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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연 님의 서재입니다.

람의 계승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저스연
작품등록일 :
2015.03.21 02:01
최근연재일 :
2015.09.01 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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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19 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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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3)

DUMMY

“아...안녕하세요, 공주님. 루도입니다.”


루도는 허리를 펴며 인사했다. 요 며칠 새 긴장이 풀린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공주의 앞인지라 그는 행동거지를 정중하게 하려 노력했다. 레미나가 입을 움직여 말했다.


-어서 와요.


그녀가 의사를 표현할 수 있게 됐을 때부터 느낀 거지만, 레미나는 누구를 대하든 항상 경어를 사용했다. 그게 루도든, 마리네든, 어린 꼬마든 마찬가지였다. 제리온에게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선왕 란테리크의 교육 탓일 거다. 어렸을 때부터 자신을 낮추는 태도가 몸에 배어 있거든. 말했잖아, 공주가 아니라 옆집 누나라 생각하라고. 계급 문제에 있어서는 대단히 관대한 계집애거든. 어, 그런데 왜 나한텐 반말하지? 이 썩을 년!”


루도는 그녀와 시선을 마주할 때면 자기도 모르게 뒤통수를 긁적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녀는 자기 나이 또래의 아가씨다. 거기다 둘 다 이성에 호기심을 가질 나이, 세 시간 동안 서로를 응시하고 있으니 부끄러운 기분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루도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잘 주무셨어요? 제리온은 조금 전에 저랑 교대하고 밥 먹으러 갔어요.”


-네에. 아무래도 몸이 불편하니 자는 것 외에는 시간을 보낼 길이 없네요.


“그...그렇죠? 심심한 것도 어떻게 보면 스트레스니까요. 날씨가 이렇게 화창한데 방에 누워있으셔야만 하니...많이 힘드시죠?”


그러자 레미나의 눈두덩이 살짝 위로 올라갔다. 꽃보다 화사한 미소라는 건 어쩌면 그녀를 두고 말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루도는 그녀의 미소를 보는 것만으로도 몸이 나른해지는 걸 느꼈다.

그녀가 말했다.


-괜찮아요. 클로람님이 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시니까요. 하아~. 오늘은 바람이 참 시원하군요.


“아, 네! 날이 너무 좋아서 다들 꽃구경을 하러 나갔어요. 마을 외곽 가로수 길에 사프란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더라고요. 연한 노란색인데, 향기가 기가 막혀요.”


루도는 사프란 꽃의 생김새를 세세하게 설명했다. 그의 실감 나는 묘사에 레미나는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무덤덤한 이칼롯이나 매사에 까칠한 제리온에 비하면, 그녀의 리액션은 이야기하는 상대를 신이 나게 만들었다.


-정말 예쁘겠네요. 사프란 꽃이라...그런데 사프란은 약재나 향신료로 쓰이지 않던가요?


“아...약재나 향신료요? 물론 무지하게 귀하죠. 그래서 마을 사람들도 며칠 후에 다 따버릴 거라 하더라고요. 여긴 워낙 약재가 귀한 곳이라.”


-그런가요...몸이 회복되고 가면 늦겠네요. 꼭 보고 싶은데...


“그...렇겠죠? 으음...”


그녀는 실망하여 눈을 내리깔았다. 그 낙담한 눈빛이 안쓰러웠지만 도리가 없었다. 루도는 괜한 얘기를 꺼낸 게 아닌가 싶어 전전긍긍했다. 몸도 성치 않은 사람에게 바깥세상 얘기를 해 애간장을 녹이게 만든 것이다. 그는 어떻게든 레미나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어 이리저리 머리를 굴렸다.


“공주님, 그럼 제가 가서 사프란을 몇 개 꺾어올까요? 멀지 않으니 금방이면 될 텐데.”


-아뇨...꽃을 꺾는 건 좋아하지 않아요. 하루만 지나도 금세 시들어버리니까요.


“아...네. 죄송합니다.”


그렇다면 통째로 화분에 옮겨 가져오는 방법도 있었다. 생각해보니 화분을 창가에 관상용으로 두는 것도 괜찮을 법 싶었다. 왜 지금까지 그 생각을 못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루도는 묘안이다 싶어 그 제안을 하려 했다. 그런데, 레미나 쪽에서 먼저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순 없을까요?


화분 생각에 정신이 팔려 루도는 그녀의 입 움직임을 놓치고 말았다. 그는 화들짝 놀라 다시 물었다.


“앗, 죄송합니다. 잠시 딴생각을 하느라...방금 뭐라고 하셨나요?”


-저를 그 가로수 길로 데려다 주실 수 없을까요?


루도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그는 자신의 분석이 잘못된 건가 싶어 한참을 고민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레미나의 「아오우이」라는 입 모양은 「가로수길」이라는 단어로밖에 연상되지 않았다.


“공주님...정말 죄송한데...방금 뭔가로 데려다 주실 수 없냐고 말씀하셨잖아요? 그게 혹시 가로수 길인가요?”


레미나는 눈을 꾸우욱 감았다 뗌으로써 강한 긍정의 뜻을 표시했다. 루도는 다소 놀라워하면서도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유난스럽긴 해도, 공주님이니까 그 정도는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사람을 불러서 가마를 준비하라고 하지요. 잠시만요.”


그런데 아무래도 그녀의 뜻을 잘못 이해한 모양이다. 루도가 사람을 부르려 하자 레미나는 당황하여 그를 제지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런 번거로운 일 할 필요 없어요. 가마라니, 저 때문에 다른 사람을 귀찮게 하고 싶진 않아요.


루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라고요? 그럼 어떻게...”


-...클로람님이 저를 안고 데려가 주시면 안 될까요?


그 문장을 이해한 순간, 루도는 얼굴이 확 달아올라 말을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또래의 여자를, 그것도 일국의 공주를 안고 가라니, 시골 소년에겐 너무 가혹한 자극이었다.


“저...저...제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공주님, 그, 그, 저더러 공주님을 안고...가라는...가요?”


-역시 불편하신가요?


“아뇨, 아뇨!! 당치도 않습니다! 제가 어찌 그런...그보다 저 같은 평민에게 업히시면 공주님의 명예에 큰 누가 되진 않을까 해서...그러니까...”


지금껏 많은 상황을 경험했지만 이런 식으로 평정을 잃을 것이라곤 생각도 못했다. 제리온이 말한 대로 그녀는 상대방을 난처하게 만드는 데 특이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그녀는 그런 사실을 모른다. 지나친 순수함과 상대에 대한 신뢰가 결합된 결과다.

레미나는 루도가 자신의 신분을 들어 말을 얼버무리자 온화한 미소를 흘렸다.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리고 클로람님은 저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위치에 있으시답니다. 아니, 오히려 제가 클로람님을 모셔야 할 처지지요. 클로람님은 펠아람의 힘을 이어받은 몸이시니까요.


“으...으음...흠...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그래도 여기서는 남녀유별을 들어 그녀의 청을 거절하는 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루도는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입으로는 어느새 그녀의 부탁을 승낙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만난 지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녀는 참으로 신비한 여자였다. 요정 같은 외모를 차치하고라도 그녀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상냥한 미소, 상대를 배려하는 언행, 기품이 넘치는 태도까지. 그녀와 대화를 나누어본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그녀의 사랑스러움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루도가 결례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를 안아보고 싶다고 생각한 건 그런 이유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몰랐다.


“그럼...실례하겠습니다.”


루도는 조심스럽게 레미나를 일으켜 업었다. 그녀는 안젤리카가 그랬던 것처럼, 놀랄 정도로 가벼워 마치 등에 아무것도 짊어지지 않은 듯한 느낌이었다. 루도는 새삼 여자의 몸무게에 놀라워했다.


‘대체 뭘 먹으면 이렇게 가벼워지냐...그보다 가로수 길이면 윽?!’


루도는 그녀가 떨어지지 않게 몸을 밀착시키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탄성을 질렀다. 아직 목 아랫부분은 움직이지 않는 탓에 레미나는 루도에게 업히자마자 그의 등에 축 늘어졌다. 그러자 순박한 소년에겐 너무나 큰 자극이 - 잠옷 너머로 느껴지는 살결의 감촉이 - 밀려 들어왔다. 루도는 당황해 하마터면 그녀를 놓칠 뻔했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다 큰 처녀와 이렇게 몸을 밀착한 건 처음이었다. 루도는 요동치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 했다.

다행히 몸에 감각이 없는 레미나는 루도의 고충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루도는 행여 그녀가 떨어지진 않을까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갔다.

마당에선 제리온이 의자에 앉아 한가로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그는 루도가 레미나를 업고 나오는 광경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뭐하냐? 너네.”


“공주님이 사프란 꽃을 구경하고 싶다고 하셔서. 잠깐 갔다 올게.”


“어이구, 또 괜한 사람 성가시게 하는구만. 나 있을 때 안 그래서 천만다행이네.”


루도는 레미나의 신분을 전혀 개의치않는 제리온도 참 대단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등에 업힌 레미나도 지지 않고 혀를 날름거렸다. 제리온이 그걸 보곤 손을 휘휘 저었다.


“예, 예, 어련하시겠어. 수고해라 루도. 가서 누님 콧구멍에 사프란인지 날계란인지 하는 거 쑤셔 박아주는 거 잊지 말고.”


“...제리온 그러다 정말 사형당할 지도 몰라.”


에메랄드 섬 광장과 과수원을 연결하는 가로수 길은 여름을 맞아 각종 화초가 숨 막힐 듯이 우거져 있었다. 오후를 알리는 매미의 울음소리와 공중을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잠자리의 날갯짓, 그리고 바람을 맞아 일제히 흔들리는 나뭇잎의 파동은 용솟음치는 생명을 느끼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루도는 가로수 중 그늘이 잘 든 곳을 찾아 레미나를 내려놓았다. 사프란은 어딜 가든 흐드러지게 돋아있어 굳이 이리저리 움직일 필요도 없었고, 다른 야생화도 눈을 즐겁게 해주는 요소였다.

레미나는 실로 간만에 느끼는 바깥 공기의 상쾌함에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녀는 가로수 사이를 뛰어다니는 참새들과 하늘하늘 물결 치는 사프란을 바라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궁전에서도 맛보지 못한 자연의 절경이었다.

루도는 기뻐하는 그녀를 보자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제 고향에서도 사프란을 재배하던 업자가 있었는데, 그건 보라색이었어요. 여긴 그 품종은 없나 보네요.”


-보라색 꽃이라...그것도 예쁘겠네요.


레미나가 입을 움직였지만 루도 역시 꽃구경에 정신이 팔린지라 알아차리지 못했다. 둘은 일직선으로 곧게 뻗은 가로수 길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일정 간격마다 심어진 벚나무와 그 사이로 우거진 화초들, 그리고 반듯이 닦인 도로 등은 시골 섬 주민들의 작품이라곤 믿기 어려울 정도로 운치가 있었다.


“여기 이 나무들은 다 벚나무에요. 아르유가 그러는데 봄이 되면 흰 벚꽃이 피고, 어느 시기가 되면 일제히 꽃잎이 떨어진다고 하더라고요. 흰 꽃이 떨어지는 모습이 마치 눈이 내리는 것 같다고 하던데...”


-눈처럼 내리는 꽃잎이라.


둘은 나무 그늘에 마주앉아 가만히 자연의 정취를 감상했다. 가로수 길은 정오가 지날 무렵이라 그런지 지나다니는 사람 하나 없이 한산했다. 농부들은 진즉에 식사를 마치고 일터로 돌아갔을 터였다. 울타리 안에 존재하는 장소라 경비병도 돌아다니지 않았다. 귀를 울리는 매미 소리도 소음이라기 보단 경쾌한 음악이었다.

그렇게 10여 분을 있었을까? 루도는 멀리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레미나는 소리를 듣진 못했지만 루도의 흠칫 거리는 움직임을 눈치 채고 물었다.


-무슨 일인가요?


“에? 아, 뭐냐고요? 그냥, 누가 오는 것 같아서요. 직업병이라 반사적으로 그만...신경쓰지 마세요.”


루도는 쾌활하게 말하며 웃어넘겼지만 속으로는 온갖 우스갯거리가 떠나질 않고 있었다.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는 그가 익히 아는 것이었다.


‘분명 디리터와 에레이시아다. 요즘 잠잠하다 했더니 여기로 데이트를 온 거구나.’


만약 루도가 움직이려는 행동을 보였다면 디리터 쪽에서도 즉각 알아챘을 것이다. 그러나 루도는 자리를 떠날 생각이 추호도 없었고, 레미나는 아예 미동조차 않았기 때문에 그는 둘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다. 적당히 자라난 수풀도 둘의 모습을 가려주었다.

아무도 없는 거라 생각한 모양인지 디리터는 낯 뜨거운 대사를 마구 뱉어냈다.


“에리, 델키아에 자리 잡거나, 아니면 네가 살던 고향 근처에 터를 잡자. 2층 집으로. 으리으리한 집을 짓는 거야.”


그러자 에레이시아는 실소를 터뜨렸다.


“웃겨 정말. 땡전 한 푼 없는 주제에 무슨 집?! 배나 곯지 않으면 다행이지.”


“야야! 내 동물도감 알지? 그거 엄청나게 비싼 거야. 류이너스 교단에서 외주까지 받은 거라고. 페이지를 다 채우면 어림잡아도 5천 골드는 나올 거야.”


“그게? 아니, 그보다 그거 너희 아버지 유품이라며?”


“유품은 유품이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어차피 아버지도 갖다 팔려고 만들기 시작한 거니까. 게다가 여기는 희귀한 동물이 많아서 도감 채우기에 안성맞춤이야. 조금만 더 하면 완성할 수 있을걸?”


“그래도...너희 아버지가 남기신 걸 돈 때문에 갖다 판다는 건 좀...당장은 베른헬트 주교님께 받은 어음도 있으니까 너무 무리하지 마.”


둘은 볼을 발갛게 물들인 채 살림살이 장만 계획에 한창이었다. 대화는 보통 디리터가 허황된 계획을 제의하고, 에레이시아가 이에 태클을 거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둘의 대화는 제삼자가 들으면 손등이 간지러울 정도로 닭살이 돋는 내용이었지만, 루도는 어째서인지 그게 자신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이 설계하는 미래는, 오로지 로샤단의 복수만으로 점철되어있는 자신과는 너무도 다르기 때문이었다.

미래를 준비한다는 것. 그건 지난 몇 달간 전혀 고려해본 적 없는 주제였다. 만약 레이시를 죽이고, 안개송곳니를 괴멸시키고, 그래서 로샤단의 복수를 완수한다면, 그럼 그 후엔 무엇을 할 것인가?

생각해본 적 없었다. 그때까지 자신이 살아남을 거라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게 끝나면....? 그렇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 난 계속 레인저일 뿐이지. 아니면...’


하지만 이는 스스로를 설득하기 위한 변명거리일 뿐이었다. 만약 평생을 군인으로 살 생각이었다면 사비를 들여 책을 구입하거나 작문연습을 하는 일 따위는 결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람카디스가 그토록 바라마지 않았던 일, 그리고 안젤리카와 했던 약속.

역사학자로서의 자신.

너무나도 아득하게 멀어 진즉에 포기했던 일이다. 루도는 순간 헛웃음이 나와 급히 손으로 입을 가렸다. 장밋빛 미래를 꿈꾸는 디리터가 우습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부럽기도 했다. 이미 자신에게는 람카디스의 복수 외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는데.


-아쟉스님과 그웬드린양이군요. 둘은 연인 사이인가 보죠?


사념에 잠겨있던 루도는 레미나의 입놀림에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침울해진 그와 달리 그녀는 다소 들뜬 얼굴이었다.


“아...예. 딱히 공표한 건 아니지만, 알 사람은 다 알고 있죠.”


-잘 어울리는 한 쌍이네요. 두 분 다 쾌활하고, 생기가 넘쳐흐르죠.


루도는 그녀의 의사를 웃어넘겼다. 레미나가 한 말이 웃기다기보단, 디리터와 에레이시아의 태도가 너무도 귀엽기 때문이었다. 둘이 연인 사이라는 건 섬 주민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로샤단 멤버는 말할 것도 없고, 이제는 레미나 공주까지 알게 됐다. 그러나 둘은 공석에선 사귀는 사이라는 걸 끝끝내 부정했다. 루도는 누가 시샘하는 것도 아닌데 연인 사이를 부정하는 두 사람이 전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디리터의 어수룩한 태도는 여기까지 와서도 그치질 않았다. 가로수 길을 걷던 두 사람은 필연적으로 루도, 레미나와 마주칠 운명이었는데, 마침 인기척을 느껴 사주를 경계하던 디리터의 시선이 루도와 교차했다. 그때 철렁 내려앉은 가슴은 그의 표정에 그대로 드러났다.


“...어헉?!”


그때까지도 에레이시아는 꽃구경을 하느라 둘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루도는 굳이 내색하지 말자는 생각에 눈웃음만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요오~. 웬일이야?」


물론 그의 미소에 ‘방금 한 얘기 다 들었다.’란 의미가 담겨있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디리터는 삽시간에 사색이 되어 에레이시아를 낚아챘다. 그는 그녀가 뭐라 대꾸할 틈도 없이 걸어오던 방향으로 줄행랑을 놓기 시작했다.


“꺄악?! 왜...왜 그래!”


“그그그그그 중요한 할 일이 있는데 깜박하고 왔어. 어서 돌아가자!”


“뭐어? 그렇다고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갑자기...”


“어쨌든 돌아가야 해! 우와아각!”


디리터는 버둥대는 에레이시아를 업은 채 쏜살같이 왔던 방향으로 사라져갔다. 루도는 멀어져가는 두 사람을 보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사귄다고 선언하면 되는 문제인데, 뭐가 그리 부끄럽다고 숨긴단 말인가.

그러나 레미나 공주는 둘 못지않게 상황파악에 서툴렀다.


-아쟉스님, 많이 급한가 보네요. 저렇게 전력으로 마을로 되돌아가는 걸 보면.


루도는 제리온이 말한 「공주는 일반인과는 다른 차원에 살고 있다」라는 충고를 다시금 되새겼다. 앞의 두 사람이 사랑에 눈이 멀어 바보가 된 경우라면, 레미나는 선천적으로 순박한 성격이었다.


“그...급한 일이 있는 거겠죠. 우리도 슬슬 돌아갈까요? 공주님이 없어졌다는 걸 알면 다들 걱정할 거예요.”


레미나는 좀 더 있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루도의 입장을 생각에 굳이 칭얼대진 않았다. 그는 왔을 때처럼 그녀를 등에 업은 뒤 마을 어귀를 향해 자박자박 걸어가기 시작했다. 때아닌 바람이 불어와 그럴 시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잎사귀 몇 개가 떨어져 그들이 지나간 발자국 뒤를 수놓았다.

그날 루도는 디리터와 에레이시아가 했던 대화를 두고두고 가슴에 새겨놓았다. 둘의 이야기는 그에게 있어 단 한 번도 고려해보지 않았던, 이를테면 작은 충격처럼 다가왔다. 그가 지금껏 최악의 결과만을 상정해 행동해왔다면, 둘은 최선의 결과를 미루어 미래를 설계했으니까.

악운이 겹쳐 나온 결과가 자신의 죽음이라면 행운이 겹쳐 결국 복수를 이뤘을 때 자신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는 향후 루도가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두 사람이 끝끝내 함구했기에 그날 벚나무 가지 위에서 마리네와 이칼롯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은 죽을 때까지 그들만의 비밀로 남았다.



***


작가의말


레미나가 이렇게 가련할 리가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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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 람의 계승자 - ep.5 - 사냥감의 반전(2) +2 15.05.04 867 22 21쪽
215 람의 계승자 - ep.5 - 사냥감의 반전(1) +1 15.05.04 774 24 20쪽
214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5) +2 15.05.04 709 24 15쪽
213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4) +2 15.05.04 720 25 23쪽
212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3) +3 15.05.03 845 29 18쪽
211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2) +3 15.05.03 764 22 23쪽
210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1) +2 15.05.03 853 23 20쪽
209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7) +5 15.05.03 795 28 25쪽
208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6) +2 15.05.03 894 24 22쪽
207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5) +4 15.05.02 938 29 21쪽
206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4) +1 15.05.02 884 27 20쪽
205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3) +2 15.05.02 690 24 21쪽
204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2) +2 15.05.02 767 24 24쪽
203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1) +2 15.05.02 586 24 22쪽
202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6) +3 15.05.02 696 28 18쪽
201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5) +5 15.04.29 863 24 19쪽
200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4) +1 15.04.29 937 24 26쪽
199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3) +1 15.04.29 789 24 24쪽
198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2) +3 15.04.29 812 26 18쪽
197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1) +1 15.04.29 758 24 17쪽
196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8) +4 15.04.28 904 28 16쪽
195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7) +3 15.04.28 840 25 20쪽
194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6) +3 15.04.27 711 26 19쪽
193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5) +3 15.04.27 756 22 17쪽
192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4) +2 15.04.27 731 22 18쪽
191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3) +1 15.04.27 730 30 18쪽
190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2) +2 15.04.27 758 27 19쪽
189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1) +2 15.04.27 789 31 18쪽
188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完) +1 15.04.27 599 33 18쪽
187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5) +4 15.04.26 733 24 17쪽
186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4) +1 15.04.26 928 28 16쪽
185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3) +2 15.04.26 739 26 20쪽
184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2) +6 15.04.23 779 28 15쪽
183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1) +3 15.04.23 840 26 19쪽
182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2) +2 15.04.23 755 25 17쪽
181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1) +3 15.04.23 767 26 15쪽
180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0) +1 15.04.23 682 25 22쪽
179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9) +3 15.04.22 811 29 16쪽
178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8) +3 15.04.22 846 27 15쪽
177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7) +1 15.04.22 777 29 18쪽
176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6) +1 15.04.22 790 23 18쪽
175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5) +2 15.04.22 765 29 15쪽
174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4) +3 15.04.22 911 25 18쪽
173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3) +5 15.04.21 767 27 16쪽
172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2) +2 15.04.21 922 25 14쪽
171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 +3 15.04.21 806 25 17쪽
170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8) +3 15.04.21 729 24 21쪽
169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7) +2 15.04.21 703 19 15쪽
168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6) +4 15.04.20 751 24 18쪽
167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5) +2 15.04.20 655 20 18쪽
166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4) +1 15.04.20 767 23 17쪽
165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3) +2 15.04.20 738 24 16쪽
164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2) +3 15.04.20 809 20 16쪽
163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1) +1 15.04.20 821 22 21쪽
162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6) +1 15.04.20 830 29 14쪽
161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5) +2 15.04.20 711 25 18쪽
160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4) +3 15.04.19 865 28 18쪽
»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3) +3 15.04.19 947 28 18쪽
158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2) +3 15.04.19 901 26 22쪽
157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1) +5 15.04.19 1,210 46 22쪽
156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10) +6 15.04.18 901 26 21쪽
155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9) +3 15.04.18 772 26 18쪽
154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8) +1 15.04.18 657 24 19쪽
153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7) +2 15.04.18 687 26 18쪽
152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6) +1 15.04.18 748 27 17쪽
151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5) +4 15.04.18 713 23 16쪽
150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4) +1 15.04.18 669 24 17쪽
149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3) +2 15.04.18 754 22 17쪽
148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2) +3 15.04.16 849 29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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