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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연 님의 서재입니다.

람의 계승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저스연
작품등록일 :
2015.03.21 02:01
최근연재일 :
2015.09.01 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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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27 0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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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4)

DUMMY

“음? 방금 저쪽에서 무슨 소리 나지 않았어?”


그러나 금방이라도 칼부림을 벌일 것 같았던 둘의 야합은 인기척을 느낀 병사 하나가 뒤를 돌아보면서 즉시 끝을 맺었다. 병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창고 쪽을 향하자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몸을 숙이고 숨을 들이마셨다. 상황이 아무리 첩첩산중이라지만, 흑연기사단에 잡힌다는 것만큼 최악의 경우도 없었다.


“꺄아악!! 제발, 이제 그만 해요!”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잡아온 처녀 하나가 비명을 지르자 병사들은 바로 경계를 풀었다. 꿩 같은 산짐승이 소음을 일으킨 거라 판단한 것이었다. 다시 잔인한 능욕이 펼쳐지고, 짧은 정적은 즉시 여인들의 비명으로 덧씌워졌다.


“.....”


둘은 절체절명의 고비가 넘어가자 안도의 한숨을 토하고는, 맞잡은 서로의 오른손을 쳐다본 뒤, 다시 무기를 꺼내려고 왼손을 버둥거렸다.


“으익, 으익! 썅.”


“윽, 씨발. 너 이, 씨발.”


하지만 다리를 쭉 뻗기도 어려운 비좁은 상자 안이었다. 위첼의 글레이브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루도는 자꾸 칼이 판자 틈에 걸려 뽑을 수가 없었다. 행여 무리해서 무기를 뽑으려 하면 소음이 나 그 즉시 흑연기사단에게 발각될지도 몰랐다. 이렇다 보니 둘은 대단히 소극적으로, 그리고 여전히 오른손은 꽉 맞잡은 채 한동안 공방을 벌였다. 아마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남자 둘이 손장난을 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렇게 1분여 가량 지났을까, 이대로 있다간 들키는 건 시간문제라 생각했는지 위첼이 먼저 타협을 제시했다.


“야, 잠깐. 잠깐 멈춰봐!”


“잠깐은 얼어 죽을.”


“아 씨발.”


다시 그렇게 30초가 흘렀다. 하지만 이쯤 되자 루도도 타협안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계속 되는 소음에 병사들이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다. 투닥거림이 가라앉자 위첼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잠깐 멈추라곳! 너도 흑연기사단에게 들키면 작살나는 거 아니었어?”


“그래서 뭐 어쩌라고.”


“휴전, 휴전하자. 이딴 곳에서 죽는 건 사양이라고.”


루도는 고민에 빠졌다. 이성은 물론 휴전만이 살 길이라 말하고 있었다. 여기서 아옹다옹 해봐야 남는 건 개죽음뿐이다. 안개송곳니의 완전한 궤멸이 목표인 루도에게 위첼 같은 말단과 함께 죽는 건 영 손해 보는 장사다. 이러니저러니 결국 여기선 다툼을 멈추는 것만이 살 길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안개송곳니 단원이다. 로샤단을 습격한 일당을 눈앞에 두고도 손 놓고 있어야 한다는 게 그로서는 탐탁지가 않았다.

그렇게 몇 번을 고민했을까. 결국 루도는 이성을 따르는 쪽으로 결론 내렸다. 그는 입을 비죽이며 말했다.


“손 놔라, 새끼야.”


“확실히 대답을 하라고. 손 놔주면 바로 칼을 뽑으려는 속셈이지?”


“알았으니까 놓으라고! 휴전인지 어물전인지...”


“한 가지 확실히 해두자면 구두로 하는 계약은 그 강제성이 약한 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네가 명예를 아는 인간이라면 지금 이 상황에...”


“거 자식 말 많네.”


루도는 짜증스럽게 손을 뺐다. 그의 돌발적인 반응에 위첼은 흠칫 놀랐지만, 그가 공격하지 않는 것을 보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불편한 적과의 동침이 시작됐다. 비좁은 상자 속, 둘은 각각 양쪽 끝 모서리에 기대고 앉았다. 그러다 행여 발이라도 닿을라치면 둘은 갖은 욕설을 퍼부으며 상대를 압박하곤 했다. 한눈을 판 사이 공격해올 수도 있었기 때문에 서로가 보이도록 짚더미는 치워두었다.

아마 위첼도 마찬가지겠지만, 루도는 이 자리가 불편해 견딜 수가 없었다. 이 드넓은 대륙에, 하필 돌아오자마자 만난 게 안개송곳니라니. 어이가 없어 헛웃음만 나왔다. 빨리 이대로 창고를 빠져나가 위첼을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의 바람과는 달리, 야영지로 합류하는 병사들은 점점 많아져만 갔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위첼이 먼저 입을 열었다. 물론 루도에게 대화를 청한 건 아니었고, 그냥 신세 한탄 조의 중얼거림이었다.


“쳇, 바질리스크의 독에 맞고도 살아남다니, 재수도 더럽게 좋네.”


“그래, 살아남으셨다 이 새끼야. 니들 전부 쓸어버릴 때까진 내가 눈을 못 감지.”


최대한 평정을 되찾으려는 위첼과 달리, 루도의 언행에는 말끝마다 독기가 서려 있었다. 하지만 적나라한 적개심은 오히려 위첼의 마음을 놓이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 무서운 건 표정을 숨기고 비책을 강구하는 경우인데, 루도는 아무래도 그런 쪽으로는 서툴렀다. 그리고 말을 매섭게 했다 뿐이지 그도 위첼과 한 약속은 성실히 지키고 있었다.

위첼이 말했다.


“꼴에 신의 아이라고...그런데 아직 각성한 거 같진 않군.”


“입조심해라. 내가 각성하면 니들부터 조질 거란 생각은 안 해봤냐?”


“흥, 에센스도 없는 신의 아이 따위. 그리고 넌 꼬락서니를 보니 각성해보기도 전에 뒈질 상이다.”


“그건 내가 할 말이지. 내가 다른 건 몰라도 너는 이긴다. 네가 안개송곳니에서 제일 약하지?”


오랫동안 제리온과 함께 지낸 탓일까. 빈정거리는 말투가 원래부터 써왔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위첼도 이번에는 자존심이 많이 상한 모양이었다. 비아냥을 듣자 그는 어깨를 움찔거리고, 어금니를 깨물다가, 이내 한숨을 쉬고는 다시 판자에 몸을 기대었다. 하지만 그 일련의 행동은 그 또한 냉정한 성격이 아님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여기서 나가자마자 네 목을 날려주마.”


“웃기고 있네. 눈이나 뜨고 얘기해, 자식아.”


“윽...! 이 새끼가..”


위첼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의 눈은 옆으로 쭉 째진, 소위 말하는 뱁새눈이었다. 루도는 이를 노리고 인신공격에 들어갔고, 안 그래도 외모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던 그로서는 심사가 뒤틀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위첼은 발끈했다고는 하나 바로 인신공격으로 반격에 들어가진 않았다. 그는 몇 번 이를 갈다가 건물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이런 유치한 말싸움은 시간낭비, 체력낭비라고 여겼다.


“품위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군. 로시느님이랑은 완전 딴판이야.”


그러자 루도의 눈이 일순 번쩍였다.


“로시느? 아, 혹시 걔가 아반케즈의 아이냐? 좋은 정보 알려줘서 고맙다.”


“....”


그때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자잘한 비명과 함성은 줄곧 들려오던 것이었지만, 한 여인의 자지러지는 단말마는 소음 속에서도 확실히 고막을 찢었다. 서로 으르렁거리던 두 사람도 그 순간만은 숨죽이고 밖의 상황을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읏...저 개새끼들...”


전라의 여성이 배에 꽂힌 창을 뽑으려 버둥거렸다. 그녀는 겁탈당하는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저항했는데, 여기에 짜증을 느낀 병사가 그녀의 복부에 창을 쑤셔 넣은 것이었다.

그 갑작스런 참극에 여성들은 물론 같이 있던 병사들마저도 말을 잃었다. 창에 찔린 여인은 그렇게 한동안 몸부림치다가, 결국 숨이 멎은 듯 땅바닥에 축 늘어졌다. 창을 찌른 병사는 죽은 여인의 얼굴을 툭툭 발로 찼다. 그는 한껏 기분이 고조되어서는 겁에 질린 여자들에게 말했다.


“개년들아 똑똑히 봤지? 우리한테 반항하면 이렇게 되는 거라고, 와하하!”


그제야 다른 병사들도 어색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 사이에선 그런 야만성이 호방함과 직결되는 모양이었다. 공포의 효과는 확실해서, 그 뒤로 잡혀온 여성들은 흐느끼거나 이따금 신음소리만 낼뿐 더 이상 저항하기를 포기했다.

위첼이 길게 날숨을 내뱉었다. 그의 호흡은 루도와 다름없이 불규칙했다. 왼손에 쥔 글레이브의 손잡이가 가늘게 떨렸다. 그러나 그 순간 그의 창끝은 루도가 아닌, 흑연기사단을 향하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구더기보다도 못한 족속들. 저래놓고 귀향해서는 국가를 위해 싸웠다며 무용담을 늘어놓겠지. 개 같은 세상이야.”


“...누가 아니래. 저런 새끼들을 남편이나 아버지라고 부를 아스트리카 국민들이 불쌍하다.”


루도는 스스로 말하고도 놀랐다. 자기도 모르게 위첼에게 동조해 혼잣말을 늘어놓은 것이다. 위첼도 루도가 그런 반응을 보여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그로서는 이례적으로 눈을 크게 떴다. 루도는 갑자기 무안해져서 작게 헛기침을 내뱉었다.


“뭐 새꺄? 난 혼잣말도 못하냐?”


“누가 뭐랬냐.”


둘은 다시 툴툴거리며 대치상황에 들어갔다. 하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태도가 조금 전과는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자신은 부정했지만, 흑연기사단의 작태를 보며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적어도 이 녀석은 바깥의 군인들보다는 낫겠지, 하는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무기를 쥔 손에 힘이 풀렸다.

긴장이 풀어지자 엉거주춤한 자세가 영 불편하게 다가왔다. 위첼은 아예 글레이브에서 손을 떼고 팔짱을 꼈고, 루도도 그걸 보곤 편하게 다리를 폈다. 하지만 아예 전투태세에서 벗어난 위첼과는 달리 루도는 허리춤에 가져간 손을 여전히 풀지 않고 있었다. 그건 서로를 인식하는 태도 때문이었지만, 그의 느슨한 경계에 루도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충 틈을 봐서 죽여버리려고 했는데, 상대가 이렇게 나오니 자신이 악인이 된 기분이었다.

알룬도가 말했던 대로 위첼은 확실히 다른 안개송곳니 단원과는 성향을 달리하고 있었다.

루도가 말했다.


“근데 넌 왜 여기 있는 거냐? 난 재수가 없어서 그랬다 치고.”


그러자 위첼은 콧방귀를 뀌며 답했다.


“네놈한테 말해줄 의무는 없어.”


“...그러시겠지. 빌어먹을 땅강아지야.”


창고 안은 썩은 풀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대화가 끊기니 자연스레 후각과 청각이 예민해졌는데, 진한 퇴비 냄새는 역한 수준은 아니라 할지라도 계속 맡고 있자니 목이 갑갑해졌다. 물 한 모금 생각이 간절했지만 루도는 수통을 꺼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위첼이 그럴 생각이 없다 하더라도, 손을 놀렸다간 방심했다는 인상을 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두어 시간이 지났다. 밖에서는 속속 합류부대가 도착하여 금세 대대급 병력으로 불어났다. 잡혀온 부녀자들은 그동안 휴식시간도 없이 계속 능욕당했고, 결국 몇몇은 탈진해서, 몇몇은 혀를 깨물어 죽고 말았다. 병사들은 죽은 시신을 풀숲에 아무렇지도 않게 던져두었다. 그중 하나는 계집애들이 전부 죽으면 한꺼번에 태워버리자고 말했는데, 루도와 위첼은 그 잔악한 발언에 몸서리를 쳤다.

다시 30분이 지났다. 새로운 부대가 도착했을 때 루도는 자기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 잡아야만 했다. 지금까지 보아온 부대가 장비도 제각각에 규율도 엉망이었다면, 새로 도착한 부대는 척 봐도 정예부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갑옷은 모두 검은색 플레이트로 통일했고, 제식은 자로 잰 것처럼 척척 맞아떨어졌다. 투구와 갑옷으로 몸을 가리고, 오와 열을 반듯하게 맞춘 그 모습은 생텀가드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하지만 통일된 무장 내에서도 차이는 존재했다. 부대는 백여 명으로 이루어진 기병대였는데, 그중 삼십은 붉은색 휘장 망토를 등에 걸치고 있었다. 그들은 랜스를 수직으로 세운 채 한 남자를 호위하는 중이었다.

루도는 그 남자가 흑연기사단의 지휘관이라는 걸 단박에 알아차렸다. 그는 마흔 줄에 들어선 중년 신사로, 적갈색 곱슬머리를 멋나게 기른 미남이었다. 타고 있는 말도 그의 머리색과 같은 붉은색이었지만, 그가 착용한 플레이트는 다른 어떤 기사의 것보다도 칠흑에 가까웠다.

위첼은 그 남자를 확인하곤 낮게 신음을 흘렸다.


“스벤달 오빌리크...”


위첼은 그 남자를 향한 적개심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루도는 그의 살기에 의아해했지만, 곧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스벤달은 쌓여 있는 시체와 그 한편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상을 보곤 히죽 웃었다.


“좋아. 재미있게 즐기고 있군. 부관, 현재 상황을 보고하도록.”


그러자 한 기사가 나와 서류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는 각 부대에서 작성된 교전보고서가 들려 있었다.


“옛, 장군. 1직영대대와 4직영대대가 오늘 새벽 백천기사단의 잔당을 급습, 400여 명을 사살했습니다. 그 와중에 포로 157명을 잡았고, 귀족 19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처형시켰습니다. 현재 백천기사단은 서쪽으로 후퇴한 듯 보입니다. 2, 3직영대대는 마드리고에 남아있는데 별다른 탈환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흠, 나쁘지 않군. 별동대는?”


“별동대...말씀이십니까? 현재 국경 부근을 돌며 민간인 마을을 초토화하고 있습니다. 장군이 명하신 대로 10~30대 여자를 제외하곤 전부 죽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잡은 여자들은 대략 1200명 정도로...”


‘뭐?!’


루도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껏 보아온 게 전쟁의 광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지휘부에서 직접 내린 명령 때문이었다니! 공포와 분노가 동시에 느껴졌다. 무엇을 위한 작전인가, 아니, 무엇을 얻는다고 한들 이런 행위가 용서될 수 있단 말인가. 스벤달 오빌리크라는 이름은 루도의 머릿속에 똑똑히 각인되었다.


“...이상 보고를 마칩니다. 장군, 잡은 포로들은 어떻게 할까요?”


“포로?”


“오늘 붙잡은 백천기사단의 기사들 말입니다. 일단 이곳 임시수용소에 가둬놓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귀족으로, 자신의 몸값을 지불할 능력이 됩니다.”


스벤달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 미소는 어린 시절 자신을 납치했던 납치범의 그것과 너무나 흡사해서, 루도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무장은 해제했나?”


“예? 일단 무기만...”


“좋아. 갑옷은 계속 입혀두도록. 하얀 갑옷이야말로 백천기사단의 상징이니까 말이야.”


“장군, 외람되오나 무슨 말씀이신지...”


비좁은 판자 사이로 보는 세상은 이미 지옥으로 변해있었다. 그리고 그 구덩이 한가운데 스벤달 오빌리크가 있었다. 그는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보다도 가벼이 여기는 인물이었다. 손가락만 튕기면 목 하나가 날아간다고 믿을 정도로. 그는 이 전쟁의 최선봉에 있었다.


“마드리고는 점령했나 하나 아직 백천기사단의 주력은 건재하다. 내일, 아니면 모레쯤이겠지. 주력과 대치했을 때 포로들을 공개처형하도록. 적의 사기를 깎는 데엔 최고의 재료지.”


“.....”


심드렁하게 보고하던 부관도 이번만큼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민간인은 물론이거니와 귀족마저도 전쟁의 도구로 사용한단 말인가. 스벤달은 전후의 이해관계는 생각지도 않고, 마치 리크나이츠라는 한 나라의 말살을 목표로 달리는 것 같았다.

그때 후미에서 한 남자가 말을 타고 왔다. 그는 무장도 보잘 것 없었지만 수십의 친위대를 제치고 당당히 스벤달의 오른쪽에 섰다. 루도는 그 남자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제랄드!’


제랄드는 강간하는 병사들을 보며 애매한 미소를 흘렸다.


“이야-. 초토화 작전이란 정말 대단하군요. 용병 생활을 오래 했지만 이런 건 정말 처음입니다.”


스벤달이 말했다.


“이제 이곳은 아스트리카의 영토가 될 것이다. 리크나이츠 국민은 필요 없어.”


“음, 민간인에겐 국적이 뭐가 되든지 별로 상관없는 일일 텐데요. 차라리 살려둬서 세금을 받아내는 게...”


“네놈의 알량한 충고 따윈 필요 없다. 넌 지금처럼 이 나라의 지리정보만 토해내면 되는 일이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어째서인지 그는 흑연기사단의 개가 되어 있었다. 흑연기사단이든 안개송곳니든 어차피 적이라는 사실은 변함없지만, 루도는 그제야 왜 위첼이 이런 타지까지 와서 잠복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슬쩍 곁눈질로 보자 위첼은 예상대로 이를 빠득빠득 갈며 분노를 드러냈다.

루도는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뭐야, 저 인간 너네 편 아니었냐? 왜 저기 붙어있냐. 설마 배신한 건가?”


“아직은 아니지만...엇, 뭐라고? 너 제랄드를 알고 있는 거야?”


그의 반응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역동적이었다. 추측이 들어맞자 루도는 속으로 쾌재를 질렀다.


“당연하지. 직접 얘기까지 해봤는데. 지난번에는 내가 각성하면 안개송곳니를 배신하겠다는 말까지 했었다니까?”


위첼은 몇 번 눈을 껌벅거리다가 흥미 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루도가 한 말이 전부 허세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쳇, 네놈 말을 믿을까 보냐. 원래 아케니온 따위 안중에도 없었어. 시궁창에서 굴러다니던 용병 놈들.”


하지만 그가 뭐라 생각하든, 지금 이곳에 와있는 게 제랄드 때문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루도는 처음에는 그가 스벤달의 목을 치기 위해 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었는데, 그건 아무래도 가능성이 낮았다. 그런 초특급 임무에 위첼 같은 말단을 보낼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럼 역시 아케니온과 연관된 일일 터인데, 제랄드를 죽이거나, 아니면 그를 감시하러 왔다고 추측해볼 수 있었다. 전자는 물론 아케니온이 완벽히 배신을 한 경우다. 그렇다면 후자는? 위첼을 보냈다는 건 레이시도 제랄드를 견제한다는 뜻이었다. 그가 아직 안개송곳니의 편이라고 생각한다면, 스벤달과의 연계는 추후 브리토리스의 남진정책에 있어 조력자를 포섭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사단이라는 존재는 안개송곳니의 전력을 상회해버린다. 이쪽이 수십 규모라면 기사단은 단숨에 만 단위로 올라간다. 기사단이 역으로 제랄드를 포섭해 브리토리스로 진출하는 경우도 꽤 가능성이 있었다.

그럴 경우에는 아반케즈의 아이가 문제가 되겠지만, 혹시 아는가? 아스트리카 쪽에서도 신의 아이를 찾아냈을지. 베릴의 아이는 분명 동쪽 땅에 있다고 했다.

여기까지의 추리는 물 흐르듯이 단 몇 초 만에 진행되었다. 루도는 자신이 늘어놓은 가설이 꽤 그럴듯하다는 걸 알고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호오...나 꽤 머리 좋은 걸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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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 람의 계승자 - ep.5 - 사냥감의 반전(2) +2 15.05.04 866 22 21쪽
215 람의 계승자 - ep.5 - 사냥감의 반전(1) +1 15.05.04 774 24 20쪽
214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5) +2 15.05.04 709 24 15쪽
213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4) +2 15.05.04 720 25 23쪽
212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3) +3 15.05.03 844 29 18쪽
211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2) +3 15.05.03 763 22 23쪽
210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1) +2 15.05.03 853 23 20쪽
209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7) +5 15.05.03 795 28 25쪽
208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6) +2 15.05.03 894 24 22쪽
207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5) +4 15.05.02 937 29 21쪽
206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4) +1 15.05.02 884 27 20쪽
205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3) +2 15.05.02 689 24 21쪽
204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2) +2 15.05.02 766 24 24쪽
203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1) +2 15.05.02 585 24 22쪽
202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6) +3 15.05.02 695 28 18쪽
201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5) +5 15.04.29 863 24 19쪽
200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4) +1 15.04.29 937 24 26쪽
199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3) +1 15.04.29 789 24 24쪽
198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2) +3 15.04.29 812 26 18쪽
197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1) +1 15.04.29 758 24 17쪽
196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8) +4 15.04.28 904 28 16쪽
195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7) +3 15.04.28 839 25 20쪽
194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6) +3 15.04.27 711 26 19쪽
193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5) +3 15.04.27 756 22 17쪽
»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4) +2 15.04.27 731 22 18쪽
191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3) +1 15.04.27 730 30 18쪽
190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2) +2 15.04.27 757 27 19쪽
189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1) +2 15.04.27 789 31 18쪽
188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完) +1 15.04.27 598 33 18쪽
187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5) +4 15.04.26 733 24 17쪽
186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4) +1 15.04.26 928 28 16쪽
185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3) +2 15.04.26 739 26 20쪽
184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2) +6 15.04.23 779 28 15쪽
183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1) +3 15.04.23 839 26 19쪽
182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2) +2 15.04.23 755 25 17쪽
181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1) +3 15.04.23 767 26 15쪽
180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0) +1 15.04.23 682 25 22쪽
179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9) +3 15.04.22 811 29 16쪽
178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8) +3 15.04.22 846 27 15쪽
177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7) +1 15.04.22 776 29 18쪽
176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6) +1 15.04.22 790 23 18쪽
175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5) +2 15.04.22 764 29 15쪽
174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4) +3 15.04.22 911 25 18쪽
173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3) +5 15.04.21 767 27 16쪽
172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2) +2 15.04.21 921 25 14쪽
171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 +3 15.04.21 805 25 17쪽
170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8) +3 15.04.21 729 24 21쪽
169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7) +2 15.04.21 702 19 15쪽
168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6) +4 15.04.20 750 24 18쪽
167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5) +2 15.04.20 655 20 18쪽
166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4) +1 15.04.20 767 23 17쪽
165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3) +2 15.04.20 738 24 16쪽
164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2) +3 15.04.20 809 20 16쪽
163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1) +1 15.04.20 821 22 21쪽
162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6) +1 15.04.20 829 29 14쪽
161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5) +2 15.04.20 711 25 18쪽
160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4) +3 15.04.19 865 28 18쪽
159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3) +3 15.04.19 946 28 18쪽
158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2) +3 15.04.19 901 26 22쪽
157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1) +5 15.04.19 1,210 46 22쪽
156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10) +6 15.04.18 901 26 21쪽
155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9) +3 15.04.18 772 26 18쪽
154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8) +1 15.04.18 656 24 19쪽
153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7) +2 15.04.18 686 26 18쪽
152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6) +1 15.04.18 748 27 17쪽
151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5) +4 15.04.18 712 23 16쪽
150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4) +1 15.04.18 668 24 17쪽
149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3) +2 15.04.18 753 22 17쪽
148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2) +3 15.04.16 848 29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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