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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연 님의 서재입니다.

람의 계승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저스연
작품등록일 :
2015.03.21 02:01
최근연재일 :
2015.09.01 03:28
연재수 :
34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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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844,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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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27 0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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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글자
18쪽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1)

DUMMY

“어제 일은 정말 감사합니다. 그...저를 믿어주셔서....”


“시시콜콜한 말 따윈 필요 없느니라. 가거라. 가서 스스로를 증명해 보이도록 하라. 그게 내 믿음의 보상이 될 터이니.”


해풍을 받은 그녀의 머릿결이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물결 쳤다. 수평선 너머에서 불어온 바람은 그녀가 입은 드레스를 금방이라도 찢어버릴 듯한 기세였다. 그러나 케리아돌은 그 자리에 굳건히 선 채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다. 모아 쥔 손은 양산을 지팡이 삼아 땅에 고정시킨 채, 어깨너비로 벌린 두 발은 그대로 대지에 뿌리내린 듯.

그녀는 망설이지 않는다.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스스로가 믿는 바를 관철한다. 천 년을 살아온 드래곤이,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은, 그러나 감당할 수 없는 힘을 손에 쥔 소년을 보며 떠올린 생각은 무엇일까.

루도는 그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 그녀가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케리아돌, 지난번에 얘기하지 않은 게 하나 있어요. 저는 죽어가는 사람의 생각이 보여요. 그 사람이 느끼는 고통, 감정, 비애...그런 걸 몇 번이고 공유했어요. 이건 아마도 펠아람의 아이 때문에 생긴 능력이겠죠. 생각해보면 녀석은 훨씬 전부터 저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저는 어쩌면...”


각성이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다, 라는 말은 어째서인지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옆에서 메디치가 머쓱하게 책갈피를 뒤적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또 무슨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기다림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녀가 말했다.


“그는 적인가?”


“예? 그건....”


“그대는 과거를 보았느니라. 에리안델을 기억하느냐? 우리는 그 아이를 차별하지 않았다. 각성 전에도 각성 후에도, 그녀는 늘 한결같았지.”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잘 알고 있었다. ‘저주’만 아니라면 신의 아이는 더없이 유용한 존재이다.

그러나 하나의 몸에 두 개의 영혼. 그리고 세상은 빙의 당한 쪽을 「숙주」라 부른다.


“지향하는 바가 같다면, 그 또한 그대의 꿈을 이뤄줄 것이니. 인간은 단지 살아 숨쉬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지. 그대가 정말 실현시키고 싶은 이상이 있다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이루고 싶은 게 있다면, 그때는 그자에게 맡겨보는 것도 좋을 것이니라.”


그녀의 충고는 루도에게라기보다는 펠아람의 아이에게 향했다고 보는 게 맞았다. 숙주와 신의 아이의 관계, 그것은 기생인가 공생인가? 그 물음은 소년의 가슴 속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죽음을 보려 한다는 것은 그만큼 삶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 게다가 펠아람의 아이는 지금까지 몇 번씩이나 각성의 징후를 보여왔지. 하지만 루도, 그대는 아직 육체의 소유권을 유지하고 있느니라. 이것은 앞서 말한 내용과 명백히 상충되는 사실이다. 때문에 나는 확답을 내려줄 수가 없구나.”


그녀는 천천히 가로저으며, 또 천천히 미소 지었다. 그녀의 미소는 경박하지 않다. 오히려 모든 걸 알고 있는 듯한 자조적인 웃음이다. 그 때문인지, 마주한 상대방은 그 미소를 보며 겨울철의 벽난로 같은 포근함을 느낄 수 있었다.

케리아돌은 왼손으로 루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따뜻한 온기가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갔다.


“어쩌면 그 아이도 답을 찾고 있는 중일 게다. 신의 아이 또한 ‘인간’이라면 말이지.”


“인간...”


루도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요소는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천만 개의 금화도, 억만 개의 포도주도 아닌, 그저 시공을 꿰뚫는 한마디의 말.

답은 얻었다. 루도는 마지막으로 깍듯이 인사를 하곤 서둘러 로크에 올라탔다.


“너 이제 죽어서라도 카잘산맥에 가야겠다?”


멀리서 대화를 엿들었는지 디리터가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루도는 씨익 웃으며 그와 주먹을 맞부딪혔다.


“안 죽어도 갈 수 있어.”


모든 준비가 끝나자 메디치는 일행 각자에게 악수를 청했다. 차례대로 돌아가며 작별인사를 하던 그는, 어째서인지 이칼롯의 앞에 서자 품을 뒤적이며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가 꺼낸 것은 은테가 달린 자그마한 안경이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받아두십시오. 제가 드리는 약소한 선물입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제가 시력이 좋은 편이라...”


-하하, 그래도 가지고 계십시오. 착용하고 다니다보면 언젠가 기이한 게 보일 때가 있을 겁니다.


그러자 이칼롯은 더 거절하지 않고 안경을 주머니 안에 집어넣었다.

메디치가 로크의 귀에 대고 뭐라 속삭이자 녀석이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단지 몸을 일으킨 것만으로도 5미터는 우습게 넘어가는 그 높이에 에레이시아는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질렀고, 반대로 레미나는 까르륵 웃으며 옆에 앉은 제리온을 들볶았다.

메디치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육지에 도착하면 로크의 귀에 대고 ‘끼취리 끼끼취릭’이라고 크게 말하십시오. 억양은 상관없으니, 발음만 정확히 하시면 됩니다. 뭐라고요?


“끼...끼리리 끼끼끼취?”


-끼취리 끼끼취릭입니다. 자 그럼, 류이너스의 가호가 함께 하길.


그걸 마지막으로 로크가 힘차게 날아올랐다. 녀석은 구름에 닿을 때까지 거의 수직으로 상승한 후, 날개를 쭉 펴고 활강하듯이 비행하기 시작했다. 에레이시아를 포함한 몇몇이 숨넘어가는 비명을 질렀지만, 전부 전방에서 불어오는 어마어마한 맞바람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히이이이이익??!!”



하늘을 나는 건 어떤 기분일까.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창공을 날아다니는 새를 보며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봤을 문제다. 흔히 떠오르는 건 자유, 해방감, 정복감 따위이다. 그러나 막상 하늘로 올라가고 보니, 그리고 눈이 떠지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바람을 가르고 있자니 역시 사람은 땅을 디디고 살아야 할 동물이라는 사실이 절실하게 다가왔다.


“우이으이으...꺄이우아우하하!”


“얼굴 들지 마, 이 미친년아!”


제리온이 촐싹대는 레미나를 향해 욕설을 내뱉었다. 그녀는 날아가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사위를 두리번거려 주위를 불안하게 했다. 반면 그녀를 제외한 전원은 로크의 등에 납작 엎드린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안전띠를 매고 있다곤 하지만 살짝만 손을 들어도 공기의 저항이 엄청나서, 금방이라도 몸이 뒤로 젖혀져 날아갈 것만 같았다.


“무기랑 가방 잘 챙겨!”


상황이 이렇다보니 소지품이 바람에 날려가진 않을까가 제일 걱정이었다. 일행 개개인은 밧줄로 몸을 동여맸지만, 기타 소지품이나 옷가지는 그렇지 못했다. 실제로 로크가 비행을 시작하자 디리터는 들떠서 만세 합창을 했는데, 그때 여파로 숄더가드가 뜯겨 날아갔다. 그 뒤에는 다들 조용히 웅크린 채 무기며 옷을 그러안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하늘을 난다는 사실 자체가 가져오는 희열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눈동자를 굴리니 희뿌연 안개 너머로 굽이치는 바다의 정경이 한가득 시야에 들어왔다. 자신이 구름을 가로지르고 있다는 게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이따금 로크가 날갯짓을 할 때 몸이 흔들린다는 것만 빼면, 별다른 위험요소도 없어 보였다.

그러나 가장 경이로운 점은 배나 말을 타고는 결코 맛보지 못할 이동속도에 있었다. 하늘 위에서 몇날 며칠을 어떻게 지낼 것이며, 용변은 어찌 해결하느냐며 볼멘소리를 하던 마리네의 투정은 전혀 쓸데없는 것임이 드러났다. 배를 타고 십여 일을 걸려 도착한 거리를, 로크는 단 반나절 만에 주파해낸 것이다. 해안선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자 루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신음을 흘렸다. 멀리서 꼬물대던 범선들이 순식간에 눈에 밟힐 정도로 커졌다.


“어...저기가 메르실이야? 설마, 진짜로?!”


지면에서 곰실대던 푸르름의 물결이 어느새 그 끝을 고하고, 그 위로 가을날의 울긋불긋한 산수가 덧씌워졌다. 육지에 도달하자 로크도 기분이 좋은지 크게 포효했다.


“쿠워어어억!”


독수리의 입에서 나오는 호랑이의 포효소리는 참으로 괴상하기 그지없었다.

메르실 항구가 순식간에 뒤로 멀어지자 일행도 차츰 내려설 장소를 고민해야 했다. 가능하면 라키시아 근방에서 내리는 게 좋겠지만, 지금까지 일직선으로 비행해온 로크의 특성을 볼 때 약간 위치를 벗어나는 건 어쩔 수 없을 것 같았다.

한 줄기의 도로가 끝을 맺고, 다시 이름 모를 도시가 눈에 들어왔다. 이칼롯이 말했다.


“슬슬 내리지. 루도, 착륙하는 암호가 뭐라고 했지?”


“응? 끼끼리 끼끼리취릭”


“끼끼리 끼끼리취릭!”


그러나 로크는 전혀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녀석이 속도를 올려 더욱 세차게 바람을 가르기 시작하자 바짝 엎드려 있던 에레이시아가 혀를 차며 말했다.


“틀린 거 같은데. 좀 제대로 말해.”


“음..끼, 끼끼취 취끼리릭?”


“...아까 말한 거랑 다른데?”


“끼뤼리 취리리끼였나? 마리네, 뭐였냐?”


“...끼...그러니까...미안, 그때 좀 딴청부리고 있어서...”


영양가 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이칼롯과 마리네, 에레이시아는 착륙 명령어를 듣지 못했고, 루도는 헷갈려하고 있었다. 슬슬 ‘혹시..’하는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만약 아무도 암호를 외우지 않았다면...? 그 사이에도 로크는 에누리없이 전진하고 있었다.

구원의 손길을 내려준 것은 레미나였다. 일행이 암호를 기억하지 못해 우왕좌왕하자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끼취리 끼끼취릭인데...”


루도는 벙찐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메디치가 암호를 알려줄 때도 그녀는 제리온과 손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 순간에 그걸 외웠단 말인가? 반면 그녀는 왜 다른 사람들이 그걸 기억 못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치였다.


“다...다시.”


“끼취리 끼끼취릭!!”


하지만 그녀의 외침이 헛되게도 로크는 반응하지 않았다. 레미나도 당황했는지 그 큰 눈을 연방 깜빡였다.


“어라라? 왜 이러지? 끼취리 끼끼취릭!”


“그거 정확한 거예요?”


“고작 두 마디를 까먹진 않는다구우~. 확실히 이게 맞을 텐데...”


착륙암호를 놓고 설왕설래하는 사이 이미 라키시아는 멀리 지나가버린 상태였다. 로크의 거침없는 비행속도가 점차 공포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제 일행은 수도를 기점으로 동쪽을 날아가고 있었다.


“이, 이러다가 아스트리카까지 날아가겠어! 빨리 멈추라고! 끼취끼 뤼치치?!”


마리네가 반 공황상태에 빠져 말했다. 다른 사람들도 딱히 타개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레미나는 자기가 혹시 잘못 외운 게 아닌가 싶어 쩔쩔 맸다.

그렇게 멀리 아스트리카의 국경선이 보일 정도로 날아왔을 때, 루도가 한 가지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는 섬을 출발할 때 메디치가 로크의 귀에 대고 무언가를 속삭였던 걸 떠올렸다.


“혹시 저거 못 듣고 있는 거 아냐? 직접 귀에 대고 말해야 된다든지...”


“뭐, 뭐어?”


충분히 있을 법한 얘기였다. 조류는 대부분 시각에 의지해 생활하는 지라 청각은 쇠퇴하는 경우가 많고, 하물며 지금은 고속비행 중이니만큼 웬만한 소음은 바람에 묻혀 들리지도 않을 게 뻔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루도는 곧장 안전띠를 풀고 전방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직접 로크의 귓구멍에 대고 암호를 들려줄 생각이었다.


“야, 얌마! 위험해!”


그러나 안전띠를 풀은 시점에서, 조금이라도 맞바람을 맞았다간 그대로 튕겨 날아가 버릴 지도 몰랐다. 그러나 옆에서 말려본들 루도는 듣지 않았다. 아스트리카까지 갔다간 언제 라키시아에 도착할지 기약을 잡을 수 없다. 지금도 고문당하고 있을 데루루피아를 생각하면 하루 한 시간이 아쉬운 상황이니만큼, 위험을 무릅쓰는 한이 있더라도 한시바삐 로크를 착륙시켜야 했다.

루도는 깃털 뿌리를 꽉 움켜쥐고는, 그것이 비둘기나 닭의 경우처럼 쉽게 뽑히지 않기를 빌면서 조금씩 기어갔다. 그 위태위태한 모습에 다들 발을 동동 굴렀다.


“거의 다...갔다!”


하지만 천만다행이도 깃털이 뽑힌다거나, 혹은 바람에 떠밀려 날아가 버리는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았다. 일직선으로 정직하게 날아가는 로크의 비행습관도 위험요소를 줄이는 데에 한몫했다. 루도는 마리네가 던져준 새끼줄을 붙잡고 조심스럽게 녀석의 이마 위로 내려갔다.


“으...으이이이..”


엄청난 풍압에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 루도는 한 손으로는 새끼줄을 붙잡고, 한 손으로는 더듬거리며 로크의 귀를 찾기 시작했다.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마구 깃털을 헤집다 보면 어느 지점에서 손이 쑤욱 들어갔는데, 그곳이 바로 귓구멍이었다.

루도는 다급한 마음에 로크의 귓구멍에 대고 목청이 터져라 소리 질렀다.


“끼취리 끼끼취리익!!!”


그게 실수였다. 로크의 귀가 좋지 않다는 걸 포착해낸 것까진 좋았다. 하지만 루도가 놓친 또 하나의 사실은, 그럼에도 메디치가 녀석을 상대할 때 결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귀청에 대고 고함치는데 놀라지 않을 동물은 없는 법이다. 로크 또한 갑자기 날카로운 소음이 들리자 대경실색했고, 즉시 날개를 횡으로 세워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러자 놈의 이마 위에 앉아있던 루도가 관성에 의해 그대로 튕겨 날아갔다.


“우와아아아??”


“끄아악!”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루도는 건너편에서 무언가가 우둑, 하고 어긋나는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비명의 주인공은 마리네였다. 루도에게 생명줄을 건네준 그는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해 아예 팔목에 줄을 묶어놓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갑자기 루도가 날아가 버리니, 하중을 이기지 못하고 어깨가 빠져버린 것이었다.

루도는 새끼줄 하나에 의지해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으, 큭, 제에엔장!”


“끄아아-! 빠, 빨리 올라와 이 멍청아아!”


마리네가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 양팔 멀쩡한 상태에서 붙잡고 있어도 여간 곤욕이 아닐 터인데, 한쪽 어깨가 빠진 상황에서 성인남자 하나의 무게를 버티고 있으니 그 고통이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거기다 설상가상으로 로크가 하강을 위해 몸을 세우자 경사가 순식간에 기울어졌다. 결국 밧줄을 풀고 도우려던 이들은 황급히 등자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고, 루도의 것도 모자라 자신의 체중까지 감당하게 된 마리네의 표정은 극도로 일그러졌다. 빨리 수를 쓰지 않으면 어깨 인대가 파열돼 장애로 남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야 씨발 끼취리 끼취리릭! 등 구부려! 등 구부리라고!!”


제리온이 로크의 깃털을 쥐어뜯으며 말했지만, 녀석은 조금도 반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녀석은 조금 전 루도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해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어쩜 좋아! 저러다 마리네 죽겠어!”


에레이시아가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마리네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고, 고통을 참기 위해 깨문 입술은 이미 피로 범벅이 된 상태였다. 그때 꼬리 부분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페더폴(Featherfall)!"


레미나의 손끝에서 분출된 빛줄기가 루도를 감싸고돌더니, 이내 허공에 흩어졌다. 마법이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제리온이 외쳤다.


“야! 손을 놔!”


물론 루도는 줄을 놓지 않았다. 지금 떨어지면 빼도 박도 없이 황천길인데, 전후사정도 말하지 않고 냅다 손을 놓으라 하니 곧이들을 리 없었다. 오히려 옆에 있던 에레이시아와 디리터가 미쳤냐고 말릴 정도였다.


“이 새끼가, 루도 죽이려고 작정했냐?”


“제리온, 너 정신이 있는 거니?!”


“아오 씨팔! 모르면 가만히 좀 있으라고, 이 무식한 부부야.”


그렇게 셋이 줄을 놓으니 마니하며 옥신각신하는 동안에도 마리네의 고통은 가중되고 있었다. 결국 보다 못한 레미나가 다급하게 말했다.


“루도, 절대 안 죽으니까 어서 손을 놔! 나를 믿어.”


순간 시간이 멈춘 것처럼 모든 것이 느리게 흘러갔다. 한줄기 전율이 머리부터 시작해 발가락까지 파문을 일고 가는 동안, 루도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레미나와, 한창 입씨름 중인 세 남녀와, 거의 실신해버린 마리네의 일그러진 얼굴을 차례대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구름에 가려진 태양의 잔영을 보고나서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까짓 것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그는 손을 놓았다.


“끼야오히야악!!”


로크의 뒷모습이 순식간에 멀어져갔다. 제리온이 무언가 고함치는 게 보였지만 바람에 묻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루도는 양팔을 좍 벌려 바람의 저항을 최대한 높이려 했다. 그런 짓을 한다고 살아날 수 있는 높이가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 기적이 일어나 강이라든지, 혹은 목화가 10미터 높이로 쌓인 창고 위로 떨어지길 기대하면서.


“...르응?”


이변을 눈치챈 건 온몸을 때려야 할 맞바람이 전혀 불어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였다. 깃털처럼, 혹은 가을날의 낙엽처럼 하늘하늘 낙하하는 자신을 보며 루도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뒤늦게 제리온이 무얼 말하려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지면에 처박혀 죽을 일은 없으니 침착하게 기다려라 - 뭐 이런 식의 충고였을 것이다. 경망스럽게 허우적대던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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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3) +3 15.05.03 845 29 18쪽
211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2) +3 15.05.03 764 22 23쪽
210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1) +2 15.05.03 853 23 20쪽
209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7) +5 15.05.03 795 28 25쪽
208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6) +2 15.05.03 894 24 22쪽
207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5) +4 15.05.02 938 29 21쪽
206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4) +1 15.05.02 884 27 20쪽
205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3) +2 15.05.02 690 24 21쪽
204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2) +2 15.05.02 767 24 24쪽
203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1) +2 15.05.02 586 24 22쪽
202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6) +3 15.05.02 696 28 18쪽
201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5) +5 15.04.29 863 24 19쪽
200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4) +1 15.04.29 937 24 26쪽
199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3) +1 15.04.29 789 24 24쪽
198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2) +3 15.04.29 812 26 18쪽
197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1) +1 15.04.29 758 24 17쪽
196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8) +4 15.04.28 905 28 16쪽
195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7) +3 15.04.28 840 25 20쪽
194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6) +3 15.04.27 711 26 19쪽
193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5) +3 15.04.27 756 22 17쪽
192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4) +2 15.04.27 731 22 18쪽
191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3) +1 15.04.27 731 30 18쪽
190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2) +2 15.04.27 758 27 19쪽
»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1) +2 15.04.27 790 31 18쪽
188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完) +1 15.04.27 599 33 18쪽
187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5) +4 15.04.26 734 24 17쪽
186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4) +1 15.04.26 929 28 16쪽
185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3) +2 15.04.26 739 26 20쪽
184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2) +6 15.04.23 779 28 15쪽
183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1) +3 15.04.23 840 26 19쪽
182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2) +2 15.04.23 756 25 17쪽
181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1) +3 15.04.23 767 26 15쪽
180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0) +1 15.04.23 682 25 22쪽
179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9) +3 15.04.22 811 29 16쪽
178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8) +3 15.04.22 846 27 15쪽
177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7) +1 15.04.22 777 29 18쪽
176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6) +1 15.04.22 791 23 18쪽
175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5) +2 15.04.22 765 29 15쪽
174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4) +3 15.04.22 911 25 18쪽
173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3) +5 15.04.21 767 27 16쪽
172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2) +2 15.04.21 922 25 14쪽
171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 +3 15.04.21 806 25 17쪽
170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8) +3 15.04.21 730 24 21쪽
169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7) +2 15.04.21 703 19 15쪽
168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6) +4 15.04.20 751 24 18쪽
167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5) +2 15.04.20 656 20 18쪽
166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4) +1 15.04.20 768 23 17쪽
165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3) +2 15.04.20 738 24 16쪽
164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2) +3 15.04.20 809 20 16쪽
163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1) +1 15.04.20 821 22 21쪽
162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6) +1 15.04.20 830 29 14쪽
161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5) +2 15.04.20 711 25 18쪽
160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4) +3 15.04.19 865 28 18쪽
159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3) +3 15.04.19 947 28 18쪽
158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2) +3 15.04.19 901 26 22쪽
157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1) +5 15.04.19 1,211 46 22쪽
156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10) +6 15.04.18 901 26 21쪽
155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9) +3 15.04.18 772 26 18쪽
154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8) +1 15.04.18 657 24 19쪽
153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7) +2 15.04.18 687 26 18쪽
152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6) +1 15.04.18 748 27 17쪽
151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5) +4 15.04.18 713 23 16쪽
150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4) +1 15.04.18 669 24 17쪽
149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3) +2 15.04.18 754 22 17쪽
148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2) +3 15.04.16 849 29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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