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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연 님의 서재입니다.

람의 계승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저스연
작품등록일 :
2015.03.21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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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01 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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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27 0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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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3)

DUMMY

“당신들이 저지른 건가요?”


켈가의 낯빛이 일순 어두워졌다. 어금니를 악문 채 일부러 시선을 피하는 그 모습은 기사라서가 아닌,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느낄 수 있는 수치심 때문이었다.


“숙녀분이 신경 쓸 만한 일은 아닙니다.”


“어린아이, 노인 할 것 없이 전부 죽였군요. 여자들은 다 어디로 간 거죠?”


“...군사기밀을 민간인에게 발설할 수는 없습니다. 그보다는 먼저 그쪽의...”


“「약자를 위한 검」이게 흑연기사단의 모토가 아니었나요? 전 지금 클라우디오 제펫트 단장에게 깊은 분노를 느낍니다. 그분이 설파했던 게 전부 입에 발린 거짓이었다니. 이게 기사의 본분인가요? 울며불며 매달리는 어린아이까지 죽여야만 했나요?”


레미나의 어조는 차분했으나 그 속에는 절제된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그녀는 존댓말을 썼지만, 그 자리에 있던 어느 누구도 그게 존댓말이라곤 생각지 않았다. 결코 잊지 않겠다고, 그러니까 각오해두라는 엄포를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뿐이었다. 그러한 화술이라든지 지금 보여주는 의연하고 강경한 태도는 고위귀족이 아니고서야 결코 나올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켈가는 당황했다. 그녀가 클라우디오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도 놀랐지만, 그 고고한 태도에 기가 죽어버린 것이었다.


“제펫트 단장님은 3년 전에 일선에서 물러나셨습니다. 지금은 스벤달 오빌리크경이 지휘를 맡고 계시죠.”


“오빌리크...칼자스 지방을 통치하는 후작가로군요. 하지만 스벤달이라는 이름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벤자민 오빌리크경의 아들인가요?”


“예, 예에...”


“안타깝군요. 벤자민님은 폭력을 혐오하고, 세상만사가 인의(仁義)에 의해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 분이셨습니다. 그런 현인의 자재가 이런 만행을 저질렀다니, 실망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레미나는 재차 분노를 표출했다. 그러자 그녀와 마주한 기병대는 위축되어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을 치기 시작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왕이나 장군을 상대할 때와 같은, 알 수 없는 오오라가 뿜어져 나와 자신들을 옥죄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이미 그녀의 신분이 어떠한지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있는 인물이었고, 때문에 감히 이름을 여쭈는 결례를 범할 수는 없었다. 차라리 산드로 백작의 딸이라는 게 거짓이고, 실은 그보다 더 높은 작위의 귀족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사실이 그러했지만). 기사들은 자기도 모르게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그들 중 몇몇은 말에서 내려야 하는 게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할 정도였다.

켈가가 말했다.


“...잔인한 참상을 보여 드린 데 대해서는 깊은 사과를 드립니다. 하지만 이곳은 전쟁터이니만큼, 레이디께서도 이해를 해주셨으면...”


“아뇨, 이해 못 합니다. 경은 에나스트란 협약(민간인 및 포로 처우에 대한 각국의 합의서)을 모르시는지? 기사는커녕 용병들로 가득한 텔아단에서조차 이런 만행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기병대도 기병대지만, 일행 역시 그들 못지않게 놀랐다. 그 유순하던 공주가 이렇게 서슬 퍼런 날을 세워 상대를 몰아붙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제리온의 질 나쁜 욕설도, 아르유의 짓궂은 장난도 방긋 웃으며 넘어가던 그녀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역시 왕족은 왕족이라는 걸까? 한 마디 한 마디마다 위엄이 풍겼다.

한편 이칼롯은 켈가가 위축되는 걸 확인하자 바로 그녀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만. 우리 목적은 이곳에서 벗어나는 거지, 저들을 몰아붙이는 게 아닙니다.’


레미나는 바로 실행에 옮겼다. 그녀는 흐트러진 치맛자락을 정돈하고는, 자연스럽게 켈가의 옆을 지나쳐 걸어갔다.


“흑연기사단은 오늘로서 그 유구한 명예를 잃게 되었군요. 그 땅에 떨어진 명예를 조금이라도 회복하고자 한다면, 지금 당신에게 주어진 과제가 무엇인지는 잘 알 것이라 믿습니다. 아드리아노경.”


그녀의 도도함에 축배를! 레미나는 끝까지 고자세를 유지했다. 그녀는 그 자리를 떠남에 있어 전혀 켈가의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조심스럽게 보내주지 않겠느냐고 청했을 테고, 이는 도리어 기병대의 의심을 샀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그들을 가볍게 무시함으로써 누가 우위에 있는지를 분명히 언급했다. 때문에 기사들은 상부의 명령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압도적인 도도함에 눌려 그들을 보내주어야 한다고 암묵적으로 납득해버리고 말았다.

켈가가 뒤늦게 이를 알아차렸을 때에는 이미 말할 타이밍을 놓친 뒤였다.


“레, 레이디! 현재 이 지역은 대단히 위험한 상태입니다. 저희 기마대가 안전지대까지 호위해 드리겠습니다!”


“말씀은 고맙지만 거절합니다. 지금은 흑연기사단과 몸을 섞고 싶지 않군요.”


일행은 자연스럽게 레미나의 뒤로 따라붙었다. 기사들 옆을 지나칠 때 그들의 긴장한 눈동자를 엿볼 수 있었는데, 제리온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 무진 애를 썼다.

그때 켈가가 이칼롯을 붙잡으며 말했다.


“백작영애 분께 심려를 끼쳐 드려 미안하오. 그런데 그대도 산드로 백작을 섬기는 자요?”


“...그렇소만.”


“그렇군. 염치없는 소리지만, 오늘 본 것에 대해서는 백작께 잘 설명 해드리길 바라오. 난 전에 뤼제폰 백국에 사절로 간 적이 있다오. 백작은....연한 갈색 눈동자가 매우 아름다운 분이셨지요.”


순간 이칼롯의 목덜미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이 집요한 기사는 아직도 의혹의 덜미를 놓지 않은 것이다. 그는 끝까지 백작영애의 신분에 집착했다. 그러나 이제 레미나에게 말을 걸긴 뭣해졌으니, 그의 가신인 이칼롯에게 떡밥을 던진 것이었다.

산드로 백작의 눈동자는 무슨 색인가. 당연히 이칼롯은 답을 알지 못했다. 여기선 긍정해야 할까, 아니면 부정해야 할까. 부정한다면 무어라 둘러대야 할까. 제리온과 마리네도 뒤늦게 질문의 함정을 깨닫곤 숨을 삼켰다.

그때 앞서가던 레미나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으며 말했다.


“기억력이 나쁘시군요, 아드리아노경. 정말로 뤼제폰 백국에 갔다 오신 건가요?”


모두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켈가는 그녀가 말했다는 것만으로도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마리네는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코로만 숨 쉬느라 죽을 지경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백작의 눈은 에메랄드빛이십니다. 클라우디오 제펫트 단장도 아마 같은 색이셨을 텐데요?”


두말 할 것도 없이 그녀의 완벽한 승리였다. 켈가는 얼떨떨하게 대답을 했고, 그 뒤론 결코 질문을 건네지 않았다. 마지막 문답으로 그는 레미나가 산드로 백작의 영애라고 완벽히 믿어버린 모양이었다. 기사들이 일행을 멀거니 바라보는 가운데, 제리온은 재빨리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제법이잖아, 누님! 역시 공주는 공주라는 건가?”


“...으응...”


다른 사람들도 그녀를 찬양하고 싶어 안달이 났지만, 기병대의 시선 때문에 최대한 태연하게 걸으려 애쓰고 있었다. 레미나가 일행의 구원자가 될 줄 누가 예상했겠는가?

일행은 마을을 벗어나 숲의 벌목지로 들어섰다. 기사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이윽고 마리네는 참았던 숨을 길게 토해냈다.


“푸하아-! 진짜 죽는 줄 알았네.”


“진짜 이러다 제 명에 못 살겠다. 돌아오자마자 뭔 꼴이야.”


그때 레미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저기, 에레이시아.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네?”


“아까 저를 왜 산드로 백작의 딸이라고 말한 거예요?”


제리온과 에레이시아는 입을 딱 벌렸다. 누가 말했던가, 천재와 바보는 종이 한 장 차이라고.



루도는 옹이구멍에 걸친 발이 미끄러질 때마다 온몸의 털이 쭈뼛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그러면 그는 나무기둥을 그러안은 채 깍지에 있는 힘껏 힘을 주고, 다시 자세를 잡기 위해 발을 허우적거려야 했다. 그러기를 벌써 10여 분이었다.

페더폴(Featherfall)의 지속시간은 그가 지면에 안착할 수 있을 만큼 충분했다. 그는 이따금 팔을 버둥거려 방향을 조절하며 내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막 나무 꼭대기 틈을 헤집고 있을 무렵, 아래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최소한 수십 명은 되는 남자들의 잡담소리, 그리고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알 수 없는 비명까지. 루도는 즉시 지면에 군대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는 나뭇가지 하나를 골라 그 위에 내려앉았다. 잠시 나무 위에서 상황을 살펴보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페더폴은 낙하속도를 줄이는 마법이지, 개체 자체의 중량을 감소시키진 않는다. 이를 알 리 없는 루도는 자신이 가벼워졌다고 생각하곤 자그마한 나뭇가지 위에 다리를 올렸고, 가지는 그 즉시 부러져 밑으로 떨어졌다.

아래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루도는 황급히 나무기둥을 붙잡고, 옹이구멍에 발을 올려놓은 후 몸을 밀착시켰다. 다행히 아래쪽에서는 그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울창한 나뭇잎이 그의 몸을 가려준 것이다. 하지만 나무옹이에는 이끼가 잔뜩 껴 있어서, 아무리 애를 써도 계속 발이 미끄러졌다. 설상가상으로 마법의 효과까지 사라지자 루도는 이제 마음대로 내려가지도 못하게 되었다. 아래쪽의 군대는 아예 자리를 잡은 건지 움직일 생각도 않고 있었다.


“으그극...젠장, 젠자앙.”


아무리 단련한 몸이라곤 하지만, 불안정한 자세로 10분 동안이나 나무에 매달려 있으려니 슬슬 팔다리에 무리가 오기 시작했다. 그러다 다시금 옹이에서 발이 미끄러지자, 루도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조금씩 힘을 풀어가며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잔가지가 얼마 없는 나무라 내려오는 데 별다른 인기척은 나지 않았다. 빽빽하게 우거진 녹음의 틈새로 드디어 지상의 전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막 뛰어내려도 무리 없을 높이에 도달했을 때, 루도는 주둔 중인 부대의 정체를 확인하곤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흑연기사단!’


그는 전쟁을 경험해보진 못했지만 오랜 정규군 생활 덕분에 아스트리카 군대의 편재 및 무장상태 등은 파악하고 있었다. 그중 흑연기사단은 갑옷을 검은색으로 통일하기로 유명해 다른 나라에도 소문이 퍼져 있었다.

땅에 내려오자 루도는 재빨리 수풀 사이에 몸을 숨겼다. 하지만 그건 임시방편일 뿐으로, 몸을 완전히 가리지도 못하거니와 수색대가 있다면 즉시 발각될 우려가 있었다. 그는 숨을 죽인 채 기사단의 동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예 이 부근에 야영지를 꾸릴 생각인지, 모닥불까지 피워놓고는 식사준비가 한창이었다. 대강 세어보니 숫자는 백여 명 즈음으로, 정찰대혹은 별동대로서 활동하는 부대인 듯했다. 하지만 아무리 소수라고 한들 흑연기사단의 군세가 이곳까지 미쳤다니, 실로 놀라울 따름이었다.


‘백천기사단이 패한 건가? 아니, 아예 보급을 포기하고 마드리고를 지나쳐온 걸지도...’


그러나 지금은 자신에게 닥친 문제가 더 시급했다. 떨어진 자리가 흑연기사단 진영과 너무 가까웠고, 병사들이 주변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어 들키기에는 시간문제였다. 루도는 속으로 갖은 욕설을 난무하며 - 왜 로크는 급정지를 한 건지, 왜 하필 떨어져도 적 부대 근처인지, 왜 그놈의 나무구멍은 그리도 미끄러웠던 건지 등등 - 포복자세로 천천히 기어가기 시작했다.

마침 공터 가장자리에 다 쓰러져가는 마구간 하나가 보였다. 지붕이 완전히 날아간 그 목조건물은 말을 묶어놓기에도, 사람이 머무르기에도 마땅치 않아 보였다. 저기라면 사람이 접근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미치자 루도는 신이 나서 속도를 올렸다. 기어가는 중간 중간 검이 부딪혀 쇳소리가 났지만, 워낙 기사단 쪽이 시끌벅적해서 그런 소음쯤은 간단히 묻혔다.

마구간이 코앞에 다가오자 루도는 재빨리 일어나 새발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볏짚 더미가 가득 쌓여 있을 뿐 병사들이 사용한 흔적은 전혀 없었다. 그는 주저 없이 볏짚 속으로 뛰어들었다.

지푸라기로 몸을 가리고 나자 흑연기사단에게 관심이 쏠렸다. 마침 나무판자 사이로 틈이 있어 바깥의 상황을 훔쳐볼 수 있었다.


“엇...”


그렇게 기사단의 동태를 파악한 순간, 그리고 나무 위에서 들었던 비명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확인한 순간 자기도 모르게 짓눌린 탄성이 터져 나왔다. 여태껏 많은 끔찍한 광경을 보아왔지만, 지금처럼 구역질 나고 역겨운 것도 없었다.


“꺄아악, 살려주세요!”


“히익, 아아악! 아버지!!”


일단의 병사들이 온몸을 발가벗은 채로, 민간인으로 보이는 여성들을 능욕하고 있었다. 아마도 근처의 마을에서 끌고 온 것이리라. 병사들은 일부러 결박도 하지 않고는 도망가려는 여자들을 마음껏 희롱하고 있었다. 어떤 자는 저항하는 여성의 배를 마구 때렸고, 어떤 자는 기력이 다해 실신한 여성을 유린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어떤 자는 기어서 도망치는 여인을 발로 자근자근 밟으며 웃고 있었다.


“어...으...”


분노로 눈이 뒤집힐 것 같았다. 자제하려고 해도 몸이 떨려 지푸라기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어금니를 꽉 깨물지 않으면 그대로 쌍욕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저게 인간의 탈을 쓰고 할 수 있는 짓이란 말인가. 아무리 이곳이 전장이라지만, 저런 비인도적인 처사가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세상이 썩었다 하지만.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여기서 뛰쳐나가면 발가벗은 자들은 10초도 안 되어 모조리 베어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뒤에는? 한 조각 남은 이성이 그를 붙들었다. 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백 명에 달하는 인원을 상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발악을 해 한두 명 더 베어본들, 결국 개죽음뿐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루도는 더욱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결국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볏짚 더미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쪽 기분은 알겠는데, 지금은 잠자코 있는 게 좋을 걸요.”


“!!”


자신 말고도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루도는 소스라치게 놀라 검을 뽑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 불청객은 그가 쓸데없는 소음을 내지 못하도록 재빨리 그의 손목을 낚아챘다.


“쉿! 괜한 소동 일으키지 마시죠. 아무리 비전투 중이라고 해도 훈련된 병사의 감은 무시 못 하니까.”


“다, 당신은??”


“글쎄요. 그쪽도 흑연기사단을 피해 이리로 숨어 들어온 게 아닌가요? 그럼 서로 싸울 일은 없을 거라 보는데.”


루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 낯선 남자를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됐지만, 적어도 여기서 소동을 피워 밖의 병사들에게 들키는 것보단 나을 듯했다. 그는 잠시 이야기를 나눠보기로 하고 몸에서 힘을 뺐다.


“...그런가요? 저는 델...음, 델키아와 레인스터를 오가는 여행잡니다만, 그쪽은 백천기사단 소속이신가요?”


“그건 아니고. 뭐 나도 지나가던 여행자라고 해두죠. 애초에 리크나이츠 국민도 아니니까.”


‘아, 텔아단에서 온 사람인가?’


제 3국에서 온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자 오히려 안심이 됐다. 아스트리카 쪽이라면 전투는 피할 수 없을 테고, 리크나이츠 쪽이라면 자신의 목에 걸린 현상금이 문제가 됐을 테니 말이다.

그 남자가 말했다.


“그런데, 잘도 여기까지 기어들어오셨네. 혼자 있는 걸 보니 싸우러 온 거 같진 않은데.”


남자는 훨씬 전부터 짚더미 속에 있었는지 루도의 잠입과정을 훤히 꿰고 있었다. 루도는 괜히 무안해져 이마를 긁적였다.


“예, 뭐...어쩌다 보니 길을 잃어서...원래는 같이 여행하는 일행이 있거든요.”


“그래요? 그럼 서둘러 여기서 빠져나가야겠네. 마침 나도 좀 있다가 도망칠 생각인데, 나랑 손잡는 게 어때요?”


“음...좋아요.”


루도는 쭈뼛거리면서도 그의 제의를 승낙했다. 의심 가는 것도 없지 않았지만, 그 남자가 루도를 잡는 게 목적이라면 애초에 처음부터 소리를 지르면 될 일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리크나이츠나 아스트리카도 아닌, 제 3국 국민이라고 밝힌 것도 신뢰가 가는 부분이었다.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건 어느 쪽의 이익도 받지 않겠다는 걸 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장은 잠자코 창고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흑연기사단이 떠날 때까지, 혹은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가 아니면 자그마한 인기척도 바로 발각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루도는 그 시간이면 적어도 이 남자가 믿을 만한 인물인지 판단하기에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결정 빨라서 좋네요. 그럼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서로 통성명이나 해볼까요.”


그 남자가 지푸라기를 헤치며 다가왔다. 그는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스럽게 악수를 청했고, 루도는 어색하게 웃으며 이를 받았다.


“저는...”


“제 이름은...”


순간 둘의 입가가 싹 굳어졌다. 처음 보아야 할 서로의 얼굴에서 강력한 위화감을 느낀 것이었다. 특히 놀란 쪽은 루도였다. 그 남자의 쭉 째진 눈, 갸름한 턱선, 그리고 지푸라기에 가려져 있지만 눈이 내린 것처럼 새하얀 백발까지. 당장 떠오르진 않아도 분명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는 얼굴. 그러나 결코 유쾌한 기억이 연상되진 않는 얼굴이었다.


“음...?”


그렇게 고개를 갸웃거리길 수차례. 이윽고 그 남자의 정체가 파악되자 루도는 경악하여 허리춤에 손을 가져가려 했다. 그러나 하필 오른손이 악수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으아앗?! 너, 위첼!”


황급히 오른손을 빼내려 했지만 마침 그때 위첼의 마주 쥔 손에도 힘이 들어왔다. 그 역시 기억해낸 것이었다.


“헐...맙소사, 펠아람의 아이?!”


어째서 안개송곳니가 여기에 있는지, 어째서 루도가 아직까지 살아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둘은 허겁지겁 무기를 뽑으려 버둥거렸다. 상대에게 자유를 허락한 순간이 승부의 기점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오른손은 여전히 뼈가 으스러져라 악수를 유지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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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 람의 계승자 - ep.5 - 사냥감의 반전(1) +1 15.05.04 774 24 20쪽
214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5) +2 15.05.04 710 24 15쪽
213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4) +2 15.05.04 720 25 23쪽
212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3) +3 15.05.03 845 29 18쪽
211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2) +3 15.05.03 764 22 23쪽
210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1) +2 15.05.03 853 23 20쪽
209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7) +5 15.05.03 795 28 25쪽
208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6) +2 15.05.03 894 24 22쪽
207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5) +4 15.05.02 938 29 21쪽
206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4) +1 15.05.02 884 27 20쪽
205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3) +2 15.05.02 690 24 21쪽
204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2) +2 15.05.02 767 24 24쪽
203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1) +2 15.05.02 586 24 22쪽
202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6) +3 15.05.02 696 28 18쪽
201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5) +5 15.04.29 863 24 19쪽
200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4) +1 15.04.29 937 24 26쪽
199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3) +1 15.04.29 789 24 24쪽
198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2) +3 15.04.29 812 26 18쪽
197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1) +1 15.04.29 758 24 17쪽
196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8) +4 15.04.28 904 28 16쪽
195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7) +3 15.04.28 840 25 20쪽
194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6) +3 15.04.27 711 26 19쪽
193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5) +3 15.04.27 756 22 17쪽
192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4) +2 15.04.27 731 22 18쪽
»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3) +1 15.04.27 731 30 18쪽
190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2) +2 15.04.27 758 27 19쪽
189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1) +2 15.04.27 789 31 18쪽
188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完) +1 15.04.27 599 33 18쪽
187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5) +4 15.04.26 733 24 17쪽
186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4) +1 15.04.26 928 28 16쪽
185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3) +2 15.04.26 739 26 20쪽
184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2) +6 15.04.23 779 28 15쪽
183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1) +3 15.04.23 840 26 19쪽
182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2) +2 15.04.23 755 25 17쪽
181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1) +3 15.04.23 767 26 15쪽
180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0) +1 15.04.23 682 25 22쪽
179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9) +3 15.04.22 811 29 16쪽
178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8) +3 15.04.22 846 27 15쪽
177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7) +1 15.04.22 777 29 18쪽
176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6) +1 15.04.22 790 23 18쪽
175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5) +2 15.04.22 765 29 15쪽
174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4) +3 15.04.22 911 25 18쪽
173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3) +5 15.04.21 767 27 16쪽
172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2) +2 15.04.21 922 25 14쪽
171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 +3 15.04.21 806 25 17쪽
170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8) +3 15.04.21 730 24 21쪽
169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7) +2 15.04.21 703 19 15쪽
168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6) +4 15.04.20 751 24 18쪽
167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5) +2 15.04.20 655 20 18쪽
166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4) +1 15.04.20 767 23 17쪽
165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3) +2 15.04.20 738 24 16쪽
164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2) +3 15.04.20 809 20 16쪽
163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1) +1 15.04.20 821 22 21쪽
162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6) +1 15.04.20 830 29 14쪽
161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5) +2 15.04.20 711 25 18쪽
160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4) +3 15.04.19 865 28 18쪽
159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3) +3 15.04.19 947 28 18쪽
158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2) +3 15.04.19 901 26 22쪽
157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1) +5 15.04.19 1,210 46 22쪽
156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10) +6 15.04.18 901 26 21쪽
155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9) +3 15.04.18 772 26 18쪽
154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8) +1 15.04.18 657 24 19쪽
153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7) +2 15.04.18 687 26 18쪽
152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6) +1 15.04.18 748 27 17쪽
151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5) +4 15.04.18 713 23 16쪽
150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4) +1 15.04.18 669 24 17쪽
149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3) +2 15.04.18 754 22 17쪽
148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2) +3 15.04.16 849 29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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