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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연 님의 서재입니다.

람의 계승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저스연
작품등록일 :
2015.03.21 02:01
최근연재일 :
2015.09.01 03:28
연재수 :
34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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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9,195
추천수 :
10,757
글자수 :
2,844,987

작성
15.05.03 0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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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글자
20쪽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1)

DUMMY

제리온은 말고삐를 쥔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하필이면 그녀가...? 현기증이 일어 중심을 가누기가 어려웠다. 옆을 바라보니 레미나가 창백히 질린 표정으로 몸을 떨고 있는 게 보였다. 그녀는 마부석 위에 얼어붙은 채로 하염없이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았다간 죽은 그녀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웃으며 대화했던 에레이시아의 얼굴이 눈에 들어올 것 같아서였다.

제리온은 착잡한 심정으로 말했다.


“...그래서 말했잖아. 이건 애들 장난이 아니라고...”


그렇게 몇 분을 달렸을까, 그는 전방에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곤 속도를 줄였다. 유미르네였다.

그녀는 말머리를 돌려 곧장 마차 옆으로 따라붙었다.


“요~다들 무사했군요.”


“너 이년...어디 갔다가 설렁설렁 기어 들어오냐? 니 꼴리는 데로 날뛰니까 좋디?”


낮은 어조였지만 제리온은 명백한 적의를 담아 그녀를 쏘아붙였다. 하지만 유미르네는 그의 빈정거림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아케니온이랑 싸우다가 네댓 명 잡고, 제스터랑 붙었는데 도무지 이길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기회 봐서 도망쳤죠 뭐, 호호호. 그래도 내가 받은 돈값은 한 것 같은데?”


제리온은 순간 울컥하여 욕설을 내뱉으려다 안에 있는 디리터를 생각하여 화를 가라앉혔다. 그가 잠잠해지자 레미나가 대신 입을 열었다.


“그래도 무사해서 다행이네요. 다친 곳은 없나요?”


“뭐 멀쩡하죠. 오히려 문제는 그쪽인 거 같은데? 뭔 일 있었어요? 마차도 너덜너덜하고.”


유미르네는 지붕 위의 이칼롯에게 눈길을 건네며 말했다. 이칼롯은 제스터와의 일전으로 어깨며 팔다리가 군데군데 찢어져 있었다. 개중에는 갑옷이 없었다면 치명상이 됐을 상처도 꽤 많았다. 하지만 그는 아픈 소리 한번 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유미르네가 말을 건넸을 때에도 그는 살짝 눈빛을 교환했을 뿐, 곧장 주위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레미나가 입을 가린 채로 말했다.


“그...에레이시아가...”


그러자 유미르네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녀는 마차 옆으로 바짝 붙은 채 창문 안을 들여다보았다. 중간에 마리네와 눈이 마주치자 둘은 말없이 눈인사만 나누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챈 것일까? 촐싹대던 그녀도 이번만은 분위기가 확 가라앉았다. 그녀는 몇 번 입을 뻐끔거리다가 물었다.


“누구한테?”


제리온이 말했다.


“누구긴 누구야? 그 쳐 죽일 제스터 놈이지.”


유미르네는 다소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자신이 제스터를 처리했다면 이런 결과가 나오진 않았을 테니까.

그러나 그녀의 분방을 탓하면 했지 도망친 그녀의 선택을 힐책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애초에 제스터 같은 괴물을 상대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유미르네는 나름 최선의 선택을 했다. 죽일 수 있는 건 죽이고, 그럴 수 없다면 재빨리 빠지는 것이다. 만약 그러한 판단이 없었다면 자칫 그녀까지 싸늘한 시체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유미르네가 무사히 합류함에 따라 일행의 사상자는 에레이시아 한 명으로 끝났다. 하지만 이걸로 된 것일까? 이게 그 상황에서 나올 수 있던 최소한의 피해였다고, 그렇게 여겨야 할까?

그 물음에 대해선 누구도 답을 낼 수 없었다.


그렇게 반나절을 달린 후 일행은 적당히 인적 드문 곳을 찾아 에레이시아의 시신을 묻었다. 정식으로 묏자리를 잡아 장례를 치르는 게 맞겠지만, 여전히 추격의 위험성이 상존하고 있었기에 그런 여유를 부릴 틈은 없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시간에, 일행은 각자 삽을 들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관짝 하나, 상복 하나 마련해주지 못한 초라한 장례식이었다.

디리터는 울지 않았다. 차라리 목이 터져라 통곡을 하면 좋으련만, 그는 눈두덩이 퉁퉁 부은 채로 끓어오르는 슬픔을 억지로 참는 것처럼 보였다. 오히려 마리네와 레미나가 감정을 참지 못해 흙을 덮다 말고 눈물을 쏟아냈다.

봉분을 만들고 묘비를 꽂기까지는 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얄궂게도 그것이 일행이 가진 몇 안 되는 휴식시간이기도 했다. 이제는 무덤을 뒤로 한 채, 다시 움직여야만 한다.

말이 두 마리나 사라진 관계로 일행은 유미르네의 것까지 마차에 합쳤다. 루도와 마리네가 이를 준비하는 동안 레미나와 유미르네는 걸레를 빨아 마차에 묻은 피를 구석구석 닦았다. 그리고 디리터와 제리온, 이칼롯은 마지막으로 묘비 앞에 섰다.

세 남자는 무덤을 응시한 채 말이 없었다. 마음 준 사람이 이렇게 쉽게 사라지는구나 - 하는 생각에 허탈감이 밀려왔다. 제리온이 나직이 말했다.


“이칼롯, 지금 나랑 같은 생각하고 있지?”


“...그래.”


“옌장...그때 류이덴사에 맡기고 왔으면 좋았을 것을.”


“그렇지.”


그 뒤로 디리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벙어리가 된 것은 아니지만, 그는 누군가 말을 걸어오기 전에는 입을 꾹 다문 채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예의 쾌활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조금만 건드리면 부서질 것 같은 그의 얼굴이 보는 사람을 더욱 가슴 아프게 했다. 제스터에게 당한 상처도 그는 치료하는 둥 마는 둥 붕대만 감아놓았다.

디리터만큼은 아니지만 마차 안의 4인조 역시 눈에 띄게 대화가 줄어들었다. 마차 안에는 에레이시아의 핏자국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특히 그녀가 숨을 거둘 때 기대어 있던 의자에는 피 얼룩이 가득 번져 일행을 착잡하게 했다. 그 자리에는 유미르네가 앉았는데, 딱히 불만을 토로하진 않았으나 역시 마음이 좋지 않은지 그녀도 말을 삼간 채 창문만 바라보았다.

말도, 마차도, 사람도 모두 만신창이였다. 며칠째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지 못한 데다 심적인 피로까지 겹쳐 다들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콧잔등에서는 피 냄새가 가시질 않고, 하늘은 언제부턴가 우중충한 잿빛이었다. 이런 날 비라도 내렸다간 빗줄기에 눌려 주저앉아버릴지도 몰랐다.

이런 상황에서 일행이 기대하는 것은 오로지 가린워드 마을이었다. 그곳에 가면 아나이스가 따뜻하게 맞아줄 테고, 여관 침대에 누워 편안히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시원하게 샤워도 하고, 피에 절은 속옷도 빨고, 갓 구운 파이의 감촉도 느낄 수 있을 터였다. 그런 막연한 기대를 품은 채로 일행은 서쪽으로, 서쪽으로 나아갔다.


그로부터 사흘이 지나고 일행은 드디어 가린워드 마을에 도착했다. 드디어 침대에서 잘 수 있다는 생각에 다들 들떠서 눈을 반짝였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다시 돌아온 그곳은 전과 달리 정적인 분위기가 감돌았다. 단지 느낌일 뿐이었지만 이칼롯은 멀리서도 무언가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했다. 마을 가장자리를 둘러싸고 있던 복숭아 과수원은 관리가 되지 않아 잡초가 무성하게 자랐고, 열매도 대부분 땅에 떨어져 염소 먹이가 되고 있었다. 들판의 귀리는 추수한 땅도 있지만, 대부분은 방치되어 목초지가 되어가고 있었다. 막 정오가 지난 시간인데도 밭일을 하는 농부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 황망한 풍경에 루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대로 길을 찾아온 게 맞을까 싶을 정도로, 예전의 그 풍요롭고 목가적이던 분위기와는 극히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제리온이 말했다.


“왜 이러냐? 전쟁터에서 한참 떨어진 동네가.”


일행은 불길한 예감을 품은 채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예상 외로 마을 안은 깨끗했다. 산적떼에게 습격당했다면 시체가 널려 있거나 아니면 건물 곳곳이 파손되어있어야 할 텐데 그러한 부분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광장에 들어서니 주위를 돌아다니는 행인도 간간이 보였다.

그런데 주민들은 하나같이 시선은 땅을 향한 채 꾸부정한 자세로 걸어가고 있었다. 마주치는 눈동자는 핏기 하나 없이 흐리멍덩하기만 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 일행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

그때 웬 남자 하나가 마차를 보고 소리쳤다.


“잠깐 정지! 여행자시오? 처음 보는 얼굴인데.”


말을 건넨 남자는 가벼운 레더아머 차림에, 어디서 구했는지도 모를 괴상한 쇠몽둥이를 허리춤에 차고 있었다. 용병, 아니면 사냥꾼? 어느 쪽이든 정규군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제리온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남자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사냥꾼이라면 한층 더 경계해야 하겠지만, 일찍부터 변장을 하고 온 까닭인지 정체가 발각된 것 같진 않았다. 그는 인중에 붙인 가짜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렇수. 여기서 하룻밤 묵고 갈 생각인데 무슨 문제라도?”


그러자 그 남자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띠어졌다. 누렇게 썩은 이빨이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 나빠지는 인상이었다. 그 남자는 허리춤의 몽둥이를 보란 듯이 툭툭 건드렸다.


“문제랄 것까진 없고, 여기가 요즘 워낙 뒤숭숭한 동네라서 말이지. 부디 말썽 일으키지 말고 조용히 즐기다 가시구려. 아, 뒤에서 칼침 들어올지 모르니 조심하고. 큭큭큭.”


비아냥 섞인 경고에 빈정이 팍 상했지만, 제리온은 별다른 대꾸 없이 다시 마차를 몰았다. 다른 사람들도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고 한 귀로 흘렸다. 이 정도 시비는 이제 거슬리는 수준도 못 되었다.

그러나 조금 전의 남자와 관계가 있는지는 몰라도, 완연히 가라앉은 마을 분위기는 자못 신경이 쓰였다. 길을 가다 루도는 웬 연인 한 쌍이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을 목격했다.

아니, 그걸 정말 연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무리 봐도 웬 우락부락한 남자 하나가 지친 여인을 끌어안고 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안긴 여자는 혼이 빠진 듯이 썩은 동태눈을 하고 있었다.

남자는 일행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자의 가슴을 주물럭거렸다. 제리온과 눈이 마주치자 그는 오히려 대담하게 씨익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제리온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여기가 언제부터 매음굴이 됐대냐.”


“흐음, 마을 분위기가 영 꺼림칙하네.”


“에효~지들이 저렇게 살겠다는데 뭔 상관이냐. 우린 우리 갈 길 가는 거지.”


일행은 상관하지 않고 전번에 묵었던 여관 「여행자의 요람」으로 마차를 몰았다. 멀리 여관 간판이 보이기 시작하자 루도는 낮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간만에 호사스럽게 잘 수 있겠네. 그런데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다. 한시가 바쁜데...”


아수라장을 헤치고 온 터라 아늑한 침대는 오히려 위화감이 들 정도였다. 유미르네가 그런 그를 위로하며 말했다.


“더 움직였다간 말이 버티질 못할걸? 어찌 됐든 하루 정도는 쉬게 해야 해. 그 틈에 이쪽도 피로 좀 풀고.”


제리온은 마구간 근처에 마차를 세웠다. 그와 디리터가 말을 꺼내 묶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먼저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여닫이문이 끼이익-하고 기다란 마찰음을 토해냈다.

홀 안은 인기척 하나 없이 고요했다. 으레 카운터에서 손님을 반기던 주인장도, 바닥을 청소하던 아나이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커튼을 있는 대로 쳐서 안은 한밤중처럼 어두웠다. 퀴퀴한 곰팡냄새는 여관이라기보다는 지하창고에 들어선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먼지도 너무 많아 루도는 잠시 문을 열어두었다.


“장사 안 하나? 왜 이리 조용해?”


“글쎄다. 계십니까~! 저기요?”


그러자 곧 주방에서 식기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요란한 쇳소리에 유미르네는 손가락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잠시 뒤에 한 소녀가 주방입구에 친 커튼을 걷어내며 나왔다. 한 갈래로 땋은 흑발이 그녀가 걸어올 때마다 좌우로 흔들렸다. 그리고 루도의 앞에 멈춰 섰을 때에도, 그것은 여전히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일행은 그녀가 겁에 질려 있다는 사실을 결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잔뜩 위축된 얼굴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어...누구시죠?”


“뭐야. 손님이 왔는데도 왜 그리 얼굴이 떨떠름해?”


그녀는 일행의 정체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다 잘 차려입은 아가씨 입에서 남자 목소리가 나오자 그녀는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마리네는 반가운 마음에 그녀의 손을 꽉 붙잡았다.


“오랜만이야 아나이스. 잘 지냈어?”


“에...에?”


아나이스는 아직도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다 그녀의 동공이 차츰 확대되기 시작했다. 갈색 눈동자에 또렷이 마리네의 실루엣이 맺히게 된 순간,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떨었다. 그리고는 황급히 팔을 뿌리치려다가, 스스로도 놀라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녀가 말했다.


“마...마리네니?”


“그래 나야. 변장하니 못 알아보겠지?”


“아...아아...그럼 이쪽은 루도겠구나. 디리터도 있고...”


말을 건네는 그녀의 중심은 잔뜩 뒤로 쏠려 있었다. 마치 쓰러지려는 그녀를 마리네가 억지로 붙들고 있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즈음에서 디리터와 제리온이 안으로 들어왔다. 제리온은 아나이스를 발견하자마자 한쪽 눈을 가늘게 떴다. 아나이스는 안절부절못하고 연방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깨는 고양이 앞의 쥐마냥 잔뜩 움츠러들었고, 입술은 금방 물에 들어갔다 나온 듯이 파랗게 질린 채였다. 그리고 불안하게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는 비단 놀라움만을 담고 있진 않았다.

두려움, 그리고 혼란스러움. 제리온은 그녀의 감정을 한순간에 간파했다. 그가 말했다.


“뭐냐? 왜 우릴 무서워하는 건데?”


그러자 아나이스는 화들짝 놀라 마리네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는 재빨리 가게 문을 닫고 일행을 2층 객실로 데리고 갔다.

일행은 처음에는 무슨 영문인가 싶어 쭈뼛거리다가, 그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별 대꾸 없이 2층으로 향했다. 아나이스가 왜 그리 긴장해있는지, 그리고 가게 안이 왜 그리 어두침침한지 알 수 있는 도리가 없었다.

가장 큰 객실에 일행을 집어넣고서, 아나이스는 다시 주방으로 사라졌다. 얼마 뒤 그녀는 쟁반에 찻잔과 주전자를 얹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말없이 차를 따라 일행에게 건넸다. 조로록, 하는 소리가 조용한 방안에 울려 퍼졌다.

아나이스는 일행이 차를 다 마실 때까지 문 앞에 서서 기다렸다. 다시 만나 반갑다느니,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는 따위의 말은 일절 건네지 않았다. 때문에 일행은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으로 차를 마셨다. 레미나가 마지막으로 찻잔을 내려놓자 그녀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다들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네요. 아직 식사 안 하셨죠?”


“어? 으, 응.”


그러자 그녀는 다시 쪼르르 주방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그녀는 밥상 위에 귀리빵이며 버섯수프, 애플파이 등을 바리바리 싸들고 나타났다. 굳이 밥을 먹겠다면 1층의 홀로 내려가면 될 텐데, 왜 이런 번거로운 일을 하는지 루도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무거운 분위기에 압도되어, 일행은 이의 한번 제기하지 못하고 식사를 마쳤다. 밥을 먹는 동안에도 아나이스는 문 앞에 버티고 선 채 말없이 일행을 바라보기만 했다.

결국 제리온이 어색한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말했다.


“대체 뭔데? 할 말 있으면 해.”


그러자 아나이스는 잔뜩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째서 돌아온 거예요?”


순식간에 참았던 감정이 복받쳐 올라와서, 그녀는 어금니를 부러져라 깨물었다. 루도가 다가가려 하자,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를 밀어냈다.


“오면서 무장한 사람들 봤죠? 그거 다 현상금사냥꾼이에요. 다 당신들 잡으러 온 거라고요! 그런데 왜...왜 돌아왔어요?”


결국 아나이스는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입을 가린 채 서럽게 우는 그녀를 보고 일행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다들 멀뚱히 서 있는 가운데, 이칼롯이 마리네를 밀어 그녀에게 보냈다. 마리네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아나이스의 어깨를 다독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는 엉엉 울며 마리네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제리온이 말했다.


“단순히 사냥꾼 때문에 우는 게 아니구만.”


아나이스의 오열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내는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갈 것을 염려했는지, 언제 그랬냐는 듯 눈물을 뚝 그치고 창밖의 거리를 주시했다. 그리고나서 슬픔을 전부 떨쳐버리려는 듯, 그녀는 마리네가 건넨 손수건에 코를 팽 풀었다.

유미르네는 그런 그녀의 행동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모두가 침묵하는 가운데 오직 그녀만이 신경 쓰지 않고 호두를 깨물고 있었다.


“성격이 똑 부러진 아가씨네.”


아나이스는 방문 앞에 무릎을 모으고 쪼그려 앉았다. 그 진이 빠진 것처럼 지친 눈동자에 루도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다시 보니 아나이스는 며칠 밤을 샌 것 마냥 눈 밑에 다크서클이 잔뜩 껴 있었다.

마리네는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어 눈높이를 맞추고서 말했다.


“말해봐, 아나이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나이스는 지친 목소리로 담담하게 말했다.


“...네가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 군인들이 들이닥쳤어.”


“군인들?”


“이곳을 다스리는 영주님의 군대였어. 영주님도 함께 왔지,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는. 와서는 다짜고짜 로샤단이 어디로 갔는지 실토하라면서 사람들을 족치기 시작했어. 그 과정에서...몇 명은 죽고 몇 명은 불구자가 됐어.”


일행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레미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틀어막았다. 반면 제리온와 이칼롯은 대번에 진상을 파악하고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나이스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그래서 마을 촌장님이 무릎 꿇고 간청하셨어. 대체 무슨 일인지 설명부터 해달라고. 그러자 영주님은 그 노쇠한 분을 몽둥이로 사정없이 패면서 말했어. 왕실에서 기별이 왔다는 거야. 이 마을에서 로샤단이 장기간 체류했던 증거를 포착했다는 내용이었어. 국왕폐하는...모든 정보를 짜내 로샤단을 잡으라고 명령하셨대. 그리고 만약 우리 마을에서 로샤단에 관한 정보가 나오지 않으면...마을 전체가 로샤단과 내통한 거라 여기기로 하셨다나봐.”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그녀는 살짝 눈물을 훔쳤다. 마리네의 손수건은 이미 콧물 범벅이 되었기 때문에, 루도가 깨끗한 것을 다시 그녀에게 건넸다. 아나이스는 손수건으로 눈두덩을 꾹꾹 누르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영주님이 노발대발하신 것도 이해가 가지. 마을 사람들을 전부 강당에 집어넣고서 영주님이 말했어 「제발 부탁이다, 로샤단이 어디로 갔는지 말해라」...하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어. 굳이 내가 숨기지 않더라도, 로샤단의 행선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냥 거기서 입 다물고 몰매나 맞았으면 좋았을 것을...입이 싼 동네 아저씨가 영주님 앞에 가서 말했어. 로샤단을 보았다고...여기서 열흘이 넘게 머물렀다고. 하지만 당연히 어디로 떠났는지는 알지 못했지. 영주님은 더욱 화가 나서, 그렇게 오래 봤는데 왜 어디로 갔는지 모르냐면서 그 아저씨를 두들겨 팼어. 그래도 답이 나오지 않자 영주님은 마을 유지 몇 명을 붙잡아 성으로 끌고 가셨어. 촌장님이랑 복숭아 농장주인, 마을 상업조합장.....그리고 우리 아버지.”


“너, 너희 아버지?”


“왜냐하면 로샤단이 머물렀던 곳이 우리 여관이니까. 끌려간 사람들은 모진 고문을 당했고, 결국 돌아오지 못했어. 그리고 며칠 뒤에 왕명으로 한 문서가 떨어졌어. 우리 마을이 범죄자와 결탁했다고 간주하고.....현시간부로 국가가 보호해주는 모든 권한을... 박탈한다는 내용이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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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9) +1 15.05.07 813 21 24쪽
226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8) +4 15.05.06 732 26 22쪽
225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7) +2 15.05.06 977 24 29쪽
224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6) +3 15.05.06 803 23 28쪽
223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5) +4 15.05.05 930 26 24쪽
222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4) +2 15.05.05 762 23 23쪽
221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3) +1 15.05.05 643 22 15쪽
220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2) +2 15.05.05 771 24 18쪽
219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1) +4 15.05.05 685 23 15쪽
218 람의 계승자 - ep.5 - 사냥감의 반전(4) +2 15.05.05 922 24 23쪽
217 람의 계승자 - ep.5 - 사냥감의 반전(3) +3 15.05.04 936 22 23쪽
216 람의 계승자 - ep.5 - 사냥감의 반전(2) +2 15.05.04 867 22 21쪽
215 람의 계승자 - ep.5 - 사냥감의 반전(1) +1 15.05.04 775 24 20쪽
214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5) +2 15.05.04 710 24 15쪽
213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4) +2 15.05.04 720 25 23쪽
212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3) +3 15.05.03 845 29 18쪽
211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2) +3 15.05.03 764 22 23쪽
»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1) +2 15.05.03 854 23 20쪽
209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7) +5 15.05.03 795 28 25쪽
208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6) +2 15.05.03 894 24 22쪽
207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5) +4 15.05.02 938 29 21쪽
206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4) +1 15.05.02 884 27 20쪽
205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3) +2 15.05.02 690 24 21쪽
204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2) +2 15.05.02 767 24 24쪽
203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1) +2 15.05.02 586 24 22쪽
202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6) +3 15.05.02 696 28 18쪽
201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5) +5 15.04.29 863 24 19쪽
200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4) +1 15.04.29 937 24 26쪽
199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3) +1 15.04.29 789 24 24쪽
198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2) +3 15.04.29 812 26 18쪽
197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1) +1 15.04.29 758 24 17쪽
196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8) +4 15.04.28 905 28 16쪽
195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7) +3 15.04.28 840 25 20쪽
194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6) +3 15.04.27 711 26 19쪽
193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5) +3 15.04.27 756 22 17쪽
192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4) +2 15.04.27 731 22 18쪽
191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3) +1 15.04.27 731 30 18쪽
190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2) +2 15.04.27 758 27 19쪽
189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1) +2 15.04.27 790 31 18쪽
188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完) +1 15.04.27 599 33 18쪽
187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5) +4 15.04.26 734 24 17쪽
186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4) +1 15.04.26 929 28 16쪽
185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3) +2 15.04.26 739 26 20쪽
184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2) +6 15.04.23 779 28 15쪽
183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1) +3 15.04.23 840 26 19쪽
182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2) +2 15.04.23 756 25 17쪽
181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1) +3 15.04.23 767 26 15쪽
180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0) +1 15.04.23 682 25 22쪽
179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9) +3 15.04.22 811 29 16쪽
178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8) +3 15.04.22 846 27 15쪽
177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7) +1 15.04.22 777 29 18쪽
176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6) +1 15.04.22 791 23 18쪽
175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5) +2 15.04.22 765 29 15쪽
174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4) +3 15.04.22 911 25 18쪽
173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3) +5 15.04.21 767 27 16쪽
172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2) +2 15.04.21 922 25 14쪽
171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 +3 15.04.21 806 25 17쪽
170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8) +3 15.04.21 730 24 21쪽
169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7) +2 15.04.21 703 19 15쪽
168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6) +4 15.04.20 751 24 18쪽
167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5) +2 15.04.20 656 20 18쪽
166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4) +1 15.04.20 768 23 17쪽
165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3) +2 15.04.20 738 24 16쪽
164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2) +3 15.04.20 809 20 16쪽
163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1) +1 15.04.20 821 22 21쪽
162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6) +1 15.04.20 830 29 14쪽
161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5) +2 15.04.20 711 25 18쪽
160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4) +3 15.04.19 865 28 18쪽
159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3) +3 15.04.19 947 28 18쪽
158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2) +3 15.04.19 901 26 22쪽
157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1) +5 15.04.19 1,211 46 22쪽
156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10) +6 15.04.18 901 26 21쪽
155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9) +3 15.04.18 772 26 18쪽
154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8) +1 15.04.18 657 24 19쪽
153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7) +2 15.04.18 687 26 18쪽
152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6) +1 15.04.18 748 27 17쪽
151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5) +4 15.04.18 713 23 16쪽
150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4) +1 15.04.18 669 24 17쪽
149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3) +2 15.04.18 754 22 17쪽
148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2) +3 15.04.16 849 29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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