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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연 님의 서재입니다.

람의 계승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저스연
작품등록일 :
2015.03.21 02:01
최근연재일 :
2015.09.01 03:28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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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18 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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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6)

DUMMY

그날 이후로 제리온은 늘 레미나에게 끌려다녔다. 그녀가 제리온에게 가지는 관심이 어찌나 대단한지, 일단 아카데미에 들어서면 무언가를 말할 때 항상 맨 앞에 그의 이름을 붙일 정도였다.

심지어 그녀는 듣는 수업이 다른 날에도 빈틈없이 짬을 내어 그를 찾아다니곤 했다. 일례로 제리온은 부전공으로 전술학 수업을 듣고 있었는데, 그녀는 어떻게 그 정보를 알아내선 강의가 끝날 때쯤이면 교실 밖에서 그를 기다렸다.

제리온은 그럴 때마다 오만상을 찌푸리며 그녀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아니, 이 누추한 곳까지 어인 행차십니까 이 빌어처먹을 공주님.”


물론 뒤쪽의 욕설은 절대 들리지 않게 혼잣말로 중얼거린 것이었다. 전술학 강의는 견습 기사들을 포함해 많은 귀족들이 수강하고 있었기에 레미나의 등장은 전보다 훨씬 큰 파장을 몰고 왔다. 호기심 많은 청년들은 꽃다운 미모의 공주님이 행차하셨다는 소식에 떼거리로 얼굴을 기웃거렸다. 레미나는 어릴 적부터 인망이 두터운 데다 외모도 빼어났기 때문에 그녀를 구경하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늘 끊이질 않았다.

그러나 제리온은 그런 부분이 늘 불쾌했다. 시끄러운 걸 좋아하지 않는 그로서는 그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항상 소음 속에서 지내야만 했던 것이다. 그녀의 그림자를 따르는 기사들의 병장기 소리, 행정 관료들의 충언, 귀족들의 입에 발린 아부, 수많은 군중들, 그리고 자신과 공주의 관계를 오해해 집적대는 사람들까지.

이러한 나날이 계속되자 그는 공주가 왜 그리 자신에게 집착하는 건지, 왜 가진 것 없는 자신과 붙어 다니려 하는 건지에 대해 의혹을 품기 시작했다. 아무리 어린 시절을 함께 한 동문이라 해도 그녀가 보이는 호의는 비정상적이었다.

가끔 스트레스가 쌓일 때면 제리온은 이런 위험한 상상을 하기도 했다. 그녀는 왜 그리 자신을 따라다니는 걸까, 공주의 신분에 모든 걸 가진 그녀가, 잘난 아버지 외엔 아무것도 없는 자신에게. 혹시 그녀는 다른 흑심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제리온의 의혹이 풀린 것은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전술학 강의를 듣던 그는 갑자기 배가 아파 화장실을 다녀온 참이었다. 마침 수업도 끝날 즈음이라 설렁설렁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코너를 건너 레미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이야기라면 이미 예전에 끝난 걸로 아는데요, 로드웰 후작님.”


제리온은 깜짝 놀라 벽에 밀착했다. 이 스토커 공주님은, 오늘도 역시나 여기까지 행차하신 모양이다.


‘어이구 씨발년. 또 나타났네 또 나타났어. 이러다 제 명에 못 살겠다.’


이렇게 속도 안 좋은 날 공주에게 시달렸다간 몸이 남아나질 않을 게 분명했다. 그는 도망칠 생각으로 슬금슬금 출입구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래서 이렇게 재차 공주님을 만나러 온 게 아니겠습니까? 공주님, 이번 일은 우리 왕국을 위해서도, 그리고 공주님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고 사료됩니다만.”


“저를 위해서라고요?”


“물론이지요. 공주님이 이번 정책에 힘을 불어넣어 주신다면, 중앙의 백성들은 그 깊은 은혜를 두고두고 잊지 않을 것입니다. 무릇 지도자란, 민중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남자의 목소리는 중후하면서도, 또 더할 나위 없이 교만했다. 제리온은 처음 그녀가 그 남자를 「로드웰 후작」이라 불렀던 걸 기억해냈다. 로드웰 후작이라면, 중부 지역에서 백천(白千)기사단을 후원하는 디하르트 로드웰을 말하는 게 분명했다. 지방의 세도가가 어째서 이곳에 온 건지, 왜 레미나를 붙잡고 있는 것인지 궁금해지자, 제리온은 걸음을 멈추고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레미나가 말했다.


“후작님, 그런 말씀을 하셔 본들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애초에 저에게 그런 일을 결정할 권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저는 그저 이 나라의 공주일 뿐, 법률상 어떠한 정책 결정권도 쥐고 있지 아니합니다.”


“하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습니까? 공주님은 장차 왕위를 계승하시게 될 텐데, 그런 힘이 없다니요. 리크나이츠 백성들은 지도자에 대한 예우로 공주님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예의 깊게 주시할 것입니다. 설령 그게 딤체흐 도시의 시의원이라 해도 말이지요.”


‘딤체흐?’


딤체흐는 왕국의 동남부에 위치한 광산 도시로, 영주가 파견되어 다스리는 게 아닌, 상인들이 공동으로 의원을 선출하여 의원제로 운영되는 곳이었다. 이는 특정 귀족의 광산 독점을 막으려는 왕실의 입김이 작용한 것으로, 그 덕에 딤체흐는 왕국의 어느 당파에도 소속되지 않은 일종의 ‘정치 중립지’였다.


“저더러 백천기사단의...아니, 그만 하지요. 후작님, 이건 무의미한 대화입니다. 딤체흐의 은광 채굴권은 그곳 의회에서 결정한 대로 한 상단이 30%의 점유율을 넘지 못하는 한도에서 경매로 매각될 겁니다. 저도 그게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라 생각하고요.”


레미나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아마 직접 보면 앙다문 입술이 바르르 흔들리고 있겠지. 제리온은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미간을 찡그렸다. 어째서 로드웰 후작이 이 먼 곳까지 찾아온 건지, 어째서 레미나가 그토록 딱딱하고 건조한 말투를 취하고 있는 건지 말이다. 제리온은 그녀가 그토록 차갑게 말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레미나는 대화를 끝내길 원했지만, 로드웰은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크게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조금 전보다 훨씬 진중해진 어조로 말했다.


“공주님. 아스트리카 왕국이 날이 갈수록 몸집을 불려가고 있는 상황에서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저희 백천기사단에게 힘을 실어주셔야 국방이 안녕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30%라니요. 그랬다간 연고도 없는 천한 상인들이 벌떼처럼 몰려들 겁니다. 그럼 경매가 끝난 뒤라도 암투가 끊이질 않겠지요. 저희 백천기사단에게, 최소 60%의 지분을 확정해주심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당황하는 레미나의 몸짓이 느껴졌다. 어지러운 구두 발굽 소리가 그녀의 심경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60%라니, 가당치도 않습니다. 그랬다간 북위파와 천정기사단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후작께선 어찌 그런 이기적인 언동을 하시는지요?”


“공주님, 최근 공주님의 행보는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참으로 많군요. 이번 은광 채굴권도 그렇고, 이전의 세율 조정안도...어찌 항상 그런 미묘한 답변만 내놓으신단 말입니까?”


“저는 특정 정치 세력을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감히 한 마디 올리겠습니다. 위정자라면 뚜렷한 정책 일관성을 지니는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런데 공주님께서 이렇게 미진한 태도를 고수하신다면, 결국 북위파와 남진파 모두로부터 외면받게 되실 겁니다.”


“충고 감사하군요. 후작님이 백천기사단을 아끼는 마음은 잘 알았습니다만, 이야기는 이제 여기서 끝내지요. 살펴 가시기 바랍니다.”


레미나는 일방적으로 대화를 마무리 짓고는 등을 돌렸다. 출입구는 로드웰 후작 쪽이었지만 그녀는 후작의 시선을 피하고 싶은 건지 코너를 돌려고 했다.

제리온은 구두 소리가 자신에게 가까워지는 걸 듣고 처음에는 재빨리 달아날까 생각도 했다. 아마 도망친다 해도 굳이 사람을 보내 붙잡거나 하진 않을 것이다. 이런 복도 한가운데서 이야기를 나눈 이상 그들도 누군가 엿들을 거란 예상은 했을 테니까. 그러나 내내 들었던 레미나의 떨리는 목소리가, 평소에는 보여주지 않았던 경멸에 찬 어투가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제리온은 왠지 모르게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어졌다. 그녀가 오늘만큼은 자신을 보고 싶지 않아 할 거란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면서도.

레미나가 막 코너를 돌았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벽에 등을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있는 제리온의 모습이었다.


“아...”


그녀는 우뚝 멈춰 서서 제리온을 응시했다. 보이고 싶지 않은 치부를 들켰다고 생각했는지 입을 가린 손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제리온은 로드웰 후작에겐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검지와 중지를 척 치켜세우며 말했다.


“여어~. 누님.”


그러자 갑자기 레미나의 눈망울이 그렁그렁해지더니, 또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가 울 거라는 예상은 하지 못했기에 제리온은 당황하여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마치 상황이 꼭 자기가 공주를 울린 것 같지 않은가. 그런데 레미나는 그가 미처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달려와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왁. 와악! 누님, 뭐하는 거예요? 사람들이 보기라도 했다간...”


“그래서 이렇게 어깨 좀 빌리는 거잖아. 조금만 이대로 있어.”


‘아니, 우는 것보단 이렇게 나랑 붙어 있는 게 더 문제라고.’


어깨가 뜨끈해졌다. 레미나는 제리온의 옷깃에 대고 소리 없이 울기 시작했다. 제리온은 어떻게든 그녀를 달래 떼어내고 싶었지만, 그녀의 간헐적인 흐느낌이, 그리고 자신의 옷소매를 쥔 손가락의 떨림이 너무 애틋하여 손을 놓았다. 대신 그는 누군가 보지 않을까 쉴 새 없이 사위를 둘러보며, 조용히 그녀의 등을 도닥거려주었다.

오랜만에 본 그녀의 눈물은 어릴 적보다 훨씬 조용했지만, 또 훨씬 애절하여 마음을 아프게 했다.


진정이 되자 레미나는 오랜만에 제리온의 집을 구경하고 싶다며 억지로 그를 이끌었다. 못 이긴 척 따라가면서 제리온은 물었다.


“그런데 그 많던 호위 기사들은 어쩌고 이리 혼자 설렁설렁 다녀요?”


“입구에서 기다리라고 했어. 네가 시끄러운 걸 싫어하는 것 같아서.”


그녀는 제리온이 생각한 만큼 눈치 없는 사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직 수업이 한창이었기에 교정은 한산했다. 제리온은 어차피 돌아가기엔 글렀고, 아예 집에 들러 점심까지 먹고 가자는 생각으로 마음 편하게 그녀를 따라갔다.

멜피드가(家)의 정원은 여름철을 맞아 부용과 맨드라미가 잔뜩 우거져 있었다. 레미나는 어릴 적처럼 정원 한가운데 자리 잡고 싶어 했지만, 꽃이며 잡초가 워낙 무성해 쉽지 않았다. 결국 둘은 마당에 놓인 탁자에 앉았다.

꿀벌 몇 마리가 정원을 분주히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중 한 녀석이 레미나의 소매에 내려앉자, 그녀는 태연하게 손가락을 퉁겨 쳐냈다. 그녀는 어릴 적과 변함없이 곤충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둘은 그렇게 몇 분간 정원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제리온은 침묵이 어색해 뭔가 말을 걸어보려 했으나 레미나의 얼굴이 너무 침울해보여 목구멍에서 삼켜버리고 말았다. 매일같이 조용히 좀 해달라고 성화를 부렸는데도, 막상 그런 상황이 오자 갑갑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제리온은 이런 어색함이라면 차라리 예의 그 쫑알대던 공주가 낫다며 마음속 깊이 탄식했다.

메이드가 차를 대접할 무렵에야 레미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 들었니?”


역시 자신이 엿들은 걸 계속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모양이었다. 제리온은 왠지 자신이 죄지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뒤통수를 긁적였다.


“다는 아니고...중간쯤부터요.”


“...그렇구나. 창피한 모습을 보여버렸네. 내 말투, 많이 무례했지?”


굳이 무례한 쪽을 고르라면 로드웰 후작 쪽이었지만, 제리온은 이를 입 밖에 내진 않았다. 확실히 그때의 공주의 목소리는 평소와 비교하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차가웠다. 단지 듣기만 했을 뿐인데도, 상대를 향한 경멸과 분노가 느껴질 정도로. 그가 말했다.


“별로요. 누구라도 싫어하는 사람 앞이라면 그런 태도를 보일 거예요.”


“싫어하는 사람...후후, 그것도 맞는 말이네. 제리온은 참 눈치가 빠르단 말이야.”


둘은 차를 마시며 잠시 숨을 골랐다. 시선은 정원의 화초에 머문 채로, 서로의 얼굴은 바라보지 않았다. 문득 레미나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많이 귀찮지? 내가 계속 엉겨 붙어서. 미안해.”


“예? 그야 뭐...”


제리온은 황급히 얼버무리려 했지만 그것도 우스운 일인 거 같아서 그만뒀다. 그동안 자신이 온갖 몸짓발짓을 써가며 불쾌함을 토로했던 걸 그녀가 모를 리 없기 때문이었다.


“난...내 그런 모습 처음이지? 하지만 어쩌면 그게 내 진짜 모습일지도 몰라. 아카데미를 나가면, 아니 너랑 헤어지면 난 늘 그런 도도한 말투로 귀족들과 언쟁을 벌여. 로시오 선생님의 수업이 사라진 뒤로 늘 그렇게 지냈어. 귀족과 말다툼을 하고, 또 때로는 입에 발린 칭찬을 하며 바라지도 않는 웃음을 짓고, 파티에 참가해 처음 보는 남자와 춤을 추고, 얼굴에는 늘 분을 잔뜩 바르고 말야.”


“...그야 뭐, 누님은 공주니까.”


그래, 공주라는 이미지라면 방금 그녀가 말한 그런 게 딱 어울릴 것이다. 거만하고 도도하며 모자란 것 없이 자란 사람. 귀족들과만 어울려 평민들의 삶은 털끝도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 그게 제리온이 생각하는 왕족의 이미지였다. 그러나 레미나는 ‘그런 공주’가 아니었다. 제리온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라도 그것만큼은 맹세할 수 있었다.


“제리온, 나는 말이지, 대단히 편리한 정치도구야. 너도 나이가 들었으니 내 말을 이해할 수 있겠지? 아까 로드웰 후작 역시 마찬가지야. 어떻게든 내게 로비를 해서 딤체흐의 은광 채굴권을 따내려는 속셈이지. 막판에는 협박까지 하더라, 후후. 이건 천정기사단도, 북위파도 다를 게 없어. 내게 붙으면 이런저런 고물이 떨어질 거란 걸 아니까 귀족들이 늘 개미떼처럼 달라붙어. 그 사람들은 날 보면 정신없이 칭찬을 해대. 그런데 그건...날 좋아해서가 아니야. 내가 필요해서지. 「공주님, 나날이 아름다워지시는군요, 그러니 이번 법안 좀...」「공주님의 식견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군요, 그러니 저번의 그것 좀...」아하하, 그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이익이 된다면 내 목까지 베어버릴 자들이야. 「공주님, 여전히 아름다우시군요, 그러니 죽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이러면서.”


그녀는 마치 혼잣말을 하는 것 같았다. 제리온은 정치판의 비정함이 어느 정도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그녀가 이런 말을 꺼낸 게 자신이 처음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어리석을 정도로 상냥하니까, 누구에게도 힘들다는 얘기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심지어 국왕인 아버지에게조차.

제리온과 헤어진 2년이란 세월동안, 그녀는 그런 역겨운 정치판을 견뎌내야 했다. 가끔 너무 힘들 때는 이렇게 홀로 창가에 앉아 혼잣말을 중얼거렸을 것이다. 그러나 심경을 토로해본들 그녀에겐 따뜻한 위로의 한 마디조차 돌아오는 법이 없었다. 제리온은 재회했을 때 그녀가 가장 먼저 꺼냈던 말을 생각해냈다.


왜 나를 만나러 오지 않았어?


어느덧 레미나의 눈에 눈물이 송골송골 맺혔다.


“제리온, 궁중에서는 있지, 먼저 본심을 드러낸 쪽이 지는 거야. 그래서 나도 거짓 가면을 쓰고 호호 웃으며 사람을 대하고 다녔어. 웃으며 춤을 추고, 웃으며 식사를 하고, 웃으며 잡담을 건네고. 그런데 그렇게 지내다 보니 있지, 내가 정말 즐거워서 웃은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거야. 내가...진심으로 사람을 대한 게 언제였는지. 그러자 네 얼굴이 막 떠오르더라? 네가 몰래 날 욕하던 것도, 함께 이 정원에서 흙장난을 쳤던 것도. 너는 나를 그저 레미나라는 하나의 인간으로서 대해줬었어. 아무런 가식도 없이, 어떠한 요구도 없이.”


제리온은 자존심이 강한 데다 직설적인 성격이라, 원체 남에게 아부 떠는 일을 못했다. 이는 레미나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지난 8년간 레미나가 스스로 퍼줬으면 퍼줬지, 단 한 번도 그가 그녀에게 무언가를 부탁한 적이 없었다. 레미나는 그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그녀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살짝 훔치며 말했다.


“그래서 무리를 하면서까지 너를 만나려고 아카데미에 입학했어.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다시 만났을 때 네가 달아나려고 해서, 그리고 오만상을 다 찌푸리고 있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아, 이 아이는 전혀 변하지 않았구나. 여전히 내가 공주라는 사실은 마음에 두지 않는구나, 라고. 나는, 이렇게...타락해버렸는데도.”


어느새 훔치는 것만으로는 수습이 안 될 정도로 눈물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눈으로 보지 않으면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조용했다. 이 또한 세월이 그녀를 변하게 한 것일까? 제리온은 문득 엉엉 소리내어 울던 그녀의 모습이 그리워졌다.

레미나가 말했다.


“난 궁전으로 돌아가면 늘 로드웰 같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야 해. 그러니까 제리온. 염치없는 부탁일지도 모르지만...너만은, 너만은 변하지 말아줘. 지금처럼 이대로...너마저 없어지면, ‘나’라는 인간은 완전히 죽어버리고 말아.”


그걸로 그녀의 이야기는 끝이었다. 레미나는 눈물 때문에 말을 똑바로 하기 힘들었는지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잠시 숨을 골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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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5) +4 15.05.02 938 29 21쪽
206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4) +1 15.05.02 884 27 20쪽
205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3) +2 15.05.02 690 24 21쪽
204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2) +2 15.05.02 768 24 24쪽
203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1) +2 15.05.02 586 24 22쪽
202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6) +3 15.05.02 696 28 18쪽
201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5) +5 15.04.29 863 24 19쪽
200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4) +1 15.04.29 938 24 26쪽
199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3) +1 15.04.29 789 24 24쪽
198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2) +3 15.04.29 812 26 18쪽
197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1) +1 15.04.29 758 24 17쪽
196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8) +4 15.04.28 905 28 16쪽
195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7) +3 15.04.28 840 25 20쪽
194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6) +3 15.04.27 712 26 19쪽
193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5) +3 15.04.27 756 22 17쪽
192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4) +2 15.04.27 731 22 18쪽
191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3) +1 15.04.27 732 30 18쪽
190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2) +2 15.04.27 758 27 19쪽
189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1) +2 15.04.27 791 31 18쪽
188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完) +1 15.04.27 600 33 18쪽
187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5) +4 15.04.26 734 24 17쪽
186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4) +1 15.04.26 931 28 16쪽
185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3) +2 15.04.26 739 26 20쪽
184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2) +6 15.04.23 779 28 15쪽
183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1) +3 15.04.23 840 26 19쪽
182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2) +2 15.04.23 756 25 17쪽
181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1) +3 15.04.23 767 26 15쪽
180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0) +1 15.04.23 684 25 22쪽
179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9) +3 15.04.22 811 29 16쪽
178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8) +3 15.04.22 847 27 15쪽
177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7) +1 15.04.22 778 29 18쪽
176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6) +1 15.04.22 793 23 18쪽
175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5) +2 15.04.22 765 29 15쪽
174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4) +3 15.04.22 911 25 18쪽
173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3) +5 15.04.21 767 27 16쪽
172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2) +2 15.04.21 923 25 14쪽
171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 +3 15.04.21 807 25 17쪽
170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8) +3 15.04.21 730 24 21쪽
169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7) +2 15.04.21 703 19 15쪽
168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6) +4 15.04.20 752 24 18쪽
167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5) +2 15.04.20 657 20 18쪽
166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4) +1 15.04.20 768 23 17쪽
165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3) +2 15.04.20 739 24 16쪽
164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2) +3 15.04.20 809 20 16쪽
163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1) +1 15.04.20 821 22 21쪽
162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6) +1 15.04.20 830 29 14쪽
161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5) +2 15.04.20 712 25 18쪽
160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4) +3 15.04.19 866 28 18쪽
159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3) +3 15.04.19 949 28 18쪽
158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2) +3 15.04.19 901 26 22쪽
157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1) +5 15.04.19 1,212 46 22쪽
156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10) +6 15.04.18 901 26 21쪽
155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9) +3 15.04.18 773 26 18쪽
154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8) +1 15.04.18 657 24 19쪽
153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7) +2 15.04.18 687 26 18쪽
»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6) +1 15.04.18 749 27 17쪽
151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5) +4 15.04.18 713 23 16쪽
150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4) +1 15.04.18 670 24 17쪽
149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3) +2 15.04.18 754 22 17쪽
148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2) +3 15.04.16 849 29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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