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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연 님의 서재입니다.

람의 계승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저스연
작품등록일 :
2015.03.21 02:01
최근연재일 :
2015.09.01 03:28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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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27 0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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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쪽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2)

DUMMY

마법으로 말미암은 저속낙하 효과 때문인지 먼저 지상에 내려앉은 쪽은 로크였다. 일행은 착륙하자마자 하늘을 살폈다. 루도는 아직도 하늘거리며 내려오는 중이었다. 레미나는 지상에 도착하기 전에 마법 지속시간이 끝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로크가 충분히 고도를 낮춰두었기 때문에 착륙엔 별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너 이 씨발, 이 좆같은 비둘기 새끼, 말 한 번 더럽게 잘 듣네.”


“퀘엑?”


로크는 자신이 저지른 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행이 다 내린 것을 확인하자 바로 날아올랐다. 멀어져가는 녀석의 뒷날개를 보며 디리터는 망연히 어깨를 늘어뜨렸다. 어디까지 날아온 건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


“여기가 어디쯤이지? 아스트리카는 아니겠고...”


“국경이 보였던 걸 생각하면 마드리고 근방쯤 되겠군. 너무 멀리 왔는데.”


로크가 내려앉은 곳은 어느 야산의 중턱 부근으로, 사방에 갈대풀이며 억새가 돋아나 사위를 판가름하기가 어려웠다. 이정표는 말할 것도 없고,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 변변한 오솔길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이칼롯이 하늘에서 봤던 전경을 바탕으로 위치를 추측해봤지만 그 역시 눈대중일 뿐이었다.

그사이 루도는 거의 지면에 도달해 있었다. 하지만 로크가 워낙 멀리 날아와 버린 까닭에 그와 다른 사람들의 거리는 까마득하게 멀었다. 게다가 이런 숲 속에서는 서로의 위치를 가늠하기 어렵기 때문에 다시 합류하기도 문제였다.


“일단은 마을을 찾는 게 좋지 않을까? 루도도 사람 사는 곳으로 올 거 아냐.”


에레이시아의 의견에 반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합류도 합류지만 우선 근처 지리에 대해 파악해야 했고, 최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보를 수집할 필요도 있었다. 일행은 루도가 숲 한가운데 떨어지는 것을 확인한 후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다행히 일행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사람이 지나다니는 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갈대밭을 헤치자 곧장 완만한 경사의 능선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곳에서 일행은 주위의 전경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일단 시야가 뚫리자 목적지를 정하긴 쉬웠다.

멀리 동쪽으로는 대리석 벽돌로 몸을 가린 도시가 한낮의 열기를 반사해 일렁이고 있었다. 그 범상치 않은 규모로 보건대 최전방 군사도시인 마드리고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마드리고에서 난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시선을 옮기다 보면 완만하게 굽어진 활대 모양의 숲이 모습을 드러냈다.

까마득한 옛날에는 이 숲을 빙 둘러 외곽의 황무지를 따라 이동했겠지만, 지금은 중앙을 가로지르는 도로가 뚫린 상태였다. 때문에 근처를 왕래하는 상인이나 군대를 상대로 한 마을이 번성했고, 일행은 그러한 촌락 몇 곳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가장 가까운 마을은 능선을 내려가 5km 정도 걸어가면 나오는 곳으로, 양지바른 곳을 화전으로 태워 그 위에 마을을 세운 모양인지 위에서 내려다보면 숲에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려있는 것 같았다. 규모로 보건대 50~60가구쯤 살고 있을까?

일행은 마을에서 마차라든지, 아니면 조랑말 따위라도 팔고 있기를 기대하면서 능선을 내려갔다. 곳곳에 벌목의 흔적이 보이고, 이어 고구마나 콩 등의 잡곡을 심은 밭두렁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일을 하는 농부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새참을 먹으러 간 것일까, 아니면 급한 볼일이 생긴 것일까.

마을 어귀에 들어섰을 때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일행은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으레 있는 상인들의 호객행위도, 뛰어노는 어린아이들도 보이지 않았다. 정적이 계속되자 휘이잉, 하는 돌개바람 소리가 기분 나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어디선가 산짐승이 가르릉거리는 것 같아 레미나는 연방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들 어디로 간 거지? 우리가 길을 잘못 들었나?”


“폐가는 아닌데...밭에는 곡물도 있고.”


일행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도 마을 중앙으로 향했다. 설마 중심지에까지 아무도 없진 않을 테니까. 그러나 잡화점을 건너, 제분소를 지나, 목조 가옥이 들어선 골목길을 가로질러 이윽고 마을회관 앞에 도착했을 때, 제리온은 입에 물고 있던 생선가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마을 주민들은 모두 그곳에 있었다.


“으, 우웁!”


에레이시아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토악질을 했다. 레미나는 황급히 손을 들어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그녀의 어깨는 사시나무 떨 듯 떨렸고, 금세 눈가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 부상에 골골대던 마리네도 그 처참한 광경에는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싸늘한 한기가 등골을 타고 지나갔다.

마을 주민들은 모두 시체가 되어 있었다. 회관 앞으로 끌려온 후 몰살당한 건지, 죽은 시신을 회관 앞에 쌓아놓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백 명에 가까운 인원이 한데 뒤엉켜 악취를 내뿜고 있었다. 누군가는 목이 없었고, 누군가는 심장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까마귀 한 마리가 시체 눈알을 파먹다가 디리터의 발길질에 황급히 날아올랐다. 대기는 이미 퀴퀴한 피비린내로 진동하고 있었다.


“큭...뭐지 이건.”


이칼롯과 디리터는 재빨리 시신을 수색했다. 주민들은 대부분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상태로, 아직 시신에 온기가 남아있는 사람도 있었다. 때문에 아직 시체가 썩지 않아 악취가 역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백여 구의 시신에서 흘러나온 피비린내는 지금까지 온갖 수라장을 거쳐 온 이칼롯조차도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레미나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누, 누가...이런 짓을...?”


“도적떼는 아닙니다. 이 정도 인원을 몰살할 정도면 적어도...”


“군대...라든지.”


이칼롯과 제리온은 마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근처에 군대가 있다! 그렇다면 누가, 어째서? 폭동을 일으켜도 이렇게 주민 전체를 깡그리 잡아 죽이는 일은 없다. 주동자 몇 명만 처벌하고, 그 외에는 높은 세율을 부과하는 걸로 족한 일이다. 무장봉기일 리도 없다. 죽은 주민들은 갑옷은커녕 변변한 무기 하나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예측은 모두 학살의 주모자가 ‘리크나이츠 군대’일 거라고 가정한 경우다. 때문에 제리온은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했다.


“용병단, 아니면 다른 나라의 군대가 저지른 거야.”


그러자 레미나가 눈물을 삼키며 말했다.


“다른 나라라니, 무슨 소리야? 여긴 분명히 리크나이츠 땅이라고. 너도 아까 동쪽 지평선에 마드리고가 있는 걸 봤잖아?”


“그야 그렇지. 그런데 누님, 한 가지 잊고 있는 거 아뇨? 지금 리크나이츠는 전쟁 중이라고.”


“서, 설마...”


그녀는 경악하며 뒷걸음질쳤다. 아스트리카 군대가 이곳까지 진출했다고 한다면 지금 마주한 상황도 어느 정도 설명이 된다. 하지만 그녀가 놀라는 이유는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스트리카가 여기까지 왔다는 것은 국경요새 마드리고가 함락되었음을 의미하고, 또 마드리고가 함락되었다는 것은...


“백천기사단이 패했다고? 그럴 리가!”


말을 꺼낸 제리온도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아무리 수적으로 열세라 하지만 백천기사단은 총병력 2만의 군세를 자랑한다. 그런 대병력이 전쟁 발발 일주일도 안 되어 패배했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주민들은 일찌감치 피난길에 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미처 그럴 틈도 없이 몰살당했다. 이곳이 마드리고에서 꽤 거리가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스트리카군은 전령보다도 빨리 마을에 도착한 것이 된다. 사실이라면 실로 무시무시한 기동력이었다.

디리터가 말했다.


“어쨌든 여기 있으면 위험해진다는 사실은 틀림없네. 어서 떠나자고.”


“그래. 루도 녀석도 걱정이다.”


일행은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시체만 있는 마을에 더 머무를 이유는 없었다. 그때 레미나가 침통한 얼굴로 말했다.


“그냥...가는 거예요? 하다못해 땅에 묻어주기라도...”


이칼롯이 고개를 저었다.


“한둘이면 모를까, 백 명에 가까운 시신을 다 묻어줄 수는 없습니다. 지금은 한시 빨리 루도를 만나, 이 지역을 벗어나는 게 급선무입니다.”


“그, 그럼 화장이라도 해주는 건 어때요?”


“...연기가 피어오르면 저희 위치가 빤히 노출됩니다. 안타깝지만, 우리가 지금 이 마을에 해줄 수 있는 건 없습니다.”


레미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이 없었다. 이칼롯의 주장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런 이성적인 고민을 떠나 인륜이라는 것에 감정이 쏠린 탓이었다.

남자들은 떠나기에 앞서 마구간이 없나 살펴보았다. 그러나 예상대로 마구간이란 마구간은 전부 텅텅 비어 있었고, 추수한 곡식이나 보화를 털어간 흔적도 곳곳에서 발견됐다. 약탈과 학살이 전쟁 시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하지만 말로 듣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은 차이가 컸다.

남자들이 주변을 조사하는 사이 레미나는 주민들의 시신이 대부분 남성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성의 시체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건 노인이나 어린아이가 전부로, 젊은 여성은 단 한 명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가 이 부분을 언급하자 에레이시아는 이빨을 딱딱 부딪치며 안절부절못했다. 사라진 여성들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엇...?”


그때 레미나가 미세한 진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젠장, 설마?!”


이번에는 디리터와 이칼롯이 문을 박차고 나왔다. 평소라면 그럴 리가 없겠지만, 건물 안에 들어가 있었던 까닭에 레미나보다 이변을 늦게 감지한 것이었다. 칼잡이들은 본능적으로 무기를 뽑았다.

멀리 일행이 들어온 어귀 쪽에서 무언가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오고 있었다. 곧이어 말발굽소리가 요란하게 귓가에 울리기 시작했다. 숫자는 20여 기쯤 될까? 1개 소대 정도의 병력이었다. 마리네가 말했다.


“어, 어떻게 해? 도망치든지, 아니면 건물 안에 숨는 게...”


“아니, 이미 늦었어.”


도망친다고 기병의 추격을 뿌리칠 수도 없거니와, 이제 와서 숨으려 법석을 떨다간 금세 기척을 들킬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만약 기병대가 뒤처리를 위해, 그러니까 마을을 불태우기 위해 파견된 후발대라면 꼼짝없이 타죽을 수도 있었다.


“...슬슬 온다. 여자들은 뒤로 물러서.”


그렇다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이칼롯은 기병대가 다가오는 동안 빠르게 타개책을 고민했다.

현재 일행은 정규군 소속이 아니다. 전에 변장했던 때를 떠올려보자면 일행은 텔아단에서 온 민간인으로, 가짜이긴 하지만 신분증도 엄연히 소지하고 있었다. 이런 경우 군인들은 제3국의 민간인이 무사히 전장을 빠져나갈 수 있게 보호해주는 것이 예의다. 만약 설득이 통한다면 일행은 피 한 방울 없이 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위험요소도 존재했다. 첫째는 일행이 미처 변장할 시간을 갖지 못했다는 것. 그러나 이쪽은 젊은 여성이 둘이나 되고, 그녀들이 다행히도 민간인 복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부분은 어찌어찌 넘어갈 수 있었다.

둘째는 상대가 민간인 학살을 전문으로 하는 부대였을 경우다. 설마 중립국의 백성까지 죽이진 않겠지만, 전쟁이라는 게 광기에 이끌리는 수도 있는 법이니 결코 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이 경우에는 귀족은 죽이지 않는다는, 즉 루도의 가짜 남작영애 신분이 큰 도움이 될 터인데, 그가 이 자리에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루도의 역할을 대신해야 하는데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마리네는 여장은커녕 부상 때문에 깁스를 한 상태였고, 에레이시아는 귀족 흉내를 내기엔 행색이 너무 남루했다. 레미나가 가장 적합한 인물이긴 한데, 그녀는 변장 시 역할분담에 대해 전혀 들은 바가 없었다. 미리 입을 맞춰놓지 않은지라 한 마디라도 어긋난다면 그 즉시 기병대의 의심을 살 게 뻔했다.

제리온이 손을 뒤로 숨기며 말했다.


“대장 나리, 싸우려면 빨리 말해. 포위당하면 끝장이라고.”


그의 말대로 또 하나의 방법은 맞서 싸워 물리치는 경우였다. 기병대의 숫자는 정확히 19명으로, 일행의 기량을 고려하면 해보지 못할 것도 없었다. 마리네가 부상당해있긴 하나, 기습적으로 제리온이 마법을 날리고 그 틈을 이칼롯과 디리터가 파고든다면 빠르게 승부가 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방법의 경우 전원을 몰살시켜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만약 한 명이라도 달아난다면 그 즉시 본대가 움직일 테고, 그건 루도를 찾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 지역에 머물러야 하는 일행에게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단순히 싸워 이긴다면 모를까, 19명이라는 숫자를, 그것도 기병대를 일시에 섬멸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니...기다려.”


“기다리라고? 지금 우린 짓밟히기 일보 직전이야.”


“우린 공격하지도, 도망가지도 않았어. 그러니 저쪽에서도 우선 대화를 시도하려 할 거다. 게다가 이쪽은 공주님도 있어. 신중하게 생각해.”


“으음...”


하지만 명령을 내린 그도 마지막 순간까지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자신의 판단이 빗나갔다면, 그들이 단순한 학살자에 불과하다면! 동료들의 얼굴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검을 쥔 손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디리터와 눈이 마주치자 자연스레 그의 의사가 느껴졌다.


-아직 늦지 않았어. 명령을 내려!


두두두두두...말발굽 소리가 끊임없이 그의 결정을 재촉했다. 지면의 울림은 마치 세상 전체가 떨리는 것 같이 거대하게 다가왔다. 식은땀 한 방울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공격해야 한다, 기다려야 한다, 공격해야 한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이칼롯과 제리온, 디리터와 마리네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수십 번이 넘게 의사를 교환했다. 그리고 선두에 선 기병의 창이 너끈히 일행의 가슴을 꿰뚫을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왔을 때, 이칼롯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말했다.


-검을 내려.


검은색 갑주를 입은 기사들이 순식간에 일행을 에워쌌다. 그중 한 기사가 손짓하자 기마대는 일제히 일행에게 창을 겨누었다. 완벽한 포위진형. 만약 이칼롯의 판단이 틀렸다면 일행은 꼼짝없이 목숨을 잃을 판이었다. 그는 텔슈피드의 손잡이를 꼭 쥔 채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제발 자신이 틀리지 않았기를.


“이 구역은 아스트리카 왕국의 지배하에 있다. 무기를 버리고 소속과 신분을 밝히도록 하라.”


다행히 기사들은 문답무용으로 공격해 오진 않았다. 일단 대화의 조짐이 보이자 이칼롯은 한결 평정을 되찾았다. 그는 디리터와 마리네에게 검을 집어넣으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말을 걸어온 기사가 창끝을 바로잡으며 말했다.


“아니, 나는 무기를 땅에 내려놓으라고 말했지, 칼집에 집어넣으라고는 하지 않았다.”


“...물론 귀공의 명을 따라야 마땅하겠지만, 우리는 여기 아가씨의 신변을 지키기 위해 고용된 몸. 목에 칼이 들어와도 무장을 포기할 수는 없소. 하지만 내 맹세컨대, 당신네들이 먼저 공격하지 않는 한 이곳에서 교전이 일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오.”


기사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칼롯의 작전이 완벽하게 들어간 것이었다. 그는 무장을 유지하는 한편 이쪽에 높은 신분의 인물이 있음을 언급, 기병대가 위축되도록 교묘하게 대화를 이끌었다. 기사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아가씨’라 불릴 만한 인물, 레미나와 에레이시아에게 향했다. 이칼롯이 설정한 ‘아가씨’는 물론 레미나였다.

문제는 그녀와 미리 입을 맞춰놓지 못했다는 데에 있었다. 일행은 제발 그녀가 입을 꼭꼭 다물고 있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기사가 말했다.


“좋다. 대신 허튼수작을 부리면 그 즉시 목이 꿰뚫릴 것이다. 자, 소속과 신분을 밝히도록.”


“우리는 텔아단에서 온 여행자들이오. 지금까지 류이덴사에 머물고 있었는데,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여기 계신 산드로 백작의 영애를 수행해 서둘러 본국으로 돌아가는 중이었소.”


다행히 일행 중 이칼롯의 거짓말에 동요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가짜 남작이 아닌, 진짜로 존재하는 백작의 이름을 들어 기사들을 압박했다. 웬만한 지위의 귀족이 아니면 그들이 꼼짝도 하지 않을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말을 건넨 기사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뤼제폰 백국의 왕인 산드로 백작을 말한 거요? 이거 크나큰 결례를 범했군.”


기사는 서둘러 투구를 벗어 예를 표했다. 하지만 여전히 겨눈 창은 그대로였다. 무작정 이칼롯의 말을 믿기엔 그쪽도 의심스러운 부분이 없지 않기 때문이었다. 맨 얼굴을 드러낸 기사가 말했다.


“나는 흑연기사단 소속 제3직영대대 5중대의 켈가 아드리아노요. 산드로 백작의 영애 분은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일부러 텔아단의 고위인사를 내세운 건데, 상대는 그럼에도 집요하게 신분을 캐물었다. 당연히 산드로 백작영애의 이름 따윈 몰랐다. 아니, 그전에 백작에게 딸이 있는지조차 의문이었다.

이칼롯은 침착하게 머리를 굴렸다. 뭐라고 말해야 매끄럽게 넘어갈까? 켈가는 백작영애의 이름을 알고 있는 걸까? 아니, 애초에 딸이 없는 걸 알면서도 유도질문을 던진 것은 아닐까?


“이 분은...”


“아니, 난 그쪽에게 묻지 않았소. 레이디, 무례라는 것을 알지만 잠시만 시간을 내주십시오.”


목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이젠 꼼짝없이 레미나에게 모든 것을 맡겨야 할 형편이었다. 그녀가 이칼롯이 던져놓은 정보를 어디까지 이해하고 있을 런지, 산드로 백작의 영애가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는 걸 아는 건지, 그렇다면 얼마만큼 태연하게 거짓말을 할 수 있을지!

만약 그녀가 자신의 배역을 이해하지 못했을 경우를, 그래서 자신의 본명을 이야기하는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 일행은 조심스럽게 공격을 준비했다. 죽을 때 죽더라도 대여섯 명 쯤 함께 데려가자는 심산이었다.

그때, 잠자코 있던 에레이시아가 앞으로 나섰다.


“아가씨, 굴욕이라는 걸 알지만, 지금은 잠자코 아가씨의 신분을 말씀해주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아가씨가 산드로 백작님의 딸이라는 것만 확인되면 저들도 잠자코 보내줄 테지요.”


그것은 이칼롯도 예상하지 못한 놀라운 기지였다. 에레이시아는 레미나가 맡은 배역을 확실히 주지시켜주는 한편, 자연스럽게 그녀의 눈을 바라보아 의사를 전달했다.


-제발, 공주님. 당신에게 우리 모두의 목숨이 달렸어요.


그녀의 간절한 기원이 전해졌기를. 그리고 기병대가 속아 넘어가주기를.

레미나는 고개를 끄덕인다든가 하는 긍정의 뜻은 전혀 내비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그 큰 눈을 몇 번 깜박이다가, 켈가가 놀라 창을 치울 때까지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는 켈가를 올려다보지도, 그렇다고 뒤돌아 일행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전방에, 정확히는 쌓여 있는 주민들의 시신 더미에 고정됐다.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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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2) +2 15.05.05 770 24 18쪽
219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1) +4 15.05.05 685 23 15쪽
218 람의 계승자 - ep.5 - 사냥감의 반전(4) +2 15.05.05 921 24 23쪽
217 람의 계승자 - ep.5 - 사냥감의 반전(3) +3 15.05.04 935 22 23쪽
216 람의 계승자 - ep.5 - 사냥감의 반전(2) +2 15.05.04 867 22 21쪽
215 람의 계승자 - ep.5 - 사냥감의 반전(1) +1 15.05.04 774 24 20쪽
214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5) +2 15.05.04 709 24 15쪽
213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4) +2 15.05.04 720 25 23쪽
212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3) +3 15.05.03 844 29 18쪽
211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2) +3 15.05.03 763 22 23쪽
210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1) +2 15.05.03 853 23 20쪽
209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7) +5 15.05.03 795 28 25쪽
208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6) +2 15.05.03 894 24 22쪽
207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5) +4 15.05.02 937 29 21쪽
206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4) +1 15.05.02 884 27 20쪽
205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3) +2 15.05.02 689 24 21쪽
204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2) +2 15.05.02 767 24 24쪽
203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1) +2 15.05.02 585 24 22쪽
202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6) +3 15.05.02 695 28 18쪽
201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5) +5 15.04.29 863 24 19쪽
200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4) +1 15.04.29 937 24 26쪽
199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3) +1 15.04.29 789 24 24쪽
198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2) +3 15.04.29 812 26 18쪽
197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1) +1 15.04.29 758 24 17쪽
196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8) +4 15.04.28 904 28 16쪽
195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7) +3 15.04.28 840 25 20쪽
194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6) +3 15.04.27 711 26 19쪽
193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5) +3 15.04.27 756 22 17쪽
192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4) +2 15.04.27 731 22 18쪽
191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3) +1 15.04.27 730 30 18쪽
»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2) +2 15.04.27 758 27 19쪽
189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1) +2 15.04.27 789 31 18쪽
188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完) +1 15.04.27 599 33 18쪽
187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5) +4 15.04.26 733 24 17쪽
186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4) +1 15.04.26 928 28 16쪽
185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3) +2 15.04.26 739 26 20쪽
184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2) +6 15.04.23 779 28 15쪽
183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1) +3 15.04.23 839 26 19쪽
182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2) +2 15.04.23 755 25 17쪽
181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1) +3 15.04.23 767 26 15쪽
180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0) +1 15.04.23 682 25 22쪽
179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9) +3 15.04.22 811 29 16쪽
178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8) +3 15.04.22 846 27 15쪽
177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7) +1 15.04.22 776 29 18쪽
176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6) +1 15.04.22 790 23 18쪽
175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5) +2 15.04.22 765 29 15쪽
174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4) +3 15.04.22 911 25 18쪽
173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3) +5 15.04.21 767 27 16쪽
172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2) +2 15.04.21 922 25 14쪽
171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 +3 15.04.21 805 25 17쪽
170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8) +3 15.04.21 729 24 21쪽
169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7) +2 15.04.21 703 19 15쪽
168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6) +4 15.04.20 750 24 18쪽
167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5) +2 15.04.20 655 20 18쪽
166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4) +1 15.04.20 767 23 17쪽
165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3) +2 15.04.20 738 24 16쪽
164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2) +3 15.04.20 809 20 16쪽
163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1) +1 15.04.20 821 22 21쪽
162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6) +1 15.04.20 830 29 14쪽
161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5) +2 15.04.20 711 25 18쪽
160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4) +3 15.04.19 865 28 18쪽
159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3) +3 15.04.19 946 28 18쪽
158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2) +3 15.04.19 901 26 22쪽
157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1) +5 15.04.19 1,210 46 22쪽
156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10) +6 15.04.18 901 26 21쪽
155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9) +3 15.04.18 772 26 18쪽
154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8) +1 15.04.18 656 24 19쪽
153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7) +2 15.04.18 686 26 18쪽
152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6) +1 15.04.18 748 27 17쪽
151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5) +4 15.04.18 713 23 16쪽
150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4) +1 15.04.18 668 24 17쪽
149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3) +2 15.04.18 754 22 17쪽
148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2) +3 15.04.16 849 29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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