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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연 님의 서재입니다.

람의 계승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저스연
작품등록일 :
2015.03.21 02:01
최근연재일 :
2015.09.01 03:28
연재수 :
34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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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9,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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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57
글자수 :
2,844,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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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26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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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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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글자
20쪽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3)

DUMMY

나머지 사람들이 각자 훈련에 매진하는 동안 제리온은 안트로서의 오두막에서 그의 조수로 일했다. 둘 다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라 마찰은 불가피했지만, 결국 서로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것이었다. 제리온은 고위마법사 밑에서 수련을 하고 싶었고, 안트로서는 쓸 만한 심부름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레미나도 이따금 오두막에 들러 둘을 도와주긴 했으나 보통은 아르유와 함께 놀러다니기 바빴다.

그러다 어느 늦은 오후 날, 제리온은 일방적으로 다른 이들에게 전갈을 보냈다. 새로운 마법을 보여줄 테니 해질 무렵에 외곽 공터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소식을 접한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이른 저녁을 먹고 나서 제리온은 약속한 공터로 향했다. 뽐내길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오늘만은 자신이 익힌 성과를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지난 몇 년을 투자한 신마법. 이미 만들어진 것을 익혀도 빠듯한 마법사의 세계에서 신마법을 만든다는 건 대단한 결심을 요했다. 그러나 제리온은 후회하지 않았다. 오히려 레미나가 살아있다는 걸 확인한 뒤로는 더욱 연구에 박차를 가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벅찬 가슴이 무색하게도, 공터는 시릴 만큼 휑했다. 당연히 그는 욕설을 내뱉었다.


“씨발! 이게 뭐야!”


그래도 아무도 없진 않았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레미나와 아르유는 공터 끝 메밀잣밤나무 아래에서 흙장난을 하고 있었다. 정령 유티넬이 제리온을 보곤 까르르 웃었다. 레미나도 그를 발견하곤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어, 제리온 제리온! 여기야!”


“썩을, 왜 둘밖에 없어? 다른 인간들은?”


“응? 다른 사람도 불렀어?”


레미나는 당연히 자기들만 부른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저녁 먹을 때조차 사람들은 이 약속에 대해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으니까.


“오빠, 제가 아까 물어봤는데 디리터 오빠는 안 온다는데요.”


아르유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애교 있게 혓바닥을 내미는 그 모습에 얼굴을 찡그릴 사람은 그리 많지 않지만, 문제는 제리온이 그 소수 부류에 속한다는 것이었다.


“뭐? 왜!”


“그게 뭐라더라...마법이래봤자 또 뻥뻥 터뜨리기만 할 테니 위험해서 안 간다고...”


“썅, 진짜. 빨리 가서 당장 오라고 해!”


“힝~왜 나한테...”


아르유는 툴툴거리면서도 군말 없이 심부름을 떠났다. 그녀가 불참자들을 끌어모으러 간 동안 제리온은 레미나와 잡담을 나눴다. 아직은 낮이 더 긴 계절, 나뭇가지에 가려 해는 보이지 않았으나 적당히 붉어진 사위는 제법 온기가 남아있었다. 레미나는 제리온 바로 옆에 쪼그려 앉은 채 말했다.


“무슨 마법이기에 이리 호들갑이니? 어차피 원소계 학파일 거 아냐.”


“아니라니깐 그러네. 이게 그러니깐...아호, 좀 있다가 보쇼. 보면 알아.”


“어머, 비싸라. 그 정도로 대단한 거야?”


레미나는 심통이 난 그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멈춰 있었던 5년의 세월. 그녀가 그 세월의 깊이를 가장 뼈저리게 느낄 때가 바로 제리온과 함께 있을 때였다. 그는 이제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키가 훌쩍 컸고, 목소리도 여느 성인남성처럼 굵직해졌다. 아직 십대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그녀에게 제리온은 더 이상 귀여운 동생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위화감은 들지 않았다. 여전히 그와 어깨를 맞대고 웃을 수 있는 것은, 그런 세월의 벽에도 굴하지 않고 한결같은 그의 태도 때문이다. 가식 없고 직설적이고 진실한, 과거와 다름없는 그의 모습은 레미나에겐 커다란 감동으로 다가왔다. 눈을 떴을 때 그가 없었다면 그녀가 이토록 빠르게 회복되진 않았을 것이다.

다른 멤버들이 도착한 건 그로부터 십여 분이 흐른 뒤였다. 루도와 마리네는 아르유에게 질질 끌려오다시피 하며 도착했다. 둘의 얼굴에는 귀찮음보다는 정말로 위험한 장소에 온 듯 공포가 깃들어 있었다.


“...뭐냐? 그건.”


그걸 반영하는 게 두 사람이 들고 있는 타워실드(Tower Shield)였다. 어디서 빌려왔는지 둘은 1미터도 넘는 대형 타워실드를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제리온이 묻자 루도는 재빨리 방패로 몸을 가리며 말했다.


“뭐긴 뭐야, 내 생명줄이지.”


“...뭐로부터?”


“불덩어리? 혹은 그거에 맞고 튀어나온 자갈파편이라든지.”


“씨발, 니들은 나 보면 떠오르는 게 그거밖에 없냐?!”


“...어.”


차라리 농담이라고 해주면 좋으련만, 정말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보며 제리온은 입을 딱 벌렸다. 마리네는 고개를 돌린 채 대답을 회피했지만, 그렇다고 부정하고 나서지도 않았다.

몇 분 뒤에는 디리터가 전신무장을 하고 도착했다. 브레스트플레이트에 플레이트 레깅스, 그리브를 입고 눈이 안 보이도록 배서닛을 꽉 눌러쓴 그 행색은 이미 레인저라고 보기도 힘들었다.


“너 이 새끼 넌 또 뭐야?”


“난 준비됐다, 제리온. 마음껏 날뛰어봐.”


“...진심이냐?”


“좀 봐줘. 나 새신랑이라고.”


그동안의 행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나마 이칼롯과 에레이시아는 평소와 다름없는 차림이긴 했지만, 대신 둘은 제리온에게서 30미터 이상 떨어졌다. 그는 잔뜩 움츠린 동료들을 보며 정말 파이어볼이라도 날려줘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했다.


“어쨌든 다 모였네. 썩을 것들, 잘 봐라. 이게 내 지난 3년을 집약한 결정체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중심으로 빙 둘러앉도록 지시했다. 중간에 루도가 자폭기냐고 진지하게 질문한 사례를 빼고는, 다들 고분고분하게 그의 명령에 따랐다.

대부분이 약속시간에 늦은 탓인지 해는 거의 저물어가려 하고 있었다. 어느새 윤달이 떠올라 고즈넉한 온기를 뿜어내고 있었고, 하늘은 막 어둠에 잠식되기 직전의 푸르름으로 빛났다. 그가 마법을 준비하는 동안 아르유는 무서운 이야기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니냐며 촐랑거렸다.

촉매의 배치가 끝나자 제리온은 마리네를 쳐다보며 말했다.


“야 마리네, 혹시 해서 묻는 건데 지금 공기 어떤 거 같냐?”


뜬금없는 질문에 마리네는 수 초간 고민한 뒤 말했다.


“공기가 어떻냐니...조금 습하고 끈적거리는 정도? 그런데 왜?”


제리온은 대답하지 않은 채 그대로 캐스팅에 들어갔다. 그의 손등 위로 연분홍빛 구체가 생성되더니, 주변의 공기를 흡수하며 서서히 위로 떠올랐다. 구체는 제리온의 머리 위에서 멈추었고,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며 빙글빙글 회전했다.

이윽고 그가 외쳤다.


“멜피즈 가든(Melphid's garden)."


화악! 구체가 터지면서 방출된 파장이 일시에 공터 전체를 뒤덮었다. 그것은 소리도, 냄새도, 물리적인 부딪힘도 없었지만 순간적으로 일행의 입을 다물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마리네가 말한 습하고 끈적한 공기는, 상쾌하고 포근한 공기에 덧씌워지면서 그 일대를 봄날의 정원에서만 느낄 수 있는 나른한 장소로 탈바꿈시켰다. 마치 보이지 않는 파도가 얼굴을 때리고 지나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바람이 지나갔다, 라는 표현은 부족했다. 그야말로 공기가 바뀌어버린 것이다. 구경하던 사람들은 갑자기 뒤바뀐 환경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갑작스런 환기에 본능적으로 몸이 움츠러든 탓이었다.

그러나 짧은 시간이 흐르고, 콧잔등을 씰룩이는 라벤더 향과, 숨을 들이마시면 한가득 들어오는 상쾌한 바람에 다들 믿을 수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와, 와아, 이거 뭐지? 뭐였어?”


“어, 어머나? 공기가 달라졌네.”


짧은 정적 뒤에 기다리던 것은 유쾌한 폭소였다. 싱그러운 봄날의 정원에 온 것 같은 포근함에 모두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게 제리온이 만든 마법이라고? 말도 안 돼! 아무것도 안 부서졌잖아?!”


“뭔가 잘못 됐어. 이건 너무 뭐랄까...평화롭잖아!”


“멋지다아~!”


디리터가 그의 뒤통수를 휘갈겼다. 루도와 마리네는 자지러지게 웃으며 그의 등을 두드렸고, 이칼롯은 말없이 봄 공기를 들이마시고 있었다.

그때까지 말이 없던 레미나가 그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대기를 바꾼 거니?”


“그렇지. 어때요? 이 천재의 실력은.”


“너희 집 정원이 모델이지? 정말 그립다...그 곳.”


그녀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는지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말이 없었다. 제리온은 그런 그녀를 보며 머쓱하게 웃었다. 설마 단박에 알아맞힐 줄이야. 그녀의 세심함이 실로 놀라웠다.


“그걸 맞추다니 징하네, 징해. 맞아요. 이건 주변 공기를 3월의 우리 집 정원처럼 바꾸는 마법이지. 뭐 실전에선 아무짝에도 쓸모없겠지만...그래도 후회는 없어.”


“왜?”


“아버지 무덤에 바치려고 만든 거니까.”


그 말을 듣자 왠지 가슴이 벅차올라 레미나는 힘껏 팔을 올려 제리온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다. 물론 그는 질색하며 피했지만, 그녀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싫지 않은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말했다.


“역시 제리온은 착해. 그 까칠한 겉모습만 좀 어떻게 못 바꾸나?”


“냅둬요. 알아서 잘 사니까.”


멜피즈 가든, 대기를 보다 상쾌하게 바꾸는 이 마법은 향후 전혀 엉뚱한 의도로 활용되고 만다. 제리온이 사용하던 그 어떤 마법보다 실전에 가깝게, 실용적으로 말이다.

그의 마법 시연회가 끝나자 일행은 멀리까지 나온 김에 아예 모닥불을 지피고 야유회를 열었다. 초가을, 아직 밤공기가 달아올라있는 계절이라 그런지 분위기는 한껏 고조되었다. 마리네와 디리터는 잽싸게 마을로 돌아가 옥수수, 고구마, 마른 생선 같은 구울 거리와 맥주 한 통을 가지고 왔다. 아르유는 에레이시아와 함께 노래를 불렀고, 정령 유티넬이 음색에 맞춰 흥겹게 춤을 추었다. 또래인 루도, 마리네, 레미나는 수줍은 잡담을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나중에는 마을 경비대 몇 명과 윈프레드까지 추가되어 적잖은 규모의 파티가 되었을 정도였다.

즐거운 노래, 경쾌하게 부딪히는 맥주잔, 목청이 떨어질 듯 혹은 공터가 떠나갈 듯한 흥겨운 웃음소리. 마음이 맞는 친구와 함께하는 한 잔 술만큼 달콤한 것이 어디 있으랴. 그날 밤의 전경은 너무나도 황홀하여, 다시는 꾸지 못할 꿈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술이 동날 무렵 마리네는 단검을 꺼내 바위에 글자를 새겼다. 워낙 후미진 장소라 새긴 사람이 아니면 찾지 못할 정도였지만, 문장은 또렷하게 그곳에 남겨졌다.


이 아름다운 섬에 축복을, 그리고 로샤단이 영원하기를.



안트로서의 갑작스런 호출을 받은 건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였다. 제리온을 빼고는 얼굴 본 지 한 달이 넘어가는 그였기에, 갑자기 연락을 받았을 때는 또 무슨 일인가 싶어 다들 어리둥절해했다.

루도는 다른 일행과 함께 그의 오두막을 찾았다. 이끼 낀 정원과 아무렇게나 쌓은 담벼락은 여전했지만, 왠지 모르게 가라앉은 조용함이 그를 불안하게 했다.

오두막 안에서는 먼저 온 사람들이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안트로서뿐 아니라 윈프레드, 레미나, 아르유가 근심 섞인 얼굴로 일행을 맞이했다. 안트로서는 보자마자 루도의 멱살을 낚아채며 말했다.


“너, 바른 대로 말해라. 루루 녀석이 뭘 하러 간 건지.”


좋은 대접을 받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이건 너무 갑작스러웠다. 루도는 그의 손을 뿌리치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말했다.


“가, 갑자기 무슨 소리세요? 루루 아줌마요?”


안트로서의 손목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보며 일행은 어리둥절해했다. 그는 화가 났다기보다는, 초조해하고 있었다. 윈프레드가 그를 간신히 진정시키고 나서 말했다.


“일단 다들 앉게. 음...이제 와서 다시 꺼내기도 좀 그렇지만...확실히 해두도록 하지. 데루루피아는 자네들과 헤어지기 전에 어디로 간다고 했었지?”


루도가 말했다.


“그야 저희에게 있지도 않은 현상금이 걸려서, 누명을 벗어주려고 수도로 간다고 했었죠. 도착은 한참도 전에 했을 텐데....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윈프레드는 말없이 턱을 쓰다듬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그가 생각을 정리하려고 침묵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평정을 유지하려 무진 애를 쓰는 것이었다. 그는 안트로서를 흘끗 바라본 뒤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실 자네들에게 숨기던 게 있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말할 필요가 없어서 가만 놔둔 것이네만...우리는 데루루피아가 어디 있는지 늘 확인하고 있었어.”


“예? 무슨...”


에메랄드 섬은 배를 타고 몇 주를 와야 할 정도로 육지와 멀리 떨어져 있다. 게다가 항해의 위험성 때문에 랄프 정도의 베테랑이 아니고서는 안전을 보장하기도 어렵다. 그런데도 늘 데루루피아를 주시하고 있었다면, 답은 한 가지뿐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안트로서를 향했다.


“아버지는 탐지계의 9클래스 마법사이시지. 데루루피아의 대략적인 위치는 물론이거니와, 특정 장소는 위저드아이(Wizard eye)를 통해 직접 확인할 수 있지. 그런데, 좀 문제가 생긴 모양이네.”


이칼롯이 말했다.


“그녀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 겁니까? 수도에 도착하기 전에 누군가에게 붙잡혔다거나...”


“아니, 그 아이는 잘 갔어. 자네들 말대로 대략 한 달 반 전에 수도에 도착했지. 그런데...그 후로 전혀 움직이질 않는군그래.”


“....?”


일행은 선뜻 이해하지 못했다. 움직이지 않는다, 라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이번에는 안트로서가 나섰다. 그가 손짓하자 허공에 직사각형 모양의 마법진이 펼쳐졌다. 그 중앙에는 파란 빛으로 자수 같은 것이 놓여 있었는데, 그게 아르드 대륙의 개괄적인 지도를 나타내고 있다는 걸 깨닫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안트로서가 말했다.


“로케이트 오브젝트(Locate object)를 내가 직접 제작한 마법지도에 좌표로 표시되게 설정했다. 이거면 내가 지정한 개체는 대륙 어디를 가도 위치를 파악할 수 있지. 루루가 어디 있는지 보이냐?”


루도는 리크나이츠의 서쪽, 수도 라키시아 부근에서 빛나고 있는 붉은색의 점을 찾아냈다. 그가 지도를 가리키자 안트로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그 녀석은 오래전에 수도에 도착했어. 그리고 그 후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지. 여기서 추론할 수 있는 답은 세 가지다. 하나는 정말로 수도에 한 달 반 동안 머물고 있는 것이거나, 아니면 붙잡혀 감금되었거나, 그것도 아니면 죽었거나.”


태연한 말투였지만, ‘죽었거나’라고 말할 때 그의 얼굴은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이번에는 마리네가 말했다.


“걱정하시는 마음은 알겠는데, 너무 극단적인 거 아닌가요? 한 곳에 몇 년씩 머무는 사람도 있는데.”


“난 그 계집애가 세르딕을 따라갈 때부터 지켜와 봤다. 그리고 장담컨대 그 역마살 낀 년은 한 도시에 한 달 이상 머문 적이 없어. 그리고, 하필 이 시기에 수도에 장기간 체류한다고? 펠아람의 아이가 제대로 섬에 도착했는지 확인하러 오지 않고?!”


일행은 숨죽인 채 그의 반박을 들었다. 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에메랄드 섬까지의 먼 여정을 생각하면 그녀는 일행의 안전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이곳에 들렀어야 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는 건 뭔가 트러블이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비약이 심하다는 느낌도 지울 수 없었다. 제리온이 그 부분에 대해 지적했다.


“잠깐, 영감. 루루 누님은 리크나이츠 국왕이랑 친분이 두텁다고 했어. 그러니까 왕의 호의를 거절하지 못해 궁전에 머물고 있을 확률도 배제하면 안 되잖아. 랄프 노친네처럼 다른 연락책을 이미 보내놨을 지도 모르고.”


그러나 윈프레드는 침통하게 고개를 저었다. 두 부자가 그 부분에 대해서 어찌 고민하지 않았겠는가. 단지 불안했을 뿐이라면 훨씬 이전에, 일행이 케리아돌의 둥지에 다녀온 직후에라도 물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야 다급하게 일행을 소집했다는 것은 무언가 심상치 않은 변화가 일어났음이 틀림없었다.

윈프레드가 말했다.


“아스트리카가 리크나이츠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네. 국경의 흑연기사단은 이미 백천기사단과 대치 중이고, 훼창기사단과 성마르세아 기사단이 추가로 이동 중이지. 자세한 정치 내력은 우리도 잘 모르지만...”


“저...전쟁이요?!”


전쟁이 일어났다. 그것도 엄청난 규모로. 다섯 개 기사단을 운영하는 아스트리카가 세 개 기사단을 원정에 파견했다면 이는 그야말로 국운을 건 총력전을 각오했다는 뜻이다. 12년 전 마드리고 대회전이 2개 기사단 규모였던 걸 감안하면 병력의 어마어마함을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특히 로샤단은 원래 정규군 소속이다. 누명을 써 도망치지 않았다면 지금쯤 델키아에 소집돼 비상대기하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때문에 단순히 소식을 전해 듣는 것뿐인데도 그 파급력은 대단했다.


“자, 잠깐만요! 전쟁이라니, 너무 뜬금없잖아요. 아니, 그보다 그 루루라는 분의 신변이 전쟁이랑 무슨 연관이 있다는 거죠?”


레미나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주의 신분인 만큼 그녀는 이번 소식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최근 10년간 리크나이츠는 과거를 청산하고 아스트리카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 노력해왔다. 무역은 정상화됐고, 교류를 위한 사절단도 심심치 않게 오고 갔다. 그런데 갑자기 전쟁이라니, 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아스트리카는 그만큼 자신이 있는 것인가? 확고한 대의명분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아니, 그것보다 전쟁과 데루루피아라는 사람의 신변이 무슨 관련이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일행에게 걸린 현상금과 양국 간의 전쟁, 얼핏 보면 전혀 연관성이 없는 주제였다.

윈프레드가 말했다.


“그게...나도 참 믿기지 않는 소식인데...지금 아스트리카를 상대하는 전력은 백천기사단 하나뿐이라는군. 귀족 평의회가 추가로 요격군을 편성해야 한다고 진언했는데, 국왕이 이를 묵살했어. 오히려 천정기사단을 텔아단 국경 부근으로 남파(南派)했다네.”


이칼롯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 기세가 어찌나 대단하던지 옆에 있던 마리네가 떠밀려 바닥에 쓰러질 정도였다. 이칼롯은 말이 없었으나 그의 눈은 그가 얼마나 흥분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천정기사단을 남파한 건 어린 아이도 알 수 있을 정도의 악수다. 두 기사단이 힘을 합쳐도 전면전이 불투명한데, 백천기사단 혼자 3개 기사단을 상대하는 건 그야말로 자살행위다. 백천기사단이 궤멸한 뒤 도착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스트리카의 3개 기사단에 무력하게 각개격파될 따름이다.

그가 흥분한 이유는 하나였다. 어째서 왕실은 그런 멍청한 결정을 내린 것인가.


“어째서입니까?”


“음...백천기사단도 만만한 집단은 아니니 당분간은 버텨줄 것 같긴 하네만...”


한참을 고민했지만 윈프레드가 할 수 있는 건 허탈하게 되묻는 것뿐이었다.


“어째서지?”


루도는 순간 등에 오싹한 한기가 흐르는 걸 느꼈다. 자신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무언가가 이미 오래 전부터 진행되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자신은 이미 그 폭풍의 눈에 들어와 버린 것은 아닐까, 하고.

일행에게 걸린 현상금, 아스트리카와의 전쟁, 데루루피아의 신변. 여전히 서로 겉도는 주제였지만, 한 가지 교차점만은 명확했다.

국왕 란도스 리크나이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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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8) +4 15.05.06 731 26 22쪽
225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7) +2 15.05.06 976 24 29쪽
224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6) +3 15.05.06 802 23 28쪽
223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5) +4 15.05.05 929 26 24쪽
222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4) +2 15.05.05 762 23 23쪽
221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3) +1 15.05.05 642 22 15쪽
220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2) +2 15.05.05 770 24 18쪽
219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1) +4 15.05.05 685 23 15쪽
218 람의 계승자 - ep.5 - 사냥감의 반전(4) +2 15.05.05 921 24 23쪽
217 람의 계승자 - ep.5 - 사냥감의 반전(3) +3 15.05.04 935 22 23쪽
216 람의 계승자 - ep.5 - 사냥감의 반전(2) +2 15.05.04 866 22 21쪽
215 람의 계승자 - ep.5 - 사냥감의 반전(1) +1 15.05.04 774 24 20쪽
214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5) +2 15.05.04 709 24 15쪽
213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4) +2 15.05.04 720 25 23쪽
212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3) +3 15.05.03 844 29 18쪽
211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2) +3 15.05.03 763 22 23쪽
210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1) +2 15.05.03 853 23 20쪽
209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7) +5 15.05.03 795 28 25쪽
208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6) +2 15.05.03 894 24 22쪽
207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5) +4 15.05.02 937 29 21쪽
206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4) +1 15.05.02 883 27 20쪽
205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3) +2 15.05.02 689 24 21쪽
204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2) +2 15.05.02 766 24 24쪽
203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1) +2 15.05.02 585 24 22쪽
202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6) +3 15.05.02 695 28 18쪽
201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5) +5 15.04.29 863 24 19쪽
200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4) +1 15.04.29 937 24 26쪽
199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3) +1 15.04.29 789 24 24쪽
198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2) +3 15.04.29 812 26 18쪽
197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1) +1 15.04.29 758 24 17쪽
196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8) +4 15.04.28 904 28 16쪽
195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7) +3 15.04.28 839 25 20쪽
194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6) +3 15.04.27 711 26 19쪽
193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5) +3 15.04.27 756 22 17쪽
192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4) +2 15.04.27 730 22 18쪽
191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3) +1 15.04.27 730 30 18쪽
190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2) +2 15.04.27 757 27 19쪽
189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1) +2 15.04.27 789 31 18쪽
188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完) +1 15.04.27 598 33 18쪽
187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5) +4 15.04.26 733 24 17쪽
186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4) +1 15.04.26 928 28 16쪽
»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3) +2 15.04.26 739 26 20쪽
184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2) +6 15.04.23 779 28 15쪽
183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1) +3 15.04.23 839 26 19쪽
182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2) +2 15.04.23 755 25 17쪽
181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1) +3 15.04.23 767 26 15쪽
180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0) +1 15.04.23 682 25 22쪽
179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9) +3 15.04.22 811 29 16쪽
178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8) +3 15.04.22 846 27 15쪽
177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7) +1 15.04.22 776 29 18쪽
176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6) +1 15.04.22 790 23 18쪽
175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5) +2 15.04.22 764 29 15쪽
174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4) +3 15.04.22 911 25 18쪽
173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3) +5 15.04.21 766 27 16쪽
172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2) +2 15.04.21 921 25 14쪽
171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 +3 15.04.21 805 25 17쪽
170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8) +3 15.04.21 729 24 21쪽
169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7) +2 15.04.21 702 19 15쪽
168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6) +4 15.04.20 750 24 18쪽
167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5) +2 15.04.20 655 20 18쪽
166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4) +1 15.04.20 767 23 17쪽
165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3) +2 15.04.20 738 24 16쪽
164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2) +3 15.04.20 809 20 16쪽
163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1) +1 15.04.20 821 22 21쪽
162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6) +1 15.04.20 829 29 14쪽
161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5) +2 15.04.20 711 25 18쪽
160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4) +3 15.04.19 865 28 18쪽
159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3) +3 15.04.19 946 28 18쪽
158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2) +3 15.04.19 901 26 22쪽
157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1) +5 15.04.19 1,210 46 22쪽
156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10) +6 15.04.18 901 26 21쪽
155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9) +3 15.04.18 772 26 18쪽
154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8) +1 15.04.18 656 24 19쪽
153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7) +2 15.04.18 686 26 18쪽
152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6) +1 15.04.18 748 27 17쪽
151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5) +4 15.04.18 712 23 16쪽
150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4) +1 15.04.18 668 24 17쪽
149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3) +2 15.04.18 753 22 17쪽
148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2) +3 15.04.16 848 29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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