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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연 님의 서재입니다.

람의 계승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저스연
작품등록일 :
2015.03.21 02:01
최근연재일 :
2015.09.01 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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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23 0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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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쪽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1)

DUM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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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과거를 보았고, 진실을 알았다. 그것이 가져온 충격 때문일까? 그때의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이 정보는 우리만의 것인가? 류이너스 교단은, 아케니온은, 안개송곳니는 어디까지 알고 있었을까.

람카디스 대장은 어디까지 알고 있었을까.

결국 모든 게 밝혀지는 건 먼 훗날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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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슈피드라...비효율의 극치인 그 검이로구나. 군마와 비교하자면 좋은 군마는 주인이 바뀌어도 빠르게 적응할 수 있어야 하지. 이 검은 그런 면에서 보자면 결코 좋은 군마가 아니다. 나타니엘이 마음에 들어한 자에게만 힘을 부여하고, 그마저도 한 번 주인이 정해지면 쉽게 바뀌는 일이 없지.”

“그렇다면 어떻게?”

“요는 이칼롯 제르비안, 아직 그대를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대는 한 번 이 검의 능력을 보았다 했지? 그럼 다시 한 번 검을 만족시켜보라. 그럼 검은 그대를 평생 따라갈 것이니.”

“하지만 대체 어떻게...지난 5년간 단 한 번도 반응한 적이 없습니다.”

“내가 조언을 해준들 그대에게 득이 되진 않을 것이다. 본디 마음만큼 진실된 것은 없지. 사랑한다고 다짐한들 원수를 경애할 수 있는가? 저주한다고 외쳐본들 부모를 증오할 수 있는가? 내가 조언을 주어도, 지금의 그대에겐 혼란스럽기만 할 뿐이야.”

“...그야...”

“겸허하게 생각하라. 조바심 또한 시험의 영역일 테니. 그런데, 자네의 조부가 이 검의 주인이었다고?”

“...예. 지난 50년간 텔슈피드의 소유자셨습니다.”

“그래? 흥미로운 자로구나. 카로얀 제르비안인가...나타니엘은 심지가 곧은 자를 좋아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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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에서 나오자 예의 그 광활한 방에 도착해 있었다. 케리아돌은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이름 모를 책을 뒤적거리는 중이었다. 그녀는 일행이 나오자 말없이 책을 덮었다.


“재미있었느냐? 우리들의 과거는.”


일행은 메디치의 안내를 받아 다시 자리에 앉았다. 성언전쟁, 펠아람의 저주, 그리고 다섯 번째 신의 아이까지. 그곳에서 보고 들은 모든 것들이 모두 꿈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런 일이 전부 실제로 일어났다니.

그러나 그 산 증인들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대들이 본 게 보편적인 진실이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그건 단지 나와 메디치, 그리고 몇몇의 기억을 짜 집어 만든 것이니까. 우리들이 간과한 부분이, 혹은 왜곡되어 해석한 부분이 없지 않겠지. 그건 그대들이 알아서 받아들여야 할 일이야.”


물론 그녀가 보여준 게 거짓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루도가 묻고 싶은 건 따로 있었다.


“그...에스터페른의 아이는 어떻게 되었죠?”


케리아돌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당연히 ‘보았던 것’에 대한 감상을 늘어놓을 줄 알았건만 가장 먼저 꺼낸다는 말이 ‘보지 못한 것’이라니, 그녀로서도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그게 지금 그대에게 가장 중요한가?”


“그건 아니지만...그 후에 다들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서요.”


그녀는 입을 가리고 웃었다.


“무엇이 더 궁금하다는 게냐? 왕실이 그날 전투에 참가했던 마법사들을 이단으로 규정한 것? 정신계와 사령계학파를 금지학문으로 지정한 것? 에스터페른의 아이가 카잘산맥 중앙에 결계를 설치한 것?”


“.....”


“물론 단순한 지식의 탐구라면 할 말은 끝도 없이 많다. 하지만 그대는 그걸 원한 게 아니지 않느냐? 나는 그대에게 필요한 것을 보여줬다고 생각하는데.”


그녀의 말대로였다. 정보는 넘칠 만큼 얻었다. 신의 아이가 지닌 능력이 어느 수준인지도 알았고, 왜 그들을 노리고 온갖 암투가 일어나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펠아람의 저주에 대해서도.

루도가 말했다.


“저는...아직 제가 펠아람의 저주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습니다.”


“흐음,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 그래서?”


“그건 아마도...제가 ‘숙주’여서 그런 거겠지요. 하지만 과거를 접하면서 생각했습니다. 만약 저도 에리안델처럼 몸속의 신의 아이와 대화하는 게 가능하다면...그 녀석의 뜻을 알아낼 수 있다면, 아마도...”


나타니엘이 완성시킨 마법. 에리안델은 그 마법에 의해 숙주와 교감할 수 있었고, 그것은 아주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했다. 루프리모의 아이가 그녀의 숭고한 사상에 교화된 것이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부분도 분명히 존재했다.


“그 마법이 파격적이라는 데에는 부정하지 않겠다. 하지만 루도 클로람, 그대도 봤을 텐데? 에리안델이 그 마법에 걸리자마자 각성했다는 걸.”


신의 아이와 숙주의 교감이 어떤 파장을 불러오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확실히 그녀의 사례는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만약 루도가 펠아람의 저주가 맞다고 한다면, 그리고 그 마법에 걸리는 순간 각성이 이루어진다면, 그보다 더 끔찍한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그때 디리터가 손을 들었다.


“어, 지금 나타니엘이 만든 마법 얘기하는 거 맞죠? 저도 그거 루도한테 한번 쏴주고 싶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근데 그 아저씨 아직 살아있어요?”


메디치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옆에 앉은 청년은 주위 분위기를 완화시키는 능력을 타고난 모양이었다. 우스꽝스럽지만, 또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은 그의 질문에 다들 피식 실소를 머금었다.


-물론 나타니엘은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 마법은 아직 남아있지요.


그러자 제리온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엇...그럼 다른 마법사가 익히고 있다든가?”


-아쉽지만 그건 아닙니다. 제가 지금까지 살면서 나타니엘을 능가하는 마법사는 보지 못했습니다. 저를 빼고요.


“그럼 댁이 배웠다는 거요?”


-하하, 전 정신계와는 영 친분이 없어서...


“그럼 뭔데!”


메디치는 답변을 케리아돌에게 넘겼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곳의 주인이고, 또 거울을 연 장본인인 그녀가 직접 말하는 게 나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녀가 말했다.


“카잘산맥에 폭풍협곡이라는 장소가 있지. 마리네 캄블러, 알고 있나?”


그러자 마리네는 쭈뼛거리며 답했다.


“에...또...리크나이츠와 브리토리스를 잇는 유일한 관문이죠. 과거 리카르고가 죽고 양국이 다시 전면전 상태에 들어가려 하자 케리아돌님이...아, 이건 에스터페른의 아이가 한 거랬죠? 그 관문에 접근하려 하면 돌개바람에 갈가리 찢기는 결계를 설치한 걸로 알고 있어요. 그 덕에 전쟁은 멈췄지만 양국 간의 교류도 끊어졌고, 그 상태로 지금까지 온 거지요.”


“잘 알고 있구나. 에스터페른의 아이가 친 결계는 500년간 이어졌고, 다시 말하면 그곳은 500년 간 사람의 손이 묻지 않은 곳이기도 하다. 루도 클로람, 그 협곡 어딘가에 작은 사당이 하나 있을 게다. 찾을 수 있으면 좋겠구나.”


“예...예? 그 말씀은...”


“나타니엘의 유산은 그곳에 있다.”


그 순간 몸 안에서 꿈틀거리는 무언가에 떠밀려, 루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그는 탁자에 머리를 찧을 기세로 케리아돌에게 절을 올렸다.


“감사합니다, 케리아돌님!!”


쩌렁쩌렁한 외침에 다른 일행도 엉거주춤하게 허리를 숙일 정도였다.

갈 길을 정했다는 것. 이것은 루도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데루루피아의 청에 못 이겨 이곳에 오긴 했지만 지금까지는 살기 위해 도망쳐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로샤단의 복수도, 그리고 자신이 나아갈 길에 대해서도 막연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곳에 가면 자신이 저주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는 희망이 싹트자 왠지 모르게 가슴이 불타올랐다. 희망은 곧 자신감이 되었다. 자신이 저주라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된다. 하지만 만약 저주가 아니라면 - 그때는 안개송곳니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이는 순간이 될 테니까.

케리아돌도 그의 박력 있는 태도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녀는 숙인 루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말했듯이 나는 그대의 질문에 답해줄 수 없다. 그저 안내만 해줄 따름이지. 거기서 그대가 어떤 답을 얻을지는 나도 알 수가 없구나. 그래도...”


그녀는 2차 소환 이후 신의 아이의 타락에 뼈저린 배신감을 느꼈다. 그 후 인간 세상에 넌더리가 난 그녀는 이 섬으로 거처를 옮겼고, 그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고통을 겪었음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신에 대한 경외, 선의(善意)에 대한 믿음 또한 그녀의 일면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차치하고라도, 그녀는 ‘루도 클로람’이라는 인간 그 자체가 마음에 들었다.


“펠아람의 아이가 유머감각이 뛰어난 자이길 빌어주마.”


답은 얻었다. 이제 더 이상 이곳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었다. 케리아돌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진 않았다. 대신 그녀는 과거를 알려주었고, 일행이 나아갈 수 있는 지침을 제공해주었다. 한 사건을 막연히 접하는 것과, 그 내력과 역사를 알고 행동하는 것은 확연히 차이가 난다.

일행은 그 뒤로 한 시간여가량 담소를 나누고 나서 레어를 나왔다. 메디치는 처음 들어왔던 공터까지 일행을 배웅했다. 그는 첫 만남 때와 다름없이 여유 있는 모습이었지만, 일행은 그가 다소 부담스럽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정체가 바로 전설의 대마법사 타이달루크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물어보고 싶은 게 잔뜩 있었지만, 그의 아픈 과거 - 동료와 제자를 잃은 - 때문에 다들 입을 조심했다. 그러다 공터 끝자락까지 오고 나서야 마리네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저어, 메디치님. 한 가지만 여쭈어 봐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메디치님은 500년 전 사람이고, 그 전설의 대마법사시잖아요. 그런데 왜 지금은 생텀가드가 되어계신 건지...”


메디치는 빙긋 웃었다. 그는 습관처럼 책갈피를 파라락 넘겼는데, 마침 그에 맞춰 기분 좋은 바람이 공터 위를 훑고 지나갔다. 아직 해는 동쪽에 머물러 있었다. 서둘러 간다면 마을에서 저녁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다시 맑게 웃었다. 그 달관하는 듯한 미소는 과거의 무뚝뚝한 그에게선 결코 볼 수 없던 것이었다. 500년이라는 세월은 그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에리안델에게 한 가지 말 안 한 것이 있지요. 사령술이라는 건, 그 시전자가 죽으면 모두 무위로 돌아가게 된답니다.


“그럼...에리안델님에게 걸린 마법을 유지하기 위해서..?”


성검 에리안델. 사실 그녀의 영혼이 현세에 머무를 수 있는 건 타이달루크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에 불과했다. 그러나 타이달루크는 그녀의 바람을, 숭고한 각오를 배신하고 싶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에리안델에게 행했듯 스스로의 영혼을 석고상 안에 봉인시켰다. 언젠가 모든 일이 마무리되면 함께 웃으며 사라지게 될 날을 기대하면서.


-혹시 그녀를 만나게 되면 지금 얘기는 비밀입니다. 쓸데없이 오지랖이 넓은 아가씨라 말이죠.


마리네는 감동했는지 그 큰 눈동자를 연방 반짝거렸다. 마음이 동한 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누가 그를 욕할 수 있단 말인가. 당장 그를 이단자로 규정한 인간을 찾아 족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메디치는 공터 끝에 선 채 말했다.


-자, 짧은 만남도 여기까지군요. 여러분의 앞날에 류이너스의 가호가 함께하길 빌겠습니다.


디리터는 그 말에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오면서 거쳤던 지긋지긋한 숲길을 또다시 가로질러야 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가호고 뭐고, 이번에야말로 죽을지도 모르겠다.”


“아, 나 그 거대 애벌레 진짜 싫은데...”


그러자 가만히 듣고 있던 메디치가 쾌활하게 디리터의 어깨를 두드렸다.


-무슨 소립니까? 이곳의 집사로서 손님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건 당연한 거죠.


번쩍! 그가 명령하자 다섯 개의 원기둥이 일행을 낚아채더니, 그대로 허공으로 쏘아 보냈다. 메디치의 송환마법에 일행은 뭐라 말을 꺼낼 틈도 없이 날아가 버렸다. 그는 일행이 떠난 자리를 보며 싱긋 웃음 짓고는,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레어 입구에는 웬일인지 케리아돌이 어깨를 기댄 채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보냈나?”


-네. 거기 있을 거면 같이 환송이라도 해주시지 그랬습니까.


“환송은 무슨...어차피 바로 코앞 마을로 돌아가는 게 아닌가.”


둘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동굴 길을 내려갔다. 이제는 전설이 된 마법사와, 문명의 시작부터 이 땅을 지켜왔던 드래곤의 조합이다. 500년간 쌓여온 둘 사이의 유대를 어찌 말로 설명할 수 있으랴. 그녀가 이 땅의 모든 인간을 저주하던 순간에도 오직 용서했던 인물이 나타니엘과 지금 여기 있는 그, 타이달루크 메디치였다. 그가 말했다.


-솔직히 뜨끔했지요?


“음, 뭐가 말이지?”


좁은 지하길이라 그런지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짐짓 모른 채하는 그녀의 반응에 메디치는 실소를 머금었다.


-루도 클로람 말입니다. 에스터페른의 아이에 대해서 물었을 때.


“뜨끔하고 자시고가 어디 있느냐. 어차피 전부 과거의 유물일 뿐이지. 우리도, 그도.”


메디치는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있지도 않은 턱수염이 만져질 리 만무했다. 젊은 석고상에 갇힌 늙은 마법사의 아이러니였다.


-후후후, 오래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유물 운운하는 건 좀 그렇지 않습니까? 우린 지금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람과 에리안델이 그렇듯이.


내려가는 길은 언제나처럼 깊고 차분한 분위기였다. 메디치는 이 고요함이 싫지 않았다. 그러나 또 막상 젊은 청년들을 접하고 나니 떠들썩한 소음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그들과 함께 했던 화기애애함을 추억하며, 그는 다시금 침묵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


“...놀랍다, 대마법사.”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지난 며칠 간 기상천외한 것들을 너무 많이 봐서인지 일행은 다들 담담한 모습이었다. 빽빽했던 침엽수림은 온데간데없이 시야가 탁 트이는 백사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루도는 걸을 때마다 발이 푹푹 빠지자 인상을 찡그렸다. 그다지 질 좋은 신발이 아닌지라 금세 안에 모래가 가득 찼다.


“여기가 어디지? 메디치가 또 무슨 마법을 써준 모양인데.”


처음 보는 곳에 떨어져 다소 불안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다행히 메디치의 배려 덕으로 길을 잃을 일은 없었다. 일단 해안절벽이 대부분인 에메랄드 섬에서 백사장이 펼쳐진 곳은 두어 군데뿐이었고, 무엇보다 멀리서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주위의 탁 트인 전경으로 보건데 몬스터와 마주칠 염려도 없어 보였다. 일행은 그 숲을 다시 횡단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메디치에게 감사를 표했다.


“가지. 배고파 뒤지겠네.”


예상대로 마을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한 20여 분가량을 걷자 벌목된 나무그루터기가 군데군데 눈에 띄기 시작했다. 아직 정오가 되지 않은 시각이었지만 늦여름의 열기는 이미 충분히 대지를 덥혀 놓은 상태였다. 곳곳에서 정신없이 울어대는 매미소리와 빼곡하게 자라 시야를 가득 덮는 녹음의 향연은 차라리 아까 있던 백사장으로 돌아가 한동안 해수욕을 즐기고 싶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후우, 수통에 물 남은 거 있냐?”


“없는데.”


“아, 제기랄!”


비교적 치렁한 차림새였던 제리온은 땀을 줄줄 흘려야만 했다. 나중에는 단추를 모두 풀고 앞섶을 훤히 드러내놓고 걷다가, 급기야는 아예 상의를 훌렁 벗어버렸다. 다른 사람들도 진즉에 갑옷을 벗었지만, 오직 이칼롯만은 꿋꿋하게 무장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 이 근처에 우물이 있었지. 목이나 좀 채우고 가자.”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 일행은 진로를 틀어 우물로 향했다. 이대로 윈프레드의 집으로 향해봤자 나오는 건 미지근한 물밖에 없을 테니, 아예 여기서 시원하게 들이키고 가자는 심산에서였다.

그런데 우물 근처에 다다랐을 때쯤, 여자들의 재잘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에잇, 받아라!”


“꺅! 언니, 이러기에요오?”


“어마앗! 가루루, 그러지 마!”


땀에 절은 일행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우물 바가지로 물을 뿌리는 아르유와, 그녀에게 물세례를 받으며 흥겨워하는 가루루, 그리고 둘 사이에 끼어 짓궂게 장난을 치는 소녀의 모습이었다. 백금발(Blonde)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치마를 걷어 올려 허벅지까지 훤히 드러난 그녀의 모습은, 침상에 누워 인형처럼 꼼짝 않던 모습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었기 때문에 다들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모두가 입을 딱 벌린 가운데 오직 제리온만이 이를 갈며 말했다.


“재수 좋아 보이네. 누군 개고생을 하다 왔는데.”


“어머, 제리온!”


그녀, 레미나는 일행을 발견하고는 반색을 하며 다가왔다. 그녀가 접근하자 제리온을 제외한 전원은 어쩔 줄 몰라 하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반면 제리온은 그녀가 안기려 하자 정색하며 팔을 쳐냈다.


“어딜 젖은 옷으로. 됐으니까 나도 물이나 한바가지 주쇼.”


“응? 아, 응!”


레미나는 종종걸음으로 달려가 바가지에 물을 가득 떠 왔다. 가져오는 도중에 몸이 기울어져 절반이 땅에 떨어졌는데, 일행은 저러다 넘어지는 게 아닌가 몰라 전전긍긍했다.


“걱정했어, 제리온. 아! 다들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이에요. 다친 곳은 없으신가요?”


전부 다 무릎을 꿇고 있었기 때문에 레미나는 다소 엉거주춤하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녀의 질문에 루도는 살짝 고개를 들었는데, 바로 앞에 그녀의 훤히 드러난 허벅지가 눈에 들어왔다.


“으익!! 예, 넵! 전혀 없습니다! 공주님도 몸이 나아지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딱딱하게 굳어진 그를 보며 레미나는 푸르게 웃었다. 그와 같은 반응은 지금껏 질리도록 경험해온 까닭이다. 한편 제리온은 물바가지를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길게 트림을 하며 말했다.


“확실히 좀 의왼데. 난 아직도 벽에 똥칠이나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요 하루 사이에 몸이 완전히 나은 거요?”


그러자 레미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하루라니? 오늘이 너 떠난 지 딱 열흘째 되는 날인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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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 람의 계승자 - ep.5 - 사냥감의 반전(3) +3 15.05.04 935 22 23쪽
216 람의 계승자 - ep.5 - 사냥감의 반전(2) +2 15.05.04 867 22 21쪽
215 람의 계승자 - ep.5 - 사냥감의 반전(1) +1 15.05.04 774 24 20쪽
214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5) +2 15.05.04 709 24 15쪽
213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4) +2 15.05.04 720 25 23쪽
212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3) +3 15.05.03 844 29 18쪽
211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2) +3 15.05.03 763 22 23쪽
210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1) +2 15.05.03 853 23 20쪽
209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7) +5 15.05.03 795 28 25쪽
208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6) +2 15.05.03 894 24 22쪽
207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5) +4 15.05.02 938 29 21쪽
206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4) +1 15.05.02 884 27 20쪽
205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3) +2 15.05.02 690 24 21쪽
204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2) +2 15.05.02 767 24 24쪽
203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1) +2 15.05.02 586 24 22쪽
202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6) +3 15.05.02 696 28 18쪽
201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5) +5 15.04.29 863 24 19쪽
200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4) +1 15.04.29 937 24 26쪽
199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3) +1 15.04.29 789 24 24쪽
198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2) +3 15.04.29 812 26 18쪽
197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1) +1 15.04.29 758 24 17쪽
196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8) +4 15.04.28 904 28 16쪽
195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7) +3 15.04.28 840 25 20쪽
194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6) +3 15.04.27 711 26 19쪽
193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5) +3 15.04.27 756 22 17쪽
192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4) +2 15.04.27 731 22 18쪽
191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3) +1 15.04.27 730 30 18쪽
190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2) +2 15.04.27 758 27 19쪽
189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1) +2 15.04.27 789 31 18쪽
188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完) +1 15.04.27 599 33 18쪽
187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5) +4 15.04.26 733 24 17쪽
186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4) +1 15.04.26 928 28 16쪽
185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3) +2 15.04.26 739 26 20쪽
184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2) +6 15.04.23 779 28 15쪽
»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1) +3 15.04.23 840 26 19쪽
182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2) +2 15.04.23 755 25 17쪽
181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1) +3 15.04.23 767 26 15쪽
180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0) +1 15.04.23 682 25 22쪽
179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9) +3 15.04.22 811 29 16쪽
178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8) +3 15.04.22 846 27 15쪽
177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7) +1 15.04.22 776 29 18쪽
176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6) +1 15.04.22 790 23 18쪽
175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5) +2 15.04.22 765 29 15쪽
174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4) +3 15.04.22 911 25 18쪽
173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3) +5 15.04.21 767 27 16쪽
172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2) +2 15.04.21 922 25 14쪽
171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 +3 15.04.21 805 25 17쪽
170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8) +3 15.04.21 729 24 21쪽
169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7) +2 15.04.21 703 19 15쪽
168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6) +4 15.04.20 750 24 18쪽
167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5) +2 15.04.20 655 20 18쪽
166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4) +1 15.04.20 767 23 17쪽
165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3) +2 15.04.20 738 24 16쪽
164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2) +3 15.04.20 809 20 16쪽
163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1) +1 15.04.20 821 22 21쪽
162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6) +1 15.04.20 830 29 14쪽
161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5) +2 15.04.20 711 25 18쪽
160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4) +3 15.04.19 865 28 18쪽
159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3) +3 15.04.19 946 28 18쪽
158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2) +3 15.04.19 901 26 22쪽
157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1) +5 15.04.19 1,210 46 22쪽
156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10) +6 15.04.18 901 26 21쪽
155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9) +3 15.04.18 772 26 18쪽
154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8) +1 15.04.18 657 24 19쪽
153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7) +2 15.04.18 687 26 18쪽
152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6) +1 15.04.18 748 27 17쪽
151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5) +4 15.04.18 713 23 16쪽
150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4) +1 15.04.18 669 24 17쪽
149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3) +2 15.04.18 754 22 17쪽
148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2) +3 15.04.16 849 29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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