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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연 님의 서재입니다.

람의 계승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저스연
작품등록일 :
2015.03.21 02:01
최근연재일 :
2015.09.01 03:28
연재수 :
34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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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9,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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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57
글자수 :
2,844,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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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5.02 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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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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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글자
18쪽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6)

DUMMY

하지만 유미르네는 싸울 마음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이칼롯 주위에 쓰러진 사냥꾼들의 몸을 뒤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꽤 많은 양의 금화가 그녀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이칼롯은 굳이 명예니 인륜이니 하는 것을 언급하진 않았다. 하지만 긴장을 거두려 해도, 그녀의 움직임만은 시야에서 놓칠 수가 없었다.

끊임없이 이칼롯의 공격 사정권 안을 맴돌고 있다. 게다가 등을 돌리고 있어 뒤에서 칼을 찌르면 꼼짝없이 당해야 할 판이다. 얼마든지 공격해보라는 듯한 그 움직임은 심지어 조롱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유미르네는 쓰러진 남자의 주머니를 뒤적이며 말했다.


“아직 약속시간까진 꽤 남았는데. 왜 혼자서 난동을 부리고 있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고.”


“일이 좀 틀어졌다. 추격대가 이 도시까지 쫓아오는 바람에.”


“추격대? 공주님을 쫓는 사람 말하는 거?”


유미르네의 어조는 한 귀로 흘릴 가십거리라도 나누는 것처럼 가벼웠다. 그녀는 모든 사건의 중심에 레미나가 있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무리도 아니다. 그녀는 아직 일행에 걸린 현상금의 진실도 모르고, 신의 아이에 대해서는 더더욱 모를 테니까.

이칼롯은 길게 날숨을 뱉었다. 한바탕 일을 벌인 탓인지 그가 있는 거리는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게 말끔해졌다. 멀리서 절그럭거리는 갑옷 소리가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우리를 쫓는 거지. 사실 공주님은 우리와 별로 연관이 없어.”


그러자 유미르네는 입을 벌리며 활짝 웃었다. 누가 보아도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가식이 뚝뚝 묻어났지만 그녀는 오히려 그걸 알아채 주길 바라는 것 같았다.


“어머, 역시 7천 골드 현상금은 허투루 걸린 게 아니라는 거네. 추격자는 뭐 하는 사람들인데요?”


“로샤단을 습격한 놈들.”


돈을 챙기던 그녀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잠깐 뿐으로, 그녀는 금세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히 물었다.


“람이랑 카토르를 죽였다는 녀석들이요?”


“진짜 범인은 따로 있고...우릴 쫓는 건 그 녀석들에게 사주를 받은 조직이야.”


“흐응? 꽤 자세히 알고 있네요, 당신. 그래, 그 사주를 받았다는 하청인은 뭐하는 사람들?”


생글생글한 미소는 본심을 감추려는 듯 여전히 입가에 머물러 있었다. 빼앗은 돈은 몇 번 손바닥 위에서 굴리고 나서 허벅지에 맨 가죽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칼롯은 잠시 대답하기를 주저했다. 생각해보니 그녀도 로샤단과 아무 연관이 없진 않았다. 발렌스 상회, 그리고 아케니온. 그녀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말을 돌리거나 아니면 거짓을 대답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굳이 거짓을 고해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그녀 역시 평범한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이칼롯은 눈을 꾸욱 감았다 떼며 말했다.


“아케니온이다.”


“...에..?”


분주하던 그녀의 움직임이 일순 정지했다. 그건 조금 전 멈칫거릴 때와는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이칼롯은 뒤돌아선 그녀의 어깨너머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유미르네는 하던 일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리에 두른 망토는 무릎 아래까지를 완전히 가리고 있어서, 검을 쥐었는지 어쨌는지도 전혀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소매를 걷어붙여 훤히 드러난 손목에는 파르스름한 핏줄이 돋아 있었다.


“아케니온? 그 아케니온? 델키아 서쪽 외곽로 경비를 맡던?”


“.....”


단순히 한때 정규군 소속이었던 아케니온이 지금 일행을 쫓는다는 사실에 놀란 것은 아니다. 그랬다면 로샤단 이야기를 꺼냈을 때에도 별반 반응이 없었던 그녀가 이렇게 동요할 리 없었다.

역시 그녀는 발렌스 상회를 전멸시킨 게 아케니온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꺄하하하, 아하하하핫!!”


갑자기 그녀는 허리를 꺾으며 자지러지게 웃기 시작했다. 그 웃음소리는 경쾌하다 못해 섬뜩하기까지 하여, 이칼롯조차 흠칫 놀라 물러설 정도였다.


“아하하, 킥킥킥킥!! 아, 정말...킥킥...”


그녀의 폭소는 끝날 듯 끝날 듯 멈추지 않았다. 이칼롯은 물론이거니와 근처에 부상을 입은 채 앉아있던 사냥꾼들마저 그녀의 기색에 눌려 숨을 죽였다. 그렇게 1분가량이 지났을까, 유미르네는 간신히 진정이 된 듯 허리를 세웠다. 눈가에는 너무 웃은 탓인지 아직도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리고나서 그녀는 처음으로 이칼롯과 눈을 마주쳤다.


“정말 재미있네. 그렇지 않아요?”


“.....”


“그래서, 그 아케니온은 지금 어디 있어요? 제랄드는?”


“곧 도착하겠지. 그러니 최대한 빨리 이 도시를 떠야 돼.”


그때 광장 골목에서 발자국 소리가 분주하게 들려왔다. 10명, 아니 20명 쯤? 소대 규모의 인원이 열을 지어 달려오는 소리였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멈추고 소리가 난 쪽으로 눈을 돌렸다. 정규군일까, 아니면 사냥꾼? 만약 정규군이 온다면 더 이상 이곳에 있을 필요는 없었다.


“여기 있다! 이칼롯 제르비안이다!”


소리의 주인공들이 도착했을 때, 이칼롯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낭패다. 모습을 드러낸 것은 사냥꾼들이었다. 정규군 마크도 없이 입고 있는 갑옷도 제각각이다. 그러나 그들은 조금 전 주먹구구식으로 덤비던 뜨내기들과는 진형부터가 달랐다.

사냥꾼들은 대열을 갖춘 채 석궁을 조준했다. 아무리 정규군을 끌어들일 때까지 버티는 게 목적이라지만, 이런 훈련된 자들을 상대로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지금은 일단 몸을 피할 시기였다.


“어이, 나한테서 떨어져! 빨리 몸을 숨....”


그러나 다음 순간 이칼롯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도망치기는커녕, 유미르네가 사냥꾼들이 있는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녀는 옆얼굴로 찡긋 윙크를 해보였다.


“지원 부탁해요~.”


성큼성큼, 늘씬한 다리가 좌우로 엇갈릴 때마다 유미르네의 몸이 몇 미터씩 앞으로 움직였다. 보폭이 말도 안 될 만큼 넓다. 상체를 바짝 숙인 채 달려나가는 그녀의 모습은 흡사 검은 표범이 질주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채 조준을 끝내기도 전에 20미터가량 거리를 좁힌 유미르네를 보며 사냥꾼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칼롯을 집중사격하려고 자세를 잡았더니 엉뚱한 여자가 자신들을 노리고 달려오는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자 사냥꾼들은 조준점을 어디로 잡아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이칼롯을 쏴야 하는가, 아니면 돌진해오는 여자를 잡아야 하는가?


“저, 저 여자 뭐야?! 일단 쏴! 저년부터 죽여!!”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가 당황하여 외쳤다. 그러자 석궁이 일제히 달려오는 유미르네를 향했다.

그러나 막 석궁을 발사하려는 찰나 갑자기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사냥꾼들은 어리둥절하여 고개를 치켜들었다.

유미르네는 어느새 광장 가장자리의 울타리를 달리고 있었다. 그러다 다시 한 번 도약하여 돌담 위에 올라섰다. 그녀는 상대가 조준점을 잡지 못하게 측면으로, 그리고 수직으로 움직였다. 어느새 2미터가 넘는 위치로 올라간 그녀를 보며 사냥꾼들은 우왕좌왕했다. 그들은 부랴부랴 석궁을 위쪽으로 향했다.


“뭐, 뭐하고 있어? 어서 떨어뜨리라고!!”


“어...어?”


그러나 조준점은 다시 한 번 흐트러졌다. 유미르네가 또다시 도약한 것이다. 몸을 날린 후 그녀가 보여준 움직임은 차라리 묘기에 가까웠다. 그녀는 반쯤 열린 건물 현관문을 디디고, 다시 도약하여 벽이 있는 방향으로 뛰었다. 거기서 건물 간판을 디딤대 삼아 다시 한 번 점프하고, 그대로 벽을 차 3층의 테라스로 올라섰다.


“...대체 저건...”


사냥꾼들이 보기에 그녀는 영락없이 벽을 달리고 있었다. 아니, 허공을 날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미처 화살 한 번 쏠 겨를도 없이 그들은 유미르네에게 측면을 붙잡혔다. 이제 사냥꾼과 그녀 사이의 거리는 10미터도 되지 않았다.

사냥꾼들은 너무나도 가까이, 그리고 높이 올라간 그녀를 보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칼롯을 노리고 짠 2열 종대는 측면을 잡히자 그대로 2열 횡대로 바뀌었다. 가까이 있는 자는 각도가 나오지 않아서, 멀리 있는 자들은 앞사람에게 시야가 가려 조준을 할 수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유미르네는 햇빛을 완벽히 등지고 있어서, 사냥꾼들은 제대로 위를 쳐다보기도 힘들었다.


“쏴! 쏘라고! 쏴아!”


사태가 급박해지자 사냥꾼들은 막무가내로 석궁을 쏘아댔다. 그러나 제대로 조준도 하지 않은 화살이 맞을 리가 없었다. 위협도 되지 않는 화살을 피하고 나서 유미르네는 테라스 난간을 박차고 도약했다.


“어....?!”


쾌청한 가을 하늘에 칠흑의 망토가 호를 그렸다. 그것을 바라보는 사냥꾼들의 고개는 어느새 수직으로 치켜 들어져 있었다. 바라보는 시선에 생긋 미소 지어 화답하면서, 유미르네는 대열의 정 가운데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카카카칵. 피는 그리 많이 튀진 않았으나, 무언가가 갑옷을 뚫는 소리는 모두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그녀의 망토가 완만한 원호를 만들며 빙그르 돌았다. 뒤에 있던 자는 망토의 펄럭임에서 발생한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검은 것들 사이로 쉭쉭거리며 지나가는 새하얀 빛줄기 같은 것도 볼 수 있었다.


“으아아아...?!”


“커...끄어...꺽...”


“끄아악!!”


그녀를 중심으로 여섯 명의 남자가 동시에 나동그라졌다. 비명을 지르는 자는 손목의 동맥을 찔렸거나 숏소드로 목을 베인 자들이었다. 그리고 비명을 지르지 않는 자는 가슴과 이마에 구멍이 나 있었다.

유미르네는 쓰러진 시체를 밟고 다시 뛰었다.

그것은 일방적인 학살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적이 진형 한복판에 뛰어든 상황에서 사냥꾼들은 화살 한 번 제대로 쏘지 못하고 갈팡질팡했다. 한 남자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석궁을 쏘았다가 애꿎은 뒤에 있는 동료만 맞추었다. 혼란한 틈을 타 유미르네는 정확히 상대의 급소만을 노렸다. 사냥꾼들이 석궁을 버리고 칼을 뽑아들기까진 5초 남짓의 시간이 걸렸지만 그 사이 유미르네는 아홉 명을 쓰러뜨렸다.


“뭐...뭐 이런 년이...”


“일단 둘러싸! 동시에 공격하라고!”


그 뒤로도 그녀는 종횡무진 누비며 사냥꾼을 찌르고 다녔다. 그러나 상대방 역시 전열을 가다듬은 것인지 조금 전처럼 속수무책으로 당하진 않았다.


“흐아압!”


채, 채앵. 두 명의 남자가 동시에 그녀를 노리고 치고 들어왔다. 가슴과 허벅지를 겨냥한 공격이었다. 유미르네는 허벅지 쪽은 에스터크로 공격을 흘리고, 가슴 쪽은 숏소드를 들어 막았다. 뒤이어 상대가 발길질을 날리자 그녀는 뒤로 재주넘기를 하며 물러났다. 그러자 우두머리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됐다! 거리 벌렸음 끝난 거지. 어서 석궁으로 끝내버려.”


확실히 몇몇은 아직도 석궁이 장전된 채라, 그대로 발사만 하면 명중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유미르네는 도망치기는커녕, 배시시 웃으며 손가락을 들었다. 그녀가 가리킨 쪽은 사냥꾼들의 후방으로, 원래 이칼롯과 그녀가 있던 방향이었다.

그즈음 사냥꾼들도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존재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혼비백산하여 뒤를 돌아보았지만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유미르네에게 정신이 팔려 시간을 보내는 사이, 이칼롯이 접근한 것이다.

이번에는 노오란 섬광이 아치를 그렸다. 햇빛을 반사한 텔슈피드는 지나간 자리에 궤적을 남길 만큼 환하게 빛났다.


“히, 흐아아악...”


순식간에 다섯이 쓰러졌다. 이제 남은 건 네 명이었다. 사냥꾼들은 이미 전의를 상실한 듯 앞뒤를 번갈아 보며 몸을 떨었다. 앞에는 이칼롯, 뒤에는 유미르네. 그들은 어느새 퇴로조차 차단당한 채였다. 부들부들 떠는 그들을 보며 이칼롯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라.”


“...뭐, 뭐?”


“부상자 추려서 꺼지라고.”


그는 검을 집어넣으며 자신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표현했다. 사냥꾼들은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는 모습이었지만, 이칼롯이 자신들에게서 완전히 시선을 거두는 것을 보곤 황급히 쓰러진 동료를 부축해 자리를 떠났다. 그러나 이칼롯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데려갈 수 있는 인원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특히 유미르네에게 당한 쪽은 전부 죽었거나, 아니면 사망이 확정된 자들이었다.

이칼롯은 건물 벽에 기댄 채 숨을 헐떡대는 남자를 흘겨보았다. 그는 숏소드에 목을 베였다. 즉사할 정도로 깊은 상처는 아니지만, 동맥이 잘려 살아날 가망은 없었다.

살인 자체를 탓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정당방위였으니까. 그러나 유미르네의 망설임 없는, 섬뜩하다시피 한 칼놀림은 오래도록 이칼롯의 기억 속에 남았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살인에 능숙하다. 여태까지 얼마나 사람을 죽여 온 것일까.

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미르네는 방긋 웃으며 다가왔다.


“나 결정했어요. 공주님에게 고용되는 걸로. 그럼 이제 우린 같은 편이죠?”


“...아케니온 때문에?”


그러자 그녀의 눈동자가 이채롭게 빛났다. 그녀는 이칼롯을 보고 있었지만, 그녀의 동공에는 아무것도 비춰지지 않았다.


“흐응, 그것도 있고.”


다시 성문 방향에서 철컥대는 쇳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야말로 경비대가 오는 것인지, 요란한 말발굽소리도 귓전을 때렸다. 두 사람은 다시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십여 구가 넘는 시체가 거리에 즐비했지만, 두 사람의 옷자락에는 피 한 방울 묻어있지 않았다.


유미르네가 합류하자 일은 한결 수월해졌다. 그녀는 위병 하나 없는 성벽 위로 올라가 서문의 동태를 파악했다. 이윽고 루도 일행이 탄 마차가 성 밖으로 나가는 게 보이자 그녀는 손을 흔들어 이칼롯에게 알려주었다. 이칼롯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남문으로 말을 몰았다. 옷을 갈아입고, 예의 투구를 머리 위에 눌러쓴 채였다.

기병대가 도착했을 때 그들이 목격한 것은 광장에 널브러진 십여 구의 시신이었다. 막 시체를 조사하고 있자니 한 여인이 술집에서 뛰쳐나왔다. 유미르네였다. 그녀는 블라우스와 망토를 벗고, 셔츠 위에 앞치마를 둘렀다. 그러고 있자니 영락없는 술집 점원의 행색이었다.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말했다.


“이, 이, 이칼롯 제르비안! 저쪽, 저쪽으로 갔어요. 아아-! 그 살인마.”


그녀는 동쪽을 가리키며 몸을 덜덜 떨었다. 그러자 기병대는 우르르 동문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연기가 어찌나 리얼했는지 의심하는 사람 하나 없었다. 심지어 창백해진 그녀를 달래려고 다가오는 마음씨 고운 기사도 있었다. 물론 그건 그녀가 바라는 게 아니었다.


“저, 저는 괜찮으니 어서 그 살인마를 잡으러 가주셔요. 어서요.”


유미르네는 멀어져가는 기사들을 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마침내 아무도 남지 않게 되자 그녀는 옷을 주섬주섬 갈아입었다. 아까 죽인 시신에서 돈 될 것을 챙기는 일도 잊지 않았다.

그녀는 모자를 탁탁 털어 맵시 있게 눌러 쓰고는 서문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동하던 도중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까...까마귀?”


다르무스에서부터 동행한 사냥꾼이다. 동료는 아니지만, 끈질기게 치근덕대며 달라붙는지라 그녀도 별반 동행을 거부하진 않았다. 그쪽에서 먼저 여비며 밥값을 지불해주겠다는데 거절한 이유는 없으니까.


“어머, 웬일이에요? 아직도 술에 쩔어있는 줄 알았더니.”


유미르네는 생글거리며 말했다. 그러나 그 남자는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 채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는 부산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저기, 까마귀. 어떻게 된 거야? 조금 전에 사냥꾼 한 무리가 피떡이 돼서 실려 왔는데, 거 있잖아! 뤼제폰 백국에서 온 녀석들.”


“흐응, 그래서요?”


“그중 한 녀석이 그...네, 네가 그놈들을 공격했다고 하던데...”


유미르네는 입을 다물었다. 입술을 꾹 다문 채 담뿍 짓는 미소는 귀에 걸릴 것처럼 환했다.


“난 모르는 일인데? 누가 그런 헛소리를 해요?”


“그, 그렇지? 네가 그런 돈 안 되는 일을 할리 없잖아. 그놈들이 사람을 잘못...본 거겠지?”


남자는 그녀의 미소를 따라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남자의 가슴에 구멍이 뚫렸다. 자신이 죽은지도 모른 채 공허하게 기울어지는 남자를 바라보며 유미르네가 말했다.


“돈이 안 될 리가 없잖아, 멍청한 아저씨.”


유미르네는 잽싸게 시체에서 돈을 챙기고는 성곽 위로 올라갔다.

추수기에 접어든 들판에는 밀이며 귀리가 잔뜩 익어가고 있었지만, 거두어갈 농부 하나 없어 황량하기만 했다. 그 들판의 물결을 눈으로 쫓고 있자니 끝자락에, 이정표가 세워진 삼거리에 마차 한 대가 서 있는 게 보였다. 로샤단의 마차다.

마차를 응시하는 그녀의 눈동자가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그리고나서 그녀는 단숨에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5미터 가까이 되는 높이였지만 그녀는 고양이처럼 사뿐히 착지했다. 시야가 트이는 곳으로 나와서인지 얼굴을 때리는 바람이 한층 시원해졌다.

그녀는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고는, 까르르 웃으며 마차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꺄하하, 세상에나 세상에나. 난 정말 어찌나 운이 좋은지. 벌써 죽일 사람이 산더미처럼 쌓였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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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2) +3 15.05.03 763 22 23쪽
210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1) +2 15.05.03 853 23 20쪽
209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7) +5 15.05.03 795 28 25쪽
208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6) +2 15.05.03 894 24 22쪽
207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5) +4 15.05.02 938 29 21쪽
206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4) +1 15.05.02 884 27 20쪽
205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3) +2 15.05.02 690 24 21쪽
204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2) +2 15.05.02 767 24 24쪽
203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1) +2 15.05.02 586 24 22쪽
»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6) +3 15.05.02 696 28 18쪽
201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5) +5 15.04.29 863 24 19쪽
200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4) +1 15.04.29 937 24 26쪽
199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3) +1 15.04.29 789 24 24쪽
198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2) +3 15.04.29 812 26 18쪽
197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1) +1 15.04.29 758 24 17쪽
196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8) +4 15.04.28 904 28 16쪽
195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7) +3 15.04.28 840 25 20쪽
194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6) +3 15.04.27 711 26 19쪽
193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5) +3 15.04.27 756 22 17쪽
192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4) +2 15.04.27 731 22 18쪽
191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3) +1 15.04.27 730 30 18쪽
190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2) +2 15.04.27 758 27 19쪽
189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1) +2 15.04.27 789 31 18쪽
188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完) +1 15.04.27 599 33 18쪽
187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5) +4 15.04.26 733 24 17쪽
186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4) +1 15.04.26 928 28 16쪽
185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3) +2 15.04.26 739 26 20쪽
184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2) +6 15.04.23 779 28 15쪽
183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1) +3 15.04.23 839 26 19쪽
182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2) +2 15.04.23 755 25 17쪽
181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1) +3 15.04.23 767 26 15쪽
180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0) +1 15.04.23 682 25 22쪽
179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9) +3 15.04.22 811 29 16쪽
178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8) +3 15.04.22 846 27 15쪽
177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7) +1 15.04.22 776 29 18쪽
176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6) +1 15.04.22 790 23 18쪽
175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5) +2 15.04.22 765 29 15쪽
174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4) +3 15.04.22 911 25 18쪽
173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3) +5 15.04.21 767 27 16쪽
172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2) +2 15.04.21 922 25 14쪽
171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 +3 15.04.21 805 25 17쪽
170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8) +3 15.04.21 729 24 21쪽
169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7) +2 15.04.21 703 19 15쪽
168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6) +4 15.04.20 750 24 18쪽
167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5) +2 15.04.20 655 20 18쪽
166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4) +1 15.04.20 767 23 17쪽
165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3) +2 15.04.20 738 24 16쪽
164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2) +3 15.04.20 809 20 16쪽
163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1) +1 15.04.20 821 22 21쪽
162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6) +1 15.04.20 830 29 14쪽
161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5) +2 15.04.20 711 25 18쪽
160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4) +3 15.04.19 865 28 18쪽
159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3) +3 15.04.19 946 28 18쪽
158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2) +3 15.04.19 901 26 22쪽
157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1) +5 15.04.19 1,210 46 22쪽
156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10) +6 15.04.18 901 26 21쪽
155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9) +3 15.04.18 772 26 18쪽
154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8) +1 15.04.18 656 24 19쪽
153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7) +2 15.04.18 687 26 18쪽
152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6) +1 15.04.18 748 27 17쪽
151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5) +4 15.04.18 713 23 16쪽
150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4) +1 15.04.18 669 24 17쪽
149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3) +2 15.04.18 754 22 17쪽
148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2) +3 15.04.16 849 29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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