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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연 님의 서재입니다.

람의 계승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저스연
작품등록일 :
2015.03.21 02:01
최근연재일 :
2015.09.01 03:28
연재수 :
34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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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9,046
추천수 :
10,757
글자수 :
2,844,987

작성
15.04.28 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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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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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글자
20쪽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7)

DUMMY

루도는 달려드는 병사들을 모두 발길질로 차버렸다. 그가 타고 있는 군마도 꽤 터프한 성격인지, 주인이 흥분하자 자기도 열이 올라 신나게 발을 굴렀다. 잠시 포위가 느슨해진 틈을 타 그는 다시 위첼에게 접근했다.


“너...”


루도는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았다. 위첼의 팔꿈치를 낚아채 그대로 쭉 당기자 그쪽에서 알아서 말 위로 올라탔다. 뒷자리에 앉은 위첼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그가 말했다.


“머, 멍청아. 문이 닫혔잖아?!”


“몰라 이 새끼야! 지금 ‘그런 걸’ 따질 때야?”


이미 폐쇄가 끝난 북문을 뒤로 하고 그들은 무작정 진지 내를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위보가 들통난 지금 딱히 달아날 곳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북문의 포위망을 뚫기엔 이미 늦었고, 서문으로 갔다간 귀환하는 기병대와 마주칠 우려가 있었다. 기사단 본대가 있는 동문, 남문으로 가는 건 그야말로 자살행위다.


“제기랄! 완전히 갇혀 버렸잖아. 제랄드 자식.”


위첼이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접근하는 병사들을 글레이브로 쳐내는 한편, 화로를 있는 대로 뒤집어 화재를 유발했다. 마침 장작 하나가 근처의 막사에 옮겨 붙어 신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시간 끌기일 뿐, 일행은 포위해오는 병력에 쫓겨 점차 막다른 곳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그때 앞자리의 소녀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쪽문...”


처음에는 병사들의 함성에 묻혀 그녀가 입을 열었다는 것을 인지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재차 말을 꺼내자, 가느다란 진동이 루도의 가슴팍에 와 닿았다.


“뭐라고?”


“시체를 처리하는 쪽문이 하나 있어요. 잡혀온 사람들이 죽으면 그곳으로...”


“어, 거기가 어딘지 알아?”


소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북서쪽의 감시탑 부근을 가리켰다. 울타리가 빽빽하게 세워져 있어 돌파하기란 불가능하지만, 쪽문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루도가 말했다.


“쪽문 크기가 얼마나 되는데? 커?”


“아, 아니요. 그냥 민가 현관이랑 비슷한 크기였어요. 지키는 사람도 없고...”


“옳거니, 씨발! 사랑한다!”


루도는 곧장 쪽문으로 말을 몰았다. 그 와중에 위첼은 날아오는 투창이며 화살을 쳐내느라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글레이브와 화살촉이 부딪쳐 채앵, 하는 쇳소리가 날 때마다 소녀는 겁에 질려 몸을 움츠렸다.

이윽고 감시탑을 지나 소녀가 말한 쪽문이 시야에 들어왔다. 문은 시체를 처리하거나 패퇴 시 도주로를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두툼한 규모의 울타리와 비교하면 굵기도 크기도 보잘 것 없었다. 일반 판잣집 문보다 약간 두꺼운 수준이랄까? 도끼로 두세 번만 찍으면 넘어갈 듯이 보였다.

하지만 찍어 내릴 도끼도 없거니와, 그러기 위해 말을 멈출 만한 시간이 안 된다는 게 문제였다. 병사들 사이로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드디어 윗선에서도 사건의 보고를 받은 것이었다.

그때 위첼이 말했다.


“말머리 옆으로 돌려! 문을 자른다.”


가능성을 재볼 시간도 없었다. 말이 좌측으로 몸을 틀자 위첼은 팔을 있는 대로 젖히고는 주저 없이 대각선으로 휘둘렀다.

가아악-. 바람 가르는 소리와 겹쳐서 무언가가 예리하게 절단되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말머리가 정면을 향했을 때, 루도는 깔끔하게 잘려나간 문을 보며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정말 베는 것 하나는 일품이었다.


“어? 야, 제발!”


그런데 쪽문이 제거되었다곤 하나, 말을 탄 채로 통과하기엔 높이가 너무 높았다. 정 지나가려면 말에서 내려 사람 따로 말 따로 지나가야만 했다. 물론 그럴 시간은 없었다.


“으랴아아!!”


우지직. 루도는 검을 휘둘러 눈높이의 울타리를 박살냈다. 위첼처럼 깔끔하게 잘리진 않았지만, 그럭저럭 시야가 트일 정도는 됐다.

이젠 정말 기다릴 틈이 없었다. 보병 네댓이 다가와 위첼을 노리고 창을 휘두르고 있었다.


“제발 가주세요, 이름 모를 말님!”


그의 간절한 외침이 통한 것일까, 말은 주춤거리면서도 좁은 통로를 지나가기 시작했다. 문을 나설 때 루도와 소녀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지만, 뒤돌아보고 있던 위첼은 그대로 울타리 모서리에 뒤통수를 찧었다.


“으억?!”


고개를 숙인 채 무언가 알 수 없는 언어를 내뱉는 그를 가볍게 무시한 채, 루도는 신나게 말 옆구리를 두드렸다. 쪽문이 위치한 곳은 잡목이 무성한 숲 가장자리였기 때문에, 먼저 속력을 낼 수 있도록 도로로 향하는 게 급선무였다.

감시탑에서 쏘아대는 화살을 요리조리 피하면서, 루도는 북동쪽으로 말을 몰아 포장도로로 들어섰다. 당연한 말이지만 백천기사단 사람들은 이미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앞서간 뒤였다.


“여울목이 여기서 어느 정도지?”


“6km! 죽어라고 달려야 돼!”


두두두두...일직선으로 닦인 도로를 따라 전속력으로 말을 달리고 있자니 새벽바람이 칼처럼 피부를 스치고 지나갔다. 막 조끼를 벗어 소녀의 상의를 가려줄 때 즈음 뒤쪽에서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위첼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기병대다! 제기랄, 말도 안 되게 빨라.”


흑연기사단의 경기병대는 놀라운 스피드로 루도 일행을 따라잡았다. 앞만 보고 달리는 루도는 그 위용을 가늠할 수 없었지만, 맨 뒤에 앉은 위첼은 땅을 울리며 돌진해오는 그들을 맨정신으로 목격해야 했다. 숫자는 50, 아니 60쯤 될까? 침입자 둘을 쫓기엔 지나치게 많은 숫자였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어째서인지 거물급 인사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위첼이 그를 발견하고는 놀라서 외쳤다.


“무슨...왜 스벤달이 여기 있는 거지?!”


흑연기사단의 단장이자, 3만의 병력을 통솔하는 그가 고작 침입자 둘을 쫓으려고 여기까지 행차했을 리는 없다. 그가 추격대를 지휘하는 데에는 필시 제랄드의 언질이 작용했을 게 분명했다. 그는 후미에 서서 어떻게든 스벤달에게 붙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루도는 다급한 마음에 말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하지만 짊어진 중량을 탓해야지 말을 탓할 수는 없는 법. 아무리 날고 기는 준마라도 사람 셋을 태우고 전속력을 낼 수는 없었다.

위첼이 글레이브를 뽑아들며 말했다.


“야! 아직 멀었냐?”


“나도 몰라 새끼야! 추격대는...억?”


뒤를 돌아본 루도는 코앞까지 다가온 기병대를 보곤 비명을 질렀다. 기사 하나가 위첼과 검을 부딪치는 사이, 다른 두 명이 양쪽에서 루도를 에워쌌다. 그들은 들고 있던 파이크(Pike)를 높이 치켜세웠다. 한 손으로는 고삐를, 한 손으로는 소녀를 감싸느라 노는 손이 없었던 루도는 꼼짝없이 당할 판이었다.

절박한 그 순간 위첼이 외쳤다.


“고개 숙여!!”


“어, 뭐?”


“숙이라고 자식아!!”


가아악-. 그가 고개를 숙이는 순간, 위첼은 허리를 틀며 360도로 글레이브를 휘둘렀다. 그와 겨루던 기사는 위험을 감지하고 재빨리 몸을 피했으나, 루도를 노리던 둘은 속절없이 옆구리를 베였다. 중상을 입은 기사들은 그대로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그러나 한숨 돌릴 틈도 없이 다른 기사들이 뒤이어 루도에게 접근했다. 고작 둘을 해치웠을 뿐, 추격대는 아직 질리도록 남아있었다. 위첼이 다시 글레이브를 휘둘렀으나, 이번에는 아무도 당하지 않았다. 그의 무기는 손잡이 끝을 잡고 휘두르면 반경 4m에 이를 정도로 높은 사정범위를 가지지만, 그만큼 파괴력이나 정밀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추가로 투입된 기사들이 위첼을 집중마크하기 시작하자 그는 자기 방어하기도 급급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가 위축된 틈을 타 다시 기사 하나가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표적은 두말할 것도 없이 루도였다.

루도는 곁눈질로 다가오는 기사의 모습을 확인했다. 그가 들고 있는 팔치온이 달빛을 반사해 번쩍였다. 루도는 시간을 끌기 위해 말머리를 살짝 왼쪽으로 돌리는 한편, 품에 안긴 소녀에게 말했다.


“나에게서 떨어져! 그리고 말 목을 붙잡고 바짝 엎드려!”


“...?”


“네 몸은 스스로 챙기라고! 나한테 바짝 달라붙어 있으니 무기를 뽑을 수가 없잖아!”


소녀는 기민하게 움직였다. 그녀가 품에서 떨어지자 루도는 곧장 검을 뽑아 등을 가렸다. 미처 고개를 돌릴 틈도 없어 일단 급한 대로 몸을 가린 것인데, 행운이 따랐는지 기사의 공격이 절묘하게 막혀 들어갔다.

방어가 성공하자 루도는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그는 등자를 디딘 발에 온 힘을 주고 그대로 우측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목을 노린 기사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감과 동시에, 루도는 상대방이 탄 말의 가슴팍을 찔렀다.


“히히힝!!”


말은 짧은 단말마를 지르고는 그대로 땅바닥에 곤두박질 쳤다. 마침 좁은 도로를 2열 혹은 3열 종대로 달리고 있던 추격대는 갑자기 쓰러진 말에 반응하지 못했고, 결국 가까이에 있던 기병 넷이 죽은 말에 걸려 나뒹굴었다.


“가...강이...”


달라붙는 추격대를 뿌리치려 무진 애를 쓰는 사이, 드디어 기나긴 숲길을 지나 강 자락이 모습을 드러냈다. 루도는 말 하나를 다시 찔러 넘어뜨리면서 멀리 보이는 강물의 반짝임을 확인했다. 습기를 담뿍 머금은 바람이 얼굴에 와 닿았다. 루도는 더욱더 말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이제 약속한 여울목까지는 1km도 채 남지 않은 상태였다.

한편 스벤달은 강 자락에서 갑자기 달라진 그들의 태도를 눈치챘다. 이 이상 지체했다간 포획이 힘들 것이라 여겼는지, 그는 후방에 있던 기사들 전원을 전면에 배치했다. 마침 숲길이 끝나고 널따란 능선이 펼쳐지던 참이라 포위망은 순식간에 촘촘해졌다. 가장 앞서나간 기사는 루도를 앞질러 말머리를 가로막을 정도였다.


“으윽...제기랄!”


말의 속력이 현저하게 감소하기 시작했다. 녀석은 앞을 가린 기사와 충돌하길 두려워한 것인지 서서히 스피드를 줄여갔다. 아무리 발을 차본들 말은 묵묵부답이었다.

그 시점에서 일행을 에워싼 기사는 총 여섯이었다. 후미에서 위첼을 상대하는 세 명과, 말머리를 가로막은 하나, 그리고 루도 양 옆의 둘. 반격은 고사하고 동시에 창대를 휘두르면 꼼짝없이 말에서 굴러 떨어져야 할 형편이었다. 기사들도 수적 우위에서 나온 자신감 때문인지 면면에 여유가 가득했다.

때문에, 그들은 강 건너에서 공격이 날아올 것이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들이 최후의 일격을 날리려고 천천히 무기를 올리던 순간, 다리 맞은편에서 색색의 빛 구체가 쏘아져 나왔다. 세 발의 포스미사일(Force missile)과 두 발의 매직미사일(Magic missile). 엄호를 위해 제리온과 레미나가 동시에 마법을 발사한 것이었다.


“엇...”


아무런 언질도 신호도 없었지만, 루도는 건너편에서 보라색 불빛이 일렁이는 것을 보곤 즉시 상황을 파악했다. 그는 몸을 웅크리는 한편 양손으로 각각 소녀와 위첼의 뒷목을 붙잡고 강제로 숙이게 했다.

뒤이어 쇠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귓가에 울려 퍼졌다.

타타타탕.


“으헉!!”


“끄아악!”


제리온의 공격은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앞서오던 기사 셋에 명중했다. 마법의 위력이란 실로 대단한 것이어서, 포스미사일은 그들이 입고 있던 플레이트조차 가볍게 구겨버렸다. 머리를 맞은 자는 그 자리에서 목이 부러진 듯 말 위에 축 늘어졌다.

반면 레미나의 매직미사일은 정확도에 다소 문제가 있었다. 한 발은 후미를 노리던 기사의 옆구리에 명중했지만, 한 발은 궤도가 어긋나 하마터면 위첼의 정수리를 들이받을 뻔했다.

선두의 기사 넷이 일시에 쓰러지는 모습은 뒤에 있던 추격대에게는 자신들이 함정에 빠진 것은 아닐까, 라는 의심을 갖기에 충분했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어두운 새벽, 좁은 시야를 이용해 백천기사단이 매복해 있지 않을 거라고 어느 누가 장담하겠는가. 게다가 이쪽에는 총지휘관인 스벤달까지 있었다. 이런 생각이 미치자 쫓아가던 기사들의 속력이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계속 쫓아! 매복 따위는 없다. 적은 기껏해야 열 명도 안 된단 말이다!”


위축된 그들을 다시 달려나가게 만든 건 스벤달의 일갈이었다. 제랄드로부터 로샤단의 정보를 습득한 그는 망설임 없이 돌격을 지시했다. 현상수배범인 그들이 기사단과 연대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장군의 분노에 탄력을 받은 기사들이 일시에 튀어나갔다. 전면에 있던 기사들은 스벤달이 말한 대로 적의 숫자가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다. 여울목에 놓인 다리 끝자락에 도망친 포로들을 비롯해 스무 명 남짓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게 보였다. 적이 소수라는 것을 확인하자 기사들은 더욱 기세를 올렸다.


“제리오온!!”


한편 강 언저리에 다다른 루도는 건너편에서 또 뭔가 수를 써주길 기대하며 손을 흔들었다. 그쪽에서도 마리네와 에레이시아가 무언가 제스처를 취하고 있었는데, 도무지 뭘 뜻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때 다시 제리온의 손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다시금 생성된 포스미사일을 보며 위첼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건 누구야? 제르카엘시온 멜피드?!”


“입 닥치고 고개나 숙여!”


투학, 투학! 마법이 발사될 때 나오는 효과음이 그렇게나 반가울 수가 없었다. 다시 쏘아진 두 발의 포스미사일은 루도의 머리 위를 가볍게 지나쳐 쫓아오던 기사 둘을 향해 날아갔다. 조금 전의 상황도 있는지라 기사들은 이번에는 재빠르게 반응했다.

한 명은 창대를 들어 마법을 튕겨내려 하였다. 그러나 구체의 충격력은 생각보다 어마어마해서, 창이 부러짐과 동시에 기사는 그대로 말안장에서 굴러 떨어졌다. 다른 한 명은 이를 보고는 재빨리 몸을 젖혀 공격을 회피했다. 그런데 피했다고 생각한 순간, 구체가 갑자기 허공에서 방향을 틀었다. 궤도를 수정한 구체는 정확하게 기사의 명치를 강타했다.

위첼은 두 발의 구체가 모두 명중하는 것을 똑똑히 목격했다.


“마, 맙소사...”


그는 질린 얼굴로 강 건너편의 곱슬머리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단 몇 초 만에 기사 다섯을 쓰러뜨리다니, 로샤단에 마법사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 수준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단순히 마법의 컨트롤만 두고 보면 안개송곳니의 마법사들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실력이었다.


“좋아. 거의 다 왔다!”


제리온의 놀라운 엄호에 힘입어 루도는 다리 위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일행과의 거리는 불과 70여 미터로, 동료들의 얼굴이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다리를 건넌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여전히 추격대는 건재했고, 이에 대항하는 동료의 숫자는 한정되어 있었다. 백천기사단과 힘을 합치면 상대 못 할 전력도 아니지만, 그래도 적의 숫자가 두 배에 달한다는 걸 고려하면 아무 피해 없이 상황을 타파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루도는 마리네와 디리터의 얼굴에 떠오른 당혹스러움을 보고 그들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거라 여겼다. 그러나 이는 완벽한 억측이었다. 둘은 당황한 듯 안절부절못하며 쉴 새 없이 입으로 무언가를 뻐끔거렸는데, 당연히 루도는 둘이 뭐라고 말하는지 들을 수 없었다.


“뭐? 뭔 소리야?”


루도의 뒤를 따라 추격대 절반 정도가 다리로 들어섰다. 다리는 대리석 지지대를 세우고 그 위에 벽돌을 쌓아 만든 것으로, 웬만한 무게에는 꿈쩍도 하지 않을 만큼 튼튼했다.

때문에, 루도는 그때 제리온이 다리를 폭파하려 한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건 막 절반 정도를 지나왔을 때였다.


“...음?”


사실 여기까지 일이 틀어진 데에는 소녀를 구출하느라 추격대에게 덜미를 잡힌 것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일행은 루도가 중간에 잡혔으면 잡혔지, 이렇게 꼬랑지에 적을 덕지덕지 달고 오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어떻게 좀 간격을 벌려보려고 제리온과 레미나가 마법을 쏜 것인데, 이마저도 여의치가 않았다.

거두절미하고 말하면, 일행은 처음부터 흑연기사단과 싸울 생각이 없었다. 루도가 도착하는 대로 제리온이 마법으로 다리를 끊어버려 추격대의 전진을 차단한다는 게 원래 속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루도는 생각보다 너무 지체했고, 그 덕에 양 옆에 기사들을 줄줄이 달고 나타났다.

더 기다렸다간 추격대가 함께 강을 건널지도 모르고, 또 마법을 썼다간 루도가 휘말릴지도 모르는,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제리온은 그런 문제로 고민할 정도로 우유부단한 성격이 아니었다. 다리를 건너기까지 20미터 정도 남았을까, 그의 손바닥 위로 불덩어리가 뱅글뱅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같이 있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다가오던 루도도 그 광경을 보고 탄성을 터뜨렸다.


“으억, 저거...?”


그 불덩어리를 어찌 잊을 수 있으랴. 메르실에서 군함 한 척을 박살내던 그 위력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화염이 자신을 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절박하게 마리네를 바라보았다.

설마?

설마.

마리네와 디리터, 에레이시아는 한몸이 되어 온갖 제스처를 동원해 그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 신호란 실로 단순했다.


“야 이 미친 인간아아아!!”


루도는 우측의 기사를 어거지로 밀쳐내고는, 주저 없이 다리 난간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건너편에서는 이미 모든 준비를 끝낸 제리온이 천천히 팔을 다리 중앙으로 겨누고 있었다. 그 마법의 조준점이 자신을 향하는 것만큼 소름끼치는 경험도 없었다.

한편 이런 형편을 알 리 없는 위첼은 갑자기 방향을 꺾는 루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야 어디가? 어디 가냐고?!”


“닥치고 고개나 숙여 임마!”


“뭐...응?!”


그가 불덩어리를 발견했을 땐 이미 말이 난간을 디디고 힘껏 도약하고 있었다. 루도 쪽이 강물에 뛰어드는 것을 확인하자 제리온은 곧장 마법을 발사했다.


“파이어볼(Fireball)!"


쿠콰과광.

메르실 때보다 한층 강력해진 그 파괴력은, 굉음을 일으키며 단단한 석재 다리를 나뭇가지처럼 구겨버렸다. 엄청난 업화의 향연과 함께 조각난 대리석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폭발의 중심지에 있던 기사 대여섯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산산조각이 났다. 엎드려 있던 에레이시아는 사람 눈알 같은 게 땅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꾸르르륵...”


숨을 참고 입수하는 게 아무 준비 없이 들어가는 것과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뼈저리게 느끼면서, 루도는 수면 위로 올라가려고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렸다. 칠흑 같은 물속이었지만 그는 돌이며 갑옷 파편이 강바닥으로 가라앉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만약 물에 뛰어들지 않았으면 그런 파편들이 자신의 몸을 짓찢었을 거라 생각하니 등골이 서늘해졌다.

수면 위로 올라가자 디리터가 밧줄을 던져주었다. 루도는 소녀를 가장 앞쪽에 잡게 하고, 자신과 위첼은 혹시 모를 화살 공격에 대비해 후방을 경계했다. 디리터가 밧줄을 잡아당기자 셋은 순식간에 물가까지 끌려왔다.

흑연기사단은 완전히 추격의지를 상실한 듯 다리에서 멀리 떨어졌다. 연기가 자욱하게 솟아오르는 새벽, 화염은 서로의 얼굴을 알아보게 할 정도로 밝게 타올랐다. 스벤달은 만류하는 부하들을 뿌리치고 전면에 나섰다. 그는 무사히 뭍으로 나온 루도를, 연달아 마법을 사용해 기진맥진한 제리온을 바라보고는 마지막으로 그의 옆에 서 있던 이칼롯과 눈을 마주쳤다. 아무런 대화도 없었지만 둘은 직감적으로 서로가 양 진영의 우두머리임을 알아차렸다.

스벤달은 살짝 어금니를 깨물었다.


“깜찍한 짓을 하는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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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10) +2 15.05.07 889 23 24쪽
227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9) +1 15.05.07 812 21 24쪽
226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8) +4 15.05.06 731 26 22쪽
225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7) +2 15.05.06 976 24 29쪽
224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6) +3 15.05.06 802 23 28쪽
223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5) +4 15.05.05 929 26 24쪽
222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4) +2 15.05.05 762 23 23쪽
221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3) +1 15.05.05 642 22 15쪽
220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2) +2 15.05.05 770 24 18쪽
219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1) +4 15.05.05 685 23 15쪽
218 람의 계승자 - ep.5 - 사냥감의 반전(4) +2 15.05.05 921 24 23쪽
217 람의 계승자 - ep.5 - 사냥감의 반전(3) +3 15.05.04 935 22 23쪽
216 람의 계승자 - ep.5 - 사냥감의 반전(2) +2 15.05.04 867 22 21쪽
215 람의 계승자 - ep.5 - 사냥감의 반전(1) +1 15.05.04 774 24 20쪽
214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5) +2 15.05.04 709 24 15쪽
213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4) +2 15.05.04 720 25 23쪽
212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3) +3 15.05.03 844 29 18쪽
211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2) +3 15.05.03 763 22 23쪽
210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1) +2 15.05.03 853 23 20쪽
209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7) +5 15.05.03 795 28 25쪽
208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6) +2 15.05.03 894 24 22쪽
207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5) +4 15.05.02 937 29 21쪽
206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4) +1 15.05.02 884 27 20쪽
205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3) +2 15.05.02 689 24 21쪽
204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2) +2 15.05.02 766 24 24쪽
203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1) +2 15.05.02 585 24 22쪽
202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6) +3 15.05.02 695 28 18쪽
201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5) +5 15.04.29 863 24 19쪽
200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4) +1 15.04.29 937 24 26쪽
199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3) +1 15.04.29 789 24 24쪽
198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2) +3 15.04.29 812 26 18쪽
197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1) +1 15.04.29 758 24 17쪽
196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8) +4 15.04.28 904 28 16쪽
»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7) +3 15.04.28 840 25 20쪽
194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6) +3 15.04.27 711 26 19쪽
193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5) +3 15.04.27 756 22 17쪽
192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4) +2 15.04.27 731 22 18쪽
191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3) +1 15.04.27 730 30 18쪽
190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2) +2 15.04.27 757 27 19쪽
189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1) +2 15.04.27 789 31 18쪽
188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完) +1 15.04.27 598 33 18쪽
187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5) +4 15.04.26 733 24 17쪽
186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4) +1 15.04.26 928 28 16쪽
185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3) +2 15.04.26 739 26 20쪽
184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2) +6 15.04.23 779 28 15쪽
183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1) +3 15.04.23 839 26 19쪽
182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2) +2 15.04.23 755 25 17쪽
181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1) +3 15.04.23 767 26 15쪽
180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0) +1 15.04.23 682 25 22쪽
179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9) +3 15.04.22 811 29 16쪽
178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8) +3 15.04.22 846 27 15쪽
177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7) +1 15.04.22 776 29 18쪽
176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6) +1 15.04.22 790 23 18쪽
175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5) +2 15.04.22 765 29 15쪽
174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4) +3 15.04.22 911 25 18쪽
173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3) +5 15.04.21 767 27 16쪽
172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2) +2 15.04.21 921 25 14쪽
171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 +3 15.04.21 805 25 17쪽
170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8) +3 15.04.21 729 24 21쪽
169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7) +2 15.04.21 703 19 15쪽
168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6) +4 15.04.20 750 24 18쪽
167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5) +2 15.04.20 655 20 18쪽
166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4) +1 15.04.20 767 23 17쪽
165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3) +2 15.04.20 738 24 16쪽
164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2) +3 15.04.20 809 20 16쪽
163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1) +1 15.04.20 821 22 21쪽
162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6) +1 15.04.20 830 29 14쪽
161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5) +2 15.04.20 711 25 18쪽
160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4) +3 15.04.19 865 28 18쪽
159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3) +3 15.04.19 946 28 18쪽
158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2) +3 15.04.19 901 26 22쪽
157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1) +5 15.04.19 1,210 46 22쪽
156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10) +6 15.04.18 901 26 21쪽
155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9) +3 15.04.18 772 26 18쪽
154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8) +1 15.04.18 656 24 19쪽
153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7) +2 15.04.18 686 26 18쪽
152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6) +1 15.04.18 748 27 17쪽
151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5) +4 15.04.18 713 23 16쪽
150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4) +1 15.04.18 668 24 17쪽
149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3) +2 15.04.18 754 22 17쪽
148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2) +3 15.04.16 849 29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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