지금이 묘하게 일그러져 있고 눈빛은 타오르듯 강렬했다.
“내가 살아난 방법은 생각하지 마라. 네놈의 그 빈약한 대가리로는 분명 무리일 테니.”
칼스는 명백한 증오의 웃음을 흘렸다.
“네놈은 반란에 이어 두 가지 죄를 더 저질렀다. 믿어준 상관에 대한 반역, 그리고 더러운 기만과 어설픈 살해기도. ...지랄한다.”
경멸의 웃음 뒤에 강렬한 선언이 따라왔다.
“돌아가서 목을 씻고 기다려라, 반란자 놈아. 돌아가는 즉시 함대를 끌고 와서, 네놈의 모가지를 몸에서 분리시켜 줄 테니까.”
죽었어야 할 이가 화면과 함께 사라지자, 바네타는 자신의 지휘석에 주저앉고 말았다.
아직 돌아가서 함대도 규합하기 전인데, 이렇게 모든 의도가 무위로 돌아가고, 그 죄도 무거운 철추가 되어 몸을 짓누른다.
주변의 병사들이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이 자는 이제 끝났어.
설령 우주를 창조한 신이라 하더라도, 지금의 그를 구해주지는 못할 것이다.
“바보, 바보, 이 바보 천치!!”
품에 달려든 세리사는 힘껏 그 가슴을 쳤다.
다시 보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얼굴이 쑥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나타난 순간, 그녀는 체면이고 뭐고 다 벗어던졌다.
세리사는 기쁘고도 서럽게 울고 있었고 유키나는 키득대며 웃었다.
“정말, 바퀴벌레보다 더 끈질긴 사람이에요.”
“좀 좋은 표현은 없어? ...바퀴벌레라니...?!”
칼스의 항변에 좌중에서 폭소가 터졌다. 그것은 안도와 기쁨의 웃음이었다.
아직도 통곡하는 세리사를 떼어놓으며 칼스가 말했다.
“이제 그만 하세요. 전하. 전 멀쩡하잖아요...”
유키나가 세리사에게 손수건을 주는 사이, 칼스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케네리스, 쿠라프, 도트로이, 야베타, 비로르.
그 모두가 자신이 신뢰하는 장수들이다.
“이제 적에겐 뒤가 없다. 조만간 미쳐서 쳐들어올 테니, 이를 대비해야 한다. 함대 준비는...?”
쿠라프가 대답했다.
“전 함대는 임전태세로 대기 중입니다. 병사들도 사기충천하고요. 투항을 가장한 비겁한 함정. 이건 절대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마음은 고맙지만 이번엔 무인함대로 간다. 상대는 무인함대가 대부분일 터. 쓸데없는 희생은 피해야지.”
“네...? 하지만...”
“일시적인 감정보다는 미래를 생각해야 해. 이제부턴 단 한 명도 허투루 잃을 수 없어.”
도트로이가 모처럼 입을 떼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공녀의 건은 솔직히 너무 의외...”
“그만...!!”
칼스가 엄하게 말했다.
“이 건에 대해서 입에 올리는 것은 엄히 금지한다.”
질 수 없다는 듯 유키나가 거세게 항변했다.
“설마, 그냥 용서하실 생각이신가요?”
“누가 용서한다고 했나...?”
분노의 탄식에 유키나는 입을 다물었다.
가장 슬프고 어이없고 황당한 사람은 바로 그다.
“그러나... 그녀가 나 아닌 누군가의 손에 죽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그러니 반드시 살려서 내 앞에 데려오라. ...이것은 군령이다...!”
“...네...!”
다수의 군례가 에워싼 가운데 칼스가 선언했다.
“자, 이제 최후의 전투를 준비하자.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사람은 살아가야 한다. 모두 최후의 힘을 다해주기 바란다.”
“반드시! 승리하겠습니다.”
한편, 세페토스로 귀환한 바네타는 그의 함대와 합류했다. 오베르의 1개 준함대 전력도 있으니 그 대비를 해야 했다.
하지만 우려와는 달리, 세페토스는 어떤 경계나 적대적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바네타는 의심에 빠졌다.
오베르는 아나이트 원수의 심복 중의 심복이다. 전력 차는 크지만 도전하지 않을 겁쟁이는 아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 엉성한 경계는 뭐지?
하지만 사령부에 들어선 바네타는 몹시 당혹했다. 아나이트 원수의 죽음을 접한 오베르가, 이미 권총으로 자살한 것이다.
평소 명필이기도 했던 그의, 허공의 란포르를 이용해 손으로 쓴 유서는 아름다운 글씨의 향연이다.
하지만 그 내용은 신랄했다.
‘나는 아나이트 원수를 아버지처럼 따랐다. 그리고 그 분의 평소의 말씀, 나라를 위하고 신민을 보호하는 군의 역할에 깊이 공감하여, 반역의 오명을 감수하고 여기까지 왔다. 그러나 이제, 주제도 모르고 생각도 없는 자의 어리석은 마수(魔手)에 원수께서 돌아가셨다.
나 역시 함대를 이끌고 흉수(兇手)와 싸울 수도 있지만, 함대는 황제의 손발이며 제국의 전력이자 국민의 재산이다. 병사들 역시 누군가의 아들과 딸. 결코 개인감정에 의해 함부로 소모해서는 안 된다.
이에 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 돌아가신 아나이트 각하의 뒤를 따르며, 한때 함수를 나란히 했던 동료들끼리 싸우는 우를 범하지 않고자 한다. 내 함대의 암호는 내가 파괴했으며 어느 누구도 사용하지 못할 것이다.
그대 흉수여. 그대는 군인의 마지막 긍지까지 저버렸다. 그대의 어리석음은 흉폭하고 더러운 이름을 만고에 전할 것이다.
하지만 일말의 양심과 우행(愚行)의 자각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지금이라도 스스로 목숨을 끊어 조금이나마 죄를 갚기를 바란다.
그대 흉수는 잘 생각하여, 더러운 이름을 조금이라도 씻기를 부디 바란다. 이는 한때 동지였던 그대에의 마지막 전우애다.’
더불어 한 마디가 더 써져 있었다.
‘추신 : 이 개새끼야.’
바네타는 망연자실했다.
이제 자신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다. 반역자로 잡혀 목이 베이느니 자신이 몸 담아왔던 이 함대에서, 이 함교에서 죽는 길 밖에 없다.
아나이트 원수의 암호가 있었지만 오베르의 함대는 이제 쓰지 못한다. 자살 전, 이미 휘하 함대의 영자두뇌의 기능을 모두 삭제해버린 것이다.
저것들은 그저 고철에 불과하다. 그리고, 남은 함대 7천여 척으로 2만이 넘는 정부군을 상대해야 한다.
비로소 마지막을 직감하면서,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문 바네타는 주변을 자동경비로 둘러쳤다. 이제는 부하들도 믿을 수 없었다.
이윽고 주변은 붉게 물들였다.
마치 그의 미래처럼.
수고하셨어요.
- 작가의말
많이 길어졌군요. 일단 바네타 개객끼 해봐. <- 딱 이거고... 아미에의 속셈은 그런 셈입니다. 자신이 죽어서 얻을 그의 이득과, 자신이 살아서 남게 될 그의 손해를 잰 셈이고, 아버지에게 동정표를 주고 뻘짓을 한 반역자에게 오명을 씌우는... 하지만 그 대가는 자신의 씻을 수 없는 오명이죠. ...바보같은 여자네요.
...또 비극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작가도 개객끼~?) 다음 파트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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