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저스연 님의 서재입니다.

람의 계승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저스연
작품등록일 :
2015.03.21 02:01
최근연재일 :
2015.09.01 03:28
연재수 :
345 회
조회수 :
359,071
추천수 :
10,757
글자수 :
2,844,987

작성
15.05.09 03:51
조회
1,006
추천
24
글자
18쪽

람의 계승자 - ep.5 - 승리 뒤에 오는 것들(7)

DUMMY

그녀가 팔 한 번 휘두른 것만으로 두 개의 생명이 사라졌다. 깡패들은 쓰러지고 나서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는 듯 넘어가는 숨을 꺽꺽댔다. 그러다가 뒤늦게 자신의 목이 벌어져 있음을 깨닫고, 거기서 의식은 끊어졌다.

카이안은 허망하게 바라보는 그 눈과 마주한 순간 욕지기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조금 전까지 살아 움직이던 인간이, 이제는 말 없는 고깃덩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히, 히이이익! 뭐...대체 무슨...!”


동료의 죽음에 하나 남은 깡패는 공황상태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는 도망갈 생각도 못하고 건물 벽에 기댄 채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주저앉은 가랑이 사이로 오줌이 질질 흘러내렸다. 유미르네는 에스터크를 빙그르 돌리고는 남자의 숨통을 끊으러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찌나 완벽하게 베었는지 그녀의 검에는 피 한 방울도 묻어 있지 않았다.


“멈춰! 멈추라고!!”


그때 카이안이 재빨리 달려와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는 양팔을 벌린 채 젖은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렁그렁한 덩어리 안에는 경멸과 공포, 분노가 가득 담겨 있었다.


“당신 지금 무슨 짓을 한 건지 알아요? 맙소사, 사람을 죽이다니...!”


유미르네는 다소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달아나거나, 아니면 겁에 질려 얼어붙어 있거나 - 둘 중 하나일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카이안의 반응이 제법 민첩했던 것이다.

그러나 놀란 것은 육체의 반응뿐, 그녀는 카이안의 외침 자체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그녀가 말했다.


“헤에, 시체를 처음 보는 사람은 대개 얼어붙기 마련인데. 너 이런 광경에 제법 익숙한 모양이구나? 비명도 안 지르고 말이야.”


“말 돌리지 마요! 대체 왜 죽인 거야, 무슨 이유 때문에!”


“이유? 이유야 충분하지. 저쪽이 나를 향해 칼을 빼들었으니, 나도 방위적 차원에서 공격을 한 거야. 정당방위라는 게 이런 거지.”


카이안은 기가 막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방위적 차원이라니? 그건 누가 봐도 그녀가 일방적으로 깡패들을 살육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웃기지 마! 이 사람들이 칼을 들고 있었던 건 맞지만, 그건 단지 위협용일 뿐이었어. 실제로 당신을 공격한 것도 아니잖아.”


“어머, 얘가 뭘 모르네. 칼을 드는 순간 어린 애도 살인을 저지를 수 있어. 더욱이 그걸 가지고 사람을 위협했다면 잠재적 살인미수지. 도검소지허가증이 그래서 존재하는 거야. 그런데 너...조금 짜증난다? 도와달라기에 도와줬더니만.”


“도와달라는 게 이런 의미가 아니잖아! 도대체 왜...죽일 필요까진 없었잖아!”


“필요 있어. 그게 뒤가 깔끔하거든.”


쿠욱. 카이안의 귓불 옆으로 서늘한 것이 지나갔다. 뒤이어 눈을 관통당한 남자가 힘없이 바닥에 늘어졌다. 가로막은 카이안의 제지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로, 유미르네가 마지막 남자의 숨통을 끊어버린 것이다.

그녀는 깡패들이 모두 죽었나 확인하더니 겁에 질려 떨고 있는 소녀에게 싱긋 웃으며 말했다.


“자, 청소 끝. 앗 거기 아가씨! 이따 경비대 오면 말 좀 잘해줘요. 이를테면...'강도가 칼을 들고 죽이려고 했다' 흠, 간단하죠?”


카이안은 굳이 뒤를 돌아 시체를 확인하진 않았다. 대신 그는 태연하게 피를 훔치는 그녀의 옆모습을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움켜쥔 주먹이 바르르 떨리다 못해 경련을 일으켰다.

‘악인’이라는 게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긴 하지만, 카이안의 관점에서 볼 때 그녀는 전형적인 악인이었다. 5년 전 광휘의 결사를 이끌던 유르그젠 이후로,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여기는 인간을 다시금 만나게 된 것이다.

골목길은 금세 시끄러워졌다. 마지막 남자의 비명을 듣고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모여든 것이다. 뒤이어 갑옷을 입은 병사 하나가 신고를 받고 허겁지겁 달려왔다. 유미르네는 이미 싸늘하게 식은 시체를 가리키며 무슨 대수냐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러나 이미 평정을 되찾은 그녀와 달리, 카이안의 눈에서는 여전히 불꽃이 일고 있었다.


소식을 받은 루도가 허겁지겁 도착했을 땐 이미 수사가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유미르네는 경비대에게 감사인사까지 받고는 당당하게 지구대를 걸어나왔다. 법적인 문제에서 본다면 그녀에겐 하등의 문제가 없었다. 깡패들이 무기를 들고 민간인을 살해하려 했고, 그녀는 생명보호 차원에서 어쩔 수 없이 무기를 휘두른 것이다. 물론 카이안이 지적하는 윤리적인 문제가 남아 있긴 하지만 카이안과 피해자 소녀가 침묵하는 이상 하자가 일어날 일은 없었다. 그리고, 피의자이자 피해자인 깡패들은 모두 싸늘한 시체가 되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 당신이 로샤단의 루도 클로람이로군. 소문은 많이 들었소."


“예? 예에. 저기, 대체 무슨 일인지?"


“별거 없소. 동료분이 강도 몇 명을 죽인 것뿐이오. 잠시 조사를 위해 모신 것뿐이니 아무 염려할 필요 없소. 이렇게 뒤숭숭한 때에 도와주시다니, 뭐라 감사의 말씀을 드릴 수가 없소이다."


“....."


몇 마디 대화로 루도는 지금까지 벌어진 상황을 단번에 이해했다. 그는 도도하게 팔짱을 낀 채 미소 짓고 있는 유미르네를, 그리고 그 뒤에 창백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는 카이안을 바라보았다.

카이안은 굳게 다문 입을 결코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유미르네 역시 말이 없었다. 루도는 묻고 싶은 게 산더미같이 많았지만, 둘의 강제된 침묵이 부담되어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다. 지구대를 떠나기 전 그는 깡패들의 시신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일격일살의 깔끔한 검상에 등골이 시릴 정도였다.


셋은 나란히 선 채 걸어갔다. 아직 발이 불편한 루도 덕분에 가로지르는 광장이 끝없는 황야를 달리는 것만큼이나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두 사람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루도는 카이안과 유미르네 사이에 펼쳐진 묘한 기류를 느낄 수 있었다. 살기라고 하기에는 뭣하고, 물과 기름이 마주한 듯한 이질감이랄까? 그 한가운데 선 것만으로도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레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막 광장을 지나 아카데미로 들어가는 샛길로 접어들었을 때, 기나긴 침묵을 깨고 카이안이 말했다.


“당신 실력이라면 죽이지 않고 끝낼 수 있었어요. 그런데 정말...당신은 잔혹하기 그지없군요."


그러자 유미르네가 쿡, 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그녀는 카이안의 빈정거림이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뭐, 그럴 수도 있었지. 그래서 뭐? 살인이 문제가 되는 건 그게 법에 저촉되느냐 아니냐일 때뿐이라고, 온실 도련님."


“당신에겐 사람 목숨이 벌레만도 못한 모양이군요."


“호호호. 확실히 그리 비싼 건 아니지."


“그럼 당신 목숨은 얼마죠? 아까 죽은 사람들 것보다는 비싼가요?"


순간 유미르네의 입가가 살짝 비틀렸다. 그 미묘한 변화가 어찌나 사람을 섬짓하게 만드는지, 루도는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고 말았다. 만약 그러지 않으면 그녀가 그대로 카이안의 목을 날려버릴 것만 같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미르네는 여전히 태연자약한 얼굴이었다.


“이봐 도련님, 내가 충고 하나 해줄까? 너같이 싸구려 정의에 취한 놈들은 발에 걷어차일 정도로 많이 봐왔어. 그리고 그놈들은 하나같이 비참한 최후를 맞았지. 알아? 실력이 없으면 정의고 나발이고 그냥 뒈지는 거야. 네가 루도의 지인만 아니었다면, 글쎄, 어떻게 됐을까?"


“야, 유미르네 그만 못 해?!"


보다 못 한 루도가 둘 사이를 제지했다. 그러나 당황스럽게도 유미르네나 카이안이나 그의 개입을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두 사람의 대립은 단순한 말싸움을 넘어선, 가치관끼리의 충돌이라고 봐야 했다. 하지만 일단 분위기를 식혀야 하는 건 맞았다. 루도는 둘 사이를 2미터가량 벌려놓고서 말했다.


“카이안 말이 맞아. 그 자리가 얼마나 위험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능하다면 살인은 피하는 게 맞잖아? 너 왜 이렇게 남의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거야?"


“어머나, 8살에 사람 죽인 너한테 그런 소리 듣게 될 줄은 몰랐다?"


“....."


루도는 말문이 턱 막혀 그대로 멈춰 서야만 했다. 반박할 거리가 없다기보단, 유미르네의 표정에 ‘네 의견은 필요 없으니 닥치고 있어라’라는 메시지가 역력했기 때문이다.

다시 무거운 침묵이 이어지자, 카이안은 진저리가 나버렸는지 ‘먼저 가겠다’라는 말만 남기고 기숙사 쪽으로 휙 사라졌다. 그리고 마치 각도로 재기라도 한듯 유미르네도 그와 정반대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루도는 둘 사이에서 머뭇거리다가 황급히 유미르네 뒤로 따라붙었다.


“야, 유미르네! 잠깐 기다려."


“왜, 너도 같잖은 설교라도 하려고 그러니?"


“그게 아니라 임마, 카이안을 자극하지 말라고. 왜 하필 사고를 쳐도 그 녀석 앞에서..."


그러자 유미르네는 호기심이 동한듯 발걸음을 멈추고 홱 돌아섰다.


“어째서? 그 애가 뭐 왕족이라도 되니? 그러고보니 아까도 날 씹느라 여념이 없더라. 너도 싸구려 정의감에 도취된 거야, 아니면 그 도련님을 두둔한 거야?"


“그건..."


루도는 당황하여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아무리 옛 친구라 해도 카이안의 정체를 쉽게 발설할 수는 없었다.

그가 머뭇거리자 유미르네는 곧 싫증이 난듯 빠른 걸음으로 사라져갔다. 루도는 이번에는 그녀를 붙잡지 못했다.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너무나도 낯설게만 느껴졌다. 대체 지난 5년간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그렇게 살갑게 굴던 소녀가, 이제는 차디찬 염세주의자가 되어버렸다.

루도는 한동안 찬바람을 맞고 서 있다가, 그녀가 보이지 않게 되었을 즈음에야 절뚝이며 숙소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무엇이 잘못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허나 확실한 점은, 카이안과 유미르네를 충돌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



루도가 유미르네와 언쟁을 벌이고 있던 시간, 그리고 마리네 일행이 자그마한 승리감에 도취해 늦은 점심을 즐기고 있던 시간, 제리온은 여전히 왕실도서관 내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그도 루도와 마리네가 나간 동안 헛물만 켜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란돌로부터 금서관리고의 비밀을 알게 되자 그녀는 곧장 레미나를 호출했다. 일개 레인저 나부랭이가 하늘 같은 공주님을 오라가라 한다는 게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건 일반인의 시선이고, 우리 공주님은 친한 동생이 부르자 군소리 없이 냉큼 달려왔다.

제리온은 그녀의 안내를 받아 왕족 전용 금서관리고로 들어갔다. 그곳은 입구부터 커다란 결계가 펼쳐져 있었는데, 레미나가 손을 뻗어 주문을 외자 아무런 저항 없이 문이 열렸다. 그녀가 말하길 왕족이 아닌 사람이 문을 열려 하면 당장 경보가 울리고 자체 포스필드(Force Field)가 발동된다고 했다.


“히야, 여기도 오랜만이다아. 3개월, 아니 5년 3개월 만인가? 있잖아 제리온, 내가 그람을 만난 것도 여기야. 여기 숨어서 울고 있는데 갑자기 해골 아저씨가..."


“예이예이. 문 열어줬으니 이제 가도 돼요."


“어머, 얘 좀 봐? 일 끝났으니 바로 가라고? 야박하기도 해라."


“네."


“안 가. 루도 올 때까지 여기서 버틸 거야."


“...마음대로 하시든가."


제리온은 그녀의 존재는 안중에도 두지 않은 채 책을 고르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대로 고르는 책마다 귀족용 금서관리고와는 비교도 안 되는 양질의 내용이 가득했다. 제리온은 그중에 일단 '우르톰의 수기 - 에리안델을 보았다' '에센스의 주인' 두 개를 골라 의자에 앉았다. 그는 한권을 레미나에게 던지고는, 나머지 한권의 책장을 천천히 넘기기 시작했다. 레미나는 그가 던진 책을 받지 못해 떨어뜨렸다가, 냉큼 주워 그의 옆에 앉았다.

그녀가 말했다.


“신의 아이에 대해 찾으려는 거구나. 뭘 중점적으로 보면 돼?"


“뭔가 중요해 보이는 거."


“아하하! 그게 뭐야."


두 사람은 램프에 불을 밝힌 채 자료수집에 열중했다. 그러나 다소 진지한 모습의 제리온과 달리, 레미나는 그의 어깨에 기대어 비스듬히 앉아 대충 책장을 넘겼다. 고요한 가운데 시간이 멈춘 것 같기도, 한편으로는 정신없이 흘러가는 것 같기도 했다. 램프의 불빛이 부산하게 일렁일 때면 레미나는 누가 왔나 싶어 고개를 치켜들곤 했다. 그러나, 그녀의 예감대로 누가 찾아오는 일은 결코 없었다.

램프의 불빛이 약해지고, 다시 새 기름을 넣어갈 때 즈음 드디어 제리온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는 읽던 책의 한 구절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했다.


“예토라는 이름이었군...'우유부단한 예토'”


“응? 뭔데 뭔데?"


호기심이 동한 레미나가 그의 어깨 위에 재빨리 턱을 걸쳤다. 오래지 않아 그녀는 ‘예토’라는 단어를 찾아냈다.


<><><><><><><><><><><><><><>

언제나 수십 명의 기사가 붙어있던 클라리스 공주와 달리, 에리안델은 오직 두 명의 경호원만을 데리고 다녔다. 그들은 모두 각성하기 전 그녀의 소꿉친구로, 시골청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검술실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리카르고는 붉은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아주 명랑한 청년이었다. 그는 늘 에리안델과 붙어 다녔으며, 그녀가 각성한 뒤에도 변함없이 친구로서 대했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루프리모의 아이 역시 그를 마음에 들어한 것 같았다. 그녀는 리카르고의 의견을 존중했고, 매사를 정함에 있어 그의 자문을 구하려 했다. 얄궂은 일이다. 귀족들이 전부 리카르고만 같았더라면, 마인드컨트롤 따위는 언급할 가치도 없었을 텐데.

반면 예토는 말수가 적고 내성적인 편이었다. 그는 늘 두 사람의 뒤를 따라다녔지만, 먼저 의견을 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또한 타협하기를 좋아하여 웬만큼 충돌이 있지 않는 한 늘 리카르고의 지시를 따랐다. 나는 그가 무언가 이야기를 꺼내려다 입속에서 우물거리는 장면을 많이 보았다. 좋게 말하면 둥글둥글한 성격이지만, 그보다는 상처입기를 두려워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우유부단한 예토’ 그게 그의 별명이었다.

<><><><><><><><><><><><><><>


“우유부단한 예토라...이 사람이 왜?”


제리온이 관자놀이를 꾹꾹 문지르며 말했다.


“이 자식이 에스터페른의 아이라는 거지.”


“어머나, 진짜로?”


감탄사를 터뜨리긴 했지만, 사실 레미나는 그다지 놀란 얼굴이 아니었다. 예토란 사람이 무엇이든, 지금은 죽고 없는 500년 전의 인물일 뿐이니까. 그녀는 이내 흥미를 잃은 듯 다시 자신의 책을 팔락거렸다.

반면 괜찮은 자료를 발견했다고 좋아하던 제리온은 금세 짜증스럽게 눈썹을 찌푸렸다. 그는 책장을 마지막 장까지 파라락 넘기고서 말했다.


“뭐야, 이게 끝이야? 왜 예토 이야기는 하나도 안 나오는데?”


레미나가 말했다.


“별로 안 중요한 사람이었나 보네.”


“니미 신의 아이가 안 중요하긴 개뿔. 그러고보니 이 책 쓴 인간 아주 마음에 안 들어. 기록을 하려면 성씨까지 제대로 적던가! 지 편한 대로 이름만 쏙 써넣으면 다야? 이게 무슨 일기도 아니고!”


사실 내용상으로 보면 일기가 맞았다. 우르톰이라는 학자가 남긴 일지에, 후대 사람들이 멋대로 제목을 붙여 넣은 것일 뿐.

그러나 레미나는 그런 문제를 지적하는 대신 적당히 제리온의 푸념에 장단 맞춰주며 말했다.


“성이 없는 거 아니야? 평민 출신이라든지. 인구가 적은 시골에서는 흔한 일이잖아.”


“아니야! 이건 있는데 일부러 작자가 누락시킨 거라고. 썩을 놈. 그 증거로 다른 두 사람은 버젓이 성을 가지고 있잖아. 리카르고 샤르커드, 에리안델 크류네.”


“그런가? 근데 왜 그렇게 예토라는 사람에게 집착하는 거야? 단순한 흥미는 아닌 거 같고.”


그 말에 달아올랐던 머리가 삽시간에 잦아들었다. 제리온은 날뛰던 것을 멈추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진열대로 가 다른 서적을 뒤지기 시작했다. 자못 진지하기까지 한 그의 모습에 레미나도 자세를 바로 잡았다.


“...제리온?”


제리온은 대답 대신 벽걸이에 걸어놓은 램프를 꺼내 책표지를 하나하나 훑기 시작했다. 책 모서리를 훔치는 손가락이 먼지로 희뿌옇게 될 즈음이야 그는 혼잣말처럼 입을 열었다.


“야성의 직감이라고나 할까...”


“...뭐어?”


제리온은 케리아돌이 보여줬던 과거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성언전쟁, 펠아람의 저주, 그리고 울부짖던 에스터페른의 아이.

에스터페른의 아이 예토. 펠아람의 아이를 죽인 시점에서 그는 유일무이하게 남은 신의 아이였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각성 이후 그에 관한 기록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어떻게 되었는가? 왜 아무도 그의 행적을 남겨놓지 않았는가?


‘기록을 말소시킨 건가? 그러고보니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직 에스터페른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지.’


케리아돌의 이야기대로라면 그는 전쟁 이후 카잘산맥으로 갔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폭풍협곡이라 불리는 좁은 관문에 결계를 펼쳐, 리크나이츠와 브리토리스 간의 교류를 완전히 끊어버렸을 것이다.

그것으로 끝일까? 설마. 예토는 말 그대로 갓 태어난 신의 아이였다. 클라리스나 에리안델에 비하면 보유한 에센스도 차고 넘칠 정도로 많았다. 고작 결계 하나 펼치는 데 에센스를 전부 소모했다는 건 가당치도 않은 소리다.


그럼 그는 남은 에센스를 가지고 무엇을 했을까?


그는 절규 속에서 자신이 미래를 바꾸겠노라고, 펠아람의 저주를 막겠노라고 외쳤다. 만약 그 맹세가 변하지 않았다면, 예토는 남은 에센스를 ‘펠아람의 저주를 막는 데에’ 사용한 것이 틀림없었다.

펠아람의 아이는 최후의 순간에 에센스를 날려 저주를 내렸다. 그리고 이는 지금까지 루도와 카이안을 괴롭히고 있는 문제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예토의 에센스는 무엇이 되었는가? 그게 제리온이 갖는 의문점이었다.



**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람의 계승자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47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4) +3 15.05.12 891 25 26쪽
246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3) +3 15.05.12 852 23 20쪽
245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2) +5 15.05.11 961 26 21쪽
244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1) +4 15.05.11 949 23 18쪽
243 람의 계승자 - ep.5 - 왕하직속뭐시기(完) +2 15.05.11 1,067 24 20쪽
242 람의 계승자 - ep.5 - 왕하직속뭐시기(2) +1 15.05.11 777 22 21쪽
241 람의 계승자 - ep.5 - 까마귀가 우는 밤(5) +6 15.05.10 747 22 15쪽
240 람의 계승자 - ep.5 - 까마귀가 우는 밤(4) +1 15.05.10 786 22 17쪽
239 람의 계승자 - ep.5 - 까마귀가 우는 밤(3) +2 15.05.10 880 21 17쪽
238 람의 계승자 - ep.5 - 까마귀가 우는 밤(2) +1 15.05.10 768 24 13쪽
237 람의 계승자 - ep.5 - 까마귀가 우는 밤(1) +4 15.05.09 879 24 28쪽
236 람의 계승자 - ep.5 - 왕하직속뭐시기(1) +3 15.05.09 915 23 21쪽
» 람의 계승자 - ep.5 - 승리 뒤에 오는 것들(7) +2 15.05.09 1,007 24 18쪽
234 람의 계승자 - ep.5 - 승리 뒤에 오는 것들(6) +5 15.05.08 1,021 28 24쪽
233 람의 계승자 - ep.5 - 승리 뒤에 오는 것들(5) +2 15.05.08 885 23 24쪽
232 람의 계승자 - ep.5 - 승리 뒤에 오는 것들(4) +2 15.05.08 901 22 26쪽
231 람의 계승자 - ep.5 - 승리 뒤에 오는 것들(3) +2 15.05.08 893 24 19쪽
230 람의 계승자 - ep.5 - 승리 뒤에 오는 것들(2) +2 15.05.08 758 23 24쪽
229 람의 계승자 - ep.5 - 승리 뒤에 오는 것들(1) +5 15.05.07 770 25 19쪽
228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10) +2 15.05.07 889 23 24쪽
227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9) +1 15.05.07 812 21 24쪽
226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8) +4 15.05.06 731 26 22쪽
225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7) +2 15.05.06 976 24 29쪽
224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6) +3 15.05.06 802 23 28쪽
223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5) +4 15.05.05 929 26 24쪽
222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4) +2 15.05.05 762 23 23쪽
221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3) +1 15.05.05 642 22 15쪽
220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2) +2 15.05.05 770 24 18쪽
219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1) +4 15.05.05 685 23 15쪽
218 람의 계승자 - ep.5 - 사냥감의 반전(4) +2 15.05.05 921 24 23쪽
217 람의 계승자 - ep.5 - 사냥감의 반전(3) +3 15.05.04 935 22 23쪽
216 람의 계승자 - ep.5 - 사냥감의 반전(2) +2 15.05.04 867 22 21쪽
215 람의 계승자 - ep.5 - 사냥감의 반전(1) +1 15.05.04 774 24 20쪽
214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5) +2 15.05.04 709 24 15쪽
213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4) +2 15.05.04 720 25 23쪽
212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3) +3 15.05.03 844 29 18쪽
211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2) +3 15.05.03 763 22 23쪽
210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1) +2 15.05.03 853 23 20쪽
209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7) +5 15.05.03 795 28 25쪽
208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6) +2 15.05.03 894 24 22쪽
207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5) +4 15.05.02 938 29 21쪽
206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4) +1 15.05.02 884 27 20쪽
205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3) +2 15.05.02 689 24 21쪽
204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2) +2 15.05.02 767 24 24쪽
203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1) +2 15.05.02 586 24 22쪽
202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6) +3 15.05.02 695 28 18쪽
201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5) +5 15.04.29 863 24 19쪽
200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4) +1 15.04.29 937 24 26쪽
199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3) +1 15.04.29 789 24 24쪽
198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2) +3 15.04.29 812 26 18쪽
197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1) +1 15.04.29 758 24 17쪽
196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8) +4 15.04.28 904 28 16쪽
195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7) +3 15.04.28 840 25 20쪽
194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6) +3 15.04.27 711 26 19쪽
193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5) +3 15.04.27 756 22 17쪽
192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4) +2 15.04.27 731 22 18쪽
191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3) +1 15.04.27 730 30 18쪽
190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2) +2 15.04.27 758 27 19쪽
189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1) +2 15.04.27 789 31 18쪽
188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完) +1 15.04.27 599 33 18쪽
187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5) +4 15.04.26 733 24 17쪽
186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4) +1 15.04.26 928 28 16쪽
185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3) +2 15.04.26 739 26 20쪽
184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2) +6 15.04.23 779 28 15쪽
183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1) +3 15.04.23 839 26 19쪽
182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2) +2 15.04.23 755 25 17쪽
181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1) +3 15.04.23 767 26 15쪽
180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0) +1 15.04.23 682 25 22쪽
179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9) +3 15.04.22 811 29 16쪽
178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8) +3 15.04.22 846 27 15쪽
177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7) +1 15.04.22 776 29 18쪽
176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6) +1 15.04.22 790 23 18쪽
175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5) +2 15.04.22 765 29 15쪽
174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4) +3 15.04.22 911 25 18쪽
173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3) +5 15.04.21 767 27 16쪽
172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2) +2 15.04.21 922 25 14쪽
171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 +3 15.04.21 805 25 17쪽
170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8) +3 15.04.21 729 24 21쪽
169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7) +2 15.04.21 703 19 15쪽
168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6) +4 15.04.20 750 24 18쪽
167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5) +2 15.04.20 655 20 18쪽
166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4) +1 15.04.20 767 23 17쪽
165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3) +2 15.04.20 738 24 16쪽
164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2) +3 15.04.20 809 20 16쪽
163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1) +1 15.04.20 821 22 21쪽
162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6) +1 15.04.20 830 29 14쪽
161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5) +2 15.04.20 711 25 18쪽
160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4) +3 15.04.19 865 28 18쪽
159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3) +3 15.04.19 946 28 18쪽
158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2) +3 15.04.19 901 26 22쪽
157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1) +5 15.04.19 1,210 46 22쪽
156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10) +6 15.04.18 901 26 21쪽
155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9) +3 15.04.18 772 26 18쪽
154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8) +1 15.04.18 656 24 19쪽
153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7) +2 15.04.18 686 26 18쪽
152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6) +1 15.04.18 748 27 17쪽
151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5) +4 15.04.18 713 23 16쪽
150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4) +1 15.04.18 668 24 17쪽
149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3) +2 15.04.18 754 22 17쪽
148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2) +3 15.04.16 849 29 15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