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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연 님의 서재입니다.

람의 계승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저스연
작품등록일 :
2015.03.21 02:01
최근연재일 :
2015.09.01 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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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27 0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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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完)

DUMMY

안트로서는 가래를 끓으며 괴로워하는 와중에도 특유의 빈정거림을 잃지 않았다. 물론 드래곤을 앞에 두고도 그런 태도를 거두지 않는 것은 그와 케리아돌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성립하고 있기 때문이었지만, 이를 알 바 없는 일행은 행여 그녀가 안트로서를 물어 죽이는 건 아닌가 싶어 전전긍긍했다.

안트로서가 말했다.


“펠아람의 아이를 두둔하겠다고? 당신은 신의 아이를 경멸하는 줄 알았는데.”


“어림짐작하지 말거라. 난 펠아람의 아이라고 하지 않았다. 루도 클로람이라 했지.”


“그게 그거지. 속세가 싫어 이 섬으로 도망쳐온 게 아니었소? 그런데 이제 다시 흥미가 생긴 건가?”


“그대의 말장난에 어울려보자면,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케리아돌은 양산을 접고는 그걸 지팡이 삼아 우아하게 걸어왔다. 그녀가 레미나 옆을 지나칠 때 루도는 다시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조차도 빛이 바랠 정도의 아름다움이라니. 레미나도 어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미인이었지만, 그녀와 나란히 놓고 보면 역시 상대가 되지 않았다. 디리터는 그녀의 초상화를 화폭에 담고 싶다고 우스갯소리로 중얼거렸는데, 막상 다시 만나고 보니 그러긴커녕 황급히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케리아돌은 쩔쩔매는 일행을 향해 생긋 눈웃음을 짓고는, 식탁의자 하나를 가져와 앉았다. 그녀가 말했다.


“그대야말로 박정하구나. 그대의 손녀를 구하러 간다 하는데 어찌 말리는 게냐?”


“쿨럭쿨럭, 저딴 녀석들 도움 없어도 루루는 내가 구할 거요. 나도 업솔루트 레벨의 마법사란 말이오!”


“흠, 그 몸으로? 무리하지 말거라. 넌 지금 배를 타지도 못해.”


“크윽...잘도 주절주절...”


대강 예상하긴 했지만 역시나 대화의 주도권은 케리아돌이 가지고 갔다. 안트로서가 아무리 기를 쓰고 허점을 노려본들, 그녀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대답했다. 우아하게 다리를 꼰 채 턱을 치켜든 그 모습은, 어떤 상황이 닥쳐도 동요하지 않을 것 같은 여유가 담겨 있었다.

안트로서가 말했다.


“이해할 수가 없군. 만약 저 녀석이 ‘저주’라면 어떻게 할 생각이오? 아니면 당신은 저 녀석이 저주인지 아닌지 알기라도 한단 말이오?”


“후후후, 그걸 알면 나 또한 신의 반열에 올랐겠지. 모르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


케리아돌은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 웃음은 조소나 경멸이 아닌, 정말로 유쾌해서 짓는 웃음이었기 때문에 루도는 자기도 모르게 안심이 됐다. 모르는 건 확실히 모른다고 말하는 게 그녀의 특징이기도 했다. 그녀가 말했다.


“안트로서, 전에 어느 철학자가 한 말이 있느니라.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재미다」그땐 몰랐는데, 실로 명언이로다. 재미있다는 건 참 중요한 거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요?”


“도박을 해보겠다는 게야. 확률은 5분의 4다. 꽤 높지 않느냐? 나는 이 소년이 ‘펠아람의 저주’가 아니라는 데에 걸겠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순간이었다. 엄숙한 자리가 아니었다면 펄쩍 뛰어오르며 함성을 질렀을 게 분명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실버드래곤 케리아돌이, 자신을 믿어주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루도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아 황급히 턱을 치켜세웠다. 사실 지금까지 그는 펠아람의 저주 때문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아왔다. 레이시와 그람은 아예 그가 타락한 신의 아이라 확정 지었고, 안트로서도 알게 모르게 ‘네가 저주면 어쩔 건데?’라는 식으로 말하기 일쑤였다. 물론 그때마다 로샤단 동료들이 그를 위로해주긴 했지만 그건 마치 가족의 무조건적인 믿음과도 같은 거라서, 그다지 위안이 되진 않았다. 그런 와중에 케리아돌의 신뢰를 얻었으니, 이젠 진짜 ‘저주’이면 안 되는 이유가 생긴 판이었다.

반면 안트로서는 완전히 똥 씹은 얼굴이었다. 그는 그녀가 이렇게까지 루도를 두둔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도박을 하시겠다니, 판돈은 이 세상인데? 너무 무책임한 거 아니오?”


“난 500년이나 인간을 위해 봉사했느니라. 게다가 지는 패에 건 것도 아닌데, 그 정도 권리는 있지 않느냐?”


“젠장 말이나 못하면....아후, 하나만 묻겠소.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요?”


케리아돌은 대답에 앞서 푸근하게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자 마주한 안트로서는 순간 얼굴이 시뻘개져서 이를 갈았다.

그렇다. 어떻게 보자면 이 모든 상황의 원인은 안트로서가 자초한 것이다. 루도에게 케리아돌을 소개해준 장본인이 바로 자신 아닌가. 만약 둘이 만나지 않았다면 그녀가 여기까지 오는 일도 없었을 터였다.


“그야 물론 로샤단이 마음에 들어서이지. 재미있는 만남을 주선해준 것에 대해서는 고맙게 생각하느니라.”


이야기는 끝났다. 물론 더 닦달하면 시간은 끌 수 있겠지만, 그런다고 케리아돌의 입장이 바뀔 리는 만무했다. 안트로서도 그걸 알았는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는 짜증스럽게 머리를 긁적대다, 멀뚱히 서 있던 메디치에게 물었다.


“타이달루크 메디치, 당신도 같은 생각이오?”


그러자 메디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글쎄요, 저는 일단 중립입니다만, 그녀 말대로 이쪽이 더 재미있을 거 같긴 하군요.


“제엔장, 드디어 둘 다 노망이 난 게 분명해!”


안트로서는 알 수 없는 욕설을 실컷 내뱉다가, 구석에 선 루도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루도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 그의 울화통을 더 터지게 했다. 그는 윈프레드도 루도와 별반 다르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고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래, 가라 가! 맘대로 해라. 빌어먹을, 세상이 망하든지 말든지.”


그는 요강에 가래를 탁 뱉고는 비틀거리며 방으로 향했다. 아르유가 그를 부축해주었지만, 그녀 역시 생글거리며 ‘할아버지, 잘하셨어요.’라고 말하는 걸로 보아 그의 편은 아무도 없다고 봐야 했다.

그가 방문 너머로 사라지자 디리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우, 겨우 다 정리됐네. 이제 떠나면 되는 거지?”


그러자 윈프레드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나왔다. 안트로서가 깨어나서, 그리고 케리아돌이 도착해서 줄곧 말할 타이밍을 잃었던 그가 간신히 발언권을 얻어 말했다.


“아, 그 얘기 말이네만...사실 육지로 돌아갈 수가 없네.”


“...엥?”


그는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말했다.


“이 계절에는 강한 동풍이 분다네. 자네들이 순풍을 받아 왔을 때처럼 말이야. 그런데 돌아갈 때가 되면 순풍이 역풍으로 바뀌지. 물론 삼각돛을 개조한 대형범선이 있다면 항해도 가능하겠지만...우리 섬에는 그런 큰 배가 없다네.”


“에엑? 그...그럼 노를 저어서 가면...”


“...자네 배 안 타봤나? 원양 항해에 바람이 받쳐주지 않으면 노고 뭐고 없는 거야. 그리고, 노를 저었다가 또 시서팬트라도 만나면 어쩌려고 그러나?”


디리터는 뭔가 반박하려다가 시서팬트 얘기가 나오자 바로 납득해버렸다. 바다 한가운데서 그 괴물과 다시 맞닥뜨린다 생각하니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배를 띄울 수가 없으니 결국 이야기는 원점이었다. 바람의 바뀌려면 겨울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그때가 되면 이미 리크나이츠는 멸망하고 없을지도 몰랐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케리아돌이 구원의 빛을 내려주었다. 아르유가 타준 홍차를 음미하느라 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비로소 입을 연 것이다.


“그 얘기를 하려고 온 거였지. 육지까지 타고 갈 것을 구해주마. 조금 거친 녀석이지만, 그대들이라면 괜찮을 게야.”


그때까지는 다들 당연히, 케리아돌이 준비한 운송수단이 배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배(?)가 준비되기까지 하루를 기다리라 했다. 일행도 떠나려면 이것저것 준비할 게 필요했으므로 작별인사도 할 겸 윈프레드의 집에서 밤을 보냈다. 케리아돌이 떠나고 나서 일행은 장비며 식량, 여비로 쓸 보석, 분장을 위한 옷가지며 화장품을 챙겼다. 특히 아직 로샤단에 걸린 현상금이 유효한 관계로 변장은 필수사항이었는데, 루도와 마리네는 레미나에게 여성용 치마의 용도를 설명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에레이시아의 경우는 다들 그녀가 섬에 남길 권했지만, 그녀가 바득바득 디리터를 따라가겠다고 우겨 결국 동행하기로 했다.


“라키시아에 내 동생이 살고 있단 말야! 전쟁통에 혹시 험한 꼴 당한 거 아닌지 걱정이야.”


하지만 여전히 위험요소는 존재했다. 이칼롯은 일단 본국의 상황을 지켜본 후, 사태가 여의치 않으면 그녀를 류이너스 교단에 보내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레미나의 경우는, 아주 자연스럽게 - 제리온의 결사반대를 간단히 일축하며 - 일행에 합류했다. 왕이 위험에 처해있는 만큼 두고 볼 수 없다는 그녀의 말도 일리는 있었지만, 행여 일행과 함께하다 위험에 빠지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루도가 위험요소를 언급하자 그녀는 안트로서에게 받은 박달나무 지팡이를 빙글빙글 돌리다가, 땅바닥에 떨어뜨리고는, 다시 후다닥 집으며 말했다.


“내 몸 하나는 스스로 지킬 수 있어요. 이래봬도 아카데미 수석이었답니다. 호호호.”


결국 떠나는 멤버는 로샤단 외 에레이시아와 레미나로 결정 났다. 아르유도 함께 가고 싶어 했지만 안트로서의 반대가 워낙 심했으므로 추이를 보고 나서 후발대로 오기로 했다.

대신 그녀는 레미나와 함께 일행에게 도움 될 만한 도구가 없을까 싶어 종일 마을을 털고 다녔다. 두 소녀는 잡화점과 경비대 무기고, 대장간과 술집 등을 지치지도 않고 돌아다녔다. 결국 마지막에 도착한 곳은 윈프레드의 지하서재였는데, 거기서 둘은 잠겨있는 상자를 하나 발견했다.

윈프레드가 말하길 그것은 그가 젊은 시절 대륙을 여행 다닐 때 모았던 물품으로, 상트룸의 묵주부터 도금된 갈매기 조각상 등 잡다한 기념품이 보관되어 있었다. 그중 단연 둘의 시선을 끈 것은 아주 얇은 벨벳으로 만든, 하반신 부분이 거의 없다시피 한 원피스였다. 레미나는 까르르 웃으며 그 원피스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워낙 옷감이 얇아 손을 대보니 반대쪽에서도 그대로 비춰졌다.


“윈프레드, 이 옷은 뭔가요? 신기하게 생겼네.”


윈프레드는 마시던 물이 체했는지 한참을 콜록대다 말했다.


“아...그건 ‘필승의 제복’이네.”


“예? 그냥 잠옷처럼 생겼는데요...”


“그래. ‘필승의 제복’이지.”


그는 원피스의 자세한 기능에 대해서는 언급하길 거부했다.

한편 안트로서는 따로 제리온을 불러냈다. 그는 투덜거리면서도 스크롤 하나를 꺼내 제리온에게 건넸다.


“왕궁에 도착하면 그걸 사용해라. 니놈이 장애인이 아닌 이상 루루의 위치를 바로 포착해낼 수 있을 게다.”


“흐음...이게 뭔데? 로케이트 오브젝트?”


“그거보다는 훨씬 고급스럽지. 퍼시스턴트 퍼슈어(Persistent pursuer)다. 내 역작이지.”


그는 스크롤의 효능 및 사용법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제리온은 그 와중에도 또 줄 거 없냐며 입맛을 쩝쩝 다시다가 내쫓기다시피 오두막을 나와야 했다.

에메랄드 섬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은, 왠지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못할 것만 같아 마시는 밤공기가 쓸쓸하게 느껴졌다. 지난 두 달이란 시간이 돌이켜보니 찰나처럼 짧게 느껴졌다. 그만큼 섬에서 보낸 나날이 달콤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모든 준비를 끝낸 후 루도는 집 밖으로 나와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이마를 식혀주었다. 밤하늘에 깔린 별들은 삼키면 왠지 삼키면 톡 쏘는 식초 맛이 날 것만 같았다. 손을 뻗어 별무리를 잡으려 했지만, 당연하게도 헛되이 허공만 휘저을 뿐이었다.

그람이 말했던가? 닿을 수 없는 저 별을 잡기 위해....

불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리크나이츠에 발을 내딛는 순간 다시 현상수배자가 되고, 안개송곳니의 추적을 받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단지 불안함뿐이었다면 섬을 떠나려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막연한 공포와 함께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희열. 안개송곳니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한껏 고조되었다. 그 세상 다 산 거 같던 레이시가 분노로 얼굴을 일그러뜨릴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왕의 일이 끝나면, 그때는 카잘산맥으로 떠나야 한다. 그곳에 가면 어떤 식으로든 결판이 날 테고, 더는 자신의 정체성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독수리는 없다...”


람카디스는 신의 아이도 인간이라고 했다. 그는 신의 아이 개개인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여겼고, 때문에 각성하지 않은 채 평범한 삶을 영위하길 바랐다. 상트룸 수도회는 신의 아이를 각성시켜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고자 했고, 반면 안개송곳니는 그들을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려 하고 있다.

어느 쪽이 맞냐고 하면, 루도는 당연히 람카디스 쪽이었다. 그의 아들이라서도 아니고, 자신이 신의 아이라서는 더더욱 아니다. 순수하게 그의 사상에 공감했고, 또 그게 옳은 일이라고 여겼다.

그는 한 모금 쓰게 웃고는 발걸음을 돌렸다. 내일 여정을 위해서라도 충분히 수면을 취해둘 필요가 있었다. 현관을 닫자 강풍이 불어 문이 반쯤 열렸다. 루도는 고리를 잠궈 문을 단단히 고정시킨 뒤 방으로 돌아갔다. 바다 건너 불어온 강풍은 날이 새도록 그 기세를 멈추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일행은 마을 사람들과 작별인사를 나눈 후 남동쪽 끄트머리에 위치한 해안절벽으로 향했다. 거센 파도에 암석이 깎이고 깎여 이루어진 해안절벽은 그 가파른 경사 때문도 있지만 절벽 끝에 서면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불어오는 강한 바닷바람 탓인지 사람의 발걸음이 좀처럼 닿지 않는 곳이었다. 소금기를 머금은 바람은 물이끼를 제외하곤 식물이 번식하는 걸 허락하지 않아, 절벽 가는 풀 한 포기 없어 황망한 느낌이었다.

케리아돌과 메디치는 일찌감치 도착해 있었는지 일행을 발견하곤 손을 흔들었다. 케리아돌은 전날과 다름없는 드레스 차림이었는데, 바람을 받아 소맷자락이며 적갈색 머리카락이 마구 흩날렸다. 그녀가 말했다.


“왔군. 이제 바로 떠날 터인데, 마음의 준비는 되었느냐?”


루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바다에는 배는커녕 자그마한 뗏목 하나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배를 타려고 이런 암초 무성한 절벽 가에 모인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준비는 다 끝났습니다만...그 타고 갈 배는 어디에 있나요?”


“배? 내가 그렇게 말했던가?”


케리아돌은 생긋 웃고는 손으로 입을 가려 새 지저귀는 소리를 냈다. 그러자 일순 광풍이 불어오고,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는가 싶더니, 거대한 독수리 하나가 절벽 끝에 내려앉았다.


“으히익?!”


‘거대하다’라는 단어가 실로 상대적인 것이긴 하겠지만, 그것의 몸집은 지금까지 보아온 어떤 생물보다도 단연 압권이었다. 부리는 공성추를 보는 듯했고, 발톱은 황소 몇 마리쯤은 우습게 집어갈 정도로 거대했다. 깃털은 하나하나가 다 자란 갈대풀보다도 컸는데, 놈이 날개를 갈무리하며 일으킨 바람에 아르유가 엉덩방아를 찧었을 정도였다.

천 년 전의 신수가 부활한 것일까. 녀석의 몸집은 가루루는 말할 것도 없고, 케리아돌의 본래 모습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메디치가 뭐라 말하자, 녀석은 나른한 하품을 하며 그 자리에 누웠다. 케리아돌이 녀석의 날개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로크(Roc)라고 하지. 내 오랜 친구이니라. 맞바람을 타고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는 자인데, 이번에 동쪽으로 간다 하여 내 특별히 그대들을 태워 달라 청했지. 대충 리크나이츠 근방에서 내려주면 되지 않느냐?”


“이...이걸 타고 가라고요?”


에레이시아가 질겁하며 말했다. 그녀의 발언은 모두의 의견을 대변한 것이기도 했다. 하늘을 날아서 간다니! 물론 아르유도 곧잘 가루루를 타고 돌아다니긴 하지만, 그것과는 경우가 달랐다. 잠깐 올라갔다 내려오는 것과, 몇날 며칠을 하늘 위에서 지내는 건 엄연히 다른 문제였다. 바다를 가로지르다 자칫 실수하여 떨어지기라도 하면, 망망대해에 빠진 사람을 어느 누가 구해준단 말인가.

그러나 케리아돌은 전혀 상관없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아아, 날개 없는 것들은 높은 곳을 무서워했었지?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느니라. 공포만 극복한다면, 배를 타고 가는 것보다 훨씬 안전할 테니까.”


“.....”


그녀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겠지만 다들 주춤거리기만 할 뿐 좀처럼 다가가지 못했다. 이런 경우, 무리 내에서 가장 진취적인 사람이 스타트를 끊어야 다른 이들도 따라오는 법인데, 이번에 그 역을 맡은 인물은 다른 누구도 아닌 레미나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호기심으로 똘똘 뭉친 그녀는 거대한 독수리를 보곤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이거, 혹시 잡아먹히거나 하진 않겠죠?”


메디치가 답했다.


-일단 육식이긴 합니다만, 케리아돌이 직접 부탁한 만큼 여러분을 공격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이래보여도 개나 고양이보다 훨씬 영리하거든요.


그러자 레미나는 의심 없이 그 말을 받아들이곤 곧장 로크에게 다가갔다. 녀석은 접근하는 소녀에게 힐끗 눈길을 한 번 주었을 뿐, 그 자리에 누운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안전하다는 걸 확인하자 레미나는 폴짝 뛰어 로크의 등에 올라탔다.


“꺄아! 제리온, 제리온, 이거 봐! 깃털이 폭신폭신해.”


그걸 기점으로 제리온과 이칼롯, 루도와 마리네가 차례차례 로크에 올라탔다. 에레이시아는 끝까지 못 타겠다며 버텼지만, 결국 디리터에게 강제로 업혀왔다.

로크의 깃털 사이사이엔 웬 등자 같은 것이 몇 개 매달려 있었는데, 메디치는 밧줄을 주며 등자에 허리를 꽉 묶으라고 했다. 그가 말하길 로크의 비행속도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빨라, 안전띠로 몸을 고정하지 않으면 맞바람에 날아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다들 비행준비가 한창일 때, 루도는 케리아돌에게 다가갔다. 전날 자신을 옹호해준 데에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걸어오자 케리아돌은 은은한 미소를 지어 답했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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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 람의 계승자 - ep.5 - 사냥감의 반전(2) +2 15.05.04 867 22 21쪽
215 람의 계승자 - ep.5 - 사냥감의 반전(1) +1 15.05.04 774 24 20쪽
214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5) +2 15.05.04 709 24 15쪽
213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4) +2 15.05.04 720 25 23쪽
212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3) +3 15.05.03 844 29 18쪽
211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2) +3 15.05.03 763 22 23쪽
210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1) +2 15.05.03 853 23 20쪽
209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7) +5 15.05.03 795 28 25쪽
208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6) +2 15.05.03 894 24 22쪽
207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5) +4 15.05.02 937 29 21쪽
206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4) +1 15.05.02 884 27 20쪽
205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3) +2 15.05.02 689 24 21쪽
204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2) +2 15.05.02 766 24 24쪽
203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1) +2 15.05.02 585 24 22쪽
202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6) +3 15.05.02 695 28 18쪽
201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5) +5 15.04.29 863 24 19쪽
200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4) +1 15.04.29 937 24 26쪽
199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3) +1 15.04.29 789 24 24쪽
198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2) +3 15.04.29 812 26 18쪽
197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1) +1 15.04.29 758 24 17쪽
196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8) +4 15.04.28 904 28 16쪽
195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7) +3 15.04.28 840 25 20쪽
194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6) +3 15.04.27 711 26 19쪽
193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5) +3 15.04.27 756 22 17쪽
192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4) +2 15.04.27 731 22 18쪽
191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3) +1 15.04.27 730 30 18쪽
190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2) +2 15.04.27 757 27 19쪽
189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1) +2 15.04.27 789 31 18쪽
»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完) +1 15.04.27 599 33 18쪽
187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5) +4 15.04.26 733 24 17쪽
186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4) +1 15.04.26 928 28 16쪽
185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3) +2 15.04.26 739 26 20쪽
184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2) +6 15.04.23 779 28 15쪽
183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1) +3 15.04.23 839 26 19쪽
182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2) +2 15.04.23 755 25 17쪽
181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1) +3 15.04.23 767 26 15쪽
180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0) +1 15.04.23 682 25 22쪽
179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9) +3 15.04.22 811 29 16쪽
178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8) +3 15.04.22 846 27 15쪽
177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7) +1 15.04.22 776 29 18쪽
176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6) +1 15.04.22 790 23 18쪽
175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5) +2 15.04.22 765 29 15쪽
174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4) +3 15.04.22 911 25 18쪽
173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3) +5 15.04.21 767 27 16쪽
172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2) +2 15.04.21 922 25 14쪽
171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 +3 15.04.21 805 25 17쪽
170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8) +3 15.04.21 729 24 21쪽
169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7) +2 15.04.21 703 19 15쪽
168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6) +4 15.04.20 750 24 18쪽
167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5) +2 15.04.20 655 20 18쪽
166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4) +1 15.04.20 767 23 17쪽
165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3) +2 15.04.20 738 24 16쪽
164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2) +3 15.04.20 809 20 16쪽
163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1) +1 15.04.20 821 22 21쪽
162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6) +1 15.04.20 830 29 14쪽
161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5) +2 15.04.20 711 25 18쪽
160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4) +3 15.04.19 865 28 18쪽
159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3) +3 15.04.19 946 28 18쪽
158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2) +3 15.04.19 901 26 22쪽
157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1) +5 15.04.19 1,210 46 22쪽
156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10) +6 15.04.18 901 26 21쪽
155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9) +3 15.04.18 772 26 18쪽
154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8) +1 15.04.18 656 24 19쪽
153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7) +2 15.04.18 686 26 18쪽
152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6) +1 15.04.18 748 27 17쪽
151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5) +4 15.04.18 713 23 16쪽
150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4) +1 15.04.18 668 24 17쪽
149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3) +2 15.04.18 754 22 17쪽
148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2) +3 15.04.16 849 29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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