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장. 인연의 대지. (3)
한 권이 끝날 때, 가슴에 남는 글이 되길 바랍니다.
Ⅲ
물을 적신 수건으로 조심스레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고 나서, 벗은 옷가지를 포장지로 싸고 자신의 가방에 집어넣었다.
알고 보니 칼스가 가져온 짐의 절반 가까이는 세리사의 것이었다. 돌아가기 싫다고 떼를 쓸 상황에 대비해, 꽤 오래 머물러도 괜찮도록 긴요한 것을 챙겨준 것이 분명하다.
고마움에 가슴이 찌릿하지만 한편 걱정이 몰려왔다. 돌아가면 아마 정결례를 치르겠지. 그렇다면...
“역시 돌아가는 편이 좋지 않겠어? 그동안 체력도 떨어진 판에 몸까지 이러니...”
칼스가 물어왔지만 세리사는 고개를 저었다.
“쿄우카가 많이 챙겨줬고... 괜찮지 않을까.”
“마음대로 해.”
무슨 생각인지 그는 굳이 만류하지 않았다.
다시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길을 떠난다. 로사에 접속한 칼스는 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으니 길을 잃고 헤매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갈 수 있는 걸까.
칼스의 보고를 받았을 아버지는 두 사람이 접촉한 것도, 돌아오지 않는 이유도, 돌아가기 싫다고 떼를 쓴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독촉 같은 것은 없고 칼스도 돌아가자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세리사는 조금 안도했다. 만약 부황이 불같이 화가 났다면 이런 자유는 허락하지 않았겠지. 체면 때문에 그를 보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말머리를 좀 더 붙이며 칼스가 말했다.
“네가 어딜 가든 상관은 없는데, 사람들이 사는 도시는 피하는 게 좋지 않겠어?”
“여기... 도시도 있어?”
그녀의 머릿속 지상인은 원숭이와 차이가 없다. 해저에 돌고래의 도시가 있다고 들은 느낌이랄까.
“당연히 있지. 물론 어제 우리가 만난 종족은, 모든 인구를 합쳐도 우리 도시 하나에도 못 미치는 부족이지. 고작 그 정도 숫자가 광대한 초원에 군데군데 모여 살지. 그래서 그들의 행동만 파악하면 피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지만, 인구 십만 정도의 도시는 지상에도 몇 개씩이나 있어. 이건 피해야지.”
“그거 재미있겠다. 가볼 수는 없어?”
칼스의 멍한 표정은 처음 보았다. 꽤 크게 웃은 소녀는 손뼉도 치고 말았다.
“그렇게 놀랐어? 당신도 그런 표정을 지어...?”
“왜 굳이 사람 많은 도시를 가볼 생각을 하는 거야?”
“나는 베라의 시내도 나가본 적이 없어. 방송 같은 걸로는 봤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많이 있다면 분명 재미있는 것도 많은 거고...”
“여자애들은 다 이런가... 유키나도 그러던데...”
칼스는 투덜댔지만 세리사는 진지했다.
궁 안에 갇히고 우울함 속에서 살아온 나의 세계는 회색, 그 단 하나의 색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다른 색을 칠하고 싶음은 항상 갖고 있던 욕구였다.
지금이 아니면, 이런 자유는 다시 누리지 못한다.
“정말 지상인들의 도시에 가보고 싶어?”
“응.”
“말리고 싶은데...”
“...아무 것도 모르면서...”
“응? 무슨 말이야?”
“이대로 돌아가면 나, 정결례를 치러. 그러면 할 일이 더 늘어나겠지. 물론 서궁 밖으로는 나가겠지만...”
아이답게 부족한 표현을 칼스가 보충했다.
“행동과 운신의 폭은 좁아지고, 정신적인 여유와 자유는 없어진다... 그런 의미야?”
“...응.”
“그래서, 이왕 나왔으니 좀 돌아다니면서 놀고 싶다?”
가출한 주제에 아주 신이 나셨군.
하지만 워낙 갇혀 살았던 아이니 그럴 만도 하다. 칼스는 납득했다.
“그 이외에는 없는 거야?”
“음... 그럼 바다.”
“바다?”
“응. 화면으로는 본적 있어도, 실제로는 본 적이 없어. 그러니까 그것도 보고 싶어.”
소금냄새라든가, 해풍이라든가. 영상이 표현해주는 가짜가 아닌 진짜를 보고 싶다.
화면으로도 압도되는 거대한 크기는, 실제로 보면 더더욱 굉장하겠지.
“비행정으로 올 때 본적이 없어?”
“응. 자동조종에 맡기고 외부화면도 켜지 않았는데...”
“흠... 그런데, 제일 가까운 바다라도 여기서 좀 멀어.”
“얼마나 멀기에?”
“1천 테라프 이상. 걸어간다면 못해도 두 달, 말을 타고 간다 해도 한 달은 걸려. 괜찮겠어?”
“상관없잖아. 구경도 할 겸이고.”
칼스는 한참 생각했다. 심각한 표정이 되기도 했고, 조금은 씁쓸하면서도 웃는 표정이기도 했다. 세리사도 꾸준히 그를 관찰했다.
이 사람, 이렇게 다채로운 표정도 있었나...?
“좋아. 정 가고 싶다면 데려가 줄게.”
“정말?”
이렇게 쉽게 요구를 들어준다. ...별 일이다.
“말만 잘 듣는다면.”
“아이 취급이네...”
“현실적인 걱정이지.”
“아, 그러세요...”
부아가 조금 났지만 데려가준다는 사실은 반갑다. 즐거운 그녀의 표정에 칼스는 내심 쓰게 웃었다.
그가 그렇게 쉽게 허락한 것은 이유가 있다. 일단은 약하게나마 능력자니, 자신이 붙어 있으면 어지간한 사고는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큰 이유. 이 별의 지배자가 될 이 아이가 여기서 뭔가 얻어갈 수 있다면, 내가 얻은 것까지는 되지 않아도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오늘의 너는 내가 지키고, 내일의 너는 내가 받들게 되겠지. 아직은 조금 철이 없고 연약하지만, 그렇게 세상의 때가 묻지도 않았다. 그랬기에 두려워하고 도망친 것이지만... 앞으로 하기에 따라서 나 이상의 눈물을 그들에게 흘려줄지도 몰라. 그렇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나와 내 첫 친구의 길은 달랐다. 그것은 가슴 시리도록 불행한 결과를 낳았지만, 너와 나의 길은 부디 같기를 바라고 있다. 너는 아직 모르겠지만,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바라고 있다.
소원을 들어주기로 마음먹은 것과는 별개로, 칼스에게도 갑자기 보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
이목 그 사람...
전장에서 자신을 보고 웃을 때에는 여유롭고, 병략(兵略)과 사람의 도리를 이야기할 때에는 진지했지만, 샹의 문제에서는 과연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그리고 샹, 그 작은 소녀는 조금은 더 행복해졌을까.
궁금증이 더해지자 길은 정해졌다. 그 이후 가본 적은 없지만 어차피 조금만 돌면 되는 길이다. 세리사의 소원도 들어줄 겸 그들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었다.
이후의 소식은 칼스도 모른다. 지상의 정치적 상황을 아주 상세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로사가 수집하는 정보는 뚜렷한 한계가 있다.
그래도 어느 정도 들어온 정보로는, 대규모의 싸움은 그 뒤로도 몇 번이나 관찰되고 있었다.
조나라는 지금도 전쟁 중이다. 하지만 자신이 지키고 있다. 큰 문제는 없겠지.
“그럼 내가 아는 곳으로 데려다 줄게. 다만 조금만 보고, 이어 바다를 본 다음 돌아가자. 그럼 됐지?”
“아는 곳?”
“아는 사람도 있어. 말했잖아. 지상도 다녀봤다고. 그 대신, 거길 가려면 몇 가지 준비를 해야 해.”
“준비라고? 뭔데?”
“일단 팔찌를 차. 말이 통하려면 써야 하니까.”
로사를 피해서 차지 않았던 팔찌다. 칼스를 만나서도 모국어이니 문제가 없었기에 잊어버리고 있었다.
“손에 차면 눈에 띄니까 발목에 차고, 조만간 여기 복식을 구해줄 테니 그걸로 갈아입어.”
“음. 확실히 이대로는 안 되겠지.”
“또한, 나는 여기서 쓰던 이름... 프람이란 이름이 있어. 나는 그것으로 쓸 테지만... 너도 쓸 수 있는 이름을 하나 만들어야 할 거야.”
“가명(假名)이라. 무슨 범죄극을 보는 것 같아.”
어쩐지 즐거운 활극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신이 났다. 자극이 적었던 삶이니 무엇이든 신선하다.
칼스는 낮게 혀를 찼다.
“심야방송을 보는 것까지 유키나를 따라할 이유는 없을 텐데...”
“하아... 그 애도 보고 싶지만... 일단은 참아야지. 돌아가서 들려줄 이야기가 있으면 좋겠는데...”
칼스는 조금 몸을 떨었다. 여자애들의 밤샘수다는 별로 끼고 싶지는 않다. 어머니와 로에, 유키나 등 그의 주변에 있는 여성들은 대체적으로 좋게 말하면 쾌활하고, 정직하게 말한다면 좀 시끄러우니까.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우리 외모는 너무 눈에 띄어. 네 머리카락부터 문제지.”
검은색인 칼스와는 달리 플라티나 블론드인 그녀의 머리색은, 지금부터 가려는 곳에서는 매우 이질적이다.
“염색약도 갖고 왔어. 그걸로 숨겨보자.”
“그런 것까지 갖고 왔어?”
“그야... 난 준비성이 좋으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세리사는 입을 벌렸다. 쿄우카가 건네준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가 바리바리 짊어지고 온 짐은 오지탐험 수준의 장비였다.
남자가 너무 꼼꼼해도 재미없다는 것은 오늘 처음 알았다. 빠진 것이 있다면 핀잔도 좀 주었을 텐데... 조금은 아쉬웠다.
“그럼 얼굴은 안 가려도 돼? 그건 문제없어?”
칼스는 내심 실소했다.
아쉽게도 자신이 썼던 것처럼 맞춤형의 가면 같은 것은 지금은 없었다. 구중궁궐에서 자란 이 아이가, 설마 지상의 도시 따위를 보고 싶다 말할 줄은 몰랐으니까.
그래도 자기가 예쁜 것 정도는 아는 모앙이다. 진지하게 고민하는 꼴이 우습기도 하지만, 확실히 가릴 필요성은 있었다.
“그런 건 나중에 해도 돼. 사람을 마주칠 정도가 되려면, 아직 이틀은 더 가야 하니까.”
이틀 후의 오후 나절에 황야의 끝자락, 아마 가족 단위 정도에 불과할 작은 부락을 찾아낸 후, 그녀를 잠시 세워둔 칼스는 한 늙은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칼스는 노인에게서 받은 가죽 주머니 몇 개를 말안장에 달았다.
다시 상당히 걸어 저녁이 되었고, 취사를 위해 모닥불을 피운 후 칼스가 구해온 옷가지를 살펴본 세리사는 이미 찌푸린 표정이 되었다.
낡고 이상한 옷이다. 천도 거칠고 동물가죽 같은 것도 군데군데 쓴 것 같다.
...이거, 너무 구리다...!
“이걸 입으라고?”
“여기서는 괜찮은 옷이야.
“...누가 입던 옷은 아니겠지?”
“왜 아니야? 그래도 이런 것이라도 감지덕지지. 그들도 몇 벌씩 옷을 갖추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니까. 하도 징징대기에 돈을 꽤 안겨줬다고.”
“...하아.”
곱게 자란 것은 스스로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래도, 3주 동안 갖은 고생을 한 자신에게 어느 정도 자화자찬도 했었다. 하지만 역시 거리껴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칼스는 풀이 무성한 먼 곳을 가리켰다.
“갈아입고 와.”
일단 사람의 옷이라 어떻게 입는지는 대충은 알 수 있었다. 다만 천의 감촉은 무척 거칠고 낯설다.
칼스도 현지인의 복색으로 바꿔버렸다. 타인이 입고 있는 것을 보니 세리사의 위화감도 더해졌다.
“그 다음 주의 사항. 내가 허락하기 전에는 먼저 말을 꺼내지는 말았으면 해.”
“왜?”
“당연하잖아. 말 한 마디로 의심을 살 수도 있으니. 어디까지 우리는 조용히, 그렇게 지나가는 거다.”
수다쟁이는 아니지만 아예 입을 막는다...?
실망을 읽은 듯 칼스가 웃으며 위로했다.
“놀 시간 정도는 만들어 볼 테니까...”
“...알았어.”
“좋아. 이제는 네가 쓸 이름인데...”
“그러고 보니 칼스는 이름이 있댔지?”
“그래. 프람... 여기서는 바람을 뜻해.”
이건 어울릴지도 모른다. 그녀는 솔직히 인정했다.
“그럼 나는?”
“존호를 조금 바꿔서 써볼까... 싶어.”
“존호를? 단독으로?”
황족에게만 붙는 이름. 자신의 존호를 생각하니 갑자기 우울했다.
엔야... 사랑스러운 아이라는 뜻이지만, 과연 지금 내게 어울리기나 할까.
“네 이름은 작은 새를 뜻하지. 여기에 존호와 비슷한 음을 붙여... 옌(燕)이라 쓰면 어떨까. 제비란 뜻이야.”
“뭐... 난 상관없어.”
이미 자신의 흥미는 그 따위 이름에 있지 않다. 잠시 뿐이겠지만 그래도 새롭게 맞이할 환경, 그리고...
이제는 눈에 띄게 짙어진 초록 초원. 좀 더 상쾌해진 바람을 맞으며 그와 함께 풍경을 즐긴다.
앞으로 갈 길을 팔찌로 검색하며, 필요한 물품을 챙기고 저녁식사의 뒤처리를 하며 분주한 그의 뒷모습을 조금씩 눈짓하며 모닥불에 앉아 그 따뜻함을 만끽한다.
...얼마만의 마음의 평화일까.
세리사를 자신의 앞에 앉혀놓고, 가져온 염색약을 몇 방울 머리에 떨어뜨린 칼스가 다시금 빗으로 빗었다.
차츰 검은 색으로 변하는, 모닥불에 비친 머리카락을 천천히 빗어 내려가던 그는 문득, 조만간 마주칠 색다른 경험에 들뜬 듯 낮게 노래를 흥얼거리는, 그녀의 아직은 너무도 좁은 어깨에 눈길을 주었다.
나는 이 가녀린 아이에게 많은 것을 지우려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심약하고 여린 아이가 과연 잘 견뎌낼 수 있을까.
언젠가 짊어져야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무게를, 그 목숨의 가치를...
그걸 알게 되는 날엔, 이 아이는 많이 울지도 모르겠다. 나는 마음으로 울었지만 이 아이는 정말 서럽게 울 거야.
지금껏 자라는 동안, 불 꺼진 방의 침대 안에서 남모르게 몇 번이고 두려워하며 울었을 것을 생각하면, 역시 마음이 약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너는 이제 혼자가 아니다. 유키나도 왕위는 잃었지만 큰 힘이 되겠지. 내가 빗어주고 있는 이 무수한 머리카락보다 더, 내가 널 생각하는 일은 많을 것이다.
빗질을 받는 세리사도 잠시 생각했다.
쿄우카 이외에는 지금껏 자신의 신체를 맡긴 적은 없었다. 머리카락조차도 말이다. 오죽하면 깨운 상대가 쿄우카가 아닌 것만으로도 놀라 손을 휘둘렀었는데...
하지만, 필요하다고는 하지만 어째서 그에게 이렇듯 쉽게 맡기고, 또 그 손길에 편안함을 느끼는 걸까.
환상과 두려움을 함께 갖고 있었던 그에게, 지금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기고도 두려워하지 않음은 왜일까.
그는 내게 그리 정중하지도 않고, 오라비 행세는 실컷 해가면서 줄곧 놀리기까지 한다.
얄미울 법 하기도 한데, 이상도 하지.
아냐. 지금의 나는 자유롭고, 그도 일단은 내게 무언가의 강요 같은 건 하지 않아.
지금의 나는, 인생에서 얼마 없을 진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거야. 단지 그것 때문이야.
몇 번이고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을 다잡고, 자신도 모르게 과장되게 몸을 흔들며, 어린 시절 쿄우카에게 배웠던 콧노래를 조금씩 흥얼거리는 그녀는, 아직 많은 것을 알아가야 할 아이일 뿐이었다.
수고하셨어요.
- 작가의말
아침에는 올릴 시간이 없을 듯 해서, 미리 올립니다. 기, 승은 끝났고 이제 본격 전개 ㄱ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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