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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연 님의 서재입니다.

람의 계승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저스연
작품등록일 :
2015.03.21 02:01
최근연재일 :
2015.09.01 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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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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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5.11 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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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글자
20쪽

람의 계승자 - ep.5 - 왕하직속뭐시기(完)

DUMMY

“안개송곳니는 스벤달과 접촉하려 했습니다. 저희는 실제로 아케니온의 제랄드가 그자와 함께 있는 것을 보았지요. 그게 이 북진의 의도입니다.”


“..잘 이해가 안 가는데.”


“이를테면 이런 겁니다. 전황을 리크나이츠 대 아스트리카가 아니라, 브리토리스까지 추가해야 한다는 거죠.”


루도는 손가락을 가리켜 브리토리스 왕국을 가리켰다. 물론 전황판은 카잘산맥 이남지역만 표현한 거였기 때문에 그의 손은 전황판 북쪽, 레미나가 앉은 지역을 향했다.

이미 그 시점에서 루도의 의중을 알아챈 이도 있었다. 이칼롯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제리온이 그를 다그쳤다.


“뜸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봐 짜샤. 그다음은?”


“시점을 바꾸면 돼. 안개송곳니, 즉 브리토리스 왕국의 입장에서 바라보자고. 레이시의 목적은 대륙통일이야. 이를 위해서는 지형적 장해인 카잘산맥을 넘는 게 필수요소지.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카잘산맥을 통과할 수 있는 관문은 하나뿐이지.”


“폭풍협곡...”


“맞아. 폭풍협곡을 지나쳐온다면 가장 먼저 남하를 위한 전략적 요충지가 필요할 테지. 스벤달이 이미 안개송곳니의 개가 되었다고 한다면 당연히 그 요충지를 찾으러 갈 테고.”


오늘따라 머리가 팍팍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안개송곳니에 대해 쉬지 않고 분석한 까닭일까? 루도는 말 한 번 더듬거리지 않고 거침없이 설명을 이어갔다. 디리터가 얼떨떨한 얼굴로 질문을 던졌을 때에도, 그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거침없이 답했다.


“그런데 폭풍협곡을 어떻게 넘어 오냐? 거긴 뭐냐...신의 아이가 친 결계로 막혀 있잖아.”


“여기부턴 억측이지만, 그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이겠지.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남하를 계획할 수 있겠어? 아마 아반케즈의 아이를 이용했을 수도 있고...”


그때 란도스가 루도의 말을 끊었다.


“아니, 잠깐. 난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는군.”


이미 이목은 전부 루도의 거침없는 한 마디에 쏠려 있었다. 때문에 란도스의 질문도 반론이라기보다는, 그의 명쾌한 해답을 바란 것일지도 몰랐다. 그가 말했다.


“안개송곳니의 저의가 어찌 됐든 라키시아를 함락하는 전략적 가치에 비할 바가 못 되네. 수도함락만으로 우리는 항복문서에 서명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말이지.”


“그러니까 브리토리스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는 겁니다, 폐하.”


“...흐음?”


“얼핏 보기에 리크나이츠라는 공동의 적이 있는 것 같지만, 사실 브리토리스에겐 아스트리카도 격파의 대상입니다. 지금 이대로라면 아스트리카가 압도적으로 리크나이츠를 정복할 텐데, 그건 브리토리스에는 좋지 못한 소식이죠. 적어도 양쪽의 주력이 전부 만신창이가 되지 않으면 곤란합니다.”


“엇...아니, 설마?”


슬슬 앞뒤가 맞아들어 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루도의 분석력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도 이번만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개송곳니의 입장에서는 아스트리카의 연전연승이 달갑지 않을 것이다. 3개 기사단이 전부 건재하고, 보급도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건 레이시가 의도한 바가 아니다. 브리토리스의 정복전쟁을 위해서는, 양군이 막상막하의 접전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을 의도한 포석이었으니까. 아스트리카가 그렇게 압도적이지만은 않은 병력으로 선전포고를 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백천기사단이 너무나도 쉽게 마드리고를 빼앗기면서 무게추가 기울기 시작했다. 레이시로서는 자신의 계획을 틀어지게 한 인물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흑연기사단의 단장 스벤달 오빌리크에게.

이번에는 레미나가 물었다.


“어...지금 이야기 흐름으로 봐서는 아스트리카가 완전히 안개송곳니의 꼭두각시가 된 것처럼 보이는데, 그럼 그냥 리크나이츠만 점령하면 끝나는 일 아닌가요?”


“꼭 그렇지만도 않아. 내가 보았던 스벤달은 안개송곳니를 이용했으면 했지 결코 밑에 들어가려고 하진 않았어. 뭐 이번에는 양쪽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모양이지만, 여하튼 모든 게 레이시의 뜻대로 이루어지진 않는다는 거지. 실제로 훼창기사단과 마르세아기사단은 흑연기사단과 별개로 움직이고 있잖아? 아무리 안개송곳니라도 군대 전체를 통제할 순 없을 테니까.”


루도의 설명은 일목요연했다. 그것이 리크나이츠의 미래에 있어 너무나도 비관적이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그의 조리 있는 분석 덕에 자리는 얼음을 쏟아 부은 것처럼 차가워졌다.

란도스가 착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우린 어떤 행동을 취해야겠는가?”


루도는 힘차게 대답하려다가, 곧 당황하여 말을 얼버무렸다. 거기까진 생각해놓지 않은 까닭이었다.


“에...예? 그건 저도 잘...”


“그런가...좋은 분석 고맙네. 좀 더 공부하면 훌륭한 작전참모가 될 수 있을 것 같군. 그럼 이제 문제는...흑연기사단의 다음 목표가 어디냐는 건데...”


그때 침묵을 지키던 이칼롯이 작은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한 마디를 던졌다.


“레인스터...”


“...?!”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레인스터 도시가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곧 어째서 이칼롯이 이 도시를 언급했는지를 깨닫고 경악했다.


“이건 정말이지...”


리크나이츠 왕국은 크게 북부와 중부, 남부로 나뉜다. 중부는 교통의 요지임과 동시에 각종 기간산업이 발달하였고, 남부는 텔아단-퀴넨-아스트리카와 인접해있다는 이점을 살려 일찍부터 중계무역이 번창했다.

이에 반해 북부는 거짓말로도 번화했다고는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영지 자체가 산간에 위치한 경우도 많고, 도시가 대부분 띄엄띄엄 떨어져 있어 교류도 원활하지 못하다. 그나마 가장 발달한 것이 레인스터인데, 이마저도 최근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주변 도시와의 교통로를 정비한 결과다.

그러나 북부지방이 침체된 가장 큰 이유는 그 ‘폐쇄성’에 있다. 카잘산맥이라는 벽에 막혀 북쪽으로는 진출할 기회조차 없고, 동쪽에는 적성국인 아스트리카가 버티고 있다. 바다는 어떤가? 원양항해를 시도할 기술력도 없을뿐더러 경제적 가치도 전무한 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리크나이츠의 오랜 역사 속에서 북부지방은 늘 소외당한 채였다.

그런데, 브리토리스의 개입으로 결코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변화가 이 지역에 찾아오게 되었다. 그들이 폭풍협곡을 돌파한다면, 무엇보다 전략적 교두보로 삼을 요새가 필요할 것이다. 카잘산맥에서 그리 멀지 않고, 방어적 이점을 갖추고 있으며, 남진을 위한 보급로로까지 이용할 수 있는 곳.

레인스터 외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잠깐만요...레인스터에는...!”


마리네가 무언가를 개진하려다가 주위의 분위기에 밀려 입을 다물었다. 그만큼 공기는 무거웠고,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건 대체...북쪽을 열어둔다는 것만으로도 이 정도의 전략성을 확보할 수 있단 말인가?”


“레인스터가 뚫리면 북부는 물론이고 중부 전역이 적의 사정권에 들어가게 되는군요. 어찌 보면 마드리고보다 더 중요한 거점입니다.”


란도스는 작은 충격을 받은 듯 턱을 감싸 쥐었다. 레인스터를 빼앗기면 리크나이츠는 저항할 기회조차 잃어버리게 된다. 브리토리스의 군대가 날개돋친 듯 전 국토를 유린할 테니 말이다.


“레인스터를 사수해야 합니다! 이곳이 함락당하면 정말 끝장이니.”


“하지만 어떻게 말인가?”


케이달은 말을 잇지 못했다. 눈앞의 적도 어쩌지 못하는 상황에서, 보이지 않는 적을 대비해야 하는 상황이다. 모든 것을 지킬 수 있는 방법 따위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다.


“라키시아가 함락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레인스터를 빼앗긴다면, 리크나이츠 왕국 자체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이칼롯이 모두가 알고 있는, 그러나 누구도 감히 꺼내지 못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말했다. 그 초연하기까지 한 발언에 란도스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이칼롯 제르비안. 그런 말은 함부로 내뱉는 게 아닐세.”


“망언을 꺼낸 죄는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폐하, 지금은 선택의 망설임조차 아쉬울 때가 아닌지요.”


처음 회의를 주도해나간 게 루도였다면, 지금 흐름을 잡고 있는 쪽은 단연 이칼롯이었다. 사실 란도스는 처음부터 주눅이 든 상태였다. 그처럼 지킬 것이 많은 지위에 있는 사람일수록 ‘무언가를 버려야’ 하는 패를 고르기 망설여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미 마음속으로는 결정을 내렸음에도 끊임없이 이칼롯에게 반론을 제기하는 것이었다.


“선택이라는 게 그리 쉬운 말이 아닐세. 자네는 지금 그 단어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담겨있는지 아는가?”


“...죄송합니다. 제가 폐하의 심중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여...”


“아니, 자네는 내게 선택을 종용하고 있네. 사과를 하는 지금도 말이야. 그렇지 않은가?”


“하오나 제 좁은 식견으로는...도저히 두 마리 토끼를 잡을 방법이 보이질 않습니다.”


“가능하네! 레인스터는 AOC(Arms Of Creed)를 발동하고, 라키시아는 왕실기사단을 합세해 결사항전한다면 분명...”


그때 케이달이 착잡하게 입을 열었다.


“폐하,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운다는 게 어렵다는 걸 압니다. 그러나 브리토리스는 빠르든 늦든, 반드시 침공할 겁니다.”


“....”


란도스는 무언가에 짓눌린 듯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레미나가 위로하러 다가갔으나 그는 힘없이 손을 내저었다.

이칼롯이, 케이달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이미 질릴 정도로 통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왕관이 지닌 무게는 이 중년남성을 무겁게 압박한다. 왕으로서 이런 결정을 내린다는 게 얼마나 커다란 자책감으로 다가오는지를.

그러나 이제 그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리크나이츠는 이미 이 정도까지 몰리고 만 것이다.


“...라키시아는 500년이 넘게 이 나라의 중추를 맡고 있는, 그야말로 심장 같은 곳이네. 이 도시가 갖는 상징성은 실로 어마어마하다네.”


그의 목소리는 진이 빠진 듯 나직한 중저음이었다. 곧 레미나가 손수건을 가져와 그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었다. 그가 말했다.


“이칼롯 제르비안, 토끼 한 마리를 잃은 타격은 꽤 아플 것이네.”


“...송구합니다만, 국가의 존위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닌지요. 으리으리한 도시 따위가 아니라.”


“하핫...그야 그렇지.”


이날, 본의 아니게 로샤단은 리크나이츠의 운명을 결정짓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왕하직속특무별동대 로샤단」이 역사에 자취를 남기게 되는 첫걸음이기도 했다.

란도스가 말했다.


“수도는 포기한다. 지스카르 재상, 철수준비를 맡기겠소. 나는 따로 어전회의를 열어야 하니까. 그리고 케이달, 왕실기사단에게 전령을 보내게. 라키시아가 아닌, 레인스터로 향하라고. 결코 레인스터가 함락되어서는 안 되네.”



***



수도포기작전은 로샤단을 포함하여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공개되었다. 공연히 민중들에게 알렸다간 극도의 혼란이 야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훼창기사단이 당도할 때까진 적지 않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 지스카르는 근위대를 지휘하여 시민들을 일정비율씩 대피시키기 시작했다. 귀족부터 시작하여 학자, 법률가 등 전문직 종사자, 그리고 나아가서는 일반 농민에 이르기까지.

서민을 최하위 순위에 놓은 건 꼭 귀족의 안위를 우선시해서만은 아니었다. 도시가 점령당한다고 꼭 무조건적인 학살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군대의 규율과 보급상태, 지휘관의 성향에 달려 있는데 그런 점에서 본다면 훼창기사단의 도덕성은 적으로서도 존경할 만한 수준이었다. 그러니 추후에도 항전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적의 손에 넘어가면 곤란한 인재부터 피신시켜야 하는 것이다.

한편 란도스는 로드웰 후작 이하 중신들을 설득하는 한편 아스트리카 쪽에 사신을 보내 강화를 요청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브리토리스의 침공에 대비해 전력을 보존해 놓는 일이다. 그러니 다소 불리한 조약을 감수하더라도 아스트리카와의 전쟁을 끝낼 필요가 있었다.

궁전 내부의 상황이 어지럽게 급변하는 사이 일행은 라키시아를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전쟁은 전쟁이고, 일행은 이제 별동대로서의 임무를 수행해야만 했다.


“점심은 든든히 먹고 가자고. 이 계절의 북쪽은 상당히 추울 테니까.”


“아무래도 겨울이니까. 아, 화주(火酒) 좀 챙겨갈까? 혹한기 때 쓸만할 거야.”


“뭐, 제리온이 좋아하겠네. 가방 여유는 있고?”


“술 두어 병 정도야 뭐. 운반용 말도 따로 받았는데.”


손님이 없어 썰렁한 오후의 식당 안에서 루도를 비롯한 4인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라키시아의 정식을 즐기고 있었다. 멤버는 루도, 마리네, 이칼롯, 유미르네로, 전부 수도에 연고가 없는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자리에 없는 3인은 여행에 앞서 친지들에게 작별인사를 건네러 떠났다. 디리터는 셀린느에게, 제리온은 카츄아에게, 레미나는 자신을 돌봐주던 궁녀들에게. 공교롭게도 이들은 전부 우선대피순위에서 제외된 하류층의 사람들이었다. 때문에 위의 3인은 친지들에게 위험을 알리고, 미리 도시를 떠나라고 귀띔하러 간 것이다.

친지 이야기가 나오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또 있었다. 마리네는 회의 내내 가슴에 간직하고 있던 불안감을 조심스럽게 제기했다.


“저기, 아나이스랑 오린은 어떻게 하지? 지금쯤 레인스터에 가있을 텐데...”


“글쎄다...”


“그, 그런 말이 어디 있어? 우리 충고만 듣고 무작정 레인스터로 떠난 거라고. 그 애들을 그냥 그곳에 내버려두잔 말이야?”


“아직 레인스터가 함락된 것도 아닌데 앞서나가지 마, 마리. 그보다 로샤단에겐 로샤단의 임무가 있는 거 아니었어? 뭐, 내가 꺼낼 말은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마리네는 유미르네의 무신경함에 화가 치밀었다. 그녀의 합리주의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아나이스는 로샤단이 범죄자로 몰릴 때에도 끝까지 믿어준 사람 중 하나다. 그런 그녀를 전쟁터가 될지도 모르는 도시에 보내놓고 이제 와서 내버려두자니, 너무 매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칼롯이 움츠러든 그를 위로하려고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라. 공주님에게 부탁하면 두 사람을 보호하는 것쯤 간단할 테니까. 이참에 좀 더 안전한 곳으로 보내도록 하지. 류이덴사라던지.”


“....”


사태가 사태인지라 즐거운 식사가 될 리도 만무했다.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우겨넣고, 억지로 물을 들이붓기가 일쑤였다. 그렇게 우울한 식사를 마무리해갈 즈음 디리터가 나타났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는 어떤 낯선 아가씨와 함께였다.


“...여어, 나 왔다.”


“어서 와. 그런데 뒤에 계신 분은?”


“어...여기 계신 아가씨는 메리 론. 셀린느의 친구분이셔. 전에 신세를 좀 졌지.”


일행의 이목이 키가 훤칠한 붉은 머리 아가씨에게 쏠렸다. 뚜렷한 이목구비며 꼿꼿이 편 허리가 메이드보다는 군인에 어울리는 분위기지만, 또 나름 소박한 치마차림이 어울리기도 하는 미인이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당신들이 전(前) 범죄자 집단 로샤단이로군요.”


‘으와, 정말 생긴 것처럼 당찬 사람이네.’


첫인사부터 포스가 남다른 여인이었다. 어찌 됐든 로샤단이 에레이시아의 죽음에 연관된 것은 사실이니, 셀린느의 친구인 메리가 일행을 고깝게 보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마리네가 다른 사람들을 대신하여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에, 디리터의 동료인 마리네 캄블러라고 해요.”


“네. 곧 도시를 떠나신다면서요. 셀린느가 당신들에게 주려고 이것저것 준비해뒀는데, 애가 워낙 낯을 가려서 제가 대신 왔어요. 이건 기름을 발라 구운 훈제 육포구요. 이건 팬케이크 반죽이니 바로 구워 드시면 되고, 이건 담요니까 잘 때 덮고 자면 되요.”


그녀는 마리네가 미처 말할 새도 없이 포장된 꾸러미를 휙휙 넘겼다. 일방적인 선물전달이 끝나자 메리는 절도 있는 동작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볼일이 끝났으니, 이제 돌아가겠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마리네가 허둥지둥 일어나 말했다.


“어, 저기, 디리터, 이 분도...”


“그래, 알고 있어. 그렇다고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니실 분은 아니니까 안심해라.”


“그, 그렇구나. 부디 몸조심 하세요 메리씨.”


디리터는 셀린느를 포함해 그녀의 룸메이트 둘에게도 피난소식을 알렸다. 그런데 이 당찬 아가씨 메리는 그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고서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행동력에 있어서만큼은 로샤단을 뛰어넘을 정도였다.


“흐음, 당신들도요. 뭐 전쟁이 애들 장난은 아니니까, 때로는 도망쳐 숨을 때도 있는 거겠죠. 우리들에게 미리 경고해준 건 고맙게 생각해요.”


그걸 끝으로 메리는 등을 돌렸다. 디리터는 떠나는 그녀를 배웅하기 위해 가게 문을 나섰다. 곧 두 사람 외에는 아무도 없는 한적한 곳에 이르자 그녀가 지나가듯 무심하게 말했다.


“의외로 젊네요들. 저런 소년들도 싸우는 건가요?”


“강한 녀석들입니다. 목숨을 맡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동료죠.”


“그렇군요...또 싸움터로 가는 건가요?”


“운이 나쁘다면 그렇겠지요.”


추운 바람이 한 줄기 불어와 목덜미를 훑고 지나갔다. 메리는 카디건의 옷깃을 더욱 단단하게 여몄다. 거리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정적이었다. 멈춰 서 있는 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 움직이는 건 무언가를 아는 사람들이겠지.

메리가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무사히 돌아와요. 셀린느는 이런 형부라도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으니까.”


그러자 디리터는 담담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신경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메리. 덕분에 이번 여행은 배가 풍족하겠네요.”


“가, 감사 인사는 셀린느한테 하라고요. 그건 전부 셀린느가 만든 거니까...”


그녀는 갑자기 얼굴이 새빨개져서 발걸음을 빨리했다. 그 뒷모습에서 ‘따라오지 말라’는 메시지가 너무나도 명백했기 때문에, 디리터는 멍하니 선 채로 멀어져가는 그녀를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제리온과 레미나가 도착하자 일행은 마지막으로 카이안에게 작별인사를 하러 움직였다. 아카데미로 향하는 내내 일행은 카이안의 거취에 대해 토의했다. 요는 그를 어디로 보내느냐는 것이었다.


“메르실은 어때? 거긴 서쪽 끝이니까 전화가 닿지 않을 텐데.”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꼬맹이 하나가 잘도 지내겠다. 강도나 안 만나면 다행이지.”


“그럼 루루 아줌마한테 보내는 건? 그러고 보니 천정기사단의 단장도 람이랑 친한 사이랬는데, 몸을 의탁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안 돼. 거긴 전장이라고. 그런 위험한 곳에 보낼 수 없어.”


“끄응~. 역시 에메랄드 섬밖에 없는 건가.”


카이안의 문제는 여타 친지들보다 세심한 논의가 필요했다. ‘신의 아이’라는 특수성은 단지 육체적 안위를 떠나서 정서적인 안정까지 요구하기 때문이다.

별반 특출난 해답이 나오지 않은 가운데 의견은 점차 에메랄드 섬으로 기울어졌다. 그곳이라면 분명 믿고 맡길 수 있다. 요는 카이안을 어떻게 설득하느냐였다.


“카이안 있냐? 우리 오늘 떠나게 되어서...잠깐 들어간다.”


일행은 잠기지 않은 카이안의 기숙사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나 방 어디에서도 그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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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Lv.60 el*****
    작성일
    15.05.14 07:56
    No. 1

    생각해보니 에메랄드섬은 전화는 미치지 않겠지만 몬스터가ㄷㄷㄷ
    만약 간다손 치더라도 카이안이 자기도 자경대가 되겠다고 하거나 혹은 트롤등에게 씹혀먹힌 자경대원을 보면 어떻게 될런지...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레인Rain
    작성일
    15.07.12 17:09
    No. 2

    건필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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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 람의 계승자 - ep.5 - 승리 뒤에 오는 것들(1) +5 15.05.07 770 25 19쪽
228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10) +2 15.05.07 889 23 24쪽
227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9) +1 15.05.07 813 21 24쪽
226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8) +4 15.05.06 731 26 22쪽
225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7) +2 15.05.06 977 24 29쪽
224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6) +3 15.05.06 802 23 28쪽
223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5) +4 15.05.05 929 26 24쪽
222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4) +2 15.05.05 762 23 23쪽
221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3) +1 15.05.05 643 22 15쪽
220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2) +2 15.05.05 771 24 18쪽
219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1) +4 15.05.05 685 23 15쪽
218 람의 계승자 - ep.5 - 사냥감의 반전(4) +2 15.05.05 921 24 23쪽
217 람의 계승자 - ep.5 - 사냥감의 반전(3) +3 15.05.04 936 22 23쪽
216 람의 계승자 - ep.5 - 사냥감의 반전(2) +2 15.05.04 867 22 21쪽
215 람의 계승자 - ep.5 - 사냥감의 반전(1) +1 15.05.04 774 24 20쪽
214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5) +2 15.05.04 710 24 15쪽
213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4) +2 15.05.04 720 25 23쪽
212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3) +3 15.05.03 845 29 18쪽
211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2) +3 15.05.03 764 22 23쪽
210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1) +2 15.05.03 853 23 20쪽
209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7) +5 15.05.03 795 28 25쪽
208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6) +2 15.05.03 894 24 22쪽
207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5) +4 15.05.02 938 29 21쪽
206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4) +1 15.05.02 884 27 20쪽
205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3) +2 15.05.02 690 24 21쪽
204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2) +2 15.05.02 767 24 24쪽
203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1) +2 15.05.02 586 24 22쪽
202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6) +3 15.05.02 696 28 18쪽
201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5) +5 15.04.29 863 24 19쪽
200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4) +1 15.04.29 937 24 26쪽
199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3) +1 15.04.29 789 24 24쪽
198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2) +3 15.04.29 812 26 18쪽
197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1) +1 15.04.29 758 24 17쪽
196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8) +4 15.04.28 905 28 16쪽
195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7) +3 15.04.28 840 25 20쪽
194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6) +3 15.04.27 711 26 19쪽
193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5) +3 15.04.27 756 22 17쪽
192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4) +2 15.04.27 731 22 18쪽
191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3) +1 15.04.27 731 30 18쪽
190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2) +2 15.04.27 758 27 19쪽
189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1) +2 15.04.27 789 31 18쪽
188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完) +1 15.04.27 599 33 18쪽
187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5) +4 15.04.26 733 24 17쪽
186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4) +1 15.04.26 928 28 16쪽
185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3) +2 15.04.26 739 26 20쪽
184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2) +6 15.04.23 779 28 15쪽
183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1) +3 15.04.23 840 26 19쪽
182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2) +2 15.04.23 755 25 17쪽
181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1) +3 15.04.23 767 26 15쪽
180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0) +1 15.04.23 682 25 22쪽
179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9) +3 15.04.22 811 29 16쪽
178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8) +3 15.04.22 846 27 15쪽
177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7) +1 15.04.22 777 29 18쪽
176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6) +1 15.04.22 790 23 18쪽
175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5) +2 15.04.22 765 29 15쪽
174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4) +3 15.04.22 911 25 18쪽
173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3) +5 15.04.21 767 27 16쪽
172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2) +2 15.04.21 922 25 14쪽
171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 +3 15.04.21 806 25 17쪽
170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8) +3 15.04.21 730 24 21쪽
169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7) +2 15.04.21 703 19 15쪽
168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6) +4 15.04.20 751 24 18쪽
167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5) +2 15.04.20 655 20 18쪽
166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4) +1 15.04.20 767 23 17쪽
165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3) +2 15.04.20 738 24 16쪽
164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2) +3 15.04.20 809 20 16쪽
163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1) +1 15.04.20 821 22 21쪽
162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6) +1 15.04.20 830 29 14쪽
161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5) +2 15.04.20 711 25 18쪽
160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4) +3 15.04.19 865 28 18쪽
159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3) +3 15.04.19 947 28 18쪽
158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2) +3 15.04.19 901 26 22쪽
157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1) +5 15.04.19 1,210 46 22쪽
156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10) +6 15.04.18 901 26 21쪽
155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9) +3 15.04.18 772 26 18쪽
154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8) +1 15.04.18 657 24 19쪽
153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7) +2 15.04.18 687 26 18쪽
152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6) +1 15.04.18 748 27 17쪽
151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5) +4 15.04.18 713 23 16쪽
150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4) +1 15.04.18 669 24 17쪽
149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3) +2 15.04.18 754 22 17쪽
148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2) +3 15.04.16 849 29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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