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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연 님의 서재입니다.

람의 계승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저스연
작품등록일 :
2015.03.21 02:01
최근연재일 :
2015.09.01 03:28
연재수 :
34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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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9,080
추천수 :
10,757
글자수 :
2,844,987

작성
15.04.18 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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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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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글자
18쪽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7)

DUMMY

제리온은 의자 등받이에 팔을 걸친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침통하다 못해 자신이 경멸스러울 지경이었다. 레미나는 아무런 사심 없이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물론 그녀가 말한 대로 그건 제리온 자신에게만 한정된 것일 테지만 어쨌든 그것만큼은 어떠한 악의도 없었다. 그런데 자신은 그런 그녀를 질색하고, 자신을 이용하려 하는 게 아닌가 의심까지 했다. 그녀가 따뜻한 사람이라는 걸 진즉에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런 추악한 생각을 품다니 자신은 최저의 인간이었다.

제리온은 그녀를 위로할 거리를 찾다가 그가 깨달은 가장 명백한 답안을 얘기해주기로 했다. 그는 레미나의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누님의 제일 큰 문제가 뭔지 알아요? 너무 착해 빠졌다는 거야. 사람이 원...”


“으...응?”


“로드웰 후작이라는 사람, 명백하게 누님을 조롱하고 있더만. 어떻게 주먹 한 번 안 날리고 참았어요? 나라면 벌써 묵사발을 만들어놨을 텐데.”


“뭐? 아...아하...아하하하하!”


레미나는 얼굴을 묻은 채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어찌나 유쾌하게 웃는지, 말을 꺼낸 제리온이 멋쩍어할 정도였다.


“울다가 웃으면 어디에 뭐 난다던데...”


“아하하하하하!!”


레미나는 그렇게 한참을 웃다가, 기운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눈물로 눈두덩이 퉁퉁 불어 있었지만 예의 그 밝은 미소를 되찾은 상태였다. 제리온은 그 모습을 보고 싱긋 웃으며 말했다.


“누님, 그리고 아까 부탁 말인데, 그런 쉬운 건 얼마든지 말하라고요. 난 절대 변하지 않으니까.”


“다들 그렇게 말하곤 해. 그리고 다음 날 입을 씻지.”


“다들 그래도 나만은 안 그래요. 나만은, 절대로.”


“응, 알았어. 믿을게.”


눈물을 한 바가지 쏟아내고 나자 왠지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레미나는 어느새 예의 발랄한 소녀로 돌아와, 가져온 가죽 가방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제리온이 뭘 하는가 싶어 기웃거리고 있자니 그녀가 가방에서 해괴한 갈색 물체를 꺼내 들었다. 그는 정체불명의 물건을 보자 흠칫 놀라 뒷걸음질쳤다.


“뭐예요, 그게? 똥?”


“똥이라니! 내가 직접 구운 빵이야. 너 주려고 싸온 거야. 어서 먹어.”


“이...이걸 먹으라고요?”


제리온은 빵이라고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물체를 보며 진저리를 쳤다. 아무리 봐도 똥, 좋게 봐줘도 마른 진흙덩이였다. 레미나가 본모습을 되찾자 제리온 역시 즉시 이마를 잔뜩 찡그리기 시작했다. 그렇다, 그녀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

레미나의 갖은 성화에 제리온이 결국 그 물체를 받아들었다. 촉감마저 괴상한 그것을 응시하며 그가 물었다.


“저기, 그런데요 누님. 이거 누님도 먹어봤어요?”


“아니. 맛없어 보여서 안 먹었는데?”


“이 썅년이...!”


그는 험상궂은 얼굴로 빵을 물어뜯고, 두세 번 씹다가, '똥이라도 먹은 것처럼' 질겁하여 입안에 든 것을 모조리 뱉어냈다.

제리온과 레미나는 그 일이 있은 뒤로 더욱 친한 사이가 되었다. 굳이 말하자면 제리온이 좀 더 마음을 열었다고 해야겠지만 말이다. 그는 레미나가 궁전에 돌아가면 갖은 모략과 암투를 견뎌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아카데미에 있을 때만큼이라도 편하게 지내주길 바랐다.

둘의 마법적 기교는 동급생들과 비교하면 독보적이었는데, 이 때문에 그들은 전혀 다른 심화전공에도 불구하고 종종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곤 했다. 물론 이러한 부분은 어릴 적의 영향이 그대로 드러나, 레미나는 어찌 되든 좋다는 식으로 겸사겸사 받아들였다. 그녀는 제리온과 경쟁하기보단 사이좋게 지내길 원했고, 때로는 짬을 내어 그의 연구를 도와주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둘은 우애 깊은 남매로 보였고, 또 그녀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아카데미에서 보낸 2년의 세월은 그녀에게 있어 최고의 추억으로 자리 잡았다. 무슨 일이든 자신의 손으로 이룩해야 성미가 풀리는 그녀였기에, 아카데미는 궁전에서는 결코 느끼지 못했던 ‘살아있다’라는 감각을 경험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 추억의 한복판에는 언제나 제리온이 있었다. 어릴 적 멜피드의 정원에 모여 마법을 배울 때부터 아카데미를 떠날 때까지, 제리온은 그녀가 부탁한 대로 친한 동생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했다.

때문에 그녀가 영원히 학교를 떠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는 생전 처음으로 술이란 것을 입에 댔다.


리크나이츠력 512년, 선정왕(善政王) 란테리크 서거. 통치기간 동안 내정을 안정시키고, 기나긴 아스트리카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위대한 국왕은 오랫동안 앓던 지병으로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전국의 백성들은 비탄에 잠겨 사흘 내내 통곡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각국에서 파견한 조문 사절단의 행렬이 줄을 이었고, 왕을 기리는 분향 연기가 곳곳에서 피어올랐다.

그리고 한편에선 왕위계승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뜨거운 감자로 대두되고 있었다. 제1 왕위계승권자인 레미나가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는 혈통파와, 정치적 감각이 풍부하고 경험도 많은 제2 왕위계승권자 란도스가 왕이 되어야 한다는 실리파가 그것이었다. 개중에는 레미나가 란도스의 조카라는 것을 이유로 그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 란도스가 섭정을 맡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런데 막상 선왕의 동생이자 제2 왕위계승권자인 란도스는 몇 년째 궁전을 떠나 종적이 묘연했다.

7년 전 마드리고 공방전을 놓고 벌인 형제간의 충돌은 끝끝내 그 골이 깊어지고 말았다. 란도스는 그 일로 권력에 염증을 느끼고 유랑에 나섰다. 보좌하는 기사는 단 한 명. 왕족이라고 떠벌리고 다니지 않는 한 그의 행방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결국 레미나를 추대하는 혈통파가 탄력을 받았다. 그녀는 귀족들에겐 그다지 지지를 받지 못했지만, 백성들에게 인망이 두터웠으므로 민심 또한 빠르게 안정될 것이라 여겨졌다. 사람들은 몇 대(代)만에 여왕이 나오는 건지 놀라워하면서도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처녀 여왕의 즉위에 관심이 쏠렸다. 꽃다운 나이에다, 미모까지 빼어난 여왕이라니. 몇몇 몰지각한 기사들은 자신이 전설로 남을 로맨스의 주인공이며, 여왕의 환심을 사 왕의 지위에 오를 거라고 허세를 떨곤 했다.

대관식에 일주일 앞서 선왕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근위병들이 철통같이 호위하는 가운데 선왕의 시신이 안치된 관이 수도를 한 바퀴 돌았다. 관이 지나갈 때마다 거리에 있던 백성들은 그 자리에 엎드려 통곡했고, 선왕의 영혼이 신계에 다다르길 기원하며 절을 올렸다.

그날은 제리온도 거리에 나가 장례식에 참석했다. 사람들의 장단에 맞춰 엎드리긴 했으나 그의 신경은 온통 추모 행렬에 쏠려 있었다.

레미나를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선왕이 모셔진 관 바로 뒤에 검은 상복을 입고 뒤따라가고 있었다. 살짝 내리깐 눈동자는 며칠 밤낮을 울어서인지 퉁퉁 불어 있었고, 눈가에 드리워진 다크서클은 그녀가 얼마나 지쳐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제리온은 그 모습을 보자 순간 목구멍이 뜨거워져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 마치 둘 사이에 어떠한 끈이 연결되어 있던 것처럼 - 레미나의 눈이 그를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수많은 인파에 둘러싸여 시야조차 어지러운 상황에서 둘의 시선이 교차했다. 직접적인 대화는 없었다. 둘은 그저 그 아련한 눈빛만으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소통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 와줘서 고마워, 제리온.

- 많이 피곤해 보이시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 괜찮아. 내가 해야 할 일인걸. 아,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아.


순간 발이 떨어지려다 우뚝 멈춰 섰다. 레미나도 이를 느꼈는지 살짝 어깨를 움츠렸다. 제리온은 그 자리에 선 채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 힘내요, 누님. 난 언제까지고 누님 편이니까.

- 고마워, 고마워....넌 언제까지고 내 사랑스러운 동생이야.


모아 쥔 양손 사이로 손가락을 꺼내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그것으로 레미나는 이 슬픈 만남의 작별을 고했다.


- 안녕.

- 안녕히.


제리온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 그녀를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 가녀린 어깨를 움켜쥐고, 힘내라고, 모든 게 잘 될 거라고 그녀를 위로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이제, 자신과 그녀의 접점은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아카데미도, 마도학도. 그녀는 이제 여왕이다. 한가롭게 잡담을 나눌 여유 따윈 존재치 않는다. 그녀가 그토록 진저리를 치던 권력의 암투 속으로 끌려가고 있다. 그리고 자신은 잘난 아버지를 두었을 뿐인 무능한 학생일 뿐.

집에 돌아와 보니 로시오가 소파에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게 보였다. 마법친위대장인 그는 국왕의 서거로 인해 며칠째 집에도 돌아오지 못하고 눈코 뜰 새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마침 짬을 내어 퇴근한 모양이라, 귀찮게 하지 말자는 생각에 제리온은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런데 잠들어 있는 줄 알았던 로시오가 말을 걸어왔다.


“...공주님 뵙고 왔냐?”


제리온은 깜짝 놀라 말을 얼버무렸다.


“네? 뭐...”


“많이 힘들어 보이시지? 그만큼 국왕 폐하를 사랑하셨다는 뜻이다. 폐하는...다신 나오지 않을 성군이셨다.”


“.....”


사실 제리온은 선왕에 대해선 별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만났던 적도 손에 꼽을 정도고, 그저 레미나를 보며 참 딸을 자유롭게 키우는구나 생각한 정도였다. 그런 것보단 단지 슬퍼하는 그녀의 얼굴이 떠오를 뿐이었다. 로시오가 말했다.


“넌 앞으로 공주님과 얼굴 맞대기가 힘들겠구나. 이제 그분은 이 나라의 왕이시니까.”


“쳇, 그럼 내가 마법친위대장이 되면 되는 거 아뇨. 그럼 매일같이 잔소리해줄 수 있겠네.”


제리온은 예전처럼 얼굴 안 봐서 속이 후련하다느니, 다시 만나는 건 이쪽에서 사양하겠다는 식의 말은 하지 않았다. 아무리 빈말이라도 그건 레미나의 진심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했다.

로시오가 그 말을 듣곤 피식 웃었다.


“이놈이 당돌하게 아버지 자리를 노리고 있네. 이 나이에 벌써 은퇴하라는 게냐?”


“좋잖아요? 탱자탱자 놀면서 정원의 꽃이나 가꾸고. 아버지가 바쁘니까 날이 갈수록 잡초만 늘어나잖아요.”


“하핫! 그건 제법 나쁘지 않구나. 꽃이라...이제 곧 라일락이 필 텐데...”


그 말을 마치고 로시오는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제리온은 툴툴거리면서도 이불을 가져와 그에게 덮어주었다. 과도한 업무가 무리를 준 것일까? 오랜만에 본 아버지의 얼굴은 몰라볼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제리온은 모두가 힘들어하고 있는 때에 자신만 편하게 지내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


그날 보았던 아버지의 초췌한 모습이 기억에 남았던 것일까. 대관식이 있던 날 제리온은 보양식을 바리바리 싸들고 궁전으로 향했다. 끼니도 거르고 혹사당하는 아버지의 건강이 염려된 것이다. 어릴 적 도시락 가방을 둘러메고 궁전에 발을 디뎠을 때로부터 꼬박 10년 만이었다.

아마 우연히 레미나를 만났으면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여유롭게 콧노래를 부르며 궁전을 향했다. 해가 지고 어스름이 짙어져서 그런지 궁전은 평소보다 훨씬 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마치 건물 전체가 잠든 듯한 정적인 느낌이었다.


“응? 뭐지.”


제리온은 이질적인 풍경에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궁전은 밤이 되면 왕족을 제외하곤 일체 통행이 금지된다. 그가 서둘러 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후문은 예상대로 나다니는 사람이 없어 고요했다. 문제는 출입을 통제하는 근위병마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뭐야? 교대시간인가?”


그러나 교대시간이라면 병사들의 시끄러운 병장기 소리가 궁전 안을 가득 메워야 정상이었다. 후문을 지키는 두 명의 병사는 배경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필수적인 요소였기에 그들이 빠진 풍경은 강렬한 위화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궁전 안을 감싼 적막은 마치 강제되기라도 한 것처럼 소름끼쳤다. 제리온은 왠지 미심쩍은 느낌이 들어 들어가기를 망설였다. 근위병들은 어딜 간 것일까? 성 안은 왜 이다지도 조용한 것일까?

그는 병사들이 돌아오기까지 기다릴까 생각해봤지만, 그랬다간 통금 시간에 걸려 이도저도 못하게 될지도 몰랐다. 결국 그는 큰마음 먹고 궁전 안으로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애초에 여기 없는 군바리들이 문제라고. 어디서 농땡이를 부리고 있는 거야?’


그리고 그 의문은 순식간에 풀렸다. 그가 안으로 들어온 순간, 사라진 병사들의 모습이 시야를 가득 메웠기 때문이었다. 처참하게 난도질당한 병사들의 시체가.


“...우와아악?!”


제리온은 기절할 듯이 놀라 뒷걸음질쳤다. 그러나 그는 알 수 없는 벽에 부딪혀 튕겨 나왔다. 그의 눈동자가 혼란으로 크게 흔들렸다.


“뭐...뭐야 이건!!”


반투명한 막이 출구를 가로막고 있었다. 아니, 비단 입구만이 아니었다. 둘러싼 성곽부터 높이 하늘에 이르기까지, 반투명한 막은 궁전 전체를 철통같이 에워싼 상태였다.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데, 어떻게? 제리온은 요동치는 가슴을 어떻게든 추스르려 애썼다.


“결...계...!”


병사들의 시신은 밖에서도 보일 정도로 대놓고 널브러져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들어오기 전까지 시신은커녕 피 냄새조차 맡질 못했다. 궁전 안에 발을 들여놓은 지금에야 이 모든 게 보인다는 것은, 안에서 밖으로 향하는 모든 정보가 통제되고 있다는 뜻이었다.

제리온은 달달 떨리는 무릎을 애써 가누며 일어났다. 다시 출구로 나가려 하자, 반투명한 막이 어김없이 그를 튕겨냈다. 이래서는 나갈 수도, 밖에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었다. 아마 밖에서 후문을 바라보면 아무 문제없이 고요한 상태일 것이다. 자신이 보았던 것처럼!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대체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 건지에 관심이 쏠렸다. 강력한 결계가 성을 둘러싸고 있고, 입구를 지키던 병사들은 싸늘한 주검이 된 상태다. 그리고 궁전 깊은 곳에서는 근위병들의 고함이 아련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제리온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설마...암살?”


그때, 단검 하나가 날아와 그의 손등에 박혔다.


“으아아악?!!”


“어이쿠, 어린애잖아? 운도 없군. 어쩌자고 이 시간에, 여길 들어오려고 했어?”


제리온은 격통 속에서도 눈동자를 굴려 자신을 공격한 남자의 모습을 확인했다. 두건으로 입을 가리고 가죽 갑옷을 차려입은 남자가 스르릉 검을 뽑고 있는 게 보였다. 그는 근위병과 왕실기사단은 절대 저런 차림을 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크윽...당신 뭐야?!”


“여기 누운 친구들도 그런 말을 하더군. 내가 누군지가 그렇게 중요한가?”


제리온은 입술을 깨물었다. 눈앞의 사내가 병사들을 몰살시킨 장본인이었다. 뒤에는 결계에 가로막혀 있고, 앞은 살인마.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남자는 궁전 안으로 들어온 게 무장도 하지 않은 소년인 것을 보고 히죽 웃었다.


“별 감정은 없다만, 죽어줘야겠다 꼬마야. 지금은 뭐랄까...그렇지. 여기 들어오는 인간은 모두 사형이거든.”


“...너 이 새끼 암살자냐? 여왕을 죽이려고 온 거지?!”


“암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혁명이라는 그럴 듯한 단어가 있잖아?”


“지랄하고 있네!”


갑작스럽게 찾아온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제리온은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조금 전 궁전 안에서 들려온 소리로 보건데 일당이 더 있는 게 분명했다. 아마 눈앞의 사내는 성 안에 들어오는 사람을 처리하는 역할이겠지. 그리고 이 어마어마한 결계, 뛰어난 마법사가 적어도 다섯은 암살에 가담해 있다고 보는 게 맞았다.

그들의 목적은 무엇일까? 정말로 반란인가? 그렇지만 레미나는 악정은커녕 국왕으로서 어떠한 조치조차 취한 적이 없었다. 민심은 누가 봐도 알 정도로 그녀를 향해 있었다. 그녀의 정치 성향으로 보아도 어느 한 당파를 옹호한 전례도 없었다. 그렇다면 대체 왜! 이런 성급한 반란은 반드시 자멸을 가져온다는 걸 모른단 말인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순식간에 달려온 남자가 그를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제리온은 기겁하며 좌측으로 몸을 날렸다.


“윽...!”


제법 침착한 대응이었지만, 운동과는 거리가 먼 그가 남자의 움직임을 따라갈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제리온은 팔꿈치를 베이곤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


“포기해라, 꼬마야. 여기 들어온 이상 살아나가기란 불가능해. 그냥 가만히 있으면 고통 없이 보내주마.”


살을 베이는 감각, 지혈하지 않아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피. 공포로 가슴이 요동쳤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제리온의 머릿속은 궁전 안에 있을 두 사람, 아버지와 레미나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을 구해야 한다. 누구도 아닌 내가!


“씨이발...이게 그렇게 바라마지 않던 실전이라는 거구만.”


그는 재빨리 발을 굴려 남자로부터 몇 보 떨어졌다. 손과 팔꿈치를 당해 왼팔은 너덜너덜한 상태였지만, 아직 오른팔은 멀쩡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거기다 눈앞의 사내를 쓰러뜨리기로 결심하자, 어쩐 일인지 심신이 편안해졌다.

남자가 말했다.


“꼬마야, 무리하지 말라니까. 나도 도망치는 상대를 죽이는 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그러자 제리온은 피식 웃으며 맞받아쳤다.


“도망? 염병하네, 이제부터 네놈 새끼를 태워버릴 생각인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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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3) +3 15.05.03 844 29 18쪽
211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2) +3 15.05.03 763 22 23쪽
210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1) +2 15.05.03 853 23 20쪽
209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7) +5 15.05.03 795 28 25쪽
208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6) +2 15.05.03 894 24 22쪽
207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5) +4 15.05.02 938 29 21쪽
206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4) +1 15.05.02 884 27 20쪽
205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3) +2 15.05.02 690 24 21쪽
204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2) +2 15.05.02 767 24 24쪽
203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1) +2 15.05.02 586 24 22쪽
202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6) +3 15.05.02 695 28 18쪽
201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5) +5 15.04.29 863 24 19쪽
200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4) +1 15.04.29 937 24 26쪽
199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3) +1 15.04.29 789 24 24쪽
198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2) +3 15.04.29 812 26 18쪽
197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1) +1 15.04.29 758 24 17쪽
196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8) +4 15.04.28 904 28 16쪽
195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7) +3 15.04.28 840 25 20쪽
194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6) +3 15.04.27 711 26 19쪽
193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5) +3 15.04.27 756 22 17쪽
192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4) +2 15.04.27 731 22 18쪽
191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3) +1 15.04.27 730 30 18쪽
190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2) +2 15.04.27 758 27 19쪽
189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1) +2 15.04.27 789 31 18쪽
188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完) +1 15.04.27 599 33 18쪽
187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5) +4 15.04.26 733 24 17쪽
186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4) +1 15.04.26 928 28 16쪽
185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3) +2 15.04.26 739 26 20쪽
184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2) +6 15.04.23 779 28 15쪽
183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1) +3 15.04.23 839 26 19쪽
182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2) +2 15.04.23 755 25 17쪽
181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1) +3 15.04.23 767 26 15쪽
180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0) +1 15.04.23 682 25 22쪽
179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9) +3 15.04.22 811 29 16쪽
178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8) +3 15.04.22 846 27 15쪽
177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7) +1 15.04.22 776 29 18쪽
176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6) +1 15.04.22 790 23 18쪽
175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5) +2 15.04.22 765 29 15쪽
174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4) +3 15.04.22 911 25 18쪽
173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3) +5 15.04.21 767 27 16쪽
172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2) +2 15.04.21 922 25 14쪽
171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 +3 15.04.21 805 25 17쪽
170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8) +3 15.04.21 729 24 21쪽
169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7) +2 15.04.21 703 19 15쪽
168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6) +4 15.04.20 750 24 18쪽
167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5) +2 15.04.20 655 20 18쪽
166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4) +1 15.04.20 767 23 17쪽
165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3) +2 15.04.20 738 24 16쪽
164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2) +3 15.04.20 809 20 16쪽
163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1) +1 15.04.20 821 22 21쪽
162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6) +1 15.04.20 830 29 14쪽
161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5) +2 15.04.20 711 25 18쪽
160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4) +3 15.04.19 865 28 18쪽
159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3) +3 15.04.19 946 28 18쪽
158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2) +3 15.04.19 901 26 22쪽
157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1) +5 15.04.19 1,210 46 22쪽
156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10) +6 15.04.18 901 26 21쪽
155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9) +3 15.04.18 772 26 18쪽
154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8) +1 15.04.18 656 24 19쪽
»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7) +2 15.04.18 687 26 18쪽
152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6) +1 15.04.18 748 27 17쪽
151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5) +4 15.04.18 713 23 16쪽
150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4) +1 15.04.18 669 24 17쪽
149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3) +2 15.04.18 754 22 17쪽
148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2) +3 15.04.16 849 29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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