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장. 대전(大戰) : 모함(母艦) 대 모함. (3)
한 권이 끝날 때, 가슴에 남는 글이 되길 바랍니다.
Ⅲ
“구슬놀이를 본 그 때 생각한 거야. 굴러오는 구슬을 어떻게 막을까. ...도랑을 파면 어떻게 될까?”
유키나에게 최초로 계획을 말했을 때, 그는 과거 학생시절을 떠올렸었다. 어느 공원에서 우연히 마주친 아이들의 구슬놀이. 그때 그는 이것이라고 직감했다.
적이 달려오면 바로 직전에 초공간 게이트를 열고, 대신 상대 모함이 들어가게 하면 그걸로 끝. 그러기 위해서는 무조건 상대의 돌진이 선행되어야 하고, 또한 아슬아슬한 거리까지 끌어들여야 한다.
말로는 무척 쉽지만, 타이밍이 엇나간다면 작전은 실패하고 아파켄을 잃을 수 있었다. 바라던 완벽한 타이밍에 시행시켜준, 샹테르 정제독의 담력과 지휘 능력에 그는 크게 감사해야 했다.
무척 획기적인 방법이었지만, 그가 채택한 것은 다른 이유도 있었다. 무심하게 아무 힘도 안 들이고, 너무나 간단한 방법으로 비웃어가면서 모함을 처리한다. 이것으로 상대에게 최대의 정신적 충격을 줄 수 있다.
이미 반란군은 꿈도 희망도 모두 잃었다. 이제는 자살적 출격이나 그냥 굶어죽는 수밖에 없겠지. 먼 우주로 도망친대도 그건 굶어죽는 장소가 변경될 뿐이다.
다만 아나이트 원수의 수완은 보통이 넘었다. 무인함대를 서슴없이 던져주는 바람에, 추격에 제동이 걸려 완전히 숨통을 끊어놓을 기회를 놓쳤다.
역시 노장은 그냥은 당하지 않았다. 당하지도 않을 것이다.
조만간 운명을 걸고 전군을 모아 대적해 올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는, 비로소 이 내전을 끝내어 그녀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을 터.
차츰 들뜨는 기분을 가라앉히려 그는 무척 노력했다.
한편, 토성 궤도로 도주한 반란군은 경악과 탄식을 크게 쏟아냈다. 1만 7천척이 넘었던 함대의 절반이 사라졌고 투입한 총병력 87만중 40만이 전사했다. 또한 브제티를 잃었고 다수의 상급지휘관도 전사했다.
무엇보다 뼈아픈 것은, 일거에 역전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비장의 수단이, 그야말로 별 힘도 안 들인 대응책에 허무하게 사라진 것이다.
두 모함을 잃은 이상 보급의 문제도 두드러진다. 가뜩이나 부족한 폭뢰와 탄도체를 거의 다 써버린 탓에, 다음음 싸움부터는 먼저 얻어맞고 시작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는 부품이 없어 수리를 하지 못하는 함정도 발생했다. 신규 함정의 충원은 전혀 없고, 남은 식량도 2개월 어치에 미치지 못했다. 참패를 당한 병사들의 패배감, 그리고 반대급부로 상승하는 상대의 사기. 정신적인 손해는 차마 말하지 못한다.
남은 함대는 고작 8,500여 척. 굶주리고 상처 입은 패잔병으로, 이제 보급도 충실하며 사기충천한 2배 이상의 적군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
아나이트 원수는 이미 직감했다.
자신들은 이제 패배했고, 반역자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며 더 이상 역전의 방법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미에. 너는 대단한 남자를 골랐고...
그 손에 아버지는 죽을 거란다...
그는 한숨만으로도 우주를 뚫을 듯이 크게 탄식했다.
목성 궤도에서의 승리와 반란군의 패주, 그리고 이어 브루와 차오지를 파괴했다는 승전보는 기쁨이었지만, 이어 많은 사람들을 탄식케 했다.
정부군의 함정 손실은 1천에 못 미쳤지만, 정수를 채워 운용한 손실이기에 사망자는 10만에 육박했다. 로사의 전황분석 결과 상대도 40만을 상실했다.
이것만으로도 전 국민의 3%다. 앞선 손실까지 합치면 현재의 전사자는 거의 100만에 육박하는데다, 그 대부분이 20대에서 50대 사이의 한창 때다.
이는 인구의 대대적인 손실이자 세대 간의 단절도 의미한다. 부모를 잃은 어린아이에, 자식을 잃은 늘그막의 부모가 그득할 판이다.
한번 지펴진 증오의 불꽃은, 쉬이 사그라지지 않고 항상 새로운 탈 것을 필요로 한다. 이번에도 그랬다.
승전의 기쁨도 잠시, 대규모 전사 소식에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던 세리사에게 날아든 보고는 그녀를 몹시 경악하게 했다.
비보가 전해진 아침이 되자마자, 좌현왕궁 앞에 시위대가 나타났고 점차 수가 늘어났다.
저들의 요구는 단 한 가지, 그의 연인이 대중 앞에 나와서 아비의 잘못을 사과하고 죄를 받으라는 것이다.
사태는 일촉즉발이었다. 왕궁의 경비 따윈 성난 시위대에겐 분명 역부족일 것이다.
“여론이고 뭐고 이건 안 됩니다.”
항상 유순했던 황태녀는 보기 드물게 화를 내고 있다.
“제국의 법정신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합니다. 애당초 칙명으로 포고한 내용입니다. 아나이트 아미에의 죄는 전혀 없다고요. 그런데도 이런 요구를 해요?”
도로프 경찰총감은 화면 너머에서 식은땀을 흘렸다.
“그게... 물론 법은 그렇습니다만, 다들 가족이나 아는 사람들을 한 명 정도씩은 다 잃었다는 겁니다. 이 분노는 쉽사리...”
“그래서 그 분풀이로, 그 가족이라도 해치겠다? 이게 어느 나라의 어느 법전에 적힌 것인가요?”
“하지만... 숫자가 심상치 않습니다. 게다가 여론이 급격하게 나빠져서...”
아이러니하게도, 칼스가 이기면 이길수록 아미에의 입지가 줄어들어간다. 좌현왕에 대한 칭송이 늘어날수록 반역자 일족에 대한 증오는 늘어났다.
세리사는 거듭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절대 안 돼요. 다름 아닌 좌현왕... 황족의 약혼녀에요. 이것만으로도 분풀이로 건드릴 대상이 아닙니다.”
“하지만 강제 해산하려면 여론이...”
아침부터 모여든 숫자만 무려 3만에 육박한다면, 오후에는 훨씬 늘어날 것은 자명하다. 재빨리 해산하지 않으면 걷잡을 수 없다.
원칙대로라면 칙명을 어긴 죄인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전사자의 가족이니 강제해산이나 구금은 불가능하다. 그리 한다면 가혹한 여론은 더 심각해진다.
사람은 사람을 부르고 이야기는 퍼져간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는 보통은 좋은 방향으로 흐르는 경우가 없다. 누가 불씨라도 당긴다면, 최악의 경우 왕궁이 침범당하는 경우도 생긴다.
제이낙도 문제이다. 누군가 함부로 접근하면 베어버리는 것도 거리끼지 않을 터. 만약 다치는 이라도 나온다면 그때는 자신도 막을 방법이 없다.
세리사는 일어섰다. 더 늦기 전에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떻게든 수습해서 그의 그녀를 지켜야 한다.
그렇지 못한다면... 나는 그를 볼 면목이 없다.
수행원은 제이낙 두 사람, 발이 느린 시녀는 걸림돌이다. 이미 차분히 모양새를 잡아서 걸을 틈도 없다. 세리사는 두 궁전을 잇는 지하철의 계단을 날듯이 뛰어올라 지상으로 향했다.
높지 않은 담장에는 사람들이 빼곡하게 붙어 있다. 정문의 자동 경비기계들이 쉬지 않고 경고음을 울리며 사람들을 막아서고 있었지만, 사람들의 웅성임 속에 울음소리와 통곡소리가 지옥 밑바닥처럼 섞여있다.
...다들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겠지.
물론 그들도 책임이 없고 아미에도 책임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었으며 아무도 죽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어찌해야 하나. 문득 세리사는 과거를 거듭 곱씹었다.
예전에 정치에 대해 논할 때 칼스가 말한 것이 있다. 사람들의 그런 분노는 위선에 가깝다고.
물론 세리사도 의문을 표했었다.
“왜? 용서하기 힘든 죄를 앞에 두었을 때, 사람들이 화내는 것은 당연한 거잖아. 그건 사람의 본성이고...”
“죄는 미워해야 해. 하지만 사람을 함부로 미워하면 안 돼. 사람은 고쳐 쓰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타인의 위에 서는 이는 결코 그를 인정해선 안 되는 거야.”
“...어째서?”
“사람은 고치지 못한다? 그럼 사법이 왜 필요하냐. 감옥도 필요 없고 형량도 필요 없어. 사형과 무죄. 그 양자만 있으면 족한 거 아니냐.”
칼스는 불쾌한 듯 말했었다.
“엄벌주의는 일견 옳아 보여. 하지만 증오를 허용하는 법은 사적 감정도 용납하는 거야. 법에는 감정이 없어야 해. 그래야 공정하게 세상을 유지할 수 있어. 그런데, 왜 범죄자를 처벌하는 데에만 감정을 처넣어야 하는 거냐. 너 같으면 판결에 감정 넣는 판사에게 재판받고 싶어? 오늘 기분에 따라, 아니면 사람들의 여론에 밀리는, 그런 망가진 저울이 제 역할을 할 수 있겠어?”
“...그야, 그런 건 아니지만...”
“물론 사람들의 분노는 정당해. 하지만 또한 기억해야 해. 법에 감정을 허용하던 시대는 야만의 시대야. 작은 도둑질을 빌미로 어른이 아이의 손목을 자르고, 권력자는 보다 잔혹한 형벌을 대중에게 내보여 통치의 불만을 잠재우지. 하지만 잔혹한 형벌은 사회를 경직시키고, 그 영향은 결국 독재와 폭정으로 돌아온다고. 엄벌 좋아하는 대중은, 언젠가 반드시 독재자와 폭군을 허용하게 된다고. 작은 범죄는 한 사람을 죽이지만, 그릇된 대중의 분노는 사회 전체를 차츰 시체로 만들지.”
그는 몇 번이고 단호하게 말했었다.
“물론 분노를 풀지 못한 대중은 통치자를 원망하겠지. 하지만 통치자가 그에 편승하는 순간, 싫어도 폭군의 길을 걷게 마련이야. 왜냐, 열 명의 도둑 틈에 정적 하나 끼워 넣어 간단하게 처리하는... 이건 권력자에겐 큰 유혹이거든. ...그러니 명심해 둬. 정해진 법을 넘어서는 처벌을 허용해선 안 돼. 대중의 분노에 편승해서도 안 돼. ...오랜 세월, 권력자의 폭정과 자의적 법해석에 시달려온 인간이다. 이제야 겨우 벗어난, 수틀리면 사람 목을 잘라대는 시대로는 결코 돌아가선 안 되는 거야.”
물론 그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당장 불안하고 힘든 것을 풀려고 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자기 이웃집에서 일어나는 범죄를 욕하지만, 법 이상 처벌하라고 말하는 자신이 더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은 절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저기 있는 수많은 사람들도 아마 그럴 것이다. 자신이야 옳다고 생각한 칼스의 논리라도, 성난 민심은 그렇게 설득해도 먹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물론 성의로 대하겠지만, 그게 안 먹힌다면 권위로라도 미는 수밖에 없다.
아직 좌현왕궁에 직접 침입하려는 간 큰 사람은 없지만, 궁 안에서 시야에 닿는 부분이라면 어디든지 사람이 있었다. 아미에도 보고 있을 것이다.
아미에를 먼저 만날까 아니면 군중부터 정리할까. 잠시 고민하던 세리사는 군중부터 말려보기로 했다.
자신 때문에 황태녀까지 찾아왔으니 아미에가 패닉에 빠질 확률도 있다. 죄책감과 황망함에 스스로를 성난 군중에 던지는 사태만은 막아야 한다.
몰려든 군중을 안절부절 훔쳐보던 몇몇 시녀들이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전하...?!”
“인사는 됐어요. ...언제부터 이랬죠?”
지위가 높은 나이든 시녀가 대답했다.
“폭풍의 별(木星) 결과가 알려지고, 오늘 아침부터 몰려들었어요. 그리고 분위기가 자꾸 험악해져서...”
잠시 망설였지만 세리사는 가슴을 폈다.
“내가 나갑니다. 정문을 여세요.”
뭇 경악에도 그녀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요. 저들이 나까지 어찌하지는 않을 테니까.”
엄중하게 닫혔던 문이 스스로 열리고, 이어 나온 사람을 확인한 사람들은 일순간 멍해졌다.
정오의 태양 앞에 나타난 그녀에, 조금 전까지 격노하던 이들이 어느새 뒷걸음질을 쳤다.
“황태녀...?!”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수만 군중이, 이내 마치 파도치듯 한쪽 무릎을 꿇었다.
조금 허리를 굽혀 인사한 황태녀. 영자력으로 성대를 조정한 그녀의 목소리는 맑고도 멀리 퍼졌다.
“여러분들이 이러시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만, 엄연히 법과 칙명의 위반입니다. 물러가시기 바랍니다.”
“하오나...!!”
가장 앞줄에 서 있던, 생애 막바지를 코앞에 둔 듯 아주 늙은 노인이 입을 열었다.
“저희는... 이대로 갈 수가 없습니다.”
세리사는 아버지보다도 훨씬 나이가 많은 노파를 바라보았다. 몹시도 초췌한 그녀는, 멀지 않은 죽음보다 더욱 짙은 슬픔에 절어 있었다.
“저는 이번 전투에서 아들을 잃었습니다. 그 애에겐 아내도 아이도 있었어요. 그 뿐인가요? 이 사람은...”
바로 옆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
“딸을 잃었어요. 그것도 둘 다. 한 명은 좌현왕 전하의 휘하에 있었고 한 명은 반란군에 있었습니다. 이젠 어린 손녀 하나만 남았습니다...!!”
이어 뒷줄의 누군가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저는 아들과 손자가 적 진영에 있습니다만,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전사자가 그렇게 많은데, 그 안에 끼지 말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몇몇 사람의 탄식과 하소연. 그것이 군중의 애원과 항의로 확대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조용히...! 아리칸 앞이오...!”
그래도 경우가 있는지 몇 사람들이 크게 외쳤다.
덕분에 조금 소동이 잦아들었지만, 생각 이상 엄청난 증오와 원망에 세리사는 잠시 기가 질렸다.
“저는...”
다시 용기를 낸 그녀는 똑바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공녀가 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딸로 태어난 것이 죄가 된다면, 태어난 사실 자체가 죄가 된다면... 그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그녀가 죄가 없다는 것은 여러분이 더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무슨 잘못을 혹시 저질렀을 때, 자신의 죄 때문에 자기 자식이 다치는 것을 용납하실 건가요? 그게 바르다고 생각하시나요?”
라피스는 토오르의 딸로 태어난 탓에 목숨을 잃었다. 지상인으로 태어난 죄로, 내 품을 거쳤던 그 아기는 어머니와 더불어 목숨을 잃었다.
“저는 아이를 가져보진 못했습니다만, 우리들에게 있어 아이들이 그런 하찮은 존재인가요? 그녀도 그런 존재입니다.”
하지만 아직 부족하다. 사람들이 다시 소리쳤다.
“말씀대로 우리 자녀들도 그런 존재입니다. 좌현왕 전하의 악혼녀라고, 그 아버지에게 죽은 우리 자녀들의 존재가 부정당해야 합니까?”
“하물며 저 여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습니다.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면, 응당 국민들 앞에 나와 아비의 죄를 빌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저 안에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이해가 가지 않잖습니까.”
“어째서 그런 여자 따위를 이렇게 비호하시는지...!”
“그런 여자? 말씀을 삼가세요!”
세리사는 화난 목소리로 외쳤다.
그런 여자라니. 그녀를 선택한 칼스까지 욕보이는 것만 같다.
“지금 하신 그 말씀을, 최전선에서 싸우고 계신 칼스 전하께도 하실 수 있습니까? 그 분이 지금 누굴 위해,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지도 그냥 잊자는 겁니까?”
황태녀가 분노하자 사람들은 움찔했다. 세리사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분노에 분노를 들이밀 수는 없다.
“죄 없는 이를 화풀이로 해칠 수는 없습니다. 이건 조정과 법의 입장일 뿐만 아니라 제 입장이기도 합니다.”
가장 먼저 외쳤던 노파가 소리쳤다.
“그렇다면 끌어내어 고개라도 숙이도록 해 주십시오! 그 꼴이라도 보지 못한다면, 저희들도 결코 이 자리를 떠나지 않을 겁니다.”
세리사는 앞이 캄캄했다. 역시 말로는 설득해도 힘들 것이다. 하지만 성난 군중 앞에서 그녀를 던져준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무엇보다 그에게 부탁받았다.
솔직히 유혹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저 안에 있는 여자는 연적이며 방해꾼이다.
말로만 들었어도 몹시 실감났고, 직접 마주치니 엄청난 압력으로 다가오는, 이처럼 성난 군중에 교묘히 밀려버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렇게 되면 내 앞날은 또 다른 가능성을 가질 수도...
순간 그녀는 내심 몸서리를 쳤다. 엄청난 혐오감이 스스로를 두들기고 후려갈긴다.
아미에 하나도 마음으로 감싸지 못한 주제에, 나는 그가 들어올 공간이 충분했다 생각한 건가?
...이런 못난이 같으니...!
문득 터무니없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결심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어금니를 물었다.
비록 수치겠지만, 아미에와 그를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잠시나마 비겁했던 내게 내리는 징벌이기도 하다.
“떠나지 못하신다. 그러면... 저도 할 수 없네요.”
세리사의 말에 다수의 사람들이 눈을 빛냈다. 기뻐하는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이제 그 빌어먹을 여자를...?!
하지만 그들의 예상은 완벽하게 빗나갔다.
부지불식, 세리사의 무릎이 꺾이면서 땅에 닿았다. 그녀의 팔과 머리도 깊이 숙여졌다.
무려 차기 황제가, 자신의 백성 앞에서 굴종의 예를 취한 것이다.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이런 일은 없었다.
경악의 탄식과 함성이 곳곳에서 일고, 황송함에 이기지 못한 사람들이 차례차례 엎드렸다. 몇 명은 너무 놀란 나머지 오히려 일어서기까지 했다.
엎드린 세리사는 목소리를 높여 말을 이었다.
“여러분들이 가실 때까지, 저도 이렇게 있을 겁니다.”
고개를 들지 못한 노파가 황망히 소리쳤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아리칸께서...어째서 저 여자를 위해서... 이런 수모를 감당하시나요...!!”
“그녀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대신해서 용서를 비는 것도 아니에요.”
비록 자세는 비굴했지만 목소리는 전혀 비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척 단호하고, 그리고 간절하기도 했다.
“저를 위해서에요...!! 그리고 여러분... 장래의 제 백성을 위해서죠...”
“...무슨...”
“왜나하면....! 저는 죄를 미워해도 사람을 미워할 수는 없어요. 황제가, 누군가의 위에 서는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면... 그 권력과 지위로 미워하는 사람을 부당하게 해칠 날이 올 수 있어요.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여러분들에게 부탁하는 거에요...!”
이것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엎드린 채 서로를 확인하는 웅성거림이 요란하고, 누군가는 혹시나 싶어 고개를 들다가 다시 엎드려버렸다.
미묘하고도 어색하고 황망한 대치가 꽤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꽤나 시간이 흐른 후, 비로소 앞줄의 노인들이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주고받았다.
마침내 노파가 긴 한숨과 탄식이 섞인 말을 내뱉었다.
“일어나세요, 전하. 저희들이... 물러가겠습니다...”
하지만 세리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숙여진 머리 아래에서 잔잔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러분들이 돌아가시면... 그때 일어나겠습니다...”
“그러시면 저희들이 더 물러가지 못합니다. ...부디 고개라도 들어 주세요.”
그제야 세리사가 조금 고개를 들자 노파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표정은 말한다. 이 체념과 함께 증오는 더 깊어졌다. 결과적으로 저딴 여자를 위해서, 아샤르의 황태녀가 전례없던 행위를 해야 하지 않았던가.
이 현실은 용납하지 못한다. 앞으로도 말이다.
“저희는 물러갑니다. 아마 다시 오지도 않을 겁니다. 그러나 안에 있는 저 사람은, 비록 좌현왕께서 인정하셔도 저희는 왕비로는 인정하지 못합니다. 좌현왕께서 사랑하셔도 저희는 사랑하지 않을 겁니다. 그것만은 전하께서도 어쩌실 수 없으실 겁니다.”
세리사는 가슴이 아팠지만 그들을 탓할 수도 없었다. 그저 오늘의 슬픔이 내일은 조금 잦아들어, 부디 최악의 사태로만은 가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아미에의 신변은 보호할 수 있었으니 이걸로 됐다. 부황이나 칼스는 화도 낼 것이고 어이도 없을 테지.
그래도 수모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미에를 미워하기로 말한다면 자신만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그가 자신을 택하더라도 그 사랑을 받을 자격도 없다.
질투와 어긋난 증오에 빠진 자신을 용납할 수도 없다. 그것에 비하면 이런 건 사소하다.
그녀는 몇 번이고 자신을 설득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가시는 길이 편안하시기를...”
황태녀가 인사하자, 뭇 사람들도 고개를 숙여 화답하고 뿔뿔이 각자의 길로 흩어졌다.
홀로 화를 참으며 성큼성큼 걷기도 하고, 서로 의지하면서 슬픔을 달래기도 하면서, 그들은 유령처럼 멀리 사라졌다.
수고하셨어요.
- 작가의말
정해진 법과 국민감정이 충돌하는 경우는 많습니다만... 우리는 한 때 욕하고 곧 잊어버리는 편한 방법, 민주국가의 시민으로는 무척 게으른 방법을 선호하기 마련입니다. 하물며 신민에게 책임이 훨씬 덜한 군주정은 더하겠죠. ‘네가 당하면 그런 말이 나오냐’ 라는 논리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당하지 않은 이도 그렇게 합니다. 쉽기도 할 뿐더러, 범죄에 대한 증오와 공포를 빠르게 해소하고 가장 쉽게 마음 속의 정의감을 충족시킬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렇게는 바뀌는 것이 하나도 없죠.
이제 이 권도 절반 지나갑니다. 덥기도 덥고 3부 비축분이 생각보다 안 쌓여요. 클났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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