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장. 불어오는 바람. (1)
한 권이 끝날 때, 가슴에 남는 글이 되길 바랍니다.
![DUMMY](http://cdn1.munpia.com/blank.png)
Ⅰ
7월 하순에 접어들어서도, 포로가 두 명 더 생긴 외의 변화는 없었다.
“며칠 사이에 천인장 셋이라...”
이목의 웃음에 췐도 맞장구쳤다.
“이제는 안 나오는군요.”
그는 밤이 되면 인근 숲에서 칼스에게 무술을 배웠다. 하루 1시간 정도지만 생각 이상 빨리 늘고 있다.
스스로도 몰랐던 재능일까, 아니면 기다리는 이를 위한 노력일까. 제자가 열심이니 스승도 나름 흥이 났다.
간담 역시 제법 늘었다. 지난번에는 천인장 둘이 나왔고 칼스와 췐이 상대하러 나갔다. 칼스가 2대1로 싸우는 동안 구경하던 췐은, 창에 찔려 비틀거리는 한 사람을 쫓아 후려쳐 사로잡는데 성공했다.
다 차린 밥상에 숟가락만 얹은 셈이었지만 공은 공이다. 다만 병사로 붙는 싸움이 없었던지라 결원이 없으므로, 승진 자체는 잠시 미뤄졌다.
“프람 덕에 이렇게 공을 빨리 세우네.”
그는 웃으며 무척 좋아했다. 칼스도 쓰게 웃었다.
두 사람의 갑옷은 받은 것으로 해결했지만, 아무래도 말 위에서 쓰려면 장병기(長兵器)가 낫다. 칼스의 것은 빼앗은 것이 있었지만, 결국 군중의 대장간에 두 개를 주문했다.
멋과 실용성을 겸비한 녀석을 찾아내기 위해 칼스는 로사의 기술정보를 뒤졌다. 우주 함대를 갖고 있지만 개인용의 검술이 남아 있는 것처럼, 창봉술도 역사적으로 남아 있고 전용 무기도 있다.
이 시대의 장병기는 과(戈)와 모(矛)로, 아직 창도 드물고 복잡한 극(戟)은 없다. 그러니 모양이 너무 안 나 불만이었다.
결국 지구의 후대에 등장하는 방천극(方天戟)과 비슷한 것을 찾아내어, 아샤르의 도량형을 이 곳의 척관법(尺貫法)으로 치환, 나뭇가지로 땅바닥에 모양을 그려가며 대장장이에게 설명을 했다.
“생긴 건 그렇다 치고, 무게가 제법 나가겠는뎁쇼?”
벗어던진 웃통에, 불똥이 튄 화상자국이 덕지덕지 붙은 40세 초반의 대장장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췐의 것은 나무 자루에 날만 붙이는 것이지만, 칼스는 갖고 온 철제의 모를 통째로 쓸 것을 주문했다.
하지만 철을 녹일만한 화로를 전선에서 기대하긴 무리다. 결국 절충안으로, 칼스의 것은 청동으로 날만 하나 새로 만들어 원래 있던 철모의 반대편에 붙이기로 했다. 양 끝에 날이 있는 창이 된 셈으로, 원래도 무거웠던 것이 이젠 40근을 넘어갈 예정이었다.
호리호리한 소년이 거의 장식용의 무게에 해당하는 것을 주문한지라, 대장장이는 깊은 의혹의 눈초리를 보냈다. 결국 칼스는 쓴맛을 삼키며 철모를 휘둘러보였다.
벌린 입으로 쳐다보던 대장장이는 혀를 내둘렀다.
“아따, 장사네. 보기에는 그렇게 안 보이는구만...”
힐끔 훑어보던 그가 중얼거렸다.
“아랫도리도 장사면 좋아하겠다잉.”
“무슨 뜻이죠?”
“으잉? 들으셨소? 귀 한 번 좋지라...”
칼스가 백장이라도 대장장이는 오래 종군했다. 서열은 비슷비슷했다.
“글게 덩치도 제법 있고... 그만하면 번듯하고 힘도 좋고... 계집애들이 자지러지지라.”
“훗. 난 또 뭐라고...”
“백장님은 아직이지요?”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런 걸... 대체 왜 묻는 겁니까.”
언젠가는 그도 여자를 품고 결혼도 할 것이다. 첫 아이에 10년을 바라보는 만큼 황족의 결혼은 빠르다. 하지만 아직 그는 생각도 하지 않은 미래다.
“백장님 같은 장정을 보니 두고 온 딸이 생각나서... 뭘 가진 게 있어야 시집도 좀 번듯한데 보낼 것인디...”
그 때부터 늘어진 신세타령과 우는 소리에, 결국 칼스는 재료비와 수고비를 합쳐 포전을 일곱 닢이나 뜯기고 말았다.
이 이야기를 돌아와서 이목에게 하자, 그는 드물게 배를 잡고 웃었다. 의아한 칼스가 물었다.
“왜 웃습니까?”
“그렇게 돈을 뜯긴 얼간이가 저번에도 있었지. 갑옷 좀 손보러 갔다가 포전 세 닢을 그냥 빼앗겼다네.”
딱히 돈이 아깝지는 않지만, 입발림에 속았다는 기분에 그는 쓴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다가온 이목이 귀엣말로 말했다.
“너무 상심하지 말게. 그리고, 이건 위로가 될지는 모르지만...”
“네?”
“사실은... 아까 말한 그 얼간이가 바로 나일세.”
이목은 투구 위로 머리를 긁으며 가 버렸다.
닷새 후 도착한 무기는 돈값은 했다. 붉은 영(纓:창술)이 피를 원하는 듯 팔랑거렸다.
새로 얻은 무기를 시험할 기회는 빨리 찾아와 7월 25일, 그의 백인대에게 임무가 주어졌다.
심수(沁水)를 건너 장평으로 항하는 진의 수송부대를 치라는 상장군의 명이다. 세작의 보고에 의하면 수레만 200량. 호위만 해도 기백 혹은 천은 될 것이다.
“천 가까운 병력을 고작 백인대로 말입니까?”
이목의 반문에 염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상 움직이면 들키게 되느니.”
적에게도 척후는 당연히 있을 것이다. 그런 만큼 많은 수가 움직일 수는 없다. 적의 뒤로 도는 만큼 들킬 경우 압살당할 위험이 높다. 하지만 백 명 정도라면 아슬아슬하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용케 임무에 성공했다 해도 추격군을 뿌리치고 돌아온다는 것은 절대 쉽지 않다. 지금껏 보냈던 부대들도 성공률은 3,4할 정도. 성공해도 부대의 반을 잃은 것이 보통일 정도다.
하지만 보급선 교란으로 얻어지는 이득은, 잃는 병력보다 월등히 크다. 지금껏 계속 보냈던 이유다.
“적들도 대비는 충분히 하고 있겠지만, 이번은 규모가 제법이라 놓칠 수가 없네. 그러니... 백장 풍의 무예를 믿고 보내는 걸세.”
염파는 이목의 옆에 시립한 칼스에게 물었다.
“해 주겠나?”
거부할 명분은 없다. 하지만 칼스는 잠시 망설였다. 지금까지와 달리 부하가 꽤 죽을 수 있는 일이다.
“...하겠습니다.”
냉정하게 보면, 타인을 사지로 내보내는 무게를 알 수 있는 좋은 경험이다.
하지만 마음이 무겁다. 달포 사이에 췐 만큼은 아니더라도 미운 정이라도 붙긴 했으니.
...전원이 살아오면 좋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겠지.
아무래도 찝찝한 그 표정에 염파는 위로하듯 말했다.
“돌아오면 술 한 잔 냄세. 내 방식으로...”
아, 젊은 애송이에게는 본심을 알아본다는 명목으로, 술을 진탕 먹이신다는 그거 말씀이세요.
듣자니 염파는 말도 못하게 주량이 세단다. 벌써부터 위장이 쓰려오는 것 같다.
구름에 가린 달 탓에 어두워지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다. 소리를 막기 위해 말발굽에는 헝겊을 씌우고 입에는 하무를 물었다.
북쪽으로 이동하여 장평을 멀리 돌아, 근 80여 리에 이르는 길을 하룻밤 만에 돌파해야 한다.
너무 어리거나 나이든 자는 쉬이 지쳤다. 하지만 행군은 엄중하며 대오를 이탈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부장들은 물론 백장도 말에서 내려 빠르게 걸었다. 숨이 찼지만 감히 불평하는 자는 없었다.
새벽이 되었다. 숙영하는 검은 그림자가 다수 있는, 낮은 절벽에 맞닿은 공터를 멀리 바라보며, 칼스는 손짓으로 큉을 불러 나지막하게 말했다.
“고함을 크게 지르며 보병은 횃불을 던지고, 맞서나온 공격 자체는 가능한 한 기병만으로 상대한다.”
큉은 상당히 놀랐다. 기병이라고 해도 말을 가진 이는 주장과 부장 둘, 고작 세 명이다. 그런데 7백 명은 되어 보이는 적 사이로 뛰어 들겠다?
“괜찮을 거다.”
당신 걱정만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요... 큉은 그 말을 입 속으로 꿀꺽 삼켰다.
하지만 칼스도 계산이 있었다. 두 명 정도라면 어떻게든 지켜낸다. 많은 수를 끌고 가는 편이 훨씬 손해다.
송진을 뭉친 나뭇가지에 불씨를 붙이는 순간 솟아오르듯 타오른다. 이어 백 명에 이르는 인간들이 일제히 고함을 질렀다. 새벽 정적을 깨뜨린 함성은, 나뭇가지에서 졸던 새들을 일제히 하늘로 날려 올렸다.
“적습...!”
외치던 보초는 날아온 화살에 목이 꿰뚫렸다. 이는 큉의 솜씨로, 어둠속에서도 사냥꾼의 본능은 어디 가지 않았다. 이어 칼스가 가장 앞서 말을 달렸고, 따라 들어온 백인대가 군량 수레에 일제히 횃불을 던졌다.
수레에는 양곡뿐만 아니라 말에게 먹이기 위한 건초도 실려 있다. 덕분에 불은 순식간에 번져 어둠을 몰아낸다. 하지만 던진 불의 숫자에 비해서도 번지는 것이 빠르다. 칼스가 미리 힘을 조금 운용한 탓이다.
발화능력은 기초중의 기초. 하지만 염력(念力)만으로 발화점을 일일이 지정, 장거리에서 불을 일으키는 것은 계산이 나름 복잡하다.
그래도 어우러지는 횃불 속에서 그다지 표가 나지 않게, 거의 전 수레에 불을 붙이는데 성공했다.
“이 놈!”
적의 대응도 정예병답게 빨라, 이미 두 기의 기병이 창을 휘두르며 거세게 달려온다. 큉이 화살을 날렸지만 기병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겨냥은 꽤나 빗나갔다. 할 수 없이 칼스가 말을 몰아 내달렸다.
두 자루의 창이 동시에 날아오지만 궤도는 읽힌 상태다. 한 자루를 쳐내고 한 자루는 몸을 숙여 피하면서, 자신의 창을 가로로 세워 두 적병을 모두 걸어버렸다.
이어 그는 떨어진 적병의 등짝을 재빨리 찔렀다. 그 강력한 힘은 그대로 작용하여, 일자형의 날은 적의 등을 뚫고 관통하여 가슴으로 나온다.
...저번에 한 번 겪었지만, 이 감촉은 역시 익숙해지진 않는다. 파고들 때는 피부와 근육이 일시 저항하지만, 그 저항감은 금방 사라지고 이어 금속과 뼈의 마찰감, 다시 뽑아낼 때에는 창날에 달라붙어버린 근육이 둔탁하면서도 묵직한 소리를 내고, 순환하던 피는 새롭게 뚫린 길을 따라 세차게 뿜어진다.
목숨을 또 하나 빼앗았다. 하지만 이들은 적이고 이것은 전쟁이다. 창질 한 번마다 그는 그렇게 다짐에 다짐을 거듭했다.
적을 죽이면 살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압도적인 힘을 가진 그는 죽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자신의 정체를 감추기 위해 죽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칼스는 내심 불안하고 착잡했다.
이러다 익숙해지는 것은 아닐까.
강대한 힘을 갖춘 황족이지만, 그 힘을 온전히 쓰는 일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아버지인 토오르조차 사람을 죽인 적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없겠지.
하지만 자신은 이제 다르다. ...몇이나 죽인 것이다.
다들 지상인들을 원숭이에 불가촉천민이라 말하지만, 이미 칼스는 그 생각을 벗어던졌다. 대화와 감정을 나눌 수 있고 서로가 기쁨과 슬픔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 이들은 분명히 사람이다. 자신의 동족들은 이들과 대화할 일이 없으니 모르는 것이다.
물론 대화만으로는 해법이라 할 수 없다. 오히려 몰랐던 것을 알아버려 더 큰 불화와 오해를 낳을 수 있겠지. 하지만 자신과 같은 이도 나올 수 있을, 그 가능성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 이상을 생각하기도, 행하기에도 너무 미숙하다. 그저 내 동료들을 지키기 위해 싸울 뿐.
...동료? 동료라고 했나? ...언제부터?
그 의문까지 생각한 그에게 왼쪽 비스듬히, 하지만 낮게 매우 긴 과가 날아온다. 이대로는 말의 다리가 베일 판이라 칼스도 창을 뻗어 막았다. 상대방의 무기도 자루까지 금속인 듯 챙 소리가 꽤 크게 올렸다.
과의 주인을 확인한 칼스는 꽤나 놀라고 또한 내심 웃었다. 적은 거한이었으나 머리가 작고 턱이 뾰족했다. 근육질 거한에 갸름한 얼굴이 안 어울린다.
하지만 갑옷도 투구도 좋은 것이었고, 특히 그의 말은 칼스의 것에 뒤지지 않는다.
나이는 30세로도 보이고, 50세로도 보여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담이 작지 않다 자부하는 칼스조차 남모르게 침을 삼켰다.
이 적의 분위기는 심상찮다. 온몸에 풍기는 살기(殺氣)는 마치 붉은 핏빛 안개를 감고 있는 듯 했다.
거한이 낮게 물었다.
“이름은...?”
“...네 무기로 물어라...!”
칼스는 창을 가로로 눕혀 극(戟)부분으로 상대를 후려쳤다. 하지만 이 속도와 힘조차, 적은 그리 어렵지 않게 막아낸다. 칼스는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이제껏 일반인의 다섯 배의 힘과 속도만을 유지했지만, 이 힘만으로도 결코 상대가 없었다. 그럼에도 상대는 덩치에 맞는 힘과, 덩치에 맞지 않은 속도를 겸비하고 자신과 대등하게 겨룬다.
두 사람은 나란히 말을 내달렸다. 휘두르는 무기의 궤적에 미처 피하지 못한 병사들이 말려든다.
“피, 피해라!”
피의 폭풍에 찢겨나간 신체들이 날아다녔다.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비명이 외쳐졌다.
이미 도주 준비를 마친 큉이 마른 침을 삼켰다. 저 백장 풍은 이목은 물론이요, 젊은 시절 상대할 자가 없었다던 염파도 인정한 강자다. 그럼에도 대등, 아니 그 이상으로 겨루는 저 자는 누구일까?
칼스는 고민했다. 시간을 끌면 압도적인 적에게 포위당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과도한 힘을 쓰게 된다.
힘을 더 써야 하나 생각하는 찰나, 적의 과가 내리쳐진다. 칼스도 자신의 창을 들어 막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두 자루가 부딪힌 접점에서부터, 부딪힌 탄력으로 한 번 더 적의 과 끝이 아래로 향한다.
끝이 떨리는 바람에 궤도도 심하게 흔들린다. 칼스는 몸을 비틀어 피했지만 결국 어깨가 정통으로 찍혔다. 쇄골이 작살나야 정상이지만, 그의 몸은 영자골격(靈子骨格)으로 보호받아 무사했다.
영자골격, 그것은 세포와 골격을 강화하여 보호하고, 한편으로는 내부 근육과 뼈대로 작용하여 무거운 물체를 들어 올리고 충격을 버텨내는 것이다.
아주 기초적인 것이라, 딱히 의식해서 운용하지 않아도 발동된다. 그러니 피할 수도 있었지만, 지나치게 인간의 운동능력을 넘어서 모두의 의심을 살수는 없어 그냥 맞았다. 물론 이것만으로도 의심거리다.
“호오... 용아(龍牙)를 맞고도...”
반격 차 휘두른 칼스의 창을 피한 상대도 놀란 듯 했다. 칼스도 호기롭게 받아쳤다.
“이런 기술이 있었나... 잘 봤다.”
“멀쩡한 거냐...?”
그 의심은 정당하다. 칼스는 어깨를 으쓱했고, 더불어 지상행 이후 처음으로 자신에게 공격을 성공시킨 지상인에게 놀라움과 흥미를 함께 느끼고 있었다. 그에게 긴박한 싸움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으나, 역시 조금은 흥분되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하기야 아군만 강하면 재미가 없다. 적도 나름은 솜씨가 있어줘야지. 그래야 공평하지 않겠는가. 칼스는 그리 생각하다 내심 자책했다. 그런 게 어디 있나.
싸움은 이겨야 가치가 있는 법이고, 압도적인 전력을 먼저 갖추는 쪽이 이겨야 마땅하다. 그 압도적인 전력을 갖추기 위한 준비와 노력은 눈에 띄지 않지만, 사실 가장 중요하고 또한 칭송받아야 하는 것이다. 소수로 다수를 이기는 것을 정석으로 삼는다면, 궤계(詭計)와 기병(奇兵)에만 마음을 홀린 멍청이가 된다.
좀 더 붙어보고 싶은 욕망을 억제하며, 칼스는 창을 휘둘러 거리를 벌린 다음 급히 말을 몰아 빠져나갔다. 이미 큉과 췐이 도주하는 아군의 후미를 맡고 있었다.
추격하는 기병이 있었지만 칼스가 최후미를 지켰다. 달려드는 기병 셋을 떨어뜨리자 아무리 적군이라도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아군을 경탄시킨 그의 무예는 적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다.
“물러나라!”
진군의 모처에서 호령이 들린다. 분명 지금껏 칼스와 겨루었던 자의 목소리일 것이다.
좋은 판단이다. 칼스는 내심 적을 칭찬했다. 기세가 꺾인 군대를 재촉하기라도 하면 무질서를 조장하는 것밖에 안 된다. 지금은 전열을 정비할 때일 터.
“이려!”
칼스가 고삐를 잡아채자, 바람의 이름을 가진 주인을 태운 흑마 또한 바람처럼 내달렸다. 그 뒷모습에, 턱이 뾰족한 장수가 쓴 웃음을 지었다.
몇 사람이 모여들었다.
“괜찮으십니까...?”
“...저런 자가 있었나...”
거듭 쓰게 웃은 장수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피해를 수습해 바로 본영으로 향한다.”
충실하고 부지런한 부하들이 대열을 다잡는 사이, 그는 지금껏 겨루었던 손을 꾸욱 쥐어보았다.
...아직까지 손이 저리다. 괘씸한...!
“끌어내서 한 번 더 보고 싶구만...”
돌아온 부대를 점검하니 미귀환자는 일곱이었다. 보통은 반절은 잃는다고 했으니, 이 정도로 그친 것은 칼스 덕인 셈이었다. 충분한, 아니 대성공이다.
“잘 했네. 애썼으이.”
이목이 어깨를 두드리며 칭찬했지만 칼스는 기분이 좋지 못했다.
미귀환자는 전부 보병이고 자신이 아는 이이다. 또, 싸움 도중에 정신없던 사이 죽었을 그들 중에서 유독 마음이 걸리는 녀석이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이름은 잘 모르겠지만, 자신이 교훈을 주며 배를 걷어찼던 아이였다.
가르친 보람도 없이 일찍 죽었구나...
긴 말을 하지 않은 염파는, 그 대신 술동이를 가져와 탁자에 쿵 놓았다.
“자, 마시자고...”
칼스는 사양하지 않았다. 최선을 다했지만 역시 몇 명의 얼굴은 다시 볼 수 없다.
그래도 자신은 미성년자... 고 나발이고, 지금은 그도 그저 술이 고팠다.
자포자기 술잔을 받아들고 몇 순배가 돌자 염파가 느닷없이 물었다.
“오늘 기분이 어떤가?”
“...나쁩니다. 의아해하실지는 모르지만...”
“아니, 이해하네. 나도 그랬거든. 지금도 그렇고...”
칼스는 이해할 수 없었다.
염파는 이름난 맹장이다. 산처럼 쌓인 부하의 머리를 밟고, 적의 피로 흐르는 강을 헤엄쳐 왔을 것이다.
하지만 노장은 쓰게 웃으며,
“내 나이 약관에 처음 전쟁에 나갔고, 서른 즈음에 장수가 되어 군을 이끌었다네. 동료도 부하도 죽어갔지만 나는 살았고... 살아남은 것으로 이 자리에 온 셈이지. 이제 칠십이 넘었으니 만족함을 알고 물러나야겠지만, 그럼에도 물러나지 않는 이유를 그대는 아는가?”
“모릅니다.”
이 정도로 정정하다면 백 살도 우스울지도 모르지만, 굳이 말하는 이유는 있을 것이다.
“...천하의 향방을 정하지 못했고, 또 이 무의미한 전쟁의 끝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네.”
“천하의 향방이요...?”
“그렇네. 주(周)왕실이 무너지고 천하가 갈리고... 우리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를 거슬러 올라가는 세월동안 싸워왔네. 하지만... 이 전쟁이 끝나도 또 다른 전쟁이 기다리고 있겠지...”
염파는 연달아 술을 들이켰다. 칼스가 따라주려 했지만, 틈도 주지 않고 그는 스스로 잔을 채웠다.
“난세를 한번 내 손으로 바로잡아보자. 내 나라, 조(趙)가 난세를 끝내는 주역이 되도록 해보자. 마침 내게는 타고난 용력도 있고... 젊을 때는 그런 생각에 군에 투신했고 줄곧 달려왔네. 승리도 패배도 했고, 적을 무수히 베었지만 부하도 많이 잃었네. ...하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어. 그러니 지금까지도 미련이 남은 게지.”
노장은 감출 수 없는 후회의 빛을 드리웠다.
“조금 더 잘했으면, 조금 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으면, 그런 후회도 많이 했다네. 그래도 여전히 매달리는 거지. 어떻게든 이 긴 싸움을 끝내고 싶어서...”
칼스는 묵묵히 들으면서도 생각했다. 일개 백장인 자신에게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까.
“나는 이제 늙었어. 그러니 이목 같은 자에게 기대하는 것일세. 지략과 인내심이 있고, 무엇보다 부하를 잘 감싸네. 혹시 이목이 군에 투신한 이유를 들었나?”
“들었습니다.”
“그래... 이목은 나보다 훨씬 젊으니, 부디 오래 살아 내가 못 다한 것을 해주기 바랄 뿐이야.”
“잘 해내겠지요. 그런데... 말씀하신 미련에, 혹시 무슨 뜻이 있습니까?”
“자네의 이런 상심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걸세.”
“...무슨 말씀이신지.”
“자네의 첫 싸움은, 자네가 살아가는 동안 오래 남을 것이네. 부하를 잃고 적을 죽인 것에 대한 고통, 내가 왜 싸우고 있는가를 매번 고민하는 고통, 하지만 그래도 참고 나아가야 하는 고통은 클 것이네.”
실제로도 그러했기에 칼스는 묵묵히 들었다.
“허나 젊은이의 인생은 긴 것. 앞으로 더한 고통이 없을 거란 장담은 하지 못하지. 허나 고통과 후회에 매달리면 나처럼 미련 많은 노인네가 될 뿐이지. 그러니 나는 너무 늦게 깨달았지만, 자네에겐 좋은 약이 있어 알려주려는 것이야.”
“...생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좋은 약...?”
“이것이지.”
염파는 비어가는 술동이를 툭툭 쳤다.
“마시게. 죽은 놈 몫까지 마셔. 그리고... 죽은 놈도 같이 마셔버려. 그렇게 술은 뱃속으로 보내고, 죽은 놈은 마음 깊이 남겨 두게. ...꺼내지는 말고.”
내미는 술잔을 사양할 틈도 주지 않는 그 심술을 칼스는 조금 이해했다.
그는 이제껏 이렇게 부하들의 죽음을 갈무리했던 것일까. 그러니 내게도 취하기를 강요하여 오늘의 고통을 조금은 줄여주려 한 것일까.
이 노장의 고뇌는 아직 전부 이해할 수는 없다. 후회할만한 일을 만들 정도로 오래 살지도 않았다. 이번의 지상행도, 자신의 지나간 세월에도 후회는 없다.
...하지만 앞으로는 장담할 수 없지. 인생은 모른다.
그리고 그 후회는 생각보다 빨리, 급박하게 그를 덮쳤다.
수고하셨어요.
- 작가의말
* 하무 : 소리를 줄이기 위해 입에 무는 작은 나뭇가지.
... 그동안 지옥에 간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신께서 보시기엔 천국의 주민이 좀 모자랐나 봅니다. 뉴스 보니 이제부터 시신 수습이나 할 듯... 에효.
Comment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