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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연 님의 서재입니다.

람의 계승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저스연
작품등록일 :
2015.03.21 02:01
최근연재일 :
2015.09.01 03:28
연재수 :
34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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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9,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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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57
글자수 :
2,844,987

작성
15.05.02 0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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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글자
21쪽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5)

DUMMY

숏소드를 빙글빙글 돌릴 때마다 검에 묻은 피가 좌우로 흩어졌다. 게네스는 어떻게든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도무지 그럴 타이밍이 나오지 않았다. 달아난다면 재빨리 말에 올라타는 수밖에 없는데, 그녀가 기수를 돌릴 시간이라도 줄지 의문이었다. 남은 동료 하나는 아예 다리가 풀린 듯 자세조차 잡지 못하고 벌벌 떨었다.

지지부진한 생각에 시간을 빼앗긴 사이, 그녀가 게네스를 노리고 달려왔다. 자세를 낮춘 채 엎어질 듯 내달리는 그 속도가 실로 엄청나서, 마주보고 있던 그조차 제대로 된 자세를 취하지 못했다.

챙, 챙, 캉.

에스터크를 쇼텔의 폼멜로 막고, 위에서 오는 숏소드를 나머지 쇼텔로 막는다. 그러나 태세를 가다듬을 틈도 없이 다시 에스터크가 심장을 노리고 날아왔다. 게네스는 이를 악물고는 숏소드를 쳐내는 한편 다른 쪽 쇼텔로 에스터크를 걸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에스터크는 미꾸라지처럼 쇼텔의 올가미를 스르륵 벗어났다.

이 몇 번의 경합에서 게네스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또한 스피드에 중점을 둔 전투스타일을 구사했기 때문이다. 격검을 사용하는 유미르네와, 마찬가지로 두 개의 쇼텔을 엇박자로 내지르는 게네스. 총 4개의 무기가 교차하는 광경은 눈이 안 좋은 사람이 본다면 그저 은빛 섬광이 번쩍이는 것처럼 보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공격의 우위는 명백히 유미르네에게 있었다. 몇 차례의 공격으로 게네스의 자세가 흐트러진 반면, 그녀는 여전히 연계를 이어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완벽히 숨을 끊을 요량으로 숏소드와 에스터크를 동시에 휘둘렀다.

측면에서 웬 광대가면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고 느낀 건 그때였다.


“...?!”


그녀는 반사적으로 숏소드를 일자로 세워 몸을 가렸다. 아니나 다를까, 둔중한 일격이 숏소드의 옆면을 강타했다. 순간 유미르네는 무리해서 자세를 유지하려 하지 않고, 충격에 몸을 맡겨 그대로 뒤로 기울어졌다. 머리가 땅에 닿기 직전 그녀는 양팔을 땅에 짚고는, 왼손으로 흙을 한 움큼 집어 전방에 뿌리며 재주넘기를 했다.


“어이쿠, 이런!”


유미르네는 재빨리 뒤로 물러나 자세를 가다듬었다. 적을 확인하는 그녀의 눈동자로 땀방울이 또르륵 흘러내렸다.

뿌린 흙은 허공에 머물러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광대가면의 아래쪽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달라붙은 듯한 모양새였다. 앞서 그의 능력을 보았던 게 다행이었다. 착용자를 투명화시키는 가면. 하지만 들고 있는 무기도 보이지 않는다니, 반칙도 이런 반칙이 없었다.

갑작스러운 제스터의 등장은 유미르네와 게네스 모두를 놀라게 만들었다. 유미르네는 이마에 묻은 땀을 훔치며 말했다.


“당신...분명히 심장이 찔리는 걸 봤는데,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흠, 악마는 그 정도로는 죽지 않습니다. 남들보다 튼튼한 몸이라고 하면 설명이 될까요? 것보다 아가씨도 여간 아니군요. 순간적으로 제 공격을 막고, 흙까지 뿌리다니. 대단한 반사신경입니다.”


“후후. 입에 발린 칭찬은 사양인데.”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입니다. 뭐 그렇다고 아가씨를 살려주진 않겠지만요.”


제스터는 조소를 머금었다. 뒤이어 몸에 묻은 흙은 털자 그는 다시금 가면을 제외하고는 완벽히 투명한 상태가 되었다.

유미르네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날고기는 그녀라 해도 쉽사리 공격할 틈이 나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게다가 심장을 찔리는 것 정도로는 죽지도 않는 적을 상대로 어떻게 싸워야 할 것인가? 오랜 용병생활로 단련된 감각이 그녀에게 외치고 있었다.

이 자는 위험하다. 적어도 조금 전 단검투척이나 해대던 때와는 완전히 분위기가 다르다. 맞서 싸운다면 승률은 기껏해야 5할?

제스터의 등장으로 상황은 완전히 반전되었다. 유미르네의 입장은 완전히 수세로 바뀌어 제스터의 눈치만 보는 상태가 되었다. 그녀가 공격할 기미가 없자 제스터는 옆에 선 게네스에게 말했다.


“먼저 가십시오. 난 이 아가씨와 춤 한 곡 추고 따라 갈 테니.”


“어...뭐요?”


게네스는 흠칫 놀라며 되물었다. 그는 이 남자가 같은 편이라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는 듯, 거리를 벌리려 했다. 눈앞의 여자도 굉장하지만, 안개송곳니만큼 사람을 기분 나쁘게 만드는 집단도 없을 것이다.


“먼저 가시라고 말했습니다.”


“...알았소, 그럼.”


게네스는 같이 싸우자느니, 여자를 조심하라는 따위의 말은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기왕이면 둘 다 맞찔러 죽기를 바라면서, 그는 남은 동료와 함께 말을 타고 사라졌다.

비좁은 갓길에는 어느새 유미르네와 제스터 둘만 남게 되었다. 제스터는 그녀의 전신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이야~이거 대단한 미인이로군요. 임무 중에 젊은 여자를 죽이는 건 실로 오랜만인데요.”


유미르네는 방어자세 그대로 눈동자를 굴려 후방을 확인했다. 당연하지만 일행이 탄 마차는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만약 막힘없이 이동했다면 벌써 3~4km쯤은 멀어졌을 것이다. 그게 아니면 매복을 만나 교전을 벌이고 있거나.

그녀는 눈썹이 가릴 정도로 모자를 꾸욱 눌러썼다.



***



“멈춰! 루도, 루도 어디 갔어!”


루도가 사라진 것을 알아챈 때는 이미 1분여가량 마차를 달린 후였다. 마차 지붕이 유달리 잠잠하다 싶어 고개를 빼꼼 내밀었더니, 망을 보고 있어야 할 루도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었다. 디리터는 즉시 마차를 멈춰 세웠다. 그가 사라졌다는 소식에 마리네와 레미나도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왔다.


“뭐야? 대체 어디로 간 거야?”


“마차에서 굴러 떨어진 거 아니야? 혹시...”


‘일반적으로’ 생각한다면 마차의 진동을 견디지 못하고 지붕에서 굴러떨어졌다고 보는 게 가장 타당하다. 그러나 루도 정도의 레인저가 고작 이런 흔들림도 버텨내지 못할 리가 없다.

제리온은 늘 하던 대로 최악의 상황을 상정했다. 앞서나간 이칼롯은 돌아오지 않고 있고, 지붕 위에 있던 루도는 자취를 감추었다. 정말 빌어먹을 가정이긴 하지만, 아케니온이 이 둘을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한 것이라면?

그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누르며 말했다.


“말 꺼내. 지금 당장 왔던 길을 돌아가야겠어. 디리터, 같이 가자.”


디리터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서둘러 마차에서 말을 한 마리 꺼냈다. 사두마차는 제스터의 공격으로 삼두마차로, 그리고 다시 한 마리 빠져 이제는 볼품없는 쌍두마차가 되어버렸다. 마리네가 말에 올라타는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엇, 그럼 나도 같이 가!”


그러나 제리온은 그의 제안을 단박에 일축했다.


“너까지 빠지면 누가 누님이랑 에레이시아를 지키냐? 넌 여기서 언제든 마차 출발할 수 있게 준비해둬. 그리고 이칼롯 돌아오면 곧장 우리 지원하러 오라고 해. 자, 루도 자식이 그냥 길바닥에 나자빠져 있길 빌자고.”


마리네가 미처 뭐라 반박할 틈도 없이 그는 말을 출발시켰다. 말발굽에서 튄 흙먼지가 바람을 타고 마차가 있는 곳까지 날아왔다. 그러나 마리네, 레미나, 에레이시아는 먼지를 피할 생각도 않고 둘이 떠나간 자리를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희미해져 가는 실루엣 사이로 디리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리! 위험하니까 넌 계속 마차 안에 들어가 있어!”



***



“끄...우웁...”


제랄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나이프를 뽑았다. 루도의 오른 가슴에서 피가 샘솟듯 흘러나왔다.


“잘 안 되는군. 이러다 진짜 죽겠는데. 아, 자크, 혹시 모르니까 텔레포트 스크롤 준비해놔.”


그는 부하 한 명에게 퇴로확보를 지시하고는 곧장 다른 부위 - 찔러도 곧바로 죽지 않는 -를 찾기 시작했다.

오른 가슴, 허벅지, 심장과 횡격막 사이. 총 세 차례에 걸쳐 찌르고 비트는 고문이 이어졌으나 루도는 각성하지 않았다. 그저 고통스러운 신음만 반복하는 소년에게서 신의 아이를 나타내는 징후는 눈곱만큼도 찾을 수 없었다.

고문도 이제 한계에 다다른 상황이었다. 상처 부위를 지혈하지 않은 탓에 루도의 출혈은 이미 치사량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해도 각성하지 않는 그를 보며 제랄드는 쩝, 입맛을 다셨다. 이런 상황을 예상 못 한 것도 아니지만, 막상 접하고 보니 실로 맥 빠지는 결말이었다.


“뭐 본인이 죽겠다는데 어쩔 수 없지. 슬슬 끝내주마, 루도.”


“충격의 방식이 틀린 것 아닌가?”


막 심장을 찌르려던 그를 멈춰 세운 것은 다름 아닌 제폰이었다. 그때까지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있던 그가 입을 열자 사람들의 이목이 전부 그쪽에 쏠렸다. 루도도 격통 속에서도 또 무슨 개소리를 하나 싶어 눈동자를 굴렸다.

제랄드가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방식이 틀렸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충격의 조건이 꼭 고통만은 아니라는 거다. 그 정도까지 했으면 알았을 텐데? 신의 아이는 네놈 장난감이 아니야.”


제폰은 살을 헤집는 쾌감에 취해 고문을 즐기고까지 있던 제랄드를 비난했다. 그의 직설적인 화법에 아케니온의 분위기가 일순 험악해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제폰을 협박하거나 해코지를 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차라리 군대와 싸우면 싸웠지, 안개송곳니의 최고실력자 진홍검(眞紅劍) 제폰과 검을 맞대려는 이는 아무도 없을 테니 말이다.

제랄드 역시 심기가 불편했지만 이번에는 성질을 죽였다. 이 남자만은 정말 적으로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


“흐음, 조건이라...그럼 제폰님의 생각을 말씀해주시오. 말을 꺼낸 걸로 봐선 좋은 수가 있는 모양인데.”


“분노라든지.”


그의 무미건조한 한 마디에 제랄드는 피식 실소를 머금었다. 그는 손에 든 나이프를 한 바퀴 빙그르르 돌리고는 숨을 씩씩대는 루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화를 내는 문제라면 지금도 충분한 것 같소만? 루도 클로람이 여기서 더 분노할 건덕지가 있나?”


“물론. 인간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제폰은 검을 어깨 위에 걸치고는 루도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케니온 멤버들은 그가 지나갈라 치자 호들갑을 떨며 양옆으로 길을 비켰다. 제랄드도 그가 다가오자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길을 터주었다. 약 1m 정도의 사이를 두고 그와 루도가 마주했다.

그가 말했다.


“루도 클로람, 나를 죽이고 싶은가?”


루도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를 노려보았다. 투구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는 시선을 피하지도 않고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 그 흐트러짐 없는, 뻔뻔하다고 느껴질 만큼 올곧은 눈빛이 루도를 화나게 만들었다. 입속에 피가 차 호흡조차 힘겨운 상황이었지만 그는 억지로 입을 열었다.


“그걸...후욱, 말이라고 하냐? 너희 안개송곳니 녀석들은 반드시 내 손으로 끝장낼 테다. 죽어 귀신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러나 제폰은 그의 저주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크림슨 블레이드를 수직으로 세워 루도의 머리맡에 세게 꽂았다. 꽂은 검을 지팡이 삼아 허리를 구부리고, 햇빛을 등진 채로 그는 루도를 수직으로 내려다보았다. 전신에 갑주를 둘러 눈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의 신체는 언젠가 보았던 생텀가드보다도 더 기계적으로 느껴졌다.

제폰은 조금 전보다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아니, 그걸로는 부족해. 너는, 나를, 훨씬 더 증오해야 한다.”


“미친...새끼...생지랄하고 있네.”


“그 이유를 알고 싶나?”


“니 새끼가 떠들던 말던.”


루도는 피 섞인 침을 탁 뱉었다. 이 남자가 무슨 소리를 지껄이든지 한 귀로 받아 흘릴 생각이었다. 당사자 옆에서 충격이니 분노니 하는 이야기를 지껄였는데 곧이곧대로 움직여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양손이 자유롭다면 그대로 귀를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그를 보며 제폰은 잠시 목을 가다듬었다. 크림슨 블레이드에 묻은 피가 흘러 루도의 머리카락을 살짝 적셨다.

바람이 멈추었다. 바스락대던 나뭇잎, 흘러가던 구름조각도 일순 움직임을 멈추었다. 아케니온도 이 숨 막히는 배경에 녹아들었다. 그가 침묵하는 몇 초간 시간 자체가 정지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루도의 동공이 크게 확대되었다. 결박당한 양손이 무기를 찾아 거칠게 요동쳤다. 상처의 고통도 이젠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동요하지 않겠다던 각오는 단 1분도 안 되어 산산조각이 났다.

구름이 다시금 흘러가기 시작했을 때, 루도는 미친 듯이 발광하며 날뛰기 시작했다.

제폰이 한 말은 다음과 같았다.


「람카디스 클로람은 내가 죽였다.」



***



류이너스의 인장이 새겨진 성문을 지나, 베리어스는 도시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대신전을 향해 쏜살같이 말을 몰았다. 중앙대로는 대리석을 직사각형 모양으로 잘라 반듯하게 깔아놓은 형태로, 말이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따그닥, 하는 소리가 크게 부각되었다. 원래대로라면 성문에서부터 말에서 내려 걸어가는 게 맞지만, 워낙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는 경비대에게 양해를 구하고 최고속력으로 말을 몰았다.


“비키시오, 비켜! 좀 지나갑시다.”


그가 대로를 질주하자 행인들이 질겁하며 양옆으로 갈라졌다. 워낙 조용하고 정적인 도시인지라 그의 경망스러운 행동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침묵이 미덕으로 통하는 장소에서 갖은 소음을 다 내며 움직이고 있으니, 수호기사라는 직위가 무색할 지경이었다. 이런 까닭에 그가 대신전에 도착했을 때엔 이미 레밀리오 사제를 비롯해 많은 관계자들이 입구에 나와 있었다.

그러나 베리어스는 사정청취를 할 시간도 없이 짧게 목례만 하고는 그대로 사제들을 지나쳤다.


“이, 이보게 노르드경!”


레밀리오 사제가 어깨를 붙잡으려 했지만 그의 움직임이 훨씬 빨랐다. 무안하게 허공만 헤집은 레밀리오는 다급히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베리어스가 이렇게 호들갑을 떨 정도면 뭔가 심각한 상황이 일어난 게 틀림없었다. 곧장 베른헬트 주교를 찾을 거란 그의 예상과 달리, 베리어스는 주교 집무실을 망설임 없이 지나쳤다. 그의 목적지는 신전 끝자락에 위치한 사제회랑이었다.

한편 레밀리오는 간신히 그의 뒤를 따라잡고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인가? 로샤단은 만난 건가?”


베리어스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답했다.


“만났습니다. 그리고 아케니온과 안개송곳니도요.”


“뭐? 그렇다면...”


“마차로 달아나고 있긴 하지만 그리 오래 버티진 못할 겁니다. 아, 잠시 비켜 주십시오 사제님.”


그는 복도 한가운데에 멈춰 섰다. 아무도 없는 장소에 우뚝 선 그를 보며 레밀리오는 혹시 자신에게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려고 여기까지 온 것인가 싶어 긴장했다. 하지만 이는 그의 착각이었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는 게 아니었다.

한낮의 햇살이 창을 뚫고 쏟아지는 가운데, 베리어스는 한창 햇볕을 머금고 있는 석고상 앞에 무릎 꿇었다. 생텀가드 루치페리아는 언제나와 같은 자세로, 창을 지팡이삼아 선 채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베리어스가 말했다.


“류이너스 교단의 수호기사, 베리어스 노르드, 루치페리아님을 뵙습니다.”


레밀리오는 화들짝 놀라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물론 루치페리아가 평범한 석고상이 아니란 것쯤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인사를 올린다고 넙죽넙죽 받아주는 성격인 것도 아니었다. 왜 그녀에게 말을 걸었는지에 대한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말수 적은 그녀가 반응을 보일 거라 기대하긴 매우 어려웠다. 얼마 전 마리네에게 말을 걸었던 것을 제외하면, 그녀는 지난 수십 년을 ‘동상으로서’만 존재해왔다. 말 한마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말이다.

예상대로 루치페리아는 묵묵부답이었다. 말을 건 베리어스조차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나 싶어 회의감을 느낄 정도였다. 하지만 아직 포기하기엔 일렀다. 이칼롯이 해준 말을 떠올리며, 그는 품 안에서 예의 손수건을 꺼내들었다.

베리어스는 잘 포갠 손수건을 루치페리아에게 건네며 말했다.


“루치페리아님, 이것을 보아주십시오. 생텀가드인 당신이라면 아실 겁니다. 이 손수건에 묻은 게 무엇인지를.”


뒤에 서 있던 레밀리오는 실눈을 뜨고 그 손수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특별한 점이 보이지 않는, 그냥 평범한 손수건이었다. 천 가장자리에 검붉은 얼룩이 묻어 있는.

베리어스는 손을 내민 자세 그대로 10초가량을 기다렸다. 역시 생텀가드란 흘러간 전설일 뿐인 것인지, 눈앞의 여인은 그저 잘 만든 석고상에 불과한 것인지. 괴로운 정적이 이어졌다. 뒤에서 지켜보던 레밀리오도 대답 없는 생텀가드를 보며 긴 탄식을 내뱉었다.

그때였다.


-이것은...악마의 피로군요. 젊은 기사여, 이 피의 주인을 보았습니까?


레밀리오는 물론이오, 말을 건 베리어스도 놀라 펄쩍 뛸 상황이 벌어졌다. 루치페리아가 부름에 응한 것이다. 게다가 그녀의 반응은 단지 목소리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쩍, 쩌적, 하는 바위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석고상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석고가루가 그대로 머리 위로 쏟아졌지만 베리어스는 피할 생각도 않고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놀라움 반, 경외심 반으로 그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이칼롯의 가설이 그대로 맞아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악마가 있는데 생텀가드가 움직이지 않을 리 없다.’


루치페리아는 천천히, 그러나 섬세한 동작으로 손수건을 받아들었다. 초점 없는 눈동자가 손수건의 검붉은 얼룩에 내리꽂혔다. 베리어스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말했다.


“네, 넵! 안개송곳니 암살단의 제스터라는 자입니다. 그자가 지금 로샤단! 아니지, 펠아람의 아이를 노리고 있습니다. 부디 루치페리아님의 가호를...”


루치페리아의 어깨가 부자연스럽게 뚜둑 꺾였다. 너무 오랜만에 몸을 움직인 까닭인지 그녀는 구체관절인형처럼 단계적으로 움직였다. 그 동작은 얼핏 기괴스럽기까지 했지만, 베리어스의 눈에서 공포 따위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신화 속의 생텀가드! 그는 지금 신성성(神聖性)을 직접 목격하고 있었다.

그 고대의 존재는 손목을 좌우로 꺾고는, 창을 땅바닥에 꽂으며 한 발자국을 내디뎠다. 녹슨 석고가루가 우수수 떨어짐으로써 기나긴 동면의 종말을 고했다. 루치페리아가 다시 물었다.


-젊은 기사여, 이 피의 주인을 보았습니까?


조금 전과 똑같은 질문에 베리어스는 흠칫 놀랐다. 그는 생텀가드가 이야기를 제대로 못 들은 건가 싶어 똑같은 말을 반복하려 했으나, 이내 자신의 화법이 틀렸던 것임을 깨달았다.

루치페리아는 처음 베리어스가 인사를 올렸을 때에는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움직이기 시작한 건 악마의 피가 묻은 손수건을 발견한 직후다. 그리고 그녀는 악마를 보았냐는 질문만 연방 되풀이했다.

이를테면 그녀는 안개송곳니나 로샤단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혹시 도움이 될까 싶어 펠아람의 아이까지 언급해봤으나 그녀가 관심을 보이는 건 오로지 ‘악마’였다. 생텀가드의 목적을 간파하자 베리어스는 즉시 그녀가 원하는 답을 들려주었다.


“네, 보았습니다. 여기서 서쪽으로 20km 정도? 아니 지금쯤이면 그보다 더 멀리 갔을지도 모릅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루치페리아는 서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레밀리오는 그녀를 따라 서쪽으로 고개를 돌렸으나, 곧 막다른 벽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루치페리아는 그 자세 그대로 30초가량을 서 있었다. 그동안 베리어스와 레밀리오는 그녀의 집중을 방해하는 게 아닌가 싶어 숨을 내쉬는 것조차 참아야만 했다.

이윽고 ‘탐색’이 끝나자, 그녀의 날개가 좌우로 활짝 펼쳐졌다.


-적 위치 포착. 지금부터 섬멸에 들어갑니다.


그 말을 끝으로 루치페리아의 몸이 수직으로 솟구쳤다. 아치형 지붕을 여지없이 박살내고서 그녀는 서쪽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 속도가 화살에 필적할 만큼 엄청나서, 레밀리오가 부서진 지붕 위를 올려다봤을 때 이미 그녀는 좁쌀만 하게 보일 정도로 멀어져 있었다.

한편, 굉음을 듣고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햇빛이 훤히 들어오기 시작한 회랑에는 부서진 벽돌과, 그 위를 부유하고 있는 잔 먼지와, 얼떨떨한 얼굴을 한 두 남자가 서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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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 람의 계승자 - ep.5 - 승리 뒤에 오는 것들(5) +2 15.05.08 885 23 24쪽
232 람의 계승자 - ep.5 - 승리 뒤에 오는 것들(4) +2 15.05.08 901 22 26쪽
231 람의 계승자 - ep.5 - 승리 뒤에 오는 것들(3) +2 15.05.08 893 24 19쪽
230 람의 계승자 - ep.5 - 승리 뒤에 오는 것들(2) +2 15.05.08 758 23 24쪽
229 람의 계승자 - ep.5 - 승리 뒤에 오는 것들(1) +5 15.05.07 770 25 19쪽
228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10) +2 15.05.07 889 23 24쪽
227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9) +1 15.05.07 812 21 24쪽
226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8) +4 15.05.06 731 26 22쪽
225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7) +2 15.05.06 976 24 29쪽
224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6) +3 15.05.06 802 23 28쪽
223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5) +4 15.05.05 929 26 24쪽
222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4) +2 15.05.05 762 23 23쪽
221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3) +1 15.05.05 642 22 15쪽
220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2) +2 15.05.05 770 24 18쪽
219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1) +4 15.05.05 685 23 15쪽
218 람의 계승자 - ep.5 - 사냥감의 반전(4) +2 15.05.05 921 24 23쪽
217 람의 계승자 - ep.5 - 사냥감의 반전(3) +3 15.05.04 935 22 23쪽
216 람의 계승자 - ep.5 - 사냥감의 반전(2) +2 15.05.04 867 22 21쪽
215 람의 계승자 - ep.5 - 사냥감의 반전(1) +1 15.05.04 774 24 20쪽
214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5) +2 15.05.04 709 24 15쪽
213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4) +2 15.05.04 720 25 23쪽
212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3) +3 15.05.03 844 29 18쪽
211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2) +3 15.05.03 763 22 23쪽
210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1) +2 15.05.03 853 23 20쪽
209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7) +5 15.05.03 795 28 25쪽
208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6) +2 15.05.03 894 24 22쪽
»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5) +4 15.05.02 938 29 21쪽
206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4) +1 15.05.02 884 27 20쪽
205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3) +2 15.05.02 689 24 21쪽
204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2) +2 15.05.02 767 24 24쪽
203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1) +2 15.05.02 586 24 22쪽
202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6) +3 15.05.02 695 28 18쪽
201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5) +5 15.04.29 863 24 19쪽
200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4) +1 15.04.29 937 24 26쪽
199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3) +1 15.04.29 789 24 24쪽
198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2) +3 15.04.29 812 26 18쪽
197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1) +1 15.04.29 758 24 17쪽
196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8) +4 15.04.28 904 28 16쪽
195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7) +3 15.04.28 840 25 20쪽
194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6) +3 15.04.27 711 26 19쪽
193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5) +3 15.04.27 756 22 17쪽
192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4) +2 15.04.27 731 22 18쪽
191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3) +1 15.04.27 730 30 18쪽
190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2) +2 15.04.27 758 27 19쪽
189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1) +2 15.04.27 789 31 18쪽
188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完) +1 15.04.27 599 33 18쪽
187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5) +4 15.04.26 733 24 17쪽
186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4) +1 15.04.26 928 28 16쪽
185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3) +2 15.04.26 739 26 20쪽
184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2) +6 15.04.23 779 28 15쪽
183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1) +3 15.04.23 839 26 19쪽
182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2) +2 15.04.23 755 25 17쪽
181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1) +3 15.04.23 767 26 15쪽
180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0) +1 15.04.23 682 25 22쪽
179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9) +3 15.04.22 811 29 16쪽
178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8) +3 15.04.22 846 27 15쪽
177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7) +1 15.04.22 776 29 18쪽
176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6) +1 15.04.22 790 23 18쪽
175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5) +2 15.04.22 765 29 15쪽
174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4) +3 15.04.22 911 25 18쪽
173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3) +5 15.04.21 767 27 16쪽
172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2) +2 15.04.21 922 25 14쪽
171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 +3 15.04.21 805 25 17쪽
170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8) +3 15.04.21 729 24 21쪽
169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7) +2 15.04.21 703 19 15쪽
168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6) +4 15.04.20 750 24 18쪽
167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5) +2 15.04.20 655 20 18쪽
166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4) +1 15.04.20 767 23 17쪽
165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3) +2 15.04.20 738 24 16쪽
164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2) +3 15.04.20 809 20 16쪽
163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1) +1 15.04.20 821 22 21쪽
162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6) +1 15.04.20 830 29 14쪽
161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5) +2 15.04.20 711 25 18쪽
160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4) +3 15.04.19 865 28 18쪽
159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3) +3 15.04.19 946 28 18쪽
158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2) +3 15.04.19 901 26 22쪽
157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1) +5 15.04.19 1,210 46 22쪽
156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10) +6 15.04.18 901 26 21쪽
155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9) +3 15.04.18 772 26 18쪽
154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8) +1 15.04.18 656 24 19쪽
153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7) +2 15.04.18 686 26 18쪽
152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6) +1 15.04.18 748 27 17쪽
151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5) +4 15.04.18 713 23 16쪽
150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4) +1 15.04.18 668 24 17쪽
149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3) +2 15.04.18 754 22 17쪽
148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2) +3 15.04.16 849 29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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