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장. 나는 왕이로소이다.
한 권이 끝날 때, 가슴에 남는 글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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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반드시...!! 바이크 값 변상시킬 테니까...!!”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꿀꺽 삼키며, 바닥에 정좌한 채인 루이코는 곁눈질로 방구석을 바라보았다.
구름을 뚫고 엄청난 속도로 날았다. 아찔한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잃지 않도록 노력했지만 헛수고였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윤활유와 아키라의 체취가 미묘하게 뒤섞인 그의 방이다.
...어떻게 들어온 거지?
여전히 뻗은 하루를 이불에 눕힌 다음, 아키라 자신은 구석에 누워버렸다. 이후 서로 말이 없었다.
이런 가시방석은 난생 처음. 한참을 망설였지만 그녀는 용기를 내어보기로 했다.
아키라에게도 하루에게도 먼저 말을 건 것은 나였다. 상대가 누구든 지금껏 할 말은 해 왔었다.
“...좀... 씻거나 갈아입을 생각은 없어?”
피는 말라붙어 갈색과 검은색으로 변색되었다. 낡긴 했지만 깨끗한 다다미를 더럽힐지도 모른다.
“어차피 나는 이 밤을 끝으로 사라진다. 그럼 뭔가 미스터리를 하나 던지는 것도 좋지 않아?”
드디어 뜬, 핏빛 같은 눈이 진한 장난기로 물든다.
“수사하는 놈들 골탕 좀 먹겠지. 특히 근처 파출소 놈들... 언젠가 바이크를 타고 있는 것만으로도 불량배 취급했겠다. 며칠 야근 좀 해보라지.”
무서운 와중에도 루이코는 기가 찼다. 무슨 심보로 타인의 수고를 즐기는 거지?
“사람이 나빠... 당신. ...사람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말해놓고 나니 덜컥 겁이 난다.
...난 지금... 대량 살인자와 같이 있다고...!
“농담이야. 당연히 흔적은 남기지 않을 거다.”
능글맞게 웃은 그는 빤히 루이코를 바라보며,
“그런데... 이 용기는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야?”
“...무슨... 이야기야?”
“내가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잖아.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이나, 아니면 어딘가의 악마나 신일지도 모르는데... 안 무서워?”
“하지만... 하지만 아키라의 얼굴인걸...”
루이코는 아키라에게 격식 없이 대했다. 무언가 존대를 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무엇보다, 당장 죽이거나 몸에 손을 댈 생각은 저 쪽에도 없어 보인다. 확신은 없지만 하려면 벌써 했을 것이다.
애당초 그도, 그녀가 필요 이상 공포에 질리기를 기대한 것이 아니다. 다만 무서워한다면, 그걸 빌미로 자신을 어떻게든 놀려먹으려는 의도 아니었나 싶다.
판단이 확신으로 바뀐 것은, 그의 표정에 흐린 아쉬움이 지나간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밤 안으로 사라진다니...?”
있어달라고 바랄 이유는 없지만, 그래도 아키라의 얼굴과 목소리와 몸이다. 아무 이유도 모른 채 그저 상실할 수는 없다.
합당한 설명이라도 해준다면 납득하려고 노력하겠지. 만약 아키라가 실수로 사람을 죽였다고 가정할 경우, 적극적으로 감싸주지는 못해도 신고 같은 것을 할 정도로 인정머리가 없진 않다. 물론 그게 실수라면 내 눈이 삔 것이겠지만, 그래도 이유 정도는 알고 싶다.
그는 두 눈을 껌벅거리면서도 담담히 답했다.
“당연하지. 이 사고를 치고 그냥 있을까. 그리고, 너희들도 같이 가야 하거든. 남의 일처럼 말하지 말라고.”
“뭐? 왜? 어디로?”
이 정체모를 녀석과? 대체 어디로...? 그것도 정든 고향과 가족, 친구를 모두 내버려두고?
너야말로 남의 일처럼 말하지 말라고...!!
“...거부한다면...?”
“...죽는다.”
짧은 답은 비수가 되어 그녀의 심장을 직격했다. 루이코는 순간 항의하려고 했지만, 단호한 붉은 눈이 쏘아보자 절로 얼어붙고 말았다.
“사정이야 어쨌든 넌 이 모습, 그리고 힘을 봐버렸잖아.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한다면, 물론 믿을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아무튼 곤란하지.”
“...비밀 때문에, 죽여서 은폐한다...?”
“그렇게 되는 거겠지?”
“그런 짓! 당신이 사람이야?!”
“소리 지르지 마. 무서운 게 없는 여자네,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무섭다. 하지만 눈을 피한다면 앞으로의 주도권이 완전히 넘어간다.
최악의 경우라도 호락호락 당하지는 않겠다, 그리 보여주는 편이 나중을 위해 좋겠지.
그 누구에게도 부당하게 당하지 않고, 당하는 꼴도 그냥 두지 않고 살았다.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다.
이번에는 진짜 죽을지도 모르지만, 여기서 비굴하게 군다면 지난 인생을 깡그리 부정하는 것 같다. 쓸데없는 자존심일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렇다.
“무서워하길 기대하지 마. 설령 무섭다고 해도, 사람을 함부로 죽여 대는 악당에게 설설 길 정도로 자존심이 없지는 않아. ...난 그렇게 살지 않았어.”
내친 김에 말했지만, 혹여나 싶어 루이코는 내심 숨을 삼켰다. ...잘못하면 맞을지도 몰라.
이번엔 어디보자는 듯 그도 마주 쏘아본다. 하지만 이내 헛웃음이 지어졌다.
“좋은 자세야. 생각 이상 용기가 대단한 걸?”
루이코는 내심 안도했다. 이 정도로는 화를 내지 않는다면 생각보다는 악랄하지 않을 지도...
한편 괴리감이 들었다. 언제나 과묵하고 침착했지만, 반대로 보자면 항시 소심했던 아키라의 얼굴이 이런 오만한 표정이라니...
무섭지만 여전히 얄미운 마음에 그녀가 반문한다.
“당신이 내 무엇을 안다는 거야?”
“꽤 알지. 말하자면...”
그는 쿡쿡 웃었다.
“아사카와 루이코. 스무 살. 본인은 평범하고 평화로운 일상에 만족하고 살지만, 또한 어딘가 모자란 사람들을 챙겨주길 좋아하는... 쓸데없을 정도로 오지랖 넓은 여자입니다.”
“...좀 좋은 평가 없어?”
미사여구를 바란 것은 아니지만 기대 이하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줄줄 읊어댄다.
“매사 현실적이고 긍정적인 기센 여자이지만, 가끔씩은 5년 전쯤의 사춘기에 졸업해야 할 생각, 백마 탄 왕자님을 아직까지 그리며 대리만족으로 바이크를 몰기도 하지요. 잘생긴 벤츠 오너와 접촉사고를 일으켜 티격태격하다가, 언젠가 깜짝 놀랄 사랑을 고백 받을 날을 기다리면서. 그 때 써먹을 멋들어진 대사를 밤마다 연습하고 있지요. ...대충 이 정도일까?”
“멋대로 이상한 설정 붙이지 마.”
그는 농담과 진담을 구분할 수 없고, 일단 진지하지 못하다. 그 이상의 평가는 아직은 내릴 수가 없다.
...살기 위해선 정보가 필요하다. 그녀는 대화를 더 잇기로 했다.
“하여튼 난 싫어. 지금 이 상황도 너무 싫고, 당신이 하는 말도 이해가 안 가. 그러니까 안 따라가...!”
“싫다고 해도 끌고 간다면...?”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어버릴 거야.”
“이거 참...”
그는 누운 채로 머리를 벅벅 긁으며,
“그럼 할 수 없지. 이 몸을 버리고, 아키라의 남은 목숨이야 어찌되든 상관하지 말까?”
루이코의 몸이 조금 튀었다. 뭐라고 했지? 남은 목숨? 아키라는 아직 죽지 않았나?
“그럼...? 아키라, 살아있다는 거야?”
“죽기 직전이야. 앞으로 반나절도 살지 못하겠지. 그래도 아직 영혼은 떠나지 않은, 이를테면 반죽음일까.”
루이코는 자신도 모르게 조금 당겨 앉았다.
“반죽음? ...왜 이런 상태가 된 거야?”
“너희를 살리기 위해서야.”
“뭐?”
뜻밖의 말에 가슴이 철렁하다. 그도 조금 찡그렸다.
“조금 전 상황에서, 단순히 도망쳐서 그 자리를 모면하는 정도라면 큰 힘은 필요 없었어. 하지만 그 힘을 너희들을 구하는데 써버리고 대신 자신이 죽는... 그는 그 방법을 선택했지. 즉, 너희를 위해 희생한 거야.”
가슴이 조여 왔다. 그의 말은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직감이 들었다.
왜, 어째서... 이런 상태가 되면서까지?
“그러니 너희들도 구하고, 아키라의 목숨도 일단 완전히 끊지 않기 위해서 내가 아키라의 몸을 대신 가져온 거야. 즉 육체는 아키라, 하지만 정신은 나. ...좀 헷갈릴 테지만 대충 그렇게 알아둬.”
이미 혼란으로 눈알이 도는 루이코. 다시 한 번 실소한 그는 자신의 손을 들어 천천히 살폈다.
“하지만 싸움을 하느라 힘을 과도하게 썼어. 손의 재생을 끝으로 더는 회복도 불가능해. 아키라가 자기 육체를 도로 찾고 살아남기란, 역시 이제는 불가능하지.”
대충 보기에도, 그의 목덜미나 손 등의 이곳저곳에는 반점 같은 울혈(鬱血)이 보인다.
그냥도 상당한 부상이다. 루이코가 급히 물었다.
“아키라를... 어떻게라도 살릴 방법은... 없는 거야?”
“없어. 너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이것도 엄연히 규칙이 있는 영역이야. 아키라는 죽어서 이미 영혼이 몸을 떠나야 하지만, 그걸 내가 강제로 붙잡고 있는 거야. 내가 놓는 순간 그는 죽어버려. 정말 살려야 한다면, 내가 죽어서 내 생명을 대신 주는 정도밖에 없어.”
“그럼 묻겠는데...”
루이코는 망설였지만 오히려 그가 선수를 쳤다.
“내가 죽어달라는 거야? 하지만... 아무리 내가 무언가의 괴물이나 악당이라도..”
그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꼬았다.
“살 권리 정도는 있는 것 아닌가?”
“하지만... 그건 원래 당신 몸도 아니잖아...”
“그럼 묻지. 네게 아키라가 소중한 존재였어?”
대놓고는 처음 받아보는 질문이라 대답을 고르기가 힘이 들었다.
...내게 있어 그는 어떤 존재였을까.
사실은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다. 생각하기 귀찮아서가 아니라, 결론을 내기 힘들다는 그 상황을 견디기 싫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그렇다.
“그야 내 친구고...”
“10년 친구도 1년만 연락이 없으면 소원해지기 마련이고, 격렬한 사랑을 나눈 연인도 사소한 말다툼 한 번에 헤어지는 게 세상일이야. 만약 아키라를 살려주기 위해 네 목숨을 달라고 해도 너는 승낙할 거야?”
그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루이코의 망설임에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꽤 착한 여자야. 자기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데, 그래도 친구를 도울 방법은 찾고 있으니. ...엇차.”
그는 기지개를 켜며 드디어 앉았다.
“자. 어떻게 할까.”
“뭐야... 어떻게 한다니...?”
“선택권을 주지. 나는 이 밤으로 도망친다. 그리고 내 안전이 보장되는 곳에서, 나는 내 원래 몸을 찾고 녀석의 영혼 역시 놓아줄 거야. 반나절도 안 남은 목숨이지만 그 때까진 내가 살려놓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이 몸에 깃든 나도 같이 죽으니까 말이야.”
그는 자신의 가슴팍을 조금 두들기며,
“내가 내 몸을 차지하게 된다면, 아주 짧은 여생이나마 아키라에게 돌려줄 수 있겠지. 그리고 아무도 지켜주지 않아 쓸쓸한, 그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해줄 의리가 네게 있다면, 그 유언 정도는 들어줄 선심을 네가 쓸 수 있다면... 그 때까진 나와 같이 행동하는 거지.”
...유언?
루이코는 깊이 생각했다. 아키라가 만약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나는 들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아키라는 자신의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았다. 교토에서 살 때의 이야기 정도는 가끔 했지만, 들려준 결코 많지 않은 이야기 속에서도...
그는 언제나 혼자였다고 느꼈다.
형제도 없고, 주변에 친구라고는 루이코와 하루 정도였던 그. 죽음의 순간에도 옆에 아무도 없고, 세상에 남길 마지막 말을 들어줄 이가 없다면...
그건 너무나 슬픈 일일 거야.
하지만 그 대가가, 자신의 목숨과 운명을 그에게 맡기는 거라면... 이건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다시 돌아올 수는 있는 거야?”
“사후 처리 정도는 해 주지. 언젠가는 다시금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을 거다.”
“...선택권이라 했지? 그럼 다른 선택은?”
“목격자인 너희를 죽이고 난 사라지는 거지, 이 육체는 그냥 어딘가에 버려지는 거고.”
기가 찬 그녀가 절로 외쳤다.
“...이런 악당 같으니...!!”
“악당이라. 기왕 들은 김에 철저히 해볼까. 훗.”
루이코는 거듭 치를 떨었다.
이 자식, 뭐가 이리 즐거워 보이는 거지?
...게다가 이건 선택이 아니라 협박이잖아...!
같이 간다고 해도 나중에는 죽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따르지 않는다면 당장 죽일지도 몰라. 그렇다면, 어떻게든 기회를 엿본다면 살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
“할 수 없겠네... 약속은 지켜...”
이번에는 그도 눈을 크게 떴다.
“생각보다는 별로 고민하지 않네?”
“고민해서 나올 답이라면 벌써 나왔어. 약속이나 확실히 지켜. 악당이라도 나름의 스케일은 있길 바라겠어.”
루이코는 내뱉듯이 말했다. 죽어가는 친구를 두고 나 몰라라 도망칠 정도로 나쁘게 살진 않았다.
그리고, 일단은 살아야 할 것 아닌가.
제기랄... 나쁜 자식...! 협박이나 하고...
“한 가지 묻자. 네 목숨 때문이야, 아니면 아키라의 임종을 지켜줄 의리 때문이야, 어느 쪽이 더 크지?”
“둘 다야! 크고 작은 것이 어디 있어...?”
그녀는 이제 맹수처럼 으르렁거리며,
“물론 나도 내 목숨은 중요해! 그렇지만 아키라가 외롭게 죽는 것도 못 봐! 그러니 따라가는 거야!”
“알았어. 알았다고. ...목소리 큰 여자네, 진짜. 그래도 난 호의를 베푼 건데...”
“애당초 당신... 대체 정체가 뭐야? 어째서 아키라 안에 있는 거지?”
루이코의 상식... 아니 비(非)상식이겠지만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한정되어 있다.
“당신, 유령이나 그런 거? 공포소설 같은데 나오는, 빙의(憑依)나 뭐 그런 거야?”
만약 그렇다면, 로마 교황청에라도 부탁해서 엑소시즘을 부탁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신자도 아니고 사실상 무종교인걸.
그래도 너르신 마음으로 받아주신다면, 그 대신 시스터가 되어도 무방할 거라는 자포자기의 심정까지 든다.
“비슷해.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나의 육체에 두 영혼이 있는 셈인데, 이유라면 필요했으니까... 라고 하면 설명이 너무 짧겠군.”
그는 조금 귀찮다는 표정을 드러내며,
“간단하게 이야기 하자면... 태아 상태의 아키라에게 내 영혼이 들어갔다고 해야 하겠지. 내가 이 세상에서 계속 살고자 하면, 내 몸을 가지고 그냥 살 순 없어. 그건 눈에 띄니까 평범한 사람의 몸이 필요한 거야.”
“자신이 있을 몸이 필요했단... 그래서 아키라의 것을 훔친 거야?”
“그런 셈일까. 이해는 구하지 않겠어. 나도 내 사정은 있으니, 네가 뭐라 하든지 상관 안 해.”
호흡이 거칠어진 루이코를 앞에 두고도 그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는다. 추궁하고 비난하고 싶지만 자신은 약자다. 루이코는 주먹을 움켜쥐며 겨우 참았다.
정체는 모르지만 남의 몸을 아무 가책 없이 간단히 빼앗는... 그런 악당이 이 녀석이다.
이래서는 약속이나 지킬지 의문이다.
씩씩거리는 그녀와는 달리 그는 여전한 즐거움으로,
“어지간히 미움 받았군.”
“당연하잖아...! ...참...”
순간 생각이 미쳤다.
“하루짱도 가야 해...? 별로 본 것도 없는데...”
관계자는 그녀 혼자가 아니다. 하루는 따라갈지 아닐지 물어보지도 못했다. 거부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허약한 그녀에게는 도망도 벅찰지도 모른다. 가능하다면 이런 일을 겪는 것은 자기 하나로 한정하고 싶다. 하지만 그는 그 마음을 단번에 저버렸다.
“예외는 없어.”
루이코는 깊은 한숨을 뱉었다. 그나저나 하루는 언제까지 기절하고 있을 것인가. 지금이라도 깨어나 주면 이 불안감이 늘어날까 줄어들까.
열심히 재고 있는 자신이 한심스럽고, 또 이 악마에 대한 원망도 깊어간다.
어딘가의 원혼인지, 아니면 악마 그 자체인지는 모르지만 하필이면 아키라에게 붙어서, 지극히 현실적이고 평온한 삶을 살던 우리들을 이렇게 비현실적인 세계로 끌어들이다니.
약간의 일탈, 즉 어딘가의 신과 엮인다던가, 자신에게 초능력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것. 살면서 그런 망상 정도는 누구나 하는 것이지만, 이렇게 피비린내가 물씬 나는 일탈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하루가 깨어나면 바로 출발할 테니, 좀 쉬어둬. 화장실, 주방, 맘대로 써도 돼.”
그는 다시 벌러덩 드러누우며 중얼거렸다.
“남은 것은 그 녀석이 늦지 않는다는 것이 있는데, 아마 이건 괜찮겠지.”
“...그 녀석?”
“있어. 우주선 갖고 올 녀석이. 내가 그걸 타면 너희들도 일상으로 돌아갈 길이 열리겠지.”
“우주선...? 잠깐만... 당신...? 유령이나 그런 것 아니었어?”
“굳이 말하자면...”
그 눈썹이 웃느라 둥글게 말렸다.
“이성인(異星人)쯤 되겠네.”
Ⅱ
루이코는 어이가 하늘로 솟구쳤다.
이제는 하다못해 지구 밖 생명체인가. 차라리 루시퍼나 사탄 같은 악마 쪽이 이해하기가 훨씬 쉽다. 오늘 무슨 운세가 이런가.
어제 산 잡지에서 본 오늘의 별점은 100점. 말미에는 ‘복권 정도는 사 두세요.’ 라며 호들갑스러운 하트까지 붙어 있었지만, 역시 별점 따윈 믿을 게 못 된다.
다른 별에서 온 인간을 만난 후라면 더더욱 그렇다.
...대체 어느 별에 점을 친 걸까.
“정말... 이성인, 외계인이야?”
“맞아. 참고로 우리 기술력은 아주 대단해. 따라서 이런 짓도 가능하지.”
여전한 불신에 그는 낮게 웃으며,
“나도 일단은 지구에서 태어났다고. 그러니 너희가 갖고 있는 이미지 정도는 알아. 대머리에 눈 크고 미끈거리는 녀석들이겠지. 그렇지만 우리 종족도 지구인과 외견상 다르지 않아.”
“어째서? 달라야 정상 아니야?”
루이코가 알고 있는 외계인을 다루는 작품이라면 우주전쟁이나 혹성탈출 정도다.
하나는 어딜 봐도 문어, 하나는 영락없는 원숭이. 이성인이 지구인과 모습이 같다면 더 설득력이 없다.
“유전자 개조를 통한 인종 변환의 결과야. 당시 지구에도 인류라 부를만한 존재들이 있었으니까, 그걸 참조해서 우리 육체를 너희 쪽으로 개조했지.”
“...자기들 몸을 바꿨다는 거야?”
“우리 기술은 유전자 조작 정도는 쉽게 해.”
“그게 아니라, ...기분 문제 아닐까?”
아침에 눈을 떠보니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이 거부감은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도덕적 문제는?
하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게,
“사람의 모습도, 주의사상(主義思想)도, 결국은 행복하게 살기 위한 거잖아? 모습을 바꿔서라도 지구에서 살 수 있으면 그걸로 족한 거야. ...물론 문제는 있었어. 우선 면역체계를 갈아줘야 했고, 몇몇 원소(元宵)는 독이기도 했고. 하지만 너희들과 우리들은 유전자를 대부분 공유하고, 따라서 혼혈도 가능해.”
“말은 그렇지만, 혹시 본 모습은 촉수가 잔뜩 달린 괴물인... 그런 거 아냐?”
“영화를 너무 봤구나. 너도 내 본 모습을 보면 생각이 바뀔 걸.”
어쩐지 자랑섞인 낮은 웃음이 흘렀다.
“우리 동족 중에서도 나와 다른 두 명은 좀 특별해서, 힘과 지능은 물론 외모도 상당히 타고 난다고. 이래 뵈도 나, 상당히 인기 많았어.”
“아. 그래. 그 잘나신 분이, 어쩌다 이 궁벽한 지구까지 오셨는지 모르겠네요?”
어딘지는 모르지만, 이왕이면 한시바삐 너희들 별로 돌아가서 거기서 행복해져라. 그녀는 강하게 소망했다.
“우리 선조들이 이 별로 온 것이 약 30만 년 전. 거리로는... 대충 여기서 4,300광년 정도 돼. 그곳의 모성에서 50만년쯤 전에 문명 발생. 그리고 8개 항성계를 가진 성간 국가. 그것이 우리 모태야.”
상상 이상의 스케일에 그녀는 입을 벌렸다. 거리가 몇천 광년이나 되고, 수십 만 년 역사에 무슨 성간 국가.
오늘 겪은 일이 아니라면 미쳤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럼 그만큼 가지고 있으면서 왜 이 별로 온 거야?”
“아주 큰 전쟁이 있었어. 우리는 궤멸전쟁(潰滅戰爭)이라 하지. 그렇게 오랫동안 미친 듯 싸운 그 결과...”
줄곧 여유만만이던 그는, 이번만은 쓴 약을 삼킨 것처럼 얼굴을 찌푸리며,
“8개 행성은 모두 파괴당했고, 한때 100억 넘던 인구도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1천만 정도. 말 그대로 거의 문명 궤멸 수준이었지.”
“당신들... 문명이나 기술이 그렇게 발달해 있다면서도... 전쟁은 하네.”
“종을 떠나서, 지능과 의식을 가진 존재의 욕심이나 의식 구조는 그렇게 다르지 않아. 우리 역사도 전쟁에서 평화, 다시 혁명에서 나태함으로 이어지는 고리의 연쇄야. 어쨌든 역사 기록의 반 이상을 이 전쟁이 차지할 정도로, 우리에게는 심각한 종족적 트라우마야.”
“무슨 전쟁을 그렇게 철저하게 한 거야?”
“그러게...”
나지막한 한숨이 다시 흐른다. 그렇게 오래전 일임에도, 마치 그는 자신이 한 것처럼 후회하고 있다.
“아무튼, 그래서 50년 정도 탐사해서 지구를 발견했어. 은하계 반대편으로 돌았다면 서너 배는 시간이 더 걸렸겠지만, 운이 좋았지. 그 동안 새로 태어난 동족도 있었지만, 그래도 갖은 희생을 치르고 찾은 땅이다. 우리가 이 별을 어찌 생각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그러면 왜 이 별을 지배하지 않은 거야?”
“이 별도 자칫 망가뜨리면? 그건 안 되니까, 이 별을 정원(庭園)으로 선포해서 내려가는 것을 엄금하고, 대신 다른 인종을 만들어서 내려 보냈지. 그게 바로 너희들, 지구인이야.”
“그럼...!”
순간 몇몇 사람들의 얼굴이 지나쳐갔다. 크게는 TV에서 본 근엄하고 자애로운 로마 법왕(교황:敎皇)부터, 작게는 길거리에서 만난 쓸데없이 신비한 분위기만 풍기려 드는 사이비 종교인까지.
그들을 전부 실업자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발언이 술술 나온다. 좋은 직업소개소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지구에도 기원 인류는 살고 있었다고 했지? 그걸 기반으로 조금 다른 모습을 부여하고 몇 가지를 가르쳐줬지. ...그게 바로 너희 지구인이고, 세월이 지나니 아주 훌륭하게 기존 인간을 밀어내 버리더군.”
“사람을 만들었다...?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어쩐지 몹시 기분이 나쁘다. 창조주 흉내나 내고 말이야. 설마 노예나 식량으로 삼을 작정인 건 아니겠지.
“우리는 성간국가 시절만도 수만 년에 달하지만, 또한 한번 거하게 멸망할 뻔 했어. 그러니 스스로를 믿지 못하게 된 거지. ...우리 안의 파멸, 그것은 언제나 우릴 두렵게 했어. 하지만...”
그의 손가락이 천천히 루이코를 가리켰다.
“만약 우리 손이 간, 생각과 모습이 닮은 인류가 지구에 있다면, 설령 우리가 멸망해도 또 다른 방식으로 다른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어떤 형식으로든 우리를 닮은 문명을 이어줄 수 있지 않을까. 당시에는 그게 이유였다고 해. 그래서 스스로 성장할 수 있도록 불간섭원칙을 세우고, 우리들이 지상에 내려온 이후로도 지상 지배 대신 북극 상공에 공중도시를 만들고, 이후 지상과의 접촉을 엄금했지. 그래서 너희들이 모르는 거야.”
“북극 정도라면 우리도 가 봤는데...?”
“그게 기원전 250년쯤 되나. 다시 전쟁이 있었어. 우주에서 벌인 싸움이니 지상에서는 모르겠지만, 우리 인구의 3할 가까이가 죽었어. 그래서 떠난 거야.”
“그거랑 떠난 것이 관계가 있어?”
“우리가 지상인, 즉 너희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냐 면 그냥 원숭이지. 지구에서 살게는 해 준다만, 부러 접촉할 필요가 없는 대상이야.”
다시 기분이 굉장히 나빠졌다. 아무 이유 없이 경멸당한다는 것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다. 자연히 톡 쏘는 말투가 되었다.
“당신들이 그렇게 잘났어? 원숭이는 뭐야?”
“일단은 주류가 되는 견해라는 거다. 하지만 같은 인간으로 취급하는 부류도 많진 않지만 존재해. 지난 전쟁은 이 두 파벌이 부딪힌 전쟁이야. 우리 문제가 아니라 너희들 문제였어. 너희가 인간이냐, 아니냐. 그리고 너희들이 인간이면 동급 취급당하는 것이 기분 나쁜 녀석들이 있거든. 그 녀석들이 격하게 반대했고 결국 반란을 일으켰어.”
사상과 이상의 차이로 전쟁을 한다는 것은 그들도 지구 인류와 다를 바가 없는 걸까. 별 것도 아닌 것까지 사유로 삼는 것도 마찬가지일까.
지나놓고 나면 왜 싸웠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지만, 싸우는 동안에는 그 질문을 하면 같은 편에게 맞아 죽기도 한다.
“우리 승리로 전쟁이 끝나긴 했지만, 다들 아는 사람들을 하나 이상씩은 잃어버린 상황이야. 국가 전체의 매너리즘, 그리고 책임문제로 불게 될 피바람. 그런 여러 정치적 문제가 생겨서, 잘못하면 다른 전쟁이 터질 것이라고 생각한 거야. ...그렇게 되면 나라는 끝장이니, 그렇게 되기 전에 일시적으로 나라를 봉인하고 다음 황제에게 앞으로의 짐을 맡긴 거지. 그래서 다들 다른 항성계로 옮겨서 아직까지 동결중이야.”
“그게... 어디지?”
“알려줄 순 없지. 만약의 사태지만, 네가 낮의 녀석들에게 잡히기라도 한다면 정보가 새잖아.”
“만약 만나게 되면, 우리는 당신 일행이 아니라고 말해줄 수는 없어? 우리는 관계없잖아.”
아키라의 마지막을 지켜주고 싶지만, 그의 위험에 같이 말려드는 것도 절대 사양이다. 하지만 저어지는 고갯짓에 실망감이 확 몰려든다.
“말이 먹힐 녀석들이 아닌데...”
“정말로... 방법 없어?”
“있다면 솔직하게 말해. 나도 관계없는 사람을 끌어들이기 싫어. 게다가 이 문제로는, 적이라도 더는 사람을 죽이기도 싫어.”
거짓말. 루이코는 내심 외쳤다. 그의 살인은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새삼 악어의 눈물은 또 뭘까.
“...하지만... 죽였잖아... 엄청나게...”
그는 떨떠름한 눈을 껌벅이며,
“그건 그 놈들 동료에 대한 경고. 섣불리 건드리면 결과는 이렇다고 알려준 거야. 인정에 이끌려 살려뒀다간, 다음엔 그 인원에 더해서 몰려올 걸. 적의 전력을 줄이는 건 싸움의 기본 아닌가?”
아무리 그래도 최소한 좀 망설이기라도 하라고... 하기야 원숭이 몇 마리 죽인다 생각하면 거리낌도 없겠지.
역시 이 사람, 악당은 악당이야. 하야시가 말한 대로, 엄청난 악행을 저질렀을 수도 있을 거야.
불쌍한 아키라. 이 악당의 손에 걸려서 몸도 빼앗기고, 목숨도 잃고... 자신들까지 노려지고...
모두 이 작자 때문이잖아...!
내심 바득바득 이를 가는 루이코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으쓱하며,
“그리고, 장차 있을 지구 침공 때는 몰라도, 이만한 싸움을 대놓고 하면 흔적이 꽤 남아버려. 한 번은 어쩔 수 없지만 더는 남아선 곤란해.”
끔찍한 소리에 루이코는 절로 반문했다.
“지구... 침공?”
“맞아. ...너희도 호락호락 당하진 않을 테니 전쟁은 필수일까.”
“왜? 우리도 문명을 영위할 권리가 있다면서, 그래서 이제껏 간섭하지 않았다고 했잖아.”
“시대가 달라졌어. 지구가 인간으로 꽉 찬 지금, 우리가 동결했던 국가를 다시 일으킨대도 그냥 우주에서 살까? 지상도 직접 지배는 하지 않아도 일단 우리 영토였고, 전부는 몰라도 일부는 돌려받고 싶거든. 그런데 곱게 줄 너희들이 아니잖아?”
“이길 자신은 있어?”
“왜 그렇게 생각하지?”
“보통 우주인들은 그렇지 않아? 지구 정복을 하겠다고 쳐들어와서, 초반에는 좀 이기다가, 마지막엔 얻어맞고 쫓겨난다. 그런 것...”
흥 하는 코웃음이 돌아온다.
“너희들 상상으로 승패를 결정하지 마. 나 하나만 해도, 원래 몸이라면 네가 본 것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닌 강력한 초능력자야. 우리 무기로도 못 건드리는데 지구인 따위가?”
“따위라고 부를 정도로 약하단 말이야? 우리도 지난 수천 년간... 그리고 핵병기도 있고...”
“단도직입적으로 우주에서 전함이 포격하면, 그걸 손댈 수 있는 전력이 지금 지구에 있을 리가 없잖아. 우리 물량과 기술력은 너희들이 비할 수준이 전혀 아냐.”
그 자신만만은 곧 현실임에 루이코는 몸을 떨었다.
잘못하면 외계침공이 현실로 다가온다. 그럼, 낮의 습격자 집단이 만약 자신과 하루를 손대지 않는다면, 아키라의 마지막을 지켜준 후 어떻게든 안전을 보장받고 차라리 이 녀석이 죽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말투로 보아서는 이 녀석은 뭔가 한 자리 하고 있는 인간이다. 이런 자에 이끌려 침공당한다면 그 즉시 지옥이 펼쳐지겠지. 지구를 위해서도 역시 이번 기회에 죽어주는 편이...
“하지만 당장은 아냐. 왜냐하면 우리 국가 원수, 즉 황제 자리가 지금 공위야. 이 문제로 싸움이 벌어지면 우리끼리 자멸할 수도 있겠지. 지구 입장에서는 만세를 부르려나?”
만세만 부를까. 축제다. 축제를 반드시 열어 주리라.
“전쟁도 모자라서 권력다툼도 하나봐? 혹시 당신, 그런 싸움에서 져서 이런 곳에 쫓겨 왔다거나...”
어쩌면 꼬리를 말고 도망친 비참한 패배자일지도 모른다. 옳거니 싶어 루이코는 빈정거렸지만,
“승계 다툼이 아냐. 오히려 그 반대지. 말하자면... 나를 포함해서 지금 깨어있는 동족은 모두 셋. 그런 우리 중에서 다음 황제가 나와야 하는데, 서로 하기 싫다고 미루는 싸움이야. ...싸움이래도 신경전이지만...”
루이코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권좌를 노리는 것이 아니라 미루는 싸움?
그녀는, 작은 정치판에서도 서로 한 자리씩 하겠다고 싸우는 세상에 살고 있다. 역시 이해가 가지 않는다.
“우리 중...? 그럼 당신도... 그 후보인 거야?”
마주보는 시선이 어딘가 우쭐해 보인다.
“맞아. 이래 뵈도 나는 왕이거든. 황제 바로 아래로 생각하면 될 거야.”
“에... 왕...? ...정말...?”
루이코가 알고 있는 왕이라면 좀 더 근엄하고 고상한 이미지. 하지만 이 녀석은 그와는 광년 단위의 차이가 있을 정도로 가볍고 사람됨이 경박하다.
여섯 장짜리 다다미방을 왕궁 삼아 20년을 살아온 왕. 그 악행에 어울리는 좋은 광경일까.
“선황제의 딸인 황태녀(皇太女), 그리고 나와 또 한 명의 왕이 있고, 그 중 나와 황태녀 두 사람이 지난 세월, 서로 제위를 이으라고 미뤄왔어.”
“왜 그렇게 좋은 것을 하기 싫어해? 권력자잖아?”
뭔가 직책을 맡아본 적은 없지만, 권력이라는 것이 가지는 마성(魔性)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무려 남에게 명령할 수 있는 권리 아닌가.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무척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복잡한 이유가 있어. 덕분에 몇 번이고 대판 싸웠고, 이번에 돌아가도 좋은 일은 없겠지.”
“당신이 하게 되면 끝나는 거 아냐?”
“난 그럴 생각이 없어. 절대 거부야.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더 묻지 말아줘. 개인사가 좀 섞여 있어서...”
물으면 대답 정도는 잘 해준 그였지만, 회피하듯 돌아눕는 모습이 어쩐지 처량해 루이코는 더 묻지 않았다.
정적을 깨듯 하루가 움찔거린다. 조금 한숨을 쉰 루이코는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이불을 쓰다듬었다.
이불 위로도 느껴지는 작고 말랑한 체구. 너무나 연약한 아이. ...그녀를 생각해서라도 도망칠 수는 없다.
갑자기 등 뒤에서 그가 벌떡 일어났다.
Ⅲ
깜짝 놀란 루이코. 하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벽에 걸린 수건을 집어 들었다.
“씻고 올게.”
미닫이 장을 열고 몇 가지 옷가지를 익숙하게 꺼낸다. 그 행동 하나하나가 전혀 어색하지 않지만, 그것이 오히려 이질감을 느끼게 한다.
아키라가 아닌 자가, 이미 완벽히 아키라처럼 행동하고 있다.
“...으응...”
핏기 없는 얼굴에서 눈꺼풀이 조금 떨리면서 열리고 감기기를 조금 반복하며, 드디어 하루가 깨어났다. 루이코가 낮게, 속삭이듯 물었다.
“하루짱?”
시선은 이쪽을 보아도 대답이 금방 돌아오진 않는다. 대신 뭔가 안타까운 눈빛으로 입만 벙긋거린다.
“설마, 목소리가... 안 나와?”
겁먹은 사슴 같은 눈빛과 함께 약간 고개가 끄덕여진다. 하지만 눈빛은 무언가를 묻고 있다. 여긴 어디이며, 그리고 어떻게 된 건지.
루이코는 매우 고민했다. 어떻게 이야기해 주어야 하지? 그 망설임은 깊고 길어, 그저 대답 없이 이불 밖으로 빠져나온 손을 힘주어 잡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설명이 필요하면 그가 해 주겠지. 이성인이라고 해도 말은 통하고, 또 의외로 수다쟁이다.
“괜찮아. 그는 무사하니까.”
애매하게 말했지만 그녀는 자기 기준에 맞춰 이해한 듯하다. 조금 안도하는 듯 편해진 시선에 루이코도 옅게 웃었다.
“나도 괜찮아.”
잠시 뇌리를 스치는 생각. 지금 하루와 같이 도망가면 어떻게 될까...
하지만 그녀의 세계는 매우 좁아, 수학여행을 제외하고는 북해도를 떠나 본 적이 없다. 어릴 때부터 알던 친구들은 있지만, 혼슈(本州) 쪽으로 대학을 가거나 다른 일로 바쁘다. 숨겨줄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제 목숨 챙기기도 바쁜 이성인이 그녀를 마냥 찾아다니진 않을지 모르지만, 당장 눈앞에 누워 있는 하루를 끌고 험난할 것이 빤한 도피생활을 한다는 것은 전혀 엄두가 안 난다.
게다가, 아키라는 우릴 살리기 위해 살 수 있는 기회도 포기했다는데, 자신이 그런 짓을 한다는 것은...
애당초 나는 그만큼 악당도 아니다. 어울리지도 않는다.
뭔가 무기나 몸을 지킬 만한 것이 있으면 좋겠지만... 둘러보니 차곡하게 쌓인 공구 몇 상자에, 전부 기계와 관련된 책들이 꽂힌 3단 책장이 전부다.
또래의 청년이 가질만한 흥미본위의 책은 하나도 없다. 대신 모든 책이 상당히 낡고 손때가 듬뿍 묻어 있다. 아마 수도 없이 뒤적거렸겠지.
루이코는 문득 몹시 슬퍼졌다.
아키라... 어지간히도 자기 꿈이 확실했구나. 하지만 스무 살 짧은 인생을 살 줄 알았다면 조금은 다르게 살았을까. 좀 더 눈에 띄게 웃고, 울고, 화내고...
하지만 후회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단 어딜 가야 한다면 최소한의 물품은 챙겨야 하지 않을까. 여기서 집까지 큰 블록이 세 개나 되는 하루짱은 어떻게 하나. 내 것을 준다 해도 옷 사이즈조차 꽤 다른데...
생각을 거듭하는 사이 하루가 움직였다.
“일어날 수 있겠어?”
긍정의 눈짓과 함께 그녀가 상체에 힘을 주고 루이코가 어깨를 잡아 도와준다. 낮은 한숨과 함께 그녀가 자신의 목을 어루만졌다.
인기척도 없이 방문이 열린다. 조금 전 들고나간 잿빛 트레이닝복. 조금 젖은 머리에는 수건이 얹어져 있다. 하루가 눈을 뜬 것은 보았겠지만, 그도 별다른 감흥은 없는 듯 스스럼없이 옆에 풀썩 주저앉았다.
루이코는 오싹했다. 온 몸의 털이 곤두서는 이 느낌, 몇 번이고 겪었지만 여전히 싫다.
“일어났네.”
그가 멀쩡한 것을 하루는 분명 의아해하고 있다. 하지만 입만 벙긋거려 마치 무성영화를 보는 것 같다. 그 대신, 무려 먼저 손을 뻗어 그의 오른팔을 잡아보고, 이어 여전히 타오르는 듯 붉은 눈동자를 이상하게 바라본다.
그의 목덜미와 얼굴에 나 있는 피멍을 보고 그녀가 다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여전히 낮은 신음 정도에 불과하다. 그녀도 답답한지 거듭 얼굴을 찌푸렸다.
“난 괜찮아.”
그는 안심시키려는 듯 싱긋 웃으며,
“왜 그래. 말을 못해?”
루이코가 대신 답했다.
“응... 성대를 다쳤는지...”
“그래? 그럼 잠시 볼까? 목 보여줘.”
뻗어지는 손길에 하루는 움찔했지만 의외로 별로 저항하지 않았다.
루이코도 움찔했다. 저 손이 한번 쥐어지기만 하면...
하지만 손길은 예상 외로 조심스럽다.
“손상은 크지 않으니 바로 치료해 줄게.”
왼손에서 옅은 빛이 뿜어진다. 손목에서 손끝까지. 마치 손 모양의 작은 전구가 켜진 것 같다. 몇 초도 지나지 않아 그는 손을 떼며,
“반시간 정도 기다리면 말이 나올 거야. 루이코 너는 어때? 딱히 아픈 데는 없어?”
“...없는 것 같아.”
“뺨은 빨간데...? 이대로는 네 집에 가면 들킬걸.”
“에? 집에 보내줄 거야?”
듣던 중 반가운 소리지만...
“며칠 여행할 짐은 집에서 챙겨. 하지만 그 뺨으로 갔다가는 의심을 살 테니까, 너도 치료해 줄게.”
거부할 틈도 없이 두 손이 뺨에 닿는다. 소리치고 싶었지만 억지로 참았다. 야수의 기분을 건드려 좋을 것이 없다.
하지만 루이코는 놀랐다. 그 손은 살아있다고 보기에는 몹시 차갑다. 언젠가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마지막 인사를 나누면서 짚어봤던 이마에 못지않다.
하지만 손은 금방 따뜻해지면서, 뺨에 닿은 느낌이 마치 온탕에 들어간 듯하다. 이어 약한 전기라도 흐르듯 진동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다시금 손을 떼며,
“이걸로 됐으니, 이젠 너희 집에 가서 짐을 챙기자. 많이는 필요 없어. 이동에 방해되니까.”
문득 악당의 웃음이 지어졌다.
“그리고 알지? 도망가도 소용없어.”
그가 어떻게 했는지, 통증이 금방 가라앉았다.
아키라의 집에는 2048년식 토요다 전기차가 있다. 아직 제대로 걷기는 힘든 하루를 루이코가 부축해 뒷좌석에 태웠다.
나오기 전, 루이코는 물을 적신 수건으로 먼지를 닦고 머리는 다시 빗어 정리를 했다. 그가 먼저 쓴 목욕탕이어서 거리껴지긴 했지만 할 수 없었다.
“오랜만이에요. 아주머니.”
“어서 와, 아키라짱. 이게 얼마만이야...?”
붉은 눈을 감추려 색이 옅은 선글라스를 쓴 그는 참으로 넉살이 좋다. 어머니가 웃었다.
“이웃에 살면서도 참 보기 힘드네. 그런데... 얼굴에 멍이 들었네?”
“조금 굴렀어요. 바이크를 타다가.”
바이크를 싫어하는 어머니는 루이코를 바라보았다. 평소의 잔소리가 귓전을 때리는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그조차 그리워지겠지.
사실 루이코는 혼신을 다해서 충동을 억제하고 있었다. 이 녀석은 아키라의 모습이지만 이성인이라고요...!! 지금 엄마의 딸이 이 자식 때문에 가시밭에 구르게 생겼다고요...!!
물론 그랬다가는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그는 아직 적대적인 행동을 보이지 않지만, 언제 돌변해서 일가를 몰살할지도 모른다.
...잊지 말자. 그는 악당이야.
무엇보다 어머니가 믿어주지 않겠지. 딸이 갑자기 미쳤다면서, 호들갑 떨며 병원에 데리고 가려 할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속도 모르고 웃었다.
“다시 나갈거니?”
“...네.”
“어디로? 미야시타 군이랑? 저녁은 안 먹고?”
루이코는 대답대신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도 더는 묻지 않았다. 잔소리를 하고 싶지만 옆에 아는 얼굴도 있고, 같이 움직이니 별 문제 없겠지. 그리 생각한 듯 하다.
그러고 보면 어머니는 묘하게 아키라에게 호의적이었지. 딸이 친분을 맺고 있는 유일한 남자라서일까.
“차라도 가져다 줄까? 건너편 집의 오오키 할머니가 조금 주셨던 것이 있는데...”
“괜찮아요. 금방 나갈 거니까.”
루이코가 거절했다. 이 녀석에게는 수돗물도 아깝다.
그가 눈짓했다.
“갔다 와. 기다려 줄게.”
어머니에게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뱉은 그녀는 재빨리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불편한 심기를 보여주듯 일부러 발소리를 내면서. 이렇게 사소한 반항밖에 하지 못하는 자신을 원망하며.
아끼던 백팩에 생각나는 대로 구겨 넣었다. 여자가 필요한 용품은 남자들이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많다. 하루의 것까지 생각해 간신히 모든 것을 챙기고 나자, 작은 백팩은 터져나갈 정도다.
돈이 필요할지도 모르지만 저축이 30만 엔은 있고, 일본 내라면 어디든 ATM 정도는 있을 테니 그다지 문제는 없다. 지갑에도 부비(部費)의 일부로 4만 엔 정도가 들어있다. 훌륭한 횡령이 되겠지.
자신의 일행들, 아마 시간이 지나도 찾아오지 않는 그들을 걱정하며 돌아왔을 확률이 높다. 그리고 이곳저곳 파괴된 것을 보게 되면 기겁을 하겠지.
좌석 주머니에 넣어놓은 휴대전화는 바이크와 함께 박살나버렸고, 아키라와 하루의 것도 아마 같은 꼴이 났으리라. 연락할 수단이 없다면 집에라도 찾아올 것이지만, 그 전에 이미 자신들은 떠나 있으리라.
“저, 다녀오겠습니다.”
저녁 준비로 바쁜 탓에 그저 뒤를 돌아본 어머니가 웃었다.
“일찍 와. 루이코짱.”
아무 것도 모르는 얼굴에 순간 조금 눈물이 났다. 어쩌면 생각보다 긴 이별이 될지도 모른다.
가기 싫어.
당장 뛰어나가서 그의 멱살을 잡고 흔들고 싶다. 나의 평온했던 일상, 그리고 아키라를 돌려줘...!!
충동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그녀는 어머니의 목에 팔을 두르고 등에 기대었다. 철들고 나서 단 한 번도 기대보지 않았건만, 지금은 몹시도 기대고 싶다.
새삼 깨닫는다. 어렸을 적 기억보다 놀랄 정도로 줄어들어 있다. 아이는 빠르게 성장하고 부모는 더 빠르게 늙어간다.
“응? 안하던 짓을 하네? 무슨 일 있니?”
이상함이라도 느낀 듯 어머니가 반문했지만,
“아뇨...”
마음은 괴롭기 그지없었지만,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말은 태연했다.
“다녀올게요. 무사히...”
돌아서는 발걸음은 참으로 힘겹다.
루이코의 백팩을 본 그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뭘 그리 많이 싼 거야? 저녁밥이라도 갖고 온 거야?”
다들 점심도 건너뛰었고 곧 저녁때라 배가 고플 법 하지만, 긴장 때문에 식욕도 없다.
“당신이 한동안 밖에 있을 생각을 하라며...?”
“그거야... 그런데 예정 변경. 어지간하면 오늘은 넘기지 않을 거야. 아니, 확실해.”
운전대를 잡은 그의 손가락이 초조히 핸들을 퉁긴다. 뒷좌석에서 루이코가 앞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무슨 뜻이야?”
“조만간 공격을 받을 확률이 높다는 거야. ...시선을 느껴...”
“에...?!”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이상은 없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하는 목소리는 손가락과 달리 태평스럽다.
“괜찮아. 공격하려면 벌써 했겠지. 나중엔 모르지만...”
“그럼 빨리 가!”
어머니를 말려들게 할 수는 없다. 전형적인 주택가 주민인 이웃들도 마찬가지다.
“저기, 미아시타 상... 어디로 가? 집에 데려다 주려고?”
이제야 목소리가 나오는지, 루이코의 옆에 앉은 하루가 조심스레 물었다. 먼저 말하는 법이 거의 없고, 상대가 아키라인 경우에도 마찬가지지만 이번은 다르다. 평소엔 맹한 그녀도 심상찮음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대답대신 운전석에서 내린 그는 뒷좌석의 문을 연다. 졸지에 그녀들을 한 자리 밀어내고 옆에 우겨 앉은 그는 루이코의 뺨을 두 손으로 움켜잡았다.
이어 가까워지는 그의 얼굴.
“무, 무슨...!!”
루이코는 기겁했지만,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들이닥친 그 탓에 서로의 이마가 부딪힌다. 눈앞에 흡사 불꽃이라도 튄 것처럼 아찔하고, 아프지는 않았지만 이내 약한 현기증과 토기(吐氣)가 올라온다.
이어 하루도 마찬가지. 다만 다른 것은 그녀는 이내 기절하며 뻗고 말았다는 것이다. 루이코가 외쳤다.
“뭐야?!”
하지만 귓가, 아니 직접 머리로 ‘말’이 들린다.
-별 것 아냐. 일종의 뇌파(腦波)의 링크지.
그는 입을 열지 않았지만 목소리는 그대로 들린다. 흡사 이어폰을 듣는 느낌이다.
“필요하다면 내가 네 머릿속으로 직접 말을 걸 수 있도록 한 거지. 서로 떨어질 경우를 대비해서.”
“텔레파시 같은 것?”
“비슷해. 아, 그리고 네 생각은 전해지지 않으니 안심하도록.”
편도만 가능한 것임은 다행이다. 지금까지 속으로 욕하고 있던 것을 알리고 싶지 않으니까.
다시 앞자리로 돌아간 이성인이 운전대를 잡으며,
“그리고 하루에겐, 부딪히는 순간에 뇌로 직접 정보를 보냈어. 한꺼번에 많은 정보를 보내니까 과부하가 걸릴 수밖에. 아직은 기절한 편이 도움이 되기도 하고...”
루이코는 기가 차서 외쳤다.
“하루짱은...! 우릴 따라가지 않겠다고 할 수 있잖아!”
“싫다고 해도 통할 상황이 아니잖아?”
그는 다시금 악당의 미소를 남겼다.
우울함과 두려움이 점철된 가운데, 그들을 태운 토요다는 이별을 고하듯 엔진음을 울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정든 집과 익숙한 거리가 뒤로 스쳐지나간다.
떠나기 전에는 알지 못했던, 정녕 소중한 세상이 멀어져가고 있었다.
창밖의 풍경이 지나가는 속도가 올라갈수록, 그녀는 더욱더 간절하게 빌었다.
되도록 빨리 돌아올 수 있기를. 그리고 예전과 같은 일상을 다시 찾을 수 있기를.
다시는 일상이 지겹다거나... 그런 철없는 생각은 하지 않을 테니까.
제발.
수고하셨어요.
- 작가의말
< 다음화 예고 >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시작되고, 조금씩 밝혀지는 이성인과 추적자와의 악연.
그리고 차츰 드러나는 그의 본의(本意).
과연 그들은 추적자의 손을 뿌리치고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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