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장. 엇갈린 인연. (3)
한 권이 끝날 때, 가슴에 남는 글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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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비어있던 옆자리에 서슴없이 앉더니 손가락을 가볍게 퉁겨 주의를 환기시킨다. 아미에는 흠칫했다.
“...누구...?”
대답대신 칼스는 선글라스를 조금 내려보였다. 빠르게 상대를 알아본 아미에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왕세자 전하...!”
“쉿... 일어나진 마시고...”
그는 묘한 승리감을 느꼈다. 드디어 이 동상 같은 여자를 놀라게 했다.
“다시 뵙네요.”
“...네.”
불편한지 그녀의 어깨가 들썩인다. 혹시 모를 도망을 방지하고자 칼스는 재빨리 말했다.
“이야기는 다른 사람에게 들었습니다. 여기 계신 이유와... 그리고 조금, 아니 꽤 곤욕이시라고.”
흑청색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리는 것 같더니, 그녀는 다시 고개를 숙여버린다.
“그다지... 곤욕은 아니에요.”
“따로 도울 일은 없겠습니까?”
“없어요. 그보다 지금 같이 있는 것이 눈에 띄면...”
주변을 곁눈질하는 아미에는 역시 불안한 듯 했다.
“그렇겠죠. 하지만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는데요?”
“준제독이십니다. 일개 사무관과 같이 있다면... 이제부터라도 눈에 띄지 않을까요?”
“일어나는 게 돕는 건가요?”
하지만 의외로 아미에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제가 오라 가라 할 수 있는 분이 아니잖아요, 그리고... 딱히 싫진 않으니까, 편하신 대로...”
선글라스 안이지만 칼스는 눈을 크게 떴다.
어쩌면 처음으로 들은 본심이 아닐까.
하지만 그게 단순히 이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칼스 본인을 이야기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뭐가 싫지 않다는 겁니까.”
그녀는 대답은 없었지만, 너무 노골적인 질문이 아니냐는 듯 이미 쏘아보고 있었다. 조금 놀려줄까.
“뭐, 저도 딱히 싫진 않습니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조금 뜸을 들이는 품이, 아마 같은 의미로 생각하고 있겠지.
서로 잠시 말이 없었지만 칼스가 다시 물었다.
“저번에... 재미있었다고 말씀하셨죠? 그러니까, 딱히 불편하지 않고... 그랬다고.”
“...네.”
“신기하네요.”
“...무엇이... 말인가요?”
“솔직히 말하자면, 신분 때문에 저를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공녀도 처음에는 그랬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제 앞에서 주눅이 들지 않은 점은 높게 평가합니다. 그 때도, 지금도 말이죠.”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칼스는 다시,
“입장을 이야기하자면, 황족인 저희는 누군가와 편하게 이야기할 경우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항상 시선을 받고 발언은 주목되지요. 그런 만큼 편안하게, 대등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존재는 환영하지요. 지위나 신분이 아닌, 사람 대 사람으로 말이죠.”
“그래서... 싫지 않다고 하신 건가요? 그냥 재미로?”
놀리는 건 조금만 더. 한계까지 가보자. 칼스는 유혹을 참을 수 없었다.
아미에는 다소 망설이며 말했다.
“저는... 원래 성격이 이래서요... 이해가 가지 않아요. 제게 무슨 재미를 느끼신 건지...”
“원래 성격이 어떻다는 겁니까?”
“무뚝뚝한데다 편한 사람이 아니어서요. 그래서 친구도 아주 적고... 그런데도 빚 운운 하시고, 또 두 번이나 이렇게 말을 걸어주세요. ...이해가 잘 가지는...”
“글쎄요.”
이 여자를 환하게 웃게 만들고 싶었다고 몇 번은 생각했지만, 자신이 왜 그런지 이해하지는 못했다. 뭘까...
“굳이 말하자면, 처음부터 원인을 찾을 수 있겠죠. 라피스를 맡겼을 때부터.”
의아한 반문의 시선에 칼스는 빙긋 웃었다.
“왕녀를 맡겼음에도 무리 없이 안고 다니고, 왕의 자리에 합석하고, 나중에 선물을 보내도 거부하고, 이후의 만남에서도 자기 자세를 잃지 않는, 이게 과연 보통 사람일까요? 상당한 배짱과 강단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성격의 문제... 라고 생각해요. 그냥 저는 공부만 좀 했었지... 사회생활은 좀 약해서...”
“그래서 흥미가 조금 생긴 겁니다. 저는 공녀 같은 사람을 한 사람 알고 있습니다. 그 애도 무척 흥미롭죠.”
칼스는 측근 중 한 사람을 생각했다.
아비에르 리비. 간부학교 10년 내 최대의 수재이자, 칼스를 차석으로 밀어버린 동갑의 여자다.
간부학교 입학 시 만점이라는, 그리고 동갑이라는 믿기 힘든 사실을 확인하러 칼스는 그녀를 만나러 갔었다. 그런데, 약간 주근깨가 남은 수수한 그녀는, 붉게 물든 뺨이 아니라 경쟁심을 담은 날카로운 눈으로 왕세자를 바라보았다.
덕분에 순간 칼스는 말해버렸다.
“네 머리가 필요해. 무척 탐이 나거든.”
그렇게 공부회에 끌어들였었고, 그녀가 비서성(秘書省)의 관료로 들어간 이후로도 연락은 가끔 하고 있다.
그리고, 머리는 무척 마음에 드나, 조금 더 미인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바가 아니었다.
“본인을 너무 과소평가 하시는데, 저랑 동갑인데 사무관. 보통은 임관 5년 정도에 이르러야 하는 겁니다. 뭐가 평범하다는 거죠?”
“아버님의 후광이라고 생각하진 않으세요?”
“군이 그렇게 무른 조직입니까? 그러니 생각보다 똑똑하고 강단 있는 사람일 터. 제가 공부회에서만 사람을 모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인재로도 괜찮다고 생각했죠. 그러니 충분히 흥미가 갑니다.”
그녀는 다시 잠시 생각하는 듯 했다.
“전하께서도... 제게는 흥미로운 사람이에요.”
“...왜요?”
아미에는 조금 씁쓸한 표정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저란 여자는, 무뚝뚝하고 말도 없고 그저 공부벌레 정도. 아니면 아버님의 후광만 생각해요. 하지만 전하는 저를 그렇게 가벼이 봐주지 않으시니까... 그 점은 감사해요.”
“그건 그 사람들의 안목이 틀린 겁니다. 그럼 사람 대 사람으로 서로 흥미는 어느 정도 있는 거군요?”
이 정도로 말해줬다면 보통은 들떴겠지만, 아미에는 여전히 표정 변화가 거의 없다.
그리고 칼스 스스로도 묘한 것이 하나 있다. 이 여자는 다소 짓궂은 말도 잘 들어주고, 덕분에 꽤 편하다.
하지만 도통 웃지를 않는군. 웃으면 꽤 예쁠 텐데.
아미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인재라면 간부학교에서도 얼마든지 있었잖아요? 거기에 더해서, 그 공부회에는 전하의 취향이 가미되었을 테죠. 어차피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모이는 것이니...”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만난 처음부터 친한 이는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판단한 공녀는, 본인 생각보다는 훨씬 더 부드러운 사람일 겁니다.”
“어째서요? 저는 상당히...”
“왕녀를 깨울까봐, 자신의 불편함과 나중의 구설수도 감수하고 끝까지 안고 있었으니까요. 그저 딱딱한 사람이었다면 어떻게든 모면하려 했겠죠.”
“...감히 하나 더 물을게요.”
“해보세요.”
이 여자에게 말을 이만큼 시킬 수 있는 사람은, 아마 가족 이외에는 나 정도일 것이다. 조금은 뿌듯했다.
“만약... 제가 뭔가 흑심이나 계산이 있어서, 조금이라도 더 왕세자 전하 옆에 있고자 그랬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안 하시나요?”
칼스는 내심 웃었다.
본인도 그리 생각하지 않는 거짓말을 하다니. 아무래도 리비에게는 미치지 못하는가.
“그랬다간 당장 티가 날 걸요? 예를 들어 군령본부에서 저와 처음으로 이야기할 때,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끌려는 의지가 있었다면 그렇게 거부하지 않았겠죠. 왜냐면 제가 그 거부에 마음이 상하기라도 했다면, 아마 앞으로 공녀는 저를 다시 볼 일이 없을 겁니다. 그런 도박은 하는 것이 아니죠.”
“그것도 전부 계산에 들어 있었다고 하면요?”
“공녀는 그렇게까지 머리를 비비 틀 위인은 아니라고 봅니다. 공녀 정도라면 저를 궁중에서 볼 일이 없지는 않을 겁니다. 기회라고 생각하면 그런데서 잡아야죠.”
아미에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아니고, 그냥 우연히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을 뿐일 수도 있잖아요?”
“그런 식으로 하면 끝이 없어요. 요는 저는 공녀가 흥미롭고, 만약 제 눈이 삐었다면 저를 탓할 문제죠. 물론 제가 최근...”
칼스는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긁적거렸다.
“좀 골치 아픈 문제가 있어서, 편하게 대화할 사람을 찾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공녀는 처음에는 대하기 힘들지 몰라도, 장차 충분히 즐겁게 이야기할 대상이 된다고 봅니다만.”
“그래도, 언젠가 황제 다음의 지위가 되실 분이잖아요. 저랑 있는 게 부끄럽다거나, 그런 것은...”
“비록 신분은 갈라져 있어도, 우린 같은 사람입니다. 그걸 부끄러워할 정도로 형편없는 인간은 아닌데요?”
“그러면...”
비로소 그녀는 눈을 내리깔았다.
“이야기 정도라면 언제든지 들어 드릴게요. 다만, 저는 재미있게 이야기를 하지는 못하니... 그저 들어만 드리는 거라면...”
“감사한 이야기네요. 충분해요.”
칼스는 웃었다. 이것으로 인재 하나 더 획득이다.
그리고, 그동안의 호승심이 이제야 좀 채워진 것 같아 뿌듯하기도 했다.
돌아오는 교통편에서 칼스는 결국 자리를 바꿨다. 케네리스 중휘는 웃으면서 기꺼이 바꿔 주었다.
그리고 짧지 않은 시간 사이. 신분이 드러날 호칭은 서로 피했지만, 오히려 대화는 살짝 가벼워졌고 훨씬 편해졌다.
칼스는 잠시 생각했다.
뭇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사회에선 수재인 그도 여자관계에서는 낙제를 면치 못했다. 전화로라도 대화할 수 있는 여자라고는, 공부벌레 리비와 임자 있는 유부녀가 고작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아미에는 새롭고 소중한 친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굳이 계산적으로 말하자면, 앞으로 도피 목적으로 군에 남아 있어야 한다면, 그녀와 조금 엮여있는 것만으로도 삼군사령장관의 호감도 얻을 수 있겠지. 아예 말뚝을 박으려면 괜찮은 조건이다.
...아주 잠시지만 아미에 개인도 생각해보았다.
사실 이 여자가 싫지 않다. 아직은 대화로 한정이긴 하지만 세리사보다 훨씬 편하고, 무엇보다 차분하고 여성스럽다.
아직은 이르지만 그녀라면 괜찮을지도...
하지만 칼스는 금방 마음속으로 부정했다.
우린 이제 3번밖에 만나지 않았어. 난 그렇게 가볍지 않아.
눈에 띄지 않도록 최후까지 저리에 남아 있은 후, 칼스는 팔찌를 낀 손을 아미에에게 내밀었다.
“번호나 교환하죠. 이제 우린 친구가 되었으니.”
아미에도 생각보다 순순히 팔찌를 내밀었다.
팔찌를 밀착하고 간단한 조작만으로 연락처가 상호 기록된다. 칼스가 잠시 눈짓한 바로는, 그녀의 손은 곱고 성격을 대변하듯 손톱도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다.
덕분에 우연인 척 한 번 잡아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물론 그는 참아냈다.
칼스는 귀환인사차 황제를 알현하려 황궁으로 가겠지만, 그녀는 일행과 함께 라므의 군령본부로 갈 것이다.
로비까지 약간 시차를 두고 내린 후 칼스가 인사했다.
“그럼 조심해서 가세요. 다음에 뵙겠습니다.”
“...네...”
꾸벅 인사를 하고 다른 방향으로 가는 아미에.
그 등을 잠시 바라보다 칼스가 어깨를 튼 순간, 누군가의 주먹이 복부를 강타했다.
“읍.”
칼스는 잠시 얼굴을 찡그렸다.
순식간에 전개되는 영자골격 때문에 딱히 아프지는 않지만, 이런 짓을 할 사람은 극히 한정되어 있다.
“잘도 기어들어 왔군요. 오라버니...?”
또래가 입는 평범한 복장에, 모자를 눌러쓰고 알이 큰 검은 안경을 쓴 유키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표정의 분노를 다 가리지는 못했다.
“아프잖아...!”
“맞아도 싸요!”
아무래도 성질이 단단히 났다. 하지만 마주 받아치기라도 했다가는 오늘 저녁 뉴스에 나올 일이다.
황족 두 명이 다투다 우주항을 부숴먹었다면 평생의 수치다. 칼스는 변명하듯 급히 말했다.
“나도 오기 싫었는데, 갈 데가 없잖아?”
“그러면 애당초 그런 짓을 하질 말던가. 게다가 조금도 후회하는 기색이 없네요?”
“왜 내가 후회를 해야 하지?”
“흥. 말은 번지르르하게 잘 해놓고, 결국은 도망간 것 아닌가요?”
“머리를 식히려고 그랬지. 나도 그럴 권리 정도는 있는 것 아냐?”
목소리가 서로 커지려고 한다. 칼스가 급히 말했다.
“일단 나가자. 여기서 이야기 할 것이 아니고.”
유키나는 자동차를 갖고 왔다. 원래는 면허가 필요하지만, 무인이기 때문에 자동조종만이라면 애들도 탈 수 있다. 자동차 면허란 조종을 수동으로 바꾸는 권한이다. 물론 서로 면허는 있다.
“내가 운전할까? 바람이나 쐬지. 어디가 좋을까.”
모처럼의 호의. 하지만 돌아온 것은, 여전히 싸늘한 표정으로 감아놓은 따가운 힐난이었다.
“이야기 도중에 한 대 맞고 사고라도 일으켜서, 교통체계를 엉망으로 만드실 작정이시라면 직접 운전하세요. 전 지금 상당히 화가 나 있거든요.”
“살벌하네. 그동안 얼마나 칼을 간 거야?”
결국 뒷좌석에 같이 앉긴 했지만, 또 맞을까봐 살짝 거리를 둔 칼스가 물었다.
“대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는 거야?”
“그 전에 물을게요. 아까 헤어진 여자, 저번에 라피스를 안고 있었던 그 여자죠? 사령장관의 딸이라던.”
“예리하네.”
“어느새 같이 다니는 사이가 된 거에요? 아니, 그 전에 어떻게 만나게 된 거에요? 불러낸 거에요?”
“그렇게 됐어. 그런데 내가 왜 그런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거지?”
“묻는다면?”
유키나가 엄포를 놓았다.
“대답을 회피하면 상대가 안 되어도 덤빌 거에요.”
“일단은...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것은 아냐.”
칼스가 아미에를 다시 만난 경위를 얘기했지만, 유키나는 거듭 찌푸렸다.
“혹시 아무 여자라도 좋다, 그런 것 아닌가요?”
“말을 삼가는 게 좋아.”
칼스도 같이 얼굴을 찌푸렸다.
“상대에게 실례잖아. 게다가 내가 고작 그 정도였나?”
“평상시의 오라버니라면 걱정이 없죠. 하지만 지금은 제대로 된 눈을 기대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요?”
“왜 무리라는 거야?”
“지금 회피하는 중이잖아요? 최악의 선택으로, 회피할 곳을 찾고 있잖아요? 그게 딱히 공간적인 장소만으로 한정할 수 있을까요? 사람은 어떨까요?”
칼스는 거듭 뜨끔했다.
확실히 도피처가 필요하긴 했다. 어쩌면 아미에에게 조금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사실은 이미 했다.
“오라버니.”
유키나는 타이르듯 말했다.
“이러는 건 전혀 오라버니답지 않아요. 시간이 필요하면 그리 하세요. 하지만 언니를 피해서 그 사람에게 도망간다는 것은, 말씀대로 상대에게도 실례잖아요.”
“딱히 그녀를 연애대상으로 보고 있지는 않은데...?”
“항상 시작은 미약하죠. 그리고 차츰 나아가는 거구요. 그리고 이런 말하긴 그렇지만 그 여자... 한번 봤을 뿐이지만, 그리고 인상뿐이었지만 오라버니 취향에 가까워요. 애교나 그런 것은 없지만 진지한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 그런 인상을 받았는데, 아닌가요?”
“...네가 어째서 내 취향을 단정하지?”
유키나는 흥 하며 코웃음을 쳤다.
“보아온 세월이 있으니 당연하죠. 오라버니는 스스로가 뛰어난 재능이 있고 자부심도 있으니, 남의 도움을 받아 쉽게 가느니 자기 혼자 어려운 길을 가길 좋아하는 사람이거든요. 실제로 그렇게 해왔고, 그걸 이겨낼 때마다 스스로도 뿌듯해하고 쾌감으로 삼죠.”
“...그래서?”
“오라버니가 그런 사람이니, 쓸데없는 동정이나 위로는 달갑지 않을 거잖아요.”
“그게 내 취향이랑 무슨 관계야?”
“설령 오라버니가 울 일이 있어도... 예를 들어 저라면 위로하겠죠. 언니라면 같이 울어줄 수 있을 거에요. 하지만 그저 하소연이라도 꾸준히 들어주면서, 오라버니 스스로 눈물을 멈출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것. 그게 오라버니의 자존심에도 가장 합당할 건데, 그렇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으로 보였어요.”
그랬던가.
유키나의 이야기에 칼스도 어느 정도 확신이 섰다. 자신이 왜 아미에에게 먼저 다가갔었는지.
조용하고 말이 없는 그녀지만, 짓궂고 힘든 일을 말해도 즐겁게 들어주고 말없이 기다려줄 그런 느낌. 그런 게 그녀에게 있었다.
이리저리 시달린 지금의 그가 가장 바라는 것.
“아무데나 웃고 헤퍼 보이는 것보다는, 오히려 입 다물고 있는 것이 사람을 궁금하게 하죠. 노린 거라면 수를 잘 쓴 거네요.”
“그렇게까지 사람을 깎아내리는 것은... 아니 잠깐. 그러면 너는 내가 그녀에게 관심이 있다고 보았어?”
“아니라고 발뺌하지 말아요. 오라버니도 스스로가 모를 뿐이지, 그녀에게 관심이 없었다면 차를 마시자거나 일부러 옆자리에 붙어서 오지 않아요. 무엇보다 오라버니도 연애는 처음이잖아요. 호기심도 있을 나이고, 그녀는 다다가기 편한 대상이니까. 게다가 지금 심적으로도 힘들고...”
칼스는 다시 생각했다.
유키나의 이야기를 계속 듣자니, 아미에에게 느꼈던 여러 이상한 충동이 이해가 된다.
유키나는 여전히 그를 쏘아보며,
“도망친 것은 언니에게 사과하세요. 그 다음에 다시 우리들끼리 이야기를 해봐요.”
“너는 세리사의 편이 아니냐?”
“물론 제 입장에서는 언니 생각을 지지하죠. 더 나은 군주를 받들고 제가 사랑하는 언니가 행복해져요. 한 번에 두 마리 토끼를 잡는데 마다할리는 없죠.”
“거 봐. 내 말이 틀리지 않는...”
“하지만 도망친 것만은 변명할 수 없잖아요. 그리고, 아직 그 계약은 충분히 남아 있어요. 제가 알았다는 것만으로는 파기 사유는 되지 않아요. 약속 정도는 지키라고요. 그 동안은 노력하라고요.”
거듭된 쌍심지에 칼스는 신음했다.
“...알았다. 조만간 동궁에 들 테니... 그렇게 말이나 전해다오. 나머지 이야기는 기회를 봐서 다시 하자.”
제길. 왜 하나같이 나를 못 잡아먹어서 이렇게 난리들인가. ...돌아가서 또 어떻게 하나.
편안하고 즐거운 군 생활은 이리 끝나고, 이젠 머리 아프고 괴로운 사회생활이 기다리고 있구나.
...뭔가 거꾸로 된 것 같은데...?
칼스는 내심 쓴 입맛을 다셨다.
수고하셨어요.
- 작가의말
...주말이라고 해서 나을 것은 없지만 평일 조회수는 더더욱 쥐약. 쓰는 사람도 힘들지만 따라오는 분도 힘든 모양이에요. 아무튼 자꾸만 엮어줍니다. 운명이라 쓰고 작가의 농간임.
4장, 분열의 조짐 편 후반부터는 대략 본 스토리로 들어가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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