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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연 님의 서재입니다.

람의 계승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저스연
작품등록일 :
2015.03.21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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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01 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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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22 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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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6)

DUMMY

그 순간의 환희를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우레와 같은 함성을 질러대는 병사들과, 포효하는 동물들, 그리고 경악에 휩싸인 악마들. 완전히 갈라진 게이트는 기묘하게 뒤틀리며 이 기나긴 전쟁에 종언을 고하고 있었다. 에스터페른조차도 먹구름을 거두며 승리에 도취됐다.

남아있던 로드 넷을 비롯한 많은 악마는 게이트가 폭발하기 직전 서둘러 원래 있던 차원으로 달아났다. 이곳에 머물러봤자 기다릴 것은 비참한 죽음뿐이라는 걸 이해한 것이었다. 그러나 돌아가지 못한 악마들도 많았다. 마침내 게이트가 폭발하자 살아남은 레비저들은 귀환에 실패한 악마들을 인솔하여 산속 깊은 곳으로 숨었다. 연합군은 한동안 잔당소탕에 열을 올렸으나 워낙 뿔뿔이 흩어진 터라 씨를 말리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성언’이 내려졌다. 아루의 권능이 행해지기 직전 남아있던 신들과 생텀가드들도 대부분 신계로 돌아갔다. 성언이 발동되면 더 이상 차원 간 이동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었다.

온 세상이 빛에 휩싸였다. 그 찬란한 광휘는 기이하게도 연극의 끝을 알리는 어둠과 닮아 있었다.

그렇게 성언전쟁이 끝나자 제리온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지금 한 두 시간 있었나? 전쟁치곤 너무 빨리 끝나는데.”


-그야 물론이죠. 실제로는 꼬박 닷새를 싸운 대전투였습니다. 근데 그걸 다 봤다간 여러분은 모두 말라죽을 거 아닙니까? 그리고 이 영상은 기본 바탕이 케리아돌의 기억이기 때문에 대충 중요한 부분만 보여준 겁니다.


“아루의 종복이라든가 절대소거라든가 뭐 그런 거요? 흐음...”


기억은 이제 어느 바닷가로 바뀌고, 인간을 제외한 다른 종족들이 신대륙을 찾아 떠날 때의 광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수백 척의 대함대가 출항을 준비하는 한편 드래곤들은 오랜 여정을 준비하며 날개를 쉬어두고 있었다. 인간 수백 명이 떠나는 그들을 전송해 주었는데, 그들의 표정엔 깊은 근심과 걱정이 스며들어 있었다.

인간 대표로 보이는 남자가 앞으로 나와 그레이엄에게 말을 건넸다. 그는 죽은 카츠케이로를 대신해 용의 우두머리가 되어 있었다.


“정말 떠나시는 겁니까? 우리에게 이 땅은 너무 넓습니다.”


“흥, 맘에도 없는 소릴 하는군. 우리도 좋아서 떠나는 게 아니다. 아루가 정한 ‘필멸자 협약’을 거스를 수 없어서지. 게이트는 모두 사라졌다. 그게 어떤 형태로 이루어졌든, 너희 인간들에 의해 달성되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지. 이제 이곳은 너희들의 땅이다. 하지만 착각하지 마라. 우린 결코 쫓겨나는 게 아니야. 새로운 세상을 개척하러 떠나는 것이지.”


“그래도...”


인간들은 아직 곳곳에 남아있는 악마의 잔당을 우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 종족에 대한 부러움과 시샘 때문일까, 아니면 오랜 전쟁이 그들을 지치게 한 것일까. 대륙에 남아 악마를 소탕하려는 이는 거의 없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그레이엄의 말은 ‘너희들끼리 알아서 잘해봐라.’라는 식의 뉘앙스가 풍겼다.

물론 모두가 이 땅을 떠난 것은 아니었다. 케리아돌을 위시한 몇몇 젊은 드래곤과 성언 때 이 땅을 떠나지 않았던 소수의 생텀가드들은 인간과 함께하기로 했다. 생텀가드 중에는 일행이 잘 아는 루치페리아도 있었다. 그레이엄은 인간들 틈에 섞여 있는 케리아돌에게 시선을 건넸다. 그 아련한 눈동자는 마치 작별을 슬퍼하는 아버지와도 같아서, 보는 이를 침울하게 만들었다.


“이제 시간이 됐다. 정말 함께 가지 않을 것이냐?”


“저는...이곳에 남겠습니다.”


감수성 어린 나이답게 그녀의 눈가는 촉촉이 젖어 있었다. 하지만 ‘남겠다’고 할 때 그녀의 어조는 단 한 치의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의 결심을 안 것인지 그레이엄도 더는 권하지 않았다.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넌 갓난아기 때부터 인간에게 흥미를 보였었지. 어쩌면 그게 네 운명일지도 모르겠구나. 건강하거라.”


동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배들이 차례차례 출항하기 시작했다. 드래곤들은 느긋하게,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여정에 지치지 않기 위해 천천히 날갯짓을 했다. 이로써 필멸자 연합은 완전히 와해하였고, 아르드 대륙의 지배권은 인간에게 돌아갔다.

루도는 수평선을 건너는 함대를 보며 말없이 턱을 괬다. 저녁노을 빛을 담뿍 받은 그들 배는 마치 지는 해를 잡겠다는 듯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었다.


“그럼 아직도 세상 어딘가에는 인간 말고도 여러 종족이 살고 있겠구나...거 참...”


다시 장소가 바뀌었다. 조금 전 해안가의 목가적인 풍경과 달리 이번에는 비가 내리는 산속 계곡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은 봉우리와 가파른 절벽, 그리고 계단식으로 조성된 폭포의 전경은 특히 디리터가 잘 아는 것이었다.


“엇! 카잘 산맥이다.”


계곡 안에서는 중대 규모의 병사들이 악마 잔당과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악마 쪽은 한 기의 레비저와 다수의 슬러터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아무리 패잔병의 무리라 해도 인간만으로 상대하기에는 벅찬 규모였다.

병사들이 슬러터와 접전을 벌이는 사이 두 마리의 드래곤이 레비저를 상대했다. 그날 떠나지 않았던 잔류자들, 케리아돌과 브론즈드래곤 라엘크라드였다.


“크아아...귀찮게 이리저리 날아다니기나 하고...정면에서 덤비란 말이다!”


레비저는 케리아돌을 노리고 커다란 대검을 이리저리 휘둘렀는데, 그때마다 그녀는 날개를 비틀어 이리저리 피했다. 그녀가 주의를 끈 틈을 타 라엘크라드가 악마의 면상에 직격으로 브레스를 날렸다. 머리가 완전히 날아간 놈은 힘없이 땅에 고꾸라졌다.

우두머리가 쓰러지자 슬러터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몇몇은 추격당해 퇴치됐지만, 대다수는 다시 산중 깊은 곳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늘 이런 식이었다. 아무리 해치워도 악마들은 다시 나타났다. 산속에 은거하며 게릴라전투를 펼치는 악마들을 일거에 소탕하기란 대단히 어려웠다. 그렇다고 그들의 공격이 미진하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라 슬러터들이 나타나면 마을 하나가 사라지는 데에는 반나절도 걸리지 않을 정도였다. 특히 레비저급의 악마는 재앙 수준이어서, 오직 생텀가드와 드래곤만이 그들과 대적할 수 있었다.


“끝이 보이질 않는군. 요즘 들어 레비저도 심심치 않게 보이는데.”


라엘크라드는 쓰러진 레비저를 보며 진저리를 쳤다. 차라리 깔끔하게 전멸시키면 좋으련만, 악마들은 마을을 습격할 때면 늘 생존자를 남겨 공포심을 극대화하고 있었다. 악마가 나타났다는 제보는 끊이질 않았고, 그러다 보니 몇 안 되는 드래곤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원정길에 올라야만 했다.

자세히 보니 그와 케리아돌의 몸엔 잔상처가 수도 없이 나있었다. 특히 케리아돌의 허벅지에 난 상처는 제법 깊어 그녀는 걸을 때마다 다리를 절었다. 꼬리에 묶어놓던 예의 리본은 이젠 보이지 않았다. 계속된 전투는 위대한 드래곤조차도 지치게 만든 것이다. 그녀가 말했다.


“일단 인간들이 제대로 된 진지를 구축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게 최선 아닐까? 이렇게 끌려다니기만 하는 건 너무 위험해. 나도 벌써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라엘크라드는 그녀의 말에 콧방귀를 뀌었다. 함께 남긴 했어도 그와 그녀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했다.


“하! 그런 짓을 할까 보냐? 내가 여기 있는 건 악마를 하나라도 더 죽이기 위함이야. 너처럼 온건주의자가 아니라고, 귀족 아가씨.”


“라엘! 여기 있는 이상 우리라고 인간을 도외시할 순 없어. 협력하지 않으면 피차 손해만 입을 뿐이야.”


“흥, 난 그딴 거 몰라. 악마만 퇴치할 수 있으면 족하지. 어차피 그럼 인간에게도 이득이잖아?”


드래곤을 비롯한 연합의 구성원들이 바다를 건너 떠난 지금 악마 잔당은 더 이상 ‘잔당’이 아니었다. 파악된 레비저만 해도 서른에 달했고 기타 슬러터나 워리어급은 인간의 총 전력을 가볍게 상회했다. 처음에는 산속에 숨어 눈치만 보던 그들도 연합이 와해하였다는 사실을 알자 점차 적극적으로 공세에 나서기 시작했다. 지금은 드래곤과 생텀가드들의 활약으로 위태위태하게 전선이 유지되고 있긴 하지만, 주력이 무너지기라도 하는 날엔 그날로 악마들에게 이 땅을 넘겨야 할 판이었다.

케리아돌은 날개에 묻은 피를 계곡물에 헹궜다. 상처가 쓰라린지 그녀는 물을 적실 때마다 어깨를 움츠렸다.


“내가 바란 건 이런 게 아니야...이래선 성언전과 다를 게 하나도 없잖아.”


그렇게 5년이 지났다. 악마는 더욱 기승을 부렸고 그에 따라 인간 쪽은 피폐해져만 갔다. 애초에 연합 최약의 전력이었던 인간에게 서른이 넘는 레비저를 상대하기란 무리였다.

그렇게 전선이 붕괴되어 갈 때 즈음, 아루의 성은이 내려졌다. 하늘 끝자락, 아니 차라리 그보다 훨씬 높은 어딘가, 우주라고 해도 좋을 만큼 아득히 먼 곳에서 한 줄기 섬광이 내려왔다. 처음에는 붉은색이었다.


“저건 뭐죠? 베릴의 솔라레이랑은 다른 거 같은데.”


마리네의 물음에 메디치는 살포시 미소 지으며 답했다.


-저것이 신의 아이가 소환된 첫 번째 순간입니다. 붉은색은 아반케즈를 상징하죠.


“아...신의 아이! 빛과 함께 내려오는 거구나.”


-신의 아이는 아루의 종복들이 보내는 것이지만, 소환의 주체는 인간입니다. 성언으로 인해 신도 이 땅에 강림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따로 영혼을 빚어 인간의 육신에 깃들도록 한 거죠. 그럼 인간의 몸으로 어떻게 권능을 행사하느냐? 이건 아루의 수정이 해결해주었습니다. 인간들의 신을 기리는, 혹은 영광을 탐하는 상념이 수정에 쌓이고, 이 상념은 에센스화(化)되어 신의 아이가 사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첫 소환 때는 아루의 종복들이 에센스를 전부 채워놓고 갔기 때문에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지만, 보통 수정에 에센스가 쌓이기까진 5백 년 정도의 세월이 걸립니다. 에센스가 꽉 차 수정이 빛나기 시작하면 그때서야 소환이 이루어지죠. 때문에 성언 직후 첫 번째 소환이, 500년이 지난, 그러니까 알테야 제국 분열기에 두 번째 소환이, 다시 500년이 지난 현재 세 번째 소환이 행해진 겁니다.


붉은 섬광이 내려오고 얼마 후, 연달아 세 개의 빛이 대지에 꽂혔다. 섬광들은 각기 아루의 종복을 상징하는 색을 띠고 있었는데, 펠아람의 자색, 루프리모의 녹색, 베릴의 황금색이 그것이었다.

이칼롯이 말했다.


“저런 빛의 기둥, 본 적이 있어. 그냥 독특한 무지개라고 생각했었는데...”


신의 아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각성했고, 이어 대대적인 악마 소탕전이 전개되었다. 로드 하나 없던 악마들이 이 강대한 힘 앞에 어찌 저항할 수 있겠는가. 악마 군대는 신의 아이에게 말살되거나, 혹은 인간에 의해 봉인되거나 하면서 서서히 붕괴하였고, 신의 아이가 활동한지 1년이 지난 후에는 완전히 대륙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인간의 완벽한 승리였다.

그리고 다시 빛이 주위를 휘감기 시작했다. 다시 장소가 바뀌고 있었다.


“메디치님, 그런데...”


루도는 이해할 수 없는 전개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마리네도, 디리터와 제리온도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제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섬광은 분명 4개밖에 떨어지지 않았는데요? 에스터페른은 어디로 간 거죠? 그분 역시 아루의 종복이잖아요. 혹시 아예 신의 아이를 만들지 않은 건가요?”


-그건...


메디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 자조적인 미소는 그의 입가에 한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그는 말을 얼버무릴 뿐 굳이 답을 알려주려 하진 않았다. 귀로 듣기보다 눈으로 보는 게 훨씬 나을 거라 생각한 것이었다.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오, 케리아돌! 아름다운 케리아돌! 나를 만나주러 이 먼 곳까지 행차하셨구려. 미리 기별이라도 해주셨다면 내 당신 오시는 길에 융단을 깔아두었을 텐데요.”


장소는 이제 책이 빽빽하게 쌓인 어느 서재로 전환되었다. 물론 말이 서재지 책이란 책은 모조리 땅바닥에 굴러다니고 있었고 방은 어두침침하여 음습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오직 구석에 장식된 은촛대와 벽면의 태피스트리만이 이곳의 소유주가 괜찮은 재력가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 어두침침한 공간에서 한 중년신사가 세레나데를 부르는 중이었다. 대상은 말할 것도 없이 케리아돌이었다.

이제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한 그녀는 복장이나 생김새가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거짓말 같은 용모와 몸매를 그대로 드러내는 벨벳 드레스는 남성이라면 사랑을 고백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물론 그녀가 드래곤이라는 걸 몰랐을 경우에 한해서지만.


“윽...먼지. 얼마나 청소를 안 한 것이냐? 일단 창문부터 좀 열거라.”


그녀가 코를 부여잡으며 말했다. 그러자 중년남자는 깍듯이 허리를 굽히고는 우아하게 돌아 커튼을 걷었다. 한낮의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졌다.


“분부대로 합지요, 나의 케리아돌. 그보다 오늘은 더 한층 아름다우시군요. 그 요염한 드레스는 어디서 맞춤 제작한 것이지요? 특히 그 허리에서 엉덩이로 이어지는 라인이 정말이지...”


“시...시끄럽다! 그대는 수치란 것을 모르는가? 어쩜 그리 만날 때마다 발정을 해대는지...아니, 그보다 난 드래곤이라고!”


“오, 아름다운 이여. 사랑에 종족이란 요소는 그리 중요하지 않답니다. 저는 당신의 비늘 하나, 머리카락 한 올도 더없이 사랑스럽답니다.”


“뚫린 입이라고 말은...”


그의 느끼한 고백에 케리아돌은 진저리를 쳤다. 그러나 먼저 찾아온 게 자신인지라 어쩔 수 없이 방 안에 발을 들이밀었는데, 바닥이 어찌나 난장판인지 드레스를 한껏 걷어 올린 채 조심조심 걸어와야만 했다. 그러자 남자는 또 그 드러난 정강이를 보곤 갖가지 찬사를 쏟아냈다.

제리온이 남자를 한심스럽다는 듯이 쳐다보며 말했다.


“이 밝히는 아저씨는 누구야? 드래곤을 상대로 겁도 없네.”


메디치는 두통이 이는지 이마를 부비며 답했다.


-...제가 다 부끄럽군요. 마법사 나타니엘 우드빌입니다.


“으헉? 이단자 나타니엘?!”


역사상 최강의 마법사이자, 신의 아이를 마인드컨트롤하려 해 이단자로 규정됐던 남자의 몰골은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일단 무엇보다 백발이 무성하고 가슴까지 수염을 기른 노인의 행색과는 명백히 거리가 있었다. 이제 막 마흔을 넘겼을까? 올백으로 빗어 넘긴 머리와 게슴츠레하게 처진 눈동자는 지식인이라기보단 호색가라고 칭하는 게 더 어울릴 정도였다.

케리아돌은 의자에 앉으려다가 뽀얗게 쌓인 먼지를 보고는 한숨 쉬며 부채를 부쳤다.


“그리고 계속 그냥 넘어가고 있는데, 앞으로 내 본명을 부르는 일은 없도록 하라. 내 정체는 극비사항이니까.”


“하핫, 여부가 있겠습니까. 단둘이 오붓하게 있을 때만 부르도록 하지요.”


“단둘이 있을 때도 부르지 마!”


그녀는 근엄해지려 애썼으나 아무리 봐도 주도권은 나타니엘에게 있었다. 티격태격 싸우는 두 사람을 보며 루도가 물었다.


“극비라니 이게 뭔 소리에요?”


-악마가 사라지고 나자 드래곤이나 생텀가드에 대한 필요성도 점차 퇴색해갔지요. 생텀가드들은 완전히 활동을 멈추고는 기나긴 수면에 들어갔습니다. 뭐 대다수는 현재 신전에 모셔져 동상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요. 그리고 드래곤은 딱 둘만이 살아남았는데, 그게 케리아돌과 라엘크라드입니다. 라엘크라드는 인간세계가 싫어 북쪽 산중 깊은 곳으로 떠났지만 케리아돌은 달랐죠. 그녀는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해 그들의 역사를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관심 받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정체가 드러나는 걸 극도로 꺼렸죠. 이때도 그녀의 정체를 아는 건 나타니엘을 비롯해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심지어 국왕도 이 사실을 몰랐을 정도니까요. 참고로 인간일 때의 이름은 카나입니다.


일행은 좀 더 역사에 대해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지만 당장은 케리아돌과 나타니엘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기로 했다. 나타니엘은 어느새 사람 얼굴만 한 초대형 쿠키를 가져와 그녀에게 건넸다. 케리아돌은 엉겁결에 받긴 했지만 부스러기가 드레스에 떨어지는 걸 보고 즉시 이맛살을 구겼다.


“얘기 들었다. 마법 친위대에서 나간다고 했다면서? 단장이라는 자가 기별도 없이 하야하다니 책임감이라곤 눈곱만치도 없구나.”


나타니엘이 넉살 좋게 웃었다.


“하하하, 그렇게 됐군요. 오, 혹시 저를 걱정해 주신 것인지?”


“설마.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가서 찾아온 게다. 그대는 아직 젊지 않은가. 하물며 마법사라면 여든까지도 바라볼 만 할 터, 왜 벌써 공직을 떠나는 게냐?”


“그냥...연구해보고 싶은 게 생겼답니다. 그런데 이게 아주 사적인 거라, 아무래도 왕실의 지원을 받기엔 무리일 거 같아서 말이죠. 거기다 간섭받기도 싫겠다, 이참에 옷 벗기로 결심했지요.”


“...연구라니? 혹시 마인드컨트롤을...”


케리아돌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의혹과 적개심으로 가득 찬, 보통 인간이라면 숨이 막힐 정도로 강렬한 시선이었다. 그러나 나타니엘은 그마저도 가볍게 받아넘겼다.


“핫, 저를 뭘로 보시고. 애초에 마인드컨트롤 연구라면 옷을 벗을 이유도 없지요. 이건 그냥 클라리스 공주의 부탁 때문에 하는 겁니다.”


“베릴의 아이가? 무슨 부탁인가.”


나타니엘은 대답하기에 앞서 잠시 뜸을 들였다. 그는 쿠키에 박힌 아몬드를 냉큼 뽑더니 이리저리 굴리며 보는 사람의 애를 태웠다. 하지만 그 행동은 비단 케리아돌을 안달 나게 하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그의 굳게 다문 입술에는 그가 지금까지 느꼈을 고뇌가, 공직을 떠나기로 결정하기까지의 무수한 고민이 드러나 있었다.

그는 한참이 지난 뒤에야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저기, 케리아돌님. 각성한 신의 아이와 각성 전 숙주와의 의사소통이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그러니까...마법으로 양자 간의 통로를 연결하는 것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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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5) +2 15.05.04 710 24 15쪽
213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4) +2 15.05.04 720 25 23쪽
212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3) +3 15.05.03 845 29 18쪽
211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2) +3 15.05.03 764 22 23쪽
210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1) +2 15.05.03 853 23 20쪽
209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7) +5 15.05.03 795 28 25쪽
208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6) +2 15.05.03 894 24 22쪽
207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5) +4 15.05.02 938 29 21쪽
206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4) +1 15.05.02 884 27 20쪽
205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3) +2 15.05.02 690 24 21쪽
204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2) +2 15.05.02 767 24 24쪽
203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1) +2 15.05.02 586 24 22쪽
202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6) +3 15.05.02 696 28 18쪽
201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5) +5 15.04.29 863 24 19쪽
200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4) +1 15.04.29 937 24 26쪽
199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3) +1 15.04.29 789 24 24쪽
198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2) +3 15.04.29 812 26 18쪽
197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1) +1 15.04.29 758 24 17쪽
196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8) +4 15.04.28 905 28 16쪽
195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7) +3 15.04.28 840 25 20쪽
194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6) +3 15.04.27 711 26 19쪽
193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5) +3 15.04.27 756 22 17쪽
192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4) +2 15.04.27 731 22 18쪽
191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3) +1 15.04.27 731 30 18쪽
190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2) +2 15.04.27 758 27 19쪽
189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1) +2 15.04.27 789 31 18쪽
188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完) +1 15.04.27 599 33 18쪽
187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5) +4 15.04.26 733 24 17쪽
186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4) +1 15.04.26 928 28 16쪽
185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3) +2 15.04.26 739 26 20쪽
184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2) +6 15.04.23 779 28 15쪽
183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1) +3 15.04.23 840 26 19쪽
182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2) +2 15.04.23 755 25 17쪽
181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1) +3 15.04.23 767 26 15쪽
180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0) +1 15.04.23 682 25 22쪽
179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9) +3 15.04.22 811 29 16쪽
178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8) +3 15.04.22 846 27 15쪽
177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7) +1 15.04.22 777 29 18쪽
»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6) +1 15.04.22 791 23 18쪽
175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5) +2 15.04.22 765 29 15쪽
174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4) +3 15.04.22 911 25 18쪽
173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3) +5 15.04.21 767 27 16쪽
172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2) +2 15.04.21 922 25 14쪽
171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 +3 15.04.21 806 25 17쪽
170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8) +3 15.04.21 730 24 21쪽
169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7) +2 15.04.21 703 19 15쪽
168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6) +4 15.04.20 751 24 18쪽
167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5) +2 15.04.20 655 20 18쪽
166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4) +1 15.04.20 767 23 17쪽
165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3) +2 15.04.20 738 24 16쪽
164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2) +3 15.04.20 809 20 16쪽
163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1) +1 15.04.20 821 22 21쪽
162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6) +1 15.04.20 830 29 14쪽
161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5) +2 15.04.20 711 25 18쪽
160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4) +3 15.04.19 865 28 18쪽
159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3) +3 15.04.19 947 28 18쪽
158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2) +3 15.04.19 901 26 22쪽
157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1) +5 15.04.19 1,210 46 22쪽
156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10) +6 15.04.18 901 26 21쪽
155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9) +3 15.04.18 772 26 18쪽
154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8) +1 15.04.18 657 24 19쪽
153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7) +2 15.04.18 687 26 18쪽
152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6) +1 15.04.18 748 27 17쪽
151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5) +4 15.04.18 713 23 16쪽
150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4) +1 15.04.18 669 24 17쪽
149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3) +2 15.04.18 754 22 17쪽
148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2) +3 15.04.16 849 29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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