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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연 님의 서재입니다.

람의 계승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저스연
작품등록일 :
2015.03.21 02:01
최근연재일 :
2015.09.01 03:28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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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19 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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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4)

DUMMY

꿈같았던 일상이 흘러가고, 어느덧 기약한 날짜가 다가왔다. 케리아돌의 둥지로 떠나는 날 아침, 로샤단 멤버 다섯은 할 수 있는 무장을 최대한 갖추고 윈프레드의 집 앞에 섰다. 주무기인 검은 말할 것도 없고 비상시에 투척할 만한 단검을 여러 개, 디리터는 경비대에 부탁해 작은 숏보우까지 얻어왔다. 음식은 도시락을 포함해 건량 사흘 정도 어치를 각자 주머니에 쟁였다.

갑옷을 사슬로 바꿀까 생각도 해봤지만 역시 일행에겐 레더아머 만한 것이 없었다. 아무래도 주목적이 전투가 아닌 행군이기 때문에 무거운 중량은 쉽게 피로가 누적될 우려가 있었다.

길 안내는 아르유가 부리는 정령, 유티넬이 맡았다. 녀석에겐 언제 공격당해도 도망칠 수 있는 민첩함이 있었고, 무엇보다 가까이 접근한 몬스터의 존재를 알아챌 수 있었기 때문에 안내인 역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아르유는 그 작은 요정을 루도에게 건네며 말했다.


“오빠들이 무사히 도착할 때까진 소환을 풀지 않을게요. 꼭 무사히 돌아오기에요?”


에레이시아는 새벽부터 일어나 일행의 도시락과 비상의약품을 준비했다. 디리터의 갑옷 이음매를 묶어줄 때 그녀는 불안한지 고개를 잔뜩 떨어뜨린 채였다. 그 애틋한 표정에 제리온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디리터, 무리하지 않아도 돼. 우리도 임자 있는 남자를 사지로 몰아갈 만큼 박정하진 않아.”


“음, 뭐 그렇지.”


“맞아. 그렇게 해.”


루도와 마리네, 심지어 이칼롯마저 그의 의견에 동의하자 디리터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항변했다.


“무...뭐뭐뭐 뭔 소리야! 난 죽어도 함께 간다!”


일행은 그렇게 사람들의 환대를 받으며 마을을 나섰다. 루도는 떠나기 전 레미나가 있는 2층 창가를 바라보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이른 아침임에도 깨어나 일행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연한 미소에 루도는 허리를 숙여 화답했다.

한여름의 숲은 각종 화초와 그 사이를 날아다니는 곤충들, 그리고 그것보다 훨씬 큰 동물들의 기척으로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처럼 느껴졌다. 계절을 불문하고 인적 드문 산중은 대단히 위험하다. 하물며 각종 식인 몬스터들이 서식하는 에메랄드 섬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육지에서 건너온 다섯 명의 청년들은 이를 알면서도 숲이라는 괴물의 입속으로 표표히 걸어 들어갔다. 마을 경비대원들은 너나할 것 없이 첨탑 위에 모여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숨죽여 지켜보았다.


***


“야, 루도! 왼쪽, 왼쪼옥!!”


“우와악, 누가 이것 좀 떼어줘!!”


촤아악-! 진물인지 피인지 모를 것이 얼굴에 사정없이 튀었다. 하지만 몸을 닦을 시간마저 주어지지 않았다.


“씨발, 마리네! 시야가 가려서 쏠 수가 없잖아! 빨랑 수그려!”


“이것부터 좀 떼어주고 말하라니까!!”


“루도, 왼쪼오옥!”


“꺄아아아!”


터엉~. 포스 미사일의 경쾌한 타격음와 함께 자이언트 웜(Giant Wyrm)이 바닥에 고꾸라졌다. 루도는 측면에서 다가오던 촉수를 황급히 떼어낸 후 쓰러진 웜을 마구 난도질했다. 그 거대한 애벌레는 칼로 쑤실 때마다 기분 나쁜 체액이 밑도 끝도 없이 흘러나왔다.


“으윽...더러워. 이게 뭐야!”


“꺄아...꺄아아!!”


“아오 씨발! 좀 닥치라고 이 날파리 년아!”


제리온은 숲에 들어섰을 때부터 자신에게 엉겨 붙는 유티넬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유티넬은 위험을 감지하는 본연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제리온의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마리네는 떼어내도 떼어내도 그에게 달라붙는 녀석을 보며 웃었다.


“제리온이 마음에 드나 보네. 아르유가 뭐랬더라? 마음씨가 착한 사람을 좋아한다고...”


“지랄하네. 그냥 내가 만만한 거야.”


마을을 떠난 지 반나절, 일행은 온갖 악전고투를 하며 숲 속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얼마 전에 봤던 트롤은 물론이거니와, 사람보다 큰 벌레, 날아다니는 뱀, 식인식물 등 숲은 완전히 무법천지였다. 몬스터와 조우할 때마다 검을 뽑기를 수차례, 이젠 아예 칼집에 집어넣지도 않고 움직이게 되었다. 그나마 우수한 레인저들만 모인지라 이렇게 버티는 거지, 일반인이 들어왔다면 진즉에 몬스터 뱃속에 들어갔을 게 분명했다.


“유티넬, 이제 어디로 가야 해?”


루도가 얼굴에 묻은 진물을 닦으며 물었다. 유티넬은 제리온의 머리 위에 올라탄 채 팔을 뻗었다.


“꺄륵, 꺄르르.”


일행은 녀석의 지시에 따라 덤불을 헤치며 이동했다. 변변한 오솔길조차 없었기 때문에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기는 것도 곤욕이었다. 찌는 듯한 더위도 피로를 불러오는 요소였다. 각종 덤불로 시야는 몇 미터 앞을 분간하기도 어려웠고, 나뭇잎이 하늘을 가려 사위는 초저녁이라도 된 것처럼 음습함이 감돌았다. 여기다 후끈한 열기까지 더해지니 마치 숲에 포위된 듯한 기분이었다.

때문에 지루한 녹음이 끝나고 탁 트인 해안이 모습을 드러냈을 땐 다들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며 달려 나갔다. 바닷바람을 쐬며 더위를 식히고 있자니 유티넬이 절벽 끝을 가리키며 웃었다.


“나룻배?”


기암절벽 아래에 금방이라도 낡아 부서질 듯한 배 한 척이 파도에 넘실거리고 있었다. 아마 저걸 타고 건너편 섬으로 이동하라는 것이리라. 이칼롯이 태양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서너 시간 후면 날이 저물 것이었다.


“여기까지가 에메랄드 섬, 저기부터는 케리아돌의 영역이다. 이 속도로 가면 달이 뜰 즈음엔 그녀의 둥지에 도착할 거야.”


그러자 디리터가 이마를 찡그렸다. 밤에 숲 속을 이동한다는 건 자살하겠다는 말과도 같기 때문이었다.


“달이 뜰 즈음이라니? 밤중에도 움직이겠다는 거야? 너무 위험한데.”


“안트로서가 말하길 어쭙잖게 야영하느니 케리아돌의 둥지까지 진군하는 게 훨씬 안전할 거라고 하더군. 물론 그건 그녀가 우릴 죽이지 않을 거라는 걸 전제한 거지만.”


루도는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절벽을 기어 내려갔다. 무엇이 최선이든, 지금은 움직일 때였다. 절벽은 가파르긴 해도 마을 사람들이 박아놓은 철침 덕분에 내려가는 데에 큰 애로사항은 없었다.

그보다 일행을 식겁하게 만든 건 따로 있었다. 루도가 잘 내려가나 지켜보고 있자니, 거무스름한 물체가 수면을 훑고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일행은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히이익~! 마리네, 봤어? 방금 그거!”


“봐...봤어. 저거 지난번의 그거 아냐? 이름이 뭐랬더라...”


“시 서펜트(Sea Serpent)!"


그러고 보니 섬 근해에 시 서펜트가 출몰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건너편 섬까지는 200여 미터로 조금만 노를 저어도 닿을 거리였다. 그러나 거대 구렁이가 바다 속에서 기다리고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랄프의 범선도 삽시간에 항해불능으로 만들어버린 괴물인데, 저런 낡은 나룻배를 타고 가다 습격당한다면 배째로 먹혀버릴 게 분명했다.

겁에 질린 루도가 급히 절벽을 올라오다 발을 헛디디는 헤프닝이 있은 후, 일행은 움직일 생각도 않은 채 시퍼런 바다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시 서펜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실루엣을 목격한 것만으로도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디리터가 먼저 의견을 내놓았다.


“일단 마을로 돌아가자. 돌아가서, 가루루한테 태워달라고 사정하는 거야. 솔직히 배를 타고 여길 건너는 건 미친 짓이라고.”


“근데 가루루는 남자 안 태운다고...”


“지금 그런 취향 따질 일이야? 정 말 안 들으면 두드려 패서라도 태우게 해야지.”


루도와 마리네는 여기까지 와서 돌아간다는 게 영 못미더웠지만 그렇다고 그의 의견에 반대하려 들진 않았다. 차라리 트롤 무리와 싸우면 싸웠지, 물속에서 허우적대다 죽는 것만큼은 사양이었다.

그러나 제리온과 이칼롯은 그의 의견에 회의적인 반응이었다. 이칼롯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건 불가능해. 나도 그 얘기를 아르유에게 했었는데, 공중으로 움직이는 게 생각보다 훨씬 위험하다더군. 여기엔 그리폰보다도 몸집이 큰 익수가 살고 있는데, 당연히 육식성이고...제리온, 그거 이름이 뭐였지?”


“와이번(Wyvern)."


"그래, 와이번. 섬 한복판을 날아가면 놈의 표적이 될 거라더군.“


결론은 배를 타는 것 이외엔 건너편 섬으로 넘어갈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일행은 숨소리도 조심하며 조용조용 배에 올라탔다. 다른 사람들의 긴장이 역력한 표정을 보고 마리네가 애써 분위기를 밝게 하려고 입을 열었다.


“산에 들어간다고 꼭 곰을 만나게 되는 건 아니잖아? 시 서펜트도 마찬가지일 거야. 재수가 없지 않은 다음에야...”


웃으며 말하던 그는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닫곤 낯빛이 흐려졌다. 제리온이 그의 오류를 지적했다.


“그럼 지난번엔 억세게 운이 좋아서 바다 구렁이에게 습격당했냐? 이번엔 제발 당첨 안 됐으면 좋겠는데.”


디리터와 루도가 신중하게 - 마치 잠든 아기를 어르는 어머니의 팔놀림처럼 - 노를 젓기 시작했다. 찰박-찰박- 일행은 배를 타고 가는 동안 한 마디 대화도 주고받지 않았다. 가끔 높은 파도가 밀려올 때면 그들은 소스라치게 놀라 검을 뽑았다. 제리온은 아예 쇼크(Shock)마법을 시전 대기 상태로 준비해놓고 언제든 바다에 때려 박을 수 있도록 준비해 놓았다.

하늘이 일행의 간절한 마음을 들어준 것일까, 다행히 바다를 건너는 동안 시 서펜트의 습격은 일어나지 않았다. 일행은 나룻배를 적당한 암벽 근처에 고정시킨 후 다시 육로로 이동을 개시했다.

유티넬은 해안가에 도착했을 무렵부터 한결같이 북쪽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에 방향이 헷갈릴 걱정은 없었다. 그보다 문제는 한층 더 거대해진 몬스터들의 몸집이었다. 이전 숲을 가로지를 땐 동물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고함이나 쇳소리를 내 위협했다면, 이젠 쥐 죽은 듯이 살금살금 움직여야 했다.

웬덤보다도 거대한 스톤 자이언트(Stone Giant), 카잘 산맥 종에 비해 두 배는 커 보이는 다이어 울프, 째지는 소음을 내는 와이번 등. 그곳에 일행이 생각하던 ‘정상적인 동물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레인저가 동물에 주눅 들지 않는다는 속설은 새빨간 거짓이었다. 루도는 어느 누구든 2미터짜리 늑대, 혹은 바위 거인과 눈이 마주친다면 그 자리에서 오줌을 지릴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래도 그런 거대 몬스터들이 생각보다 덜 공격적이라는 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일행은 몬스터와 접촉하지 않게 이리저리 선회하며 케리아돌의 둥지로 전진했다.

기나긴 숲의 향연이 끝나고 널따란 공터가 모습을 드러낸 건 막 해가 산허리에 걸릴 즈음이었다.


“썩을, 여기 두 번 왔다간 수명이 절반은 줄어들겠다.”


“어차피 돌아갈 때 다시 지나가야 되는데?”


“아, 그랬지. 썅!”


제리온은 공터 한복판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날이 샐 때까지 강행군을 한 것도 그렇지만, 긴장의 끈이 풀리자 하루 내내 쌓였던 피로가 물밀듯 밀려왔다. 지치기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루도는 온몸에 달라붙은 나뭇잎을 털어내며 말했다.


“휴우~. 일단 시키는 대로 오긴 왔는데...유티넬, 다음엔 어디로 가야 해?”


그러자 유티넬은 공터 한복판에 놓인 석상을 척 가리켰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녀석은 휘리릭 사라져버렸다.


“어어? 얘 어디 갔어?”


유티넬이 말도 없이 사라지자 디리터가 불안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칼롯이 그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아르유가 말했잖아. 제대로 도착하기 전까진 소환을 풀지 않겠다고. 여기가 케리아돌의 둥지인 거다.”


“여기가? 아무것도 없는데?”


일행은 일단 유티넬이 지목한 석상에 다가갔다. 그것은 튜닉과 가죽조끼를 멋들어지게 차려입고, 거대한 책을 옆구리에 낀 미남자의 형상이었다. 옷의 주름은 물론이거니와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심지어 신은 부츠의 실밥까지도 세세하게 조각되어 있는 모습이 교단의 루치페리아와 비견될 정도로 완성도가 뛰어났다. 디리터가 석상의 자태를 보고 휘파람을 불었다.


“휘익~, 기가 막히게 잘 만들었네. 이것도 그 생텀가드라는 건가?”


“이게 케리아돌...은 아니겠지?”


일행은 일단 좀 더 주변을 조사해보기로 했다. 석상의 발치엔 돌로 된 선반과, 그 위로 자그마한 청동 활이 놓여 있었다. 만든 재질도 그렇고 어린아이 장난감만한 크기가 공예품을 목적으로 만든 듯이 보였다. 마리네가 그 활을 주워 이리저리 매만져 보았지만, 딱히 특이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장난감 활? 그렇다곤 해도 활줄도 없고, 화살도 없고...뭘까...?”


그때 선반을 살펴보던 루도가 무언가를 발견하곤 소리쳤다.


“앗, 뭔가 홈이 파여 있는데...글씨?”


문장 자체가 작기도 했지만 사위가 어둑어둑해질 무렵이라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루도는 제리온에게 빛을 쏘아달라고 한 뒤 문장을 읽어 내려갔다.



사수(射手)여, 신월(新月)이 하사하는 축복에 눈을 맞추라.

달은 오직 바라보는 자에게만 빛을 줄지니.

원한다면 궤적을 따르라.

스스로 구원한 자만이 나를 만날 기회를 얻으리.



“이 뭔 개소리야?”


언뜻 보기엔 시문 같기도 했다. 하지만 마지막 구절의 「나를 만날 기회를 얻으리」라는 대목은 그것이 결코 의미 없이 쓰인 문장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마리네가 말했다.


“여기 써진 ‘나’는 케리아돌을 지칭하는 거겠지? 스스로를 구원하라는 건 무슨 말이지?”


“수수께끼인가...궤적을 따르라는 건 또 뭐지.”


선반의 문장은 은유적 표현이 많은데다 그게 딱히 무얼 가리키는 건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일행은 한동안 머리를 맞대고 골몰했으나 명쾌한 해석은 나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머리를 쓰는 일이다 보니 자연스레 제리온에게 시선이 쏠렸는데, 그는 성격상 문학에는 조예가 깊지 않았다.


“어쨌든 우릴 시험하고 있는 건 틀림없군. 사수라...저 장난감 활과 관계가 있는 건가?”


이칼롯이 활을 가져왔다. 첫 문장이 ‘사수’로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 활이 아무 의미 없이 놓여 있는 것 같진 않았다. 이번에는 루도가 다음 단어를 해석했다.


“신월이라는 건 글자 그대로 초승달을 의미하는 거겠지? 안트로서도 초승달이 뜨는 날에만 만날 수 있다고 했으니, 틀림없을 거야.”


다들 고개를 끄덕였나. 그러나 해석은 거기까지로, 이후 뾰족한 진전이 보이지 않았다. 루도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즉 케리아돌을 만나려면 초승달이 뜨는 밤에 이 활을 이용해 어느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거네. 조건이라는 건 다음 구절에 담겨 있겠지? ‘축복에 눈을 맞추라’, ‘달을 바라보는 자에게만 빛을 줄지니.’


디리터가 피식 웃었다.


“그럼 시키는 대로 해야지. 축복에 눈을 맞추고 달을 바라봐봐.”


“음...”


그는 활을 들어 달을 겨냥하거나, 청동 활에 활줄을 만들어 퉁기거나 해보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고민하는 사이 어느새 시간은 한밤중이 되어가고 있었다. 일행은 일단 불을 피우고 간단하게 식사를 했다. 다행히 케리아돌의 영역이라 그런지 다른 동물들은 접근조차 하려 하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후 일행은 각자 편한 자세로 휴식을 가졌다. 그 와중에도 제리온과 이칼롯이 열띤 토론을 벌였는데, 아무래도 학술 모임이 아니다보니 시문 해석은 중구난방으로 갈라질 수밖에 없었다.


“궤적을 따르라는 건 분명 화살을 쏘라는 거야. 그런데 저런 손바닥만 한 활로 무슨...아오 속 터져.”


“활을 부메랑처럼 던지라는 말일 수도 있지.”


“어디로? 하늘로? 이건 완전 시간낭비야! 생각해보니 그 영감탱이, 초승달이 뜰 때 가라고 했던 걸 보면 이 시문도 알고 있었다는 말인데...우릴 엿 먹였어!”


둘이 점차 언성을 높여가는 사이, 루도는 머리도 식힐 겸 공터 주위를 산책했다. 그런데 터덜터덜 걷고 있자니, 누군가가 어깨너머로 자신을 응시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제리온과 이칼롯은 절대 아니었고, 마리네와 디리터는 잠시 눈을 붙인 참이었다.

자연스레 눈이 예의 석고상에 갔다.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띤 채 금방이라도 책을 읽어내려 갈 것 같은 동세. 하지만 당연히 석고상이 움직이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루도는 기분 탓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걸음을 옮기려 했다.


“....!”


그러자 이번에는 조금 전보다 훨씬 뚜렷한 존재감이 피부를 쓸고 지나갔다. 루도는 화들짝 놀라 등을 돌렸다. 이칼롯과 디리터, 마리네도 같은 느낌을 받은 모양이었다.


“응? 누구 왔어?”


“...뭔가 미동이 느껴졌는데...”


기분 탓이 아니었다. 루도는 석고상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 존재감과 시선, 그건 결코 평범한 석고상이 아니었다. 그는 허리춤에 손을 가져간 채로 석고상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만약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거기서 경계를 풀거나, 기분 나쁜 동상이라며 등을 돌려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루도는 이미 예전에 말하는 동상과 만난 경험이 있었다. 류이너스 교단의 생텀가드, 루치페리아와.

그는 석고상 앞에 정중하게 무릎 꿇고서 최대한 예의를 갖춰 말했다.


“안녕하세요, 생텀가드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혹시라도 저희가 당신을 불쾌하게 만든 건가요?”


그러자 거짓말처럼 석고상의 입이 움직였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간만에 사람을 보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예의 바른 소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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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5) +2 15.05.04 710 24 15쪽
213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4) +2 15.05.04 720 25 23쪽
212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3) +3 15.05.03 845 29 18쪽
211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2) +3 15.05.03 764 22 23쪽
210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1) +2 15.05.03 854 23 20쪽
209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7) +5 15.05.03 795 28 25쪽
208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6) +2 15.05.03 894 24 22쪽
207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5) +4 15.05.02 938 29 21쪽
206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4) +1 15.05.02 884 27 20쪽
205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3) +2 15.05.02 690 24 21쪽
204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2) +2 15.05.02 767 24 24쪽
203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1) +2 15.05.02 586 24 22쪽
202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6) +3 15.05.02 696 28 18쪽
201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5) +5 15.04.29 863 24 19쪽
200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4) +1 15.04.29 937 24 26쪽
199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3) +1 15.04.29 789 24 24쪽
198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2) +3 15.04.29 812 26 18쪽
197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1) +1 15.04.29 758 24 17쪽
196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8) +4 15.04.28 905 28 16쪽
195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7) +3 15.04.28 840 25 20쪽
194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6) +3 15.04.27 711 26 19쪽
193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5) +3 15.04.27 756 22 17쪽
192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4) +2 15.04.27 731 22 18쪽
191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3) +1 15.04.27 731 30 18쪽
190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2) +2 15.04.27 758 27 19쪽
189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1) +2 15.04.27 790 31 18쪽
188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完) +1 15.04.27 599 33 18쪽
187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5) +4 15.04.26 734 24 17쪽
186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4) +1 15.04.26 929 28 16쪽
185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3) +2 15.04.26 739 26 20쪽
184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2) +6 15.04.23 779 28 15쪽
183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1) +3 15.04.23 840 26 19쪽
182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2) +2 15.04.23 756 25 17쪽
181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1) +3 15.04.23 767 26 15쪽
180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0) +1 15.04.23 682 25 22쪽
179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9) +3 15.04.22 811 29 16쪽
178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8) +3 15.04.22 846 27 15쪽
177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7) +1 15.04.22 777 29 18쪽
176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6) +1 15.04.22 791 23 18쪽
175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5) +2 15.04.22 765 29 15쪽
174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4) +3 15.04.22 911 25 18쪽
173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3) +5 15.04.21 767 27 16쪽
172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2) +2 15.04.21 922 25 14쪽
171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 +3 15.04.21 806 25 17쪽
170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8) +3 15.04.21 730 24 21쪽
169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7) +2 15.04.21 703 19 15쪽
168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6) +4 15.04.20 751 24 18쪽
167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5) +2 15.04.20 656 20 18쪽
166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4) +1 15.04.20 768 23 17쪽
165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3) +2 15.04.20 738 24 16쪽
164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2) +3 15.04.20 809 20 16쪽
163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1) +1 15.04.20 821 22 21쪽
162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6) +1 15.04.20 830 29 14쪽
161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5) +2 15.04.20 711 25 18쪽
»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4) +3 15.04.19 866 28 18쪽
159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3) +3 15.04.19 947 28 18쪽
158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2) +3 15.04.19 901 26 22쪽
157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1) +5 15.04.19 1,211 46 22쪽
156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10) +6 15.04.18 901 26 21쪽
155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9) +3 15.04.18 772 26 18쪽
154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8) +1 15.04.18 657 24 19쪽
153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7) +2 15.04.18 687 26 18쪽
152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6) +1 15.04.18 748 27 17쪽
151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5) +4 15.04.18 713 23 16쪽
150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4) +1 15.04.18 669 24 17쪽
149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3) +2 15.04.18 754 22 17쪽
148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2) +3 15.04.16 849 29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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