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장. 황야, 두 번째 만남. (3)
한 권이 끝날 때, 가슴에 남는 글이 되길 바랍니다.
Ⅲ
그다지 멀지 않은 수풀을 해치고 다가오다, 그녀를 발견한 듯 멈춰버린 사람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셋. 가죽옷과 가죽신 차림의 턱수염을 기른 남자들이다. 그들도 당황했는지, 멈춰 서서 이쪽과 서로를 번갈아 보고 있다.
그녀도 능력자니 기척은 감지해야 마땅할 터. 하지만 모처럼 만난 맑은 물에 신이 나 신경도 쓰지 못했고, 두런거리는 말소리와 수풀이 흔들리는 소리는 포샤의 숨소리와 꽤나 시끄러운 물소리에 가려졌다.
“꺄아아아!!!”
이만큼 접근했는데도 전혀 알지 못했다...!
자신도 놀랄 정도로 큰 소리를 지른 소녀는, 급히 물보라를 일으키며 물속으로 몸을 숨겼다.
사람을 그냥 만나는 것도 충분한 각오가 필요한 처지. 그런데 하필이면 목욕 중에 정면으로 마주치고 자신의 알몸까지 보였다. 혼란과 당혹감, 황당함. 그 모든 감정을 압도한 것은, 이미 뱃속에서 용솟음치는 분노였다.
이런 무례한! 발끈한 세리사는 물속에 몸을 감춘 채 그대로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물 밖으로 뻗어진 그 팔짓 따라, 작지만 밝은 빛의 구슬이 수면을 스치듯이 날아 세 사람을 덮쳤다.
영자력탄(靈子力彈)은 하늘을 나는 것보다 더 일찍 배울 수 있다. 영자력을 손바닥에 집중, 파괴력을 갖춘 에너지 탄으로 변환시켜 그대로 발사하거나 집어던져서 속도를 늘릴 수 있다. 단발성이며 초보적인 기술이지만, 강한 자라면 전함의 방어막을 뚫고 일격에 장갑을 부수어 격침시킬 수도 있다.
그녀의 것도 작은 폭탄에 준하는 위력을 발휘한다. 평범한 인간은 절대 맨몸으로는 버텨낼 수 없다. 즉, 이것이 그녀의 첫 살인이 될 것이다.
시녀를 상처 입히고 제이낙을 찌른 후 그렇게나 두려워하던 일이다. 그러니 평소 같으면 생각도 하기 싫었던 일이지만, 지금의 그녀는 그저 이 현실을 타파할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을 택했다.
물론 맞는 입장에서는 절대 동의하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거부권 따위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적중한다고 생각한 그 순간, 에너지 구슬은 무언가에 튕겨나가듯 궤도를 바꾸어 수풀에 직격했다. 작지만 큰 소리를 동반한 폭발이 일었고, 숲의 새들 몇 마리가 일제히 날아오르고 포샤도 조금 날뛰었다.
난생 처음 당하는 이상한 현실에, 남자들은 뒤로 넘어져 버둥대거나 혹은 양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엎드리기 바빴다. 하지만 당황한 건 그들만이 아니었다.
조준 실패? 아니면 설마 방어한 건가? 설마 지상인에게 이런 능력이?
소녀의 몸을 지배한 그 당혹감을 덧붙이듯, 남자의 목소리가 귀청을 울린다.
“잘하는 짓이다. 참...”
허공에 울렸지만 바로 옆에서 말하는 듯 또렷한 목소리. 기겁한 세리사가 황급히 돌아보니, 멀지 않은 나무 위에서 이미 사람의 그림자가 뛰어내리고 있었다.
두어 번의 점프만으로도 미끄러운 바위를 타고 넘어, 빠르게 다가온 그가 포샤의 앞을 막아섰다.
“워워, 진정해.”
세리사는 더더욱 가슴이 오그라들었다. 새롭게 나타난 이 사람은 누구? 아니 그 전에 우리 말?
팔찌 없이도 알아들을 수 있으니 아샤르 어가 틀림없다. 간편한 외출복이지만 복식 역시 모국의 것이다.
...추적자인가...?!
하지만 남자는 이쪽에 눈길을 주는 대신, 아직도 버둥거리는 사내들을 향해 호통을 쳤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도 그들이 굳고, 다시 몇 마디를 하자 이번에는 바싹 엎어진다. 그렇게 대화가 조금 이어진다 싶더니, 이번에는 남자들이 구르듯이 모두 도망가기 시작했다.
세리사는 기가 찼다. 대체 저들은 뭐라고 한 거지? 아니, 그 전에 그냥 보내주면 어떡해...?!
하지만 비로소 뒤돌아보는, 뚫을 듯 강렬한 시선에 몸이 굳은 소녀였다.
그리고 또한 놀라고 말았다.
매체가 아닌 실제로 접한 최초의 남자. 청년이라 부르기에도 다소 젊은 그는 굉장한 미모였다. 풍성하지만 잘 정돈한 검은 머리카락과 깎은 듯 섬세한 얼굴선. 키도 크고 몸의 균형도 좋다.
하지만 외모와는 달리, 그 표정은 꽤나 험악했다.
세리사는 자신의 상황도 잊고 순간 소리쳤다.
“누, 누구야?!”
비로소 남자의 입술이 열렸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듣던 정중한 목소리가 아니다.
“이 꼬맹이가... 이게 무슨 짓이니?”
난생 처음 접하는 무례에 세리사도 화가 났다.
“꼬맹이...?! 그게 무슨...?!”
하지만 그녀의 분노는 더 큰 호통에 가려졌다.
“시끄러워...! 넌 사람 목숨이 그렇게 우습니? 너 하나 잠시 부끄러운 거 모면하자고, 살아있는 목숨을 몇이나 끊으려 해? 그러자고 익힌 힘이야?”
거센 질타 뒤에는 빈정거림이 이어졌다.
“보여서 쪽팔릴 만하면 말도 안 해. 이제 겨우 계란 반쪽 나눠서 붙인 꼬맹이가... 내 참...”
“뭐야...?!”
화가 머리끝까지 달아올랐음에도 세리사는 차마 일어나지 못했다. 아직 잦아들지 않은 물보라가 몸을 가려주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일어날 수는 없다.
절대적으로 자신이 불리한 상황. 이를 타개하기 위한 영자력탄이 이번에는 이 무뢰한에게 날아갔지만,
“아...!”
세리사는 기겁했다. 자신의 온 힘을 쏟아 부었는데, 그는 낙엽 한 장 다루듯 가볍게 위로 쳐낸다. 회심의 일격은 이미 하늘의 별똥별이 되었다.
질렸다기보다는 공포에, 이제는 눈만 남기고 물속으로 들어가 버린 소녀에게 남자는 혀를 차며 턱짓했다.
“소용없다. 나와서 옷이나 입어. 이 말썽쟁이야.”
기가 질린 세리사는 잠시 망설였지만, 그는 전혀 고개를 돌릴 생각도 하지 않는다. 뻔뻔해...!
하지만 역시 이대로 있을 순 없다. 시선을 그에게 고정한 채로, 또한 최대한 드러나지 않게 빛을 받아 반짝이는 물속으로 몸을 숨기면서, 발끝으로 물 아래 땅을 밟아가며 조심스레 바위로 다가갔다.
냇물 끝에 도달했지만 이대로는 나갈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지만, 소녀는 용기를 내어 빽 소리를 질렀다.
“어딜 보는 거야, 저쪽 봐!! 이 호색한...!”
“꼬맹이의 알몸을 본들 아무 감흥도 없어.”
말도 안 되는 소리. 참담한 소녀였지만 당장 급한 쪽 또한 자기 쪽이다.
옷을 놓아둔 바위까지 기듯이 다가간 그녀는, 더듬더듬 손을 뻗어 놓아둔 옷가지를 집어 들었다.
정신없이 몸을 닦고 옷을 입고, 머리에 묻은 물기를 짜내자 조금 안도했지만, 알 수 없는 남자에 대한 의문과 그것을 압도하는 불안감이 다시금 엄습했다.
그는 자신보다 훨씬 강하고 게다가 남자... 잘못하다가는 말 못할 꼴이라도 당하는 거 아냐...?!
몸을 숨긴 채 머리만 쑥 내밀고 보니, 팔짱을 낀 그는 우두커니 서서 그대로 시선을 주고 있다.
“당신... 누구....?”
진지한 질문에 가벼운 답이 돌아왔다.
“맞춰보시지. 상품은 없지만 말이야.”
세리사는 침을 삼켰다. 장난처럼 웃긴 하지만, 그 자태의 존재감과 위압감은 압도적이다.
사실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었던 문제라고, 그녀는 후에 회상했다. 모국어를 쓰고 능력자의 공격을 무위로 돌렸으며, 부황조차 하지 않던 질타를 할 수 있는 남자가 둘이나 되면 그게 이상하다.
하지만 어리고 나약한 이성은 분노에 쉬이 짓눌렀다.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거야?”
결국 그녀가 택한 것은 권위에 기대는 것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쯧 혀를 찼다.
“내가 누군데... 그런 권위주의는 좋지 않아. 황족이라면 더더욱 그래. 그 누구도 좋아하지 않을 걸.”
세리사는 거듭 목젖을 울렸다. 날 알고, 그럼에도 무례를 저지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남자가 물었다.
“아무튼, 가출해보니 그동안 즐거웠니?”
“역시... 날 알고 있네? 당신.”
“그렇지.”
“그럼 내게 이러는 거, 쉽게 용서받지 못할 죄인 것은 알아? 내가 이걸 윗선에 고하기만 하면...!”
최대한 무섭게 엄포를 놓았지만, 역시나 노골적인 코웃음이 돌아왔다.
“흥. 황제의, 아버지의 근신 명령을 무시하고 궁을 나간 건 어떨까? 발끈해서 사람까지 죽이려 한 것은? 그것도 쉽게 용서받기 힘들 걸.”
한 마디도 지지 않고 그대로 받아친다. 뭐 이런 녀석이 다 있을까.
하지만 부황이 직접 들먹여지자 어느새 위축되는 자신을 깨닫고 말았다.
“...당신, 혹시 아바마마가 보내셨어?”
“맞아. 널 잡아오라고 하시더라.”
세리사는 순간 절망했다. 어설픈 반항도 이제 끝인가.
“다 입었으면 나와라. 언제까지 뭉개고 있을 거야?”
여전히 능글맞기가 끝이 없다.
날아서 도망칠까 생각했지만 금방 잡히겠지. 그녀는 충분히 경계하며 바위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는 웃으며 팔짱을 풀었다.
“가자.”
“...어디로...?”
“뭘 새삼. 당연히 너희 집, 황궁이지.”
물론 몰라서 물은 것은 아니지만, 또한 새로운 오기가 솟았다.
이대로 끌려가서 똑같은 냉대나 받으라고? 그것도 이리 무례한 이의 손에 끌려간다?
“싫어. 못 가, 아니... 안 가.”
남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떼쟁이인 줄은 알고 있지만, 이젠 적당히 해라.”
“그보다도 당신 누구야? 누구냐고...! 몇 번이나 묻게 만들지 말고 대답해...!”
“맞춰 보세요. 그 동안 공부를 빼먹었으니, 특별히 주는 숙제입니다.”
“알 리가 없잖아!”
“그럼 돌아가서 착실히 공부해. 물론 혼쭐도 좀 나고, 반성도 하고...”
믿을 수 없게도 스스럼없이 뻗어진 그의 손. 기겁하며 뿌리치듯 손짓한 소녀는 이내 남자의 뺨을 갈겼다.
그 누구도 내겐 이리 대하진 않았다. 분노는 강했다.
하지만 어찌 했는지, 가볍게 피한 남자는 더욱 무례히 굴었다. 어느 사이에 허리가 잡혀, 무슨 자루 메듯이 남자의 어깨에 걸쳐져 있다.
“아...!!”
순식간에 시야가 뒤집히며 기절초풍한 그녀가 발버둥을 쳤지만, 허리를 감은 그 팔은 강하고 단단하다.
웃음소리가 등 뒤로 들렸다.
“말을 듣지 않으면 때려서라도 끌고 오라는 명이니, 어디 바지 벗겨서 엉덩이나 좀 때려줄까?”
세리사는 기가 막혔다.
그 냉대하던 부황조차도 손을 댄 적은 없었다. 하물며 이제 제법 가슴도 부풀기 시작했는데, 어린아이처럼 엉덩이를 맞는다?
그리고, ...바지를 벗겨?! 아버지에게도 맨살은 보여주지 않았다. 그녀는 심히 버둥거렸다.
“안 돼! 놓아줘!!”
“그게 싫다면 돌아가겠다고 대답해.”
“웃기지 마...!!”
그나마 시야에 드러나는 그의 등을 꼬집고 전력으로 두들기며 발버둥을 쳤지만, 역시 전혀 소용이 없다.
즐거운 목소리가 거듭 울렸다.
“안 되겠네. 몇 대 맞으면 잠잠해지려나...?”
허리춤에 손의 감촉과 움직임이 느껴진다. 정말 엉덩이를 까서 때리기라도 하겠다는 걸까.
“자, 잠깐...! 당신! 이런 짓을 하고도...?!”
“걱정 마. 다시 말하지만, 말이 안 통하면 몇 대 때려도 된다고 하셨거든. 그리고, 황녀 전하의 엉덩짝을 구경할 수 있는 기회라... 절대 놓치고 싶지 않답니다.”
이내 반바지의 허리춤이 당겨진다.
참담하고도 다급해진 세리사. 순간 자신도 믿을 수 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싫어! 안 돼! 잘못했으니까...!! 하지 마!! 제발!!”
부황 앞에서도 빌지 않았던 나인데...!
하지만 절로 터진 애원.
어느덧 눈물이 터지고 울음소리가 배어나왔다.
...내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거야!
비탄에 몸을 떨 즈음, 믿기 힘들게도 순간 몸이 자유로워지고 그의 팔에서 놓여났다.
너무나 어이가 없고 화도 나며, 또한 상대는 물론 자신에게도 말할 수 없는 실망감을 느끼며, 세리사는 그대로 무릎을 꿇고 앉아 소리 내어 울었다. 이 또한 수치인 것은 알지만 전혀 주체할 수 없었다.
한참을 울고 나서 고개를 드니, 어느새 자신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그의 얼굴이 보인다.
장난기는 이미 사라졌지만, 더불어 조금도 마음의 가책이 없는 평온한 얼굴이다.
알 수 없는 분노가 소녀의 가슴 속 깊이 들끓었다. 전혀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다시 한 번 손을 들어 뺨을 후려쳤다.
하지만 소년은 이번엔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았다.
조금 돌아간 얼굴 따라 머리카락이 흔들린다. 누가 들어도 아픈 소리가 났지만 그는 태연히 물었다.
“기분은 풀렸어?”
“...뭐?”
“고함지르며 화도 냈고, 서럽게 울기도 울었고, 때리기도 때렸으니 좀 시원해지지 않았냐는 거야.”
일부러 맞아준 것은 알지만 의문은 여전했다.
“당신... 진짜 누구야...? 말해줘...”
눈물을 닦아낸 세리사가 잡아먹을 듯 주시했다.
잠시 웃던 그가, 불현듯 두 손을 마주잡아 예를 갖추었다.
“...좌현왕세자 세라비 칼스 카이. 황녀를 뵙습니다.”
이것이 두 사람의 두 번째 만남이었고, 나중에 회상했지만 최고이자 최악의 만남이기도 했다.
그녀는 미처 알지 못했다.
지금의 이 만남이, 그녀의 인생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안겨줄 것인지.
수고하셨어요.
- 작가의말
도발왕에게 막 굴려지는 여주...
오늘은 좀 짧아요. 질질 끌 수는 없는 파트라...
마지막 단락은 프롤로그에서 한 번 썼고, 이번에도 썼고... 한 번 더 반복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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