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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연 님의 서재입니다.

람의 계승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저스연
작품등록일 :
2015.03.21 02:01
최근연재일 :
2015.09.01 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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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5.08 0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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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글자
19쪽

람의 계승자 - ep.5 - 승리 뒤에 오는 것들(3)

DUM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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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의 우린 두려울 게 없었다. 그 녀석들과 함께 있으면, 정말 세상을 뒤집어 버릴 수도 있겠다는 착각이 들곤 했으니까. 데루루피아와 카토르, 람카디스, 그리고 나. 접점이라곤 하나도 없는 그 조합이 어찌 그토록 절묘한 하모니를 만들어 냈는지. 아마 그 녀석들과 함께 할 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떠들썩한 나날이었을 거다.

하지만 추억이란 - 아름다운 만큼 시리게 아픈 것이로구나. 꿈을 이야기하던 친구들을 먼저 떠나보내고, 이제 늙은 병자 하나만 남아 고독히 펜을 놀리고 있구나. 람카디스, 카토르...

너흰 정말이지 폭풍처럼 다가왔다 연풍처럼 떠나갔구나.


가이잘모 아델하트 '외팔이의 회고록'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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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아직 교섭의 여지가 남아 있는 게로군. 하지만 전선이 이리 불리하게 돌아가니 쉽게 휴전에 응해줄 리도 없고...난감하군.”


“지금은 가이잘모와 천정기사단을 믿어보는 수밖에 없겠구료. 아, 너무 심각한 이야기만 했군. 자, 다들 식사하세나.”


란도스는 손뼉을 치며 애써 무거운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그가 숟가락을 들자 일행도 쭈뼛거리며 먹는 ‘시늉’을 했다. 왕과 함께하는 식사에서 어찌 경망스럽게 행동할 수 있겠는가. 식탁 위에는 갖가지 산채며 고기요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으나 일행이 입에 담는 것은 ‘자신의 가장 바로 앞에 있는 요리’가 고작이었다. 멀리 있는 음식을 집으려는 행동은 감히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다. 그러려면 손을 뻗거나 몸을 일으켜야 되는데, 행여 왕에게 결례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양손이 불편한 제리온은 레미나가 떠주는 음식을 꾸역꾸역 받아먹었다. 그는 처음에는 웬 추태냐며 질색을 했지만, 그녀의 끈질긴 물량공세에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됐으니까 저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공주님. 어찌 천한 놈에게 직접 음식을...”


“여기 그런 자리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그냥 편하게 행동해.”


그녀의 짓궂은 행동에 란도스가 난처한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그나 지스카르가 그리 딱딱한 사람들이 아닌지라 가볍게 웃어넘기는 수준에서 끝났지만, 바라보는 사람들은 그렇게 애가 탈 수가 없었다.

식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가자 란도스가 냅킨으로 입을 훔치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자네들은 이제부터 어쩔 생각인가?”


이칼롯이 말했다.


“저희의 목표는 안개송곳니의 완벽한 분쇄입니다. 그리고 그걸 위해서는 잠시 들러야 할 곳이 있습니다.”


“그런가...그럼 우리는 같은 적을 둔 동지로군. 그렇지 않나?”


“저희는 로샤단이기 이전에 리크나이츠의 국민이기도 합니다. 리크나이츠의 적이, 곧 로샤단의 적입니다.”


“핫핫! 그거 참 고마운 말이로군. 그래, 출발은 언제 할 생각인가?”


“기약해놓진 않았습니다만, 아무래도 루도나 제리온의 부상이 낫기 전에는 움직이기 힘들 것 같습니다.”


“좋아. 그럼 그때까지 푹 쉬다 가게. 내 전심전력으로 자네들을 후원하겠네.”


“...성은이 망극합니다, 폐하.”


이칼롯은 정중하게 예를 갖추어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하지만 대답한 그조차도 그때는 왕이 말한 ‘후원’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기껏해야 여비를 지원해주거나 숙식을 해결해주는 정도랄까? 아니, 애초에 누명혐의가 사라진 것만으로도 일행은 왕실에 바라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더 이상 사냥꾼들의 감시를 피해 변장을 하고 도망 다니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저 지금은 승리라는 작은 전리품을 얻은 것에 의미를 두고서, 일행은 케이달의 안내를 받아 차례차례 원래 있던 병실로 복귀했다. 그들이 떠나가자 응접실 안은 란도스와 지스카르, 데루루피아와 레미나만 남게 되었다.

그 많던 요리도 전부 치워지고 널따란 식탁 위엔 찻잔 네 개만이 덩그러니 놓인 채 김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인원이 대거 빠져나간 응접실은 식탁 위의 공백만큼이나 황량하기만 했다. 왠지 불편한 기류가 감도는 것 같아 레미나는 캐모마일 차의 향을 힘껏 들이마셨다.

란도스가 티스푼을 휘휘 저으며 입을 열었다.


“저 소년이 펠아람의 아이인가...역시 람람이 데리고 다니는 이유가 있었군.”


“폐하, 하지만 루도는...”


“알아. 그 녀석이 그런 의도로 루도를 키우진 않았을 거라는 거. 하지만 네 말대로라면 사태는 점점 최악으로 치닫고 있어. 이대로라면 슬슬...선택을 해야 할지도.”


레미나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란도스는 그녀의 시선에 응하지 않은 채 찻잔 속만 멀거니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선택이라니요? 숙부님, 설마...”


란도스는 시선을 내리깐 채로 말이 없었다. 그러자 지스카르가 그를 대신하여 말했다.


“신의 아이를 전선에 내세우는 것 말입니다. 마침 저 소년은 안개송곳니에 증오심을 품고 있는 모양이니, 구태여 투쟁심을 부추길 필요도 없겠지요.”


“그런...! 그럼 지금까지 신의 아이를 은폐해온 왕실과 류이너스 교단의 노력은 어찌 되는 것입니까?”


“...공주님, 평화란 모두가 합의했을 때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브리토리스가 노골적으로 신의 아이를 전면에 내세운 이상, 우리도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말도 안 됩니다. 그럼 500년 전 피의 역사와 다를 게 무엇입니까?”


“하오면 공주님, 이대로 리크나이츠의 멸망을 두고 보자는 말씀이십니까? 브리토리스의 노예가 될 수백만의 국민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건...”


레미나는 말문이 턱 막혀 뭐라 입을 열지 못했다. 사실은 그녀도 인지하고 있던 문제이기 때문이다. 브리토리스가 아반케즈의 아이를 도구화한 시점에서 신아(神兒)전쟁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신의 아이를 막을 수 있는 건 오직 신의 아이뿐이기 때문에.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권능에는 에센스가 필요하고, 에센스가 바닥나면 신의 아이는 죽는다. 그리고 펠아람의 아이는, 현재 가장 적은 에센스를 보유한 신의 아이다.

지스카르가 말했다.


“루도 클로람은 이미 우리가 어찌할 수 있는 단계를 떠났습니다. 그 소년은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어요. 지금 여기서 다루어야 할 건 루프리모의 아이지요. 5년 전 류이너스 교단의 보호를 받다 일순 행방불명된...데루루피아 아망초, 당신은 무언가 알고 있지 않습니까?”


란도스가 괴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데루루피아는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잠시 지스카르와 시선을 맞대다가, 차를 한 모금 머금은 뒤에야 입을 열었다.


“논점이 어긋났습니다 재상님. 왜 왕실이 지금까지 신의 아이를 은폐해왔는지를 잊으시면 안 되죠.”


“펠아람의 저주 말이군요.”


“예. 안개송곳니가 이렇게 날뛰는 걸 보면, 아마 아반케즈의 아이는 ‘저주’가 아닐 겁니다. 그 말은 즉 남은 세 명 중 하나가 미치광이라는 뜻이죠. 아스트리카에 있다는 베릴의 아이는 차치하고라도 루도와 루프리모의 아이 둘 중 하나가 ‘저주’일 확률이 66%나 됩니다.”


그녀는 이미 다섯 번째 신의 아이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나 일부러 모르는 척 넘어갔다. 괜히 확률을 줄여 지스카르가 낙관론에 빠지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늙은 재상의 표정에 짙은 어둠이 드리워졌다. 성공하면 최강의 무기이지만 실패하면 나라 자체가 멸망한다. 그걸 알면서도 도박을 감행했다는 것 자체가 안개송곳니가 얼마나 무모한 집단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그럼 이대로 항복하자는 말입니까?”


“그건 제가 뭐라 왈가왈부할 입장이 못 되지요. 도박을 할지 안 할지는 왕실의 몫이죠. 하지만 당신들이 어떤 선택을 하든, 저는 루프리모의 아이의 정체를 발설하지 않을 겁니다. 그땐 고문이든 뭐든 마음대로 하시지요. 안다바리엘도 제 뜻을 굽히진 못했으니.”


“자자, 거기까지! 두 사람 다 너무 앞서나가는군. 아직 브리토리스는 공식적으로는 아무런 입장도 취하지 않았다고. 좋게좋게 생각합시다.”


논쟁이 격화되자 란도스가 두 사람을 중재하고 나섰다. 그의 지적에 지스카르와 데루루피아 모두 흥분을 가라앉히고 서로에게 사과했다. 사실 지스카르도 사태가 이 지경에 와서야 각성론을 제기하는 것이지, 원래는 앞장서 류이너스 교단을 옹호하던 온후한 인물이었다. 그걸 알기에 데루루피아 또한 거듭 사과를 표했다. 그 정도 위치에 있는 인물에겐 국민보다 국가를 우선시해야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시간은 어느새 오후2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미 점심시간을 훌쩍 넘긴 상황이라 란도스는 서둘러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일단은 급한 불인 아스트리카 문제부터 해결해 봅시다. 브리토리스 쪽은 차차 논의해 가도록 하고...뭐 베릴의 아이가 저주일 가능성도 남아 있으니까. 오늘 이야기는 이쯤 하고, 재상께서는 저와 함께 어전회의로 가십시다.”


“예, 폐하.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요.”


두 사람이 사라지고 나자 이제 식탁에는 데루루피아와 레미나만이 남게 되었다. 데루루피아는 흥분을 가라앉히려는 듯 다 식은 캐모마일 차를 연신 홀짝여댔다. 설전으로 진이 빠져서인지 그녀의 어깨가 의자 등받이에 축 늘어졌다. 그 모습을 레미나는 한쪽 팔을 괸 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데루루피아의 찻잔에, 아니 정확히는 찻잔 너머로 물결 치는 하늘색 머리카락에 고정되었다.

그녀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데루루피아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뭐 궁금하신 거 있으신가요? 공주님. 그렇게 빤히 바라보시고.”


그러자 레미나는 화들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에요. 그냥 머리색이 예뻐서...아! 저 얼마 전까지 에메랄드 섬에 있었답니다. 안트로서랑 윈프레드 아저씨, 그리고 아르유도 만났었지요.”


“...그리운 이름들이네요. 가족들은 잘 지내고 있나요?”


두 사람은 잠시 에메랄드 섬을 주제로 이야기를 꽃피웠다. 사적인 잡담이어서인지 대화는 조금 전보다 훨씬 화기애애했다. 하지만 이는 레미나가 진정 하고 싶은 말이 아니었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좋아지자 그녀는 넌지시 화제를 바꾸어 물었다.


“그, 꼭 한 번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어요. 로샤단이 그렇게나 기를 쓰고 구하려는 게 대체 어떤 사람인지.”


“그런가요...난 그렇게 대단한 년이 아닌데.”


“그, 그, 그...람카디스 클로람이라는 분과 연인사이였다고...”


데루루피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거기서 뜬금없이 람카디스의 이름이 나오리라곤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볼을 발갛게 붉힌 채 자신을 응시하는 어린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레미나는 민망해할지언정 데루루피아의 시선을 피하진 않았다. 그 진지한 눈빛에 데루루피아는 쿡, 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네, 맞아요. 그런데 그건 왜...?”


“어...어떤 분이셨나요? 그 람카디스 클로람이라는 사람은.”


레미나가 람카디스에 흥미를 갖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로샤단과 함께 행동하게 된 이후로 그녀는 줄곧 거리감을 느끼고 있었다. 멀게는 에메랄드 섬에 있을 때부터, 최근에는 가린워드 마을의 해프닝까지. 그동안 그녀는 로샤단의 다섯 명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강력한 유대감으로 뭉쳐 있으며, 그 근원에 람카디스라는 인물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일행의 누구에게서도 람카디스의 정보를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날 - 길드 홀이 불타던 날 - 의 전경이 트라우마가 되어 다들 극도의 거부반응을 보이기 때문이었다. 유미르네에게 물어봐도 평범한 레인저라는 대답이 전부였다.

여기까지 오자 묘한 오기가 생겼다. 그녀는 자신이 로샤단에게 인정받으려면, 누구보다 람카디스라는 인물에 대해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침 그와 연인사이라던 데루루피아와 단둘이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데루루피아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죄송해요, 공주님. 그에 관한 건 그냥 제 추억으로 남겨두고 싶어서요.”


“예? 아...예에.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괜히 무례하게 굴었네요. 마음에 두지 마셔요.”


레미나는 혹시 아픈 부분을 건드린 게 아닌가 싶어 조심스럽게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데루루피아는 빈 찻잔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회한과 애상으로 담뿍 물들었다. 마지막으로 건네지 못한 말이 아직도 가슴에 남아.


“폭풍처럼 다가왔다 연풍처럼 떠나가더라...”


뜻 모를 시 한 구를 읊조리고서 데루루피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쾌활한 얼굴로 돌아온 채, 그녀는 숙소를 향해 힘차게 걸어갔다. 레미나는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그날 늦은 오후, 일행은 떠나는 데루루피아를 위해 성 밖 황야로까지 배웅을 나섰다. 전령을 자청한 이래 반나절도 지나지 않은,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은 일처리였다. 제리온은 여행자 복장을 한 그녀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진짜 행동력 하나는 끝내주네. 누님, 징하쇼 징해.”


“후후, 칭찬으로 알게.”


전령의 역할을 맡긴 했으나 그 인원은 단출했다. 경호원을 자처한 알룬도를 비롯하여 다섯 명의 호위병이 일행의 전부였다. 기동력을 최우선으로 한 편성이라곤 하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안전이 신경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루도가 이 점을 지적하자 알룬도가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이미 질리도록 겪어봤으면서 뭘 그러냐. 그놈들은 쪽수로 해결할 수준이 아니라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길 한복판에서 고르딘 같은 놈 만난다고 생각해봐요.”


“끔찍하긴 하다만서도, 뭐 너희들이 한바탕해줬으니 그쪽도 당분간은 잠잠하지 않을까 싶은데. 거긴 만성적인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거든.”


그는 아직 아물지 않은 팔의 상처를 매만지며 눈썹을 찌푸렸다. 졸린 듯 약간 움츠러든 그의 눈꺼풀을 보고 있자니 왠지 살가운 기분이 들어 루도는 실소를 터뜨렸다. 그동안 많은 인연이 있었지만, 알룬도는 그야말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은인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지금쯤 자신은 흙바닥을 뒹굴고 있었겠지.


“텔아단은 대체 언제 갈 거예요? 이러다 늙어 죽게 생겼네.”


“또 그 소리냐. 걱정하지 마라. 이미 별장 자리까지 알아보는 중이니까.”


“푸하, 돈은 어디서 나서요?”


“이렇게 혹사했는데 아망초양이 어떻게든 해주겠지.”


실없는 잡담을 나누는 사이 어느새 해는 지평선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가을도 이제 다 갔는지 이제 막 6시를 넘긴 시간인데도 사위는 황혼으로 얼룩진 채였다. 황야를 타고 불어온 마파람은 옷깃을 여며야 할 정도로 제법 쌀쌀하기까지 했다.

디리터가 데루루피아의 붕대 감긴 손가락을 보며 말했다.


“몸 따뜻하게 해요. 손톱 다시 날라면 한참은 기다려야 하니까.”


“응? 어머, 고마워. 내 몸 상태도 다 걱정해주고.”


그녀는 손가락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비단 손뿐만이 아니라, 온몸에는 그간 받았던 고문의 흔적이 가득 남아 있었다. 단지 겉옷에 가려 보이지 않는 것일 뿐. 그녀는 지난 몇 달을 회상하듯 담담히 눈을 감았다.


“그러고 보니 안다바리엘, 그 남자 뭔가 이상했어. 나를 심문하면서도 계속 아루의 수정 얘기만 꺼내더란 말이지. 신의 아이를 없앨 생각이라면 수정보단 본체 쪽을 찾아야 맞는데...혹시 케리아돌에게 뭐 들은 거 있니?”


제리온이 그녀의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안개송곳니를 엿 먹이는데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그인 만큼 놈들의 정보 하나하나가 흥밋거리였다.


“응? 아뇨. 뜬금없는 소린데. 수정을 찾는다라...”


“으음, 그냥 기분 탓이려나. 하긴 그렇게 고문을 당했으니 신경쇠약에 걸릴 만도 하지. 하지만 이 정도로 끝나서 다행이야. 위릭 경이 손을 써준 덕에 고문관도 나를 그리 험하게 다뤄주진 않았거든. 나젠크루거도 내가 받은 고문은 고문 축에도 끼지 않는다고 말했고.”


그 순간 루도와 마리네의 어깨가 일순 경직됐다. 마리네는 화들짝 놀라 루도의 안색을 살폈다. 예상했던 대로, 그는 동공이 크게 확대된 채로 데루루피아를 향해 멍하니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야, 루도...”


“나젠크루거...라고요?”


데루루피아는 처음에는 그가 왜 이리도 정색을 하고 묻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가 그녀만의 비밀이 있듯이, 람카디스 또한 10년 전 루도 납치사건에 대해 철저히 숨겼던 까닭이다. 그녀는 별생각 없이 답했다.


“어머, 아는 사람이니? 핀들 나젠크루거, 광휘의 결사의 우두머리였던 사람이지. 죽은 줄 알았는데, 무슨 죄를 짓고 왕궁 지하 감옥에 10년째 수감 중이라 하더라고. 덕분에 심심하진 않았지 뭐니.”


“그렇군요...아직 살아 있군요, 그 사람.”


루도는 알 수 없는 혼잣말을 되뇌고는 왕궁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해를 등지고 선 도시 위로 황혼에 젖은 붉은 구름이 을씨년스럽게 떠다니고 있었다. 바라보는 루도의 얼굴도 어느새 음영 짙은 붉은빛을 띠었다. 그렇게 나젠크루거가 갇혀 있을 왕궁의 어딘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문득 잠에서 깬 사람처럼 눈을 깜박이며 시선을 거두었다. 분노한다든지, 괴로움에 치를 떤다든지 하는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소름 끼칠 정도로 평온한 낯빛에 마리네가 더 전전긍긍해 할 정도였다.

10년이란 세월이 기억을 무디게 만든 것인지, 아니면 흘러간 과거에 취하지 못할 정도로 현재의 불길이 강한 것인지. 안젤리카의 육신은 이미 썩어 백골이 되어버렸겠지만.


“어, 음, 아! 남쪽은 겨울이 짧다던데. 그래도 싸락눈 맞으며 여행할 일은 없으니 다행이네요.”


“...음? 그야 뭐.”


마리네는 서둘러 화제를 바꾸려고 되는 대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괜히 광휘의 결사 주제를 놓고 루도를 자극하지 말자는 심산에서였다.

그런데 마침 나타난 한 소년이 본의 아니게 마리네의 구원자가 됐다. 막 하교한 카이안이 교복차림으로 헐레벌떡 뛰어온 것이었다. 그는 멀리서 일행을 발견하고는 힘차게 소리쳐 그들을 불렀다.


“데루루피아님!! 루도오!”


아마 이렇게 자신을 어필하지 않으면 데루루피아가 휘릭 떠나버릴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불같은 열의만큼 몸이 따라주지 않는 것인지, 그는 50m정도를 달려오다 헥헥대며 허리를 꺾었다. 결국 안쓰럽게 여긴 데루루피아가 그가 있는 쪽으로 말을 몰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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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2) +2 15.05.05 771 24 18쪽
219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1) +4 15.05.05 685 23 15쪽
218 람의 계승자 - ep.5 - 사냥감의 반전(4) +2 15.05.05 921 24 23쪽
217 람의 계승자 - ep.5 - 사냥감의 반전(3) +3 15.05.04 935 22 23쪽
216 람의 계승자 - ep.5 - 사냥감의 반전(2) +2 15.05.04 867 22 21쪽
215 람의 계승자 - ep.5 - 사냥감의 반전(1) +1 15.05.04 774 24 20쪽
214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5) +2 15.05.04 709 24 15쪽
213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4) +2 15.05.04 720 25 23쪽
212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3) +3 15.05.03 844 29 18쪽
211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2) +3 15.05.03 763 22 23쪽
210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1) +2 15.05.03 853 23 20쪽
209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7) +5 15.05.03 795 28 25쪽
208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6) +2 15.05.03 894 24 22쪽
207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5) +4 15.05.02 938 29 21쪽
206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4) +1 15.05.02 884 27 20쪽
205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3) +2 15.05.02 690 24 21쪽
204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2) +2 15.05.02 767 24 24쪽
203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1) +2 15.05.02 586 24 22쪽
202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6) +3 15.05.02 695 28 18쪽
201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5) +5 15.04.29 863 24 19쪽
200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4) +1 15.04.29 937 24 26쪽
199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3) +1 15.04.29 789 24 24쪽
198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2) +3 15.04.29 812 26 18쪽
197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1) +1 15.04.29 758 24 17쪽
196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8) +4 15.04.28 904 28 16쪽
195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7) +3 15.04.28 840 25 20쪽
194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6) +3 15.04.27 711 26 19쪽
193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5) +3 15.04.27 756 22 17쪽
192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4) +2 15.04.27 731 22 18쪽
191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3) +1 15.04.27 730 30 18쪽
190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2) +2 15.04.27 758 27 19쪽
189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1) +2 15.04.27 789 31 18쪽
188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完) +1 15.04.27 599 33 18쪽
187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5) +4 15.04.26 733 24 17쪽
186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4) +1 15.04.26 928 28 16쪽
185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3) +2 15.04.26 739 26 20쪽
184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2) +6 15.04.23 779 28 15쪽
183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1) +3 15.04.23 839 26 19쪽
182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2) +2 15.04.23 755 25 17쪽
181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1) +3 15.04.23 767 26 15쪽
180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0) +1 15.04.23 682 25 22쪽
179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9) +3 15.04.22 811 29 16쪽
178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8) +3 15.04.22 846 27 15쪽
177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7) +1 15.04.22 776 29 18쪽
176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6) +1 15.04.22 790 23 18쪽
175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5) +2 15.04.22 765 29 15쪽
174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4) +3 15.04.22 911 25 18쪽
173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3) +5 15.04.21 767 27 16쪽
172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2) +2 15.04.21 922 25 14쪽
171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 +3 15.04.21 805 25 17쪽
170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8) +3 15.04.21 729 24 21쪽
169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7) +2 15.04.21 703 19 15쪽
168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6) +4 15.04.20 750 24 18쪽
167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5) +2 15.04.20 655 20 18쪽
166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4) +1 15.04.20 767 23 17쪽
165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3) +2 15.04.20 738 24 16쪽
164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2) +3 15.04.20 809 20 16쪽
163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1) +1 15.04.20 821 22 21쪽
162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6) +1 15.04.20 830 29 14쪽
161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5) +2 15.04.20 711 25 18쪽
160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4) +3 15.04.19 865 28 18쪽
159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3) +3 15.04.19 946 28 18쪽
158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2) +3 15.04.19 901 26 22쪽
157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1) +5 15.04.19 1,210 46 22쪽
156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10) +6 15.04.18 901 26 21쪽
155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9) +3 15.04.18 772 26 18쪽
154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8) +1 15.04.18 656 24 19쪽
153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7) +2 15.04.18 687 26 18쪽
152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6) +1 15.04.18 748 27 17쪽
151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5) +4 15.04.18 713 23 16쪽
150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4) +1 15.04.18 669 24 17쪽
149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3) +2 15.04.18 754 22 17쪽
148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2) +3 15.04.16 849 29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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