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권. 인연(因緣)의 대지> 에필로그 : 정원, 세 번째 만남
한 권이 끝날 때, 가슴에 남는 글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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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와라, 칼스.”
황제의 환영에, 이제는 완연한 청년이 된 왕세자가 웃었다.
“그간 너무 격조했습니다. 용서를...”
“5년만인가? 하지만 바빴으니 이해한다. 잘 왔어.”
그는 군복을 입고 있다. 기본은 검은 색이지만, 옆선에는 삼군사령본부 소속임을 나타내는 붉은 줄이 들어가 있다. 목의 옷깃에는 은빛의 작은 원이 두 개. 중휘(中揮)의 계급장이다.
기동순양함 케이로스의 함장이었던 그는, 오늘 아침 군역을 마치고 예편원을 내었다.
황태자가 아닌 이상, 황족이라 해도 2년의 징병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황족 특례는 준제독(準提督)의 위계를 받아 수십 척의 전대(戰隊)를 지휘할 수 있다.
그러나 굳이 고사한 그는, 간부학교 졸업 후 일반 군무로 2년을 보냈다.
황제는 흡족함을 감추지 않았다.
“이제 정말 다 컸구나. 네 부왕도 자랑스러워하겠지.”
“과찬이십니다.”
칼스는 차석으로 졸업했었다. 그리고, 축하하는 사람들에게 내보인 부왕 토오르의 반응은 ‘그깟 차석 졸업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으흐흐, 으흐흐흐...’ 였다고 한다. 평소에는 농담도 하지 않는 현왕인지라, 이 가벼움은 수많은 사람들을 웃게 만들었다고.
칼스는 ‘백부님이 옮았군요’ 라고 짧게 평했지만, 아버지가 좋아하니 나름 으쓱했었다.
그리 속을 썩인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땅히 눈에 띄게 효도한 것도 아니었으니.
“군복무 완료, 그 축하 및 환영 연회는 따로 준비했느니라. 잠시 쉬고... 짐은 참석치 못하겠지만 왕공족(王公族)이 몇 명 오게 될 테니까... 충분히 즐기거라.”
“그리 하겠습니다.”
“그래. 앞으로는 시간이 좀 있겠구나. 자주 보자꾸나.”
황제는 다시금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연회 장소는 남궁의 모처이다. 지하철을 타고 갈 수도 있지만, 시간도 남고 봄날을 즐길 겸 걸어가기로 했다.
사실은 도중에 만날 사람이 있다. 유키나다.
그녀가 간부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 칼스는 졸업하고 없었다. 그 동안 보지 못했기에, 이번에 짬을 내어 북궁의 한 정원에서 보기로 했다.
...그 애도 많이 컸겠지.
워낙 바빴던 탓에 부모와도 거의 연락을 끊고 살았다. 휴가를 얻기도 했지만 그럴 때도 다른 일에 매달렸다. 그러니 베라도 황궁도 정말 오랜만이다.
...사실 오기 힘든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지만...
큰 연못의 둔치에 그는 앉았다. 모든 것이 인공인 세상. 하지만 그들의 자연은 진짜보다 더 풍부했다.
여름이 멀지 않은 연못가. 물잠자리들이 수련 위를 맴돌거나 작은 개구리들이 울기도 한다. 물고기의 율동이 수면에 거품을 만들고, 그 거품이 다시 태양에 반사되어 무지개를 일렁이게 했다.
그 역시 때때로 뛰는 개구리에 시선을 주거나, 살짝 작은 돌을 던지면서 원형의 물결을 감상했다.
하지만 너무 시간이 남았었나. 팔짱을 끼고 아예 드러누운 그였다. 작은 나비 한 마리가 발끝에 앉더니, 조금 움직이자 팔랑거리면서 날아갔다.
드디어 울리는 작은 발걸음 소리. 조용하고 규칙적인, 젊은 여자의 발소리다.
“늦었어. 어디서 뭘 하다 온 거냐?”
칼스는 누운 채 투덜거렸다.
하지만 좀 이상하다. 기억대로라면, 그 장난스럽고 쾌활한 목소리가 바로 맞받아쳤을 터.
하지만 이 조용한 반응은 기억과 다르다.
의아한 그가 조금 일어나며 고개를 돌렸다. 영자반응은 극한으로 숨겨져 있어 구분을 할 수 없었지만, 이제 보니 명백한 다른 사람이다.
눈에 들어온 것은 발끝, 그리고 조금은 치렁치렁한 치맛자락. 그리고, 어깨를 넘어 몇 가닥 넘어온 플라티나 블론드의 머리카락이 확 띈다.
“안녕... 칼스...”
조금은 수줍은, 하지만 어딘가 자랑스러운 표정. 기대와 불안을 담은 맑은 눈동자가 그를 주시했다.
두 눈을 순간 크게 뜬 그는, 이내 실소하며 몸을 일으켜 풀밭에 앉았다.
“누구시더라...?”
“기억... 안나...?”
“글쎄올시다.”
쓴웃음이 서로 교차했다. 그녀가 낮은 한숨으로,
“정말... 변함없이 짓궂고 못 됐어.”
“...변하는 편이 좋았으려나. ...넌 너무 변했다...”
드디어 일어난 칼스는 양 손을 맞잡아 고개를 숙였다.
“세라비 칼스 카이가,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세리사도 비로소 웃으며 마주 인사했다. 맞잡은 그녀의 손이 다소곳이 모였다.
마치 자신을 보라는 듯이.
오늘의, 지금의 나는 어떠냐는 듯이.
“오랜만이야. 칼스.”
“...그렇네. 오랜만이네...”
몇 발 떨어진 쿄우카는 두 사람을 차분히 살폈다. 지난 몇 년, 품어왔던 의혹을 확인하고 싶었다.
마주 본 두 사람의 표정은 달랐다. 칼스는 평온했지만 쓴웃음을 짓고 있고, 세리사는 수줍은 듯 담담하게, 하지만 행복하게 웃고 있다.
그 광경은 몹시 아름다웠지만, 쿄우카의 가슴을 찢듯이 확신이 스쳐 지나갔다.
“난 또... 유키나인 줄 알았지만...”
칼스는 약간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반가워. 손님을 맞아야 하는 처지라 가봐야 하지만, 장차 이야기 할 시간 정도는 만들지.”
그녀는 가볍게 끄덕였다.
“그래... 다음에...”
“그래도... 조금은 컸구나. 기쁘게도.”
그녀의 옆을 지나치며 그가 속삭였다.
“어디까지나 오라비의 입장에서지만...”
더는 돌아보지 않은 그가 둔치를 따라 난 길로 성큼 올라간다. 보일 수 없는 당혹감이 그 입가에 걸렸다.
세리사 이 녀석. 결국 마음을 바꾸지 않은 것인가.
잘못하면 앞으로의 내 인생은 너무나 고달파질지도.
...지금의 웃음은 그냥 어이가 없어서 나오는 것일 뿐이다. 결코 이 녀석이 내 예상을 넘어서서 깜짝 놀랄 정도로 변하고...
또 마음을 흔들 정도로 사랑스러워서, 그래서 나오는 웃음이 아니라고...
황녀는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대신 격렬히 뛰는 심장을 애써 누르고, 또 그 고동을 다시금 확인했다.
...아아, 이 마음은 결코 변하지 않고, 오히려 더 뜨겁게 달아오른다.
칼스. 당신은 여전하네. 조금 더 반갑게 맞이해줬으면 좋았으련만...
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만족해. 당신을 다시 볼 수 있어서. 그리고...
지금이야말로 나를 당당하게, 자랑스럽게 당신에게 보여줄 수 있어서.
물론 당신은 앞으로도 나를 힘들게 하겠지만, 나는 언제까지나 포기하지 않을 거야. 알다시피 고집 세고 못된... 난 그런 아이였잖아...?
...그러니, 이제부터 각오해...!
왕세자의 거침없는 뒷모습과, 멈춰버린 세리사의 어깨를 번갈아 보던 쿄우카는 거듭 몸을 떨었다.
이젠 알아버렸다. 자신이 키워오고 사랑해온 이 아이가, 그렇게 스스로를 변화시킬 정도로 사랑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그리고, 이 사실이 가져올 엄청난 평지풍파도 말이다.
이것이 칼스와 세리사의 세 번째 만남이었고, 나중에 회상했지만 최고이자 최악의 만남이기도 했다.
그들은 미처 알지 못했다.
지금의 이 만남이, 서로의 인생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주게 될 것인지.
아직 그들은 아무 것도 몰랐다.
수고하셨어요.
- 작가의말
이것으로 인연의 대지 편도 끝났습니다. 지난 권과 더불어 그가 어떻게 세상에 대한 관점을 쌓고, 또한 그녀가 어떻게 그에게 빠져들었는지를 설명하는데 2권이나 써버렸네요. 분량으로는 50만자가 훌쩍~ (작가도 훌쩍.ㅜㅡ)
아무래도 로맨스에 가까워서 식상한 분들도 계셨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그 놈은 멋있어서 그녀가 한눈에 반했다던가, 타고난 재능이 있으니 포부도 크게 가졌다, 그 따위 한 줄 설명으로 끝낼 수가 없었기에 2부의 절반을 두 주인공에 할애했습니다. 두 남녀의 지상행이 이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다음 권 배덕의 창공 편은 1편과 2편으로 나뉘어져 시작합니다. 1부가 평범한 지구인 여자의 생존투쟁기와 신데렐라 스토리에 가깝다면, 2부는 두 사람의 지난 과거, 그리고 각자의 사정을 하나씩 떼어놓고 보면 사소한 것이 어우러져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싸움을 만들 겁니다. 다음 두 권은 그 과정을 그려가겠습니다.
생각만 해도 ...쉽지 않네요. 열심히 가죠.
...그리고 연참 참가는 이제 당분간 보류. 작품 시작부터 거의 나홀로 연참을 했었고... 독자가 적은 만큼 글이 빨리 썩어버립니다. 연재주기 조정 부분은 나중에 공지로 올리겠습니다. 다음권까지의 인터벌은 비슷할 거라고 봅니다만, 제가 병원을 좀 가야 할 일이 있어서... 최대한 빨리 오겠습니다. 그럼 더운 여름 잘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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