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의 계승자 - ep.4 - 격노(4)
“오...오라버니, 지금 어디 가시는 거죠?”
그녀는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 채로 말했다. 달라붙는 그녀의 옷자락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기 때문에 이칼롯은 흠칫 놀랐다.
“어디라니, 코간 산적단 토벌이지. 벌써 성문 앞에 다 집결해 있단다.”
“오라버니도 가신다고요? 안 돼요, 안 된다고요!”
그녀는 흡사 무언가에 씌기라도 한 것 같았다. 공포에 질린 채 세차게 도리질하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이칼롯도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대체 자신을 말리는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유디, 왜 그러니? 진정하고 차근차근 얘기해보렴.”
“나...난 듣지 못했어요. 오라버니가 함께 간다는 이야긴 듣지 못했다고요!”
물론 유디에게 그런 말을 한 기억은 없었다. 굳이 군사적인 내용을 들추고 싶지도 않았거니와, 그동안 그녀를 대하기 껄끄러웠던 까닭이다. 그러나 이런 건 어린애라도 알 수 있는 문제가 아니던가. 그는 근 한 달 가까이 병사들을 훈련시켰고, 토벌에 관한 사안을 앞장서 처리해왔으니까. 이칼롯이 말했다.
“이것 좀 놓고 얘기하자. 난 기사이자 제르비안 가문의 장자야. 내가 아니면 누가 병사들을 지휘한단 말이냐?”
“...아무도 그런 부탁하지 않았잖아요!!”
아마 그 소리는 밖에 대기하던 병사들에게도 들렸을 것이다. 소리 지른 유디조차 자신의 패악스러움에 놀랐는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나 붙잡은 이칼롯의 손은 여전히 놓지 않고 있었다.
이칼롯은 처음에는 어안이 벙벙하여 뭐라 대꾸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달아감에 따라 점차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유디 또한 이칼롯의 눈에 떠오른 감정을 눈치 채고 몸을 덜덜 떨었다.
그러나 여전히 붙잡은 손은 놓지 않았다.
“그럼 나더러 쥐새끼마냥 숨어 있으란 말이냐?! 병사들이 목숨 걸고 싸우는 동안? 그게 네가 바라는 거냐? 그게 제르비안 가문의 일원으로서 할 소리냔 말이다!”
이칼롯은 그녀의 면전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한 마디 한 마디 기합이 섞인 그의 일갈에 유디는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눈물이 주르륵 흘러나와 뺨을 타고 흘렀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도 그녀의 양손은 마치 이칼롯 쪽에서 잡고 있는 것처럼 철썩 달라붙어 있었다. 이칼롯은 그녀를 뿌리칠 속셈으로 손을 휙 뒤로 뺐다. 그러자 유디는 낚싯대에 걸린 물고기처럼 힘없이 끌려왔다. 그토록 세게 잡고 있을 거라곤 생각 못했기에 이칼롯도 당황하여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대...대체 왜 그렇게까지...”
유디는 이번에는 그의 허리를 확 끌어안고 깍지를 꼈다. 그녀는 통곡하는 사람처럼 눈물이 샘솟고 있었지만 결코 오열하거나 말을 더듬진 않았다. 무엇보다 간절히 외치고 싶은 말이 있는 까닭이었다.
“꿈을...꿈을 꿨어요, 오라버니. 저와 오라버니가 헤어지는 꿈을...아직도 너무 생생해요! 이런 거,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요. 제발 가지 말아요, 오라버니. 군을 지휘하지 말라는 부탁은 안 할게요. 하다못해 출정 날짜를 늦추기라도...네?”
만약 그때 이칼롯이 좀 더 감성적인 사람이었다면, 혹은 가족을 생각하는 사람이었다면 유디의 부탁을 들어줬을 것이다. 다소 혼란은 따를지 몰라도 지휘를 부탁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크렘벨의 기사들은 그보다 훨씬 오랜 경험을 쌓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의 이칼롯은 기사라는 자긍심에, 그리고 승리라는 전리품에 눈이 멀어 있었다.
그는 유디의 해몽에 코웃음을 치고는, 그녀를 안심시키기 시작했다.
“난 또 뭐라고...유디, 그건 그냥 악몽일 뿐이야. 그런 미신에 휘둘리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법이란다. 자, 너무 많이 지체했어. 이것 좀 놓아다오. 설마 내가 그런 잡배들에게 당할 거라 생각하는 거니?”
“흐흑...오라버니...제발...제발 가지 말아요...”
“자아아, 옳지. 진정하렴. 다 잘 될 거야. 알았지? 오늘 밤 중엔 돌아올 테니까,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으으윽...제바알...”
그러나 그녀의 외침은 이미 이칼롯에겐 들리지 않고 있었다. 그는 온통 군을 지휘하고 승리를 쟁취할 생각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결국 그의 끈질긴 설득에 유디는 힘없이 팔을 떨어뜨렸다. 기력이 쇠한 노인처럼, 혹은 태엽이 다한 장난감처럼 - 좀 전의 필사적으로 달라붙던 힘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이칼롯은 그녀의 축 늘어진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다녀오마. 이따 보자꾸나.”
그러나 그녀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는 겸연쩍게 머리를 긁적인 후, 회랑을 나왔다.
기사 10에 병사 90. 도합 백 명의 군세가 성문 앞에 도열해 있었다. 위풍당당하게 늘어선 병사 사이로 성큼성큼 걷고 있자니 전설에나 나오는 영웅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가 나오자 기사들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양친을 비롯해 여러 가신들도 토벌대를 격려하기 위해 새벽 일찍부터 나와 있었다.
글라우드는 갑옷을 멋지게 차려입고 나온 아들을 대견하게 바라보았다.
“이칼롯, 네가 어느새 어엿한 기사가 되어 자랑스럽구나. 영지를 위해 앞장서 군을 지휘하고.”
“오늘 내로 코간 산적단을 해체시킬 겁니다. 현상금 700골드로 성대하게 연회라도 열죠.”
“하하! 그래. 그보다 아비가 가장 바라는 게 뭔지 알지? 넌 우리 집안의 장남이다. 혹시라도 위험한 상황이 오면 즉시 퇴각하거라. 알았지? 자네들도 이칼롯을 잘 부탁하네.”
주변의 기사가 웃으며 대답했다. 글라우드 역시 유디만큼은 아니어도 떠나는 아들이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이칼롯은 양친과 힘차게 포옹을 한 뒤 군사를 이끌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그의 지휘에 맞춰 일제히 발을 굴렀다. 그것은 「기사」이칼롯의 첫 출사표이기도 했다.
한편 성 첨탑 높은 곳에선 유디가 눈물범벅이 된 채 떠나는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가 꾼 꿈, 그녀가 느낀 불안, 그녀 또한 미신이라며 애써 지워보려 했다. 그러나 그의 뒷모습이 멀어져 갈수록 불안은 점점 커져만 갔다.
산적들의 아지트는 산속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었기에 애초부터 기마대를 쓰기엔 무리였다. 이칼롯은 말을 탈 수 없다는 게 영 찝찝하긴 했지만 도리가 없었다.
군대는 산을 멀찍이 돌아 능선을 타고 골짜기로 들어갈 계획이었다. 산적들이 작전을 눈치채고 줄행랑을 놓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이칼롯은 완벽한 소탕을 원했다. 그는 일부러 레인저들이 표시해준 포인트를 피해가며 불시에 치고 들어갈 계획을 세웠다.
“갑옷 입고 움직이기엔 불편한 지형이군요. 괜찮으십니까, 도련님?”
이칼롯은 플레이트 안에 레더아머까지 덧대어 입었기 때문에 한 시간 가량 걷자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항상 기병으로서의 역할만 수행했던 그로서는 산길을 오르는 게 여간 곤욕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걱정하는 기사에게 애써 웃으며 말했다.
“아, 문제없습니다. 그보다 날씨가 좀 덥군요.”
“예. 등산하기에 괜찮은 날씨지요. 그런데...아까 유디 아가씨랑은?”
역시나 그녀의 고함이 성 밖에도 들린 것이다. 이칼롯은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 여동생과 말다툼을 벌였단 생각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아, 하하. 별것 아닙니다. 전투에 나선다고 하니까 녀석이 걱정하더라고요. 기특하죠?”
“흐음...너무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아가씨 나이 대가 되면 성격이 날카로워지는군요.”
그거랑은 약간 다른 문제 같았지만 이칼롯은 대충 그에게 동조했다. 그는 유디에 관해선 가급적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전투에 정신을 쏟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군대는 정오를 넘을 때까지 계속 전진했다. 처음부터 정상적인 길을 택한 게 아니었기 때문에 쉽게 피로가 쌓였고 무구는 삽시간에 흙과 나무가시로 진창이 됐다. 산적들의 성채가 보이기 시작한 것은 반나절이 넘게 행군한 뒤였다.
레인저들이 설명한 대로 골짜기의 입구에는 통나무로 만든 목책과 더불어 울타리가 둘러쳐져 있었다. 나뭇가지로 빈틈없이 가려놓은 탓에 레인저들의 표시가 없었다면 멀리서는 절대 알아챌 수 없었다.
이칼롯은 성채의 구조를 유심히 관찰했다. 철통같이 둘러싼 덕에 측면으로 잠입하긴 불가능하지만, 반대로 입구를 장악할 수 있다면 한 명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을 수 있는 구조였다.
입구에선 특별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주력은 약탈을 하러 떠난 것일까? 개미 한 마리도 드나들지 않는 고요함은 울타리의 규모와 대조되었다. 기사들 중 하나가 말했다.
“어떻게 할까요? 아직 우리가 온 걸 모르는 모양인데.”
적진에 다다른 이상 결단을 내릴 시기였다. 이칼롯은 병사들을 한 차례 훑어보았다. 긴 행군으로 다소 지쳐 있지만 아직 싸울 기력은 충분하다. 망설일 필요는 어디에도 없었다.
“바로 쳐들어가죠. 상대는 흉악한 산적,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처리하는 겁니다.”
그가 손짓하자 병사들이 일제히 칼을 뽑았다. 이칼롯 또한 텔슈피드를 뽑고 호흡을 골랐다. 신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마법검이 그를 지켜주기를. 이칼롯은 돌격의 외침을 내질렀다.
“공격! 한 명도 남기지 마라!”
우렁찬 함성과 함께 크렘벨 군의 돌진이 시작됐다. 이칼롯과 열 명의 기사들은 대오의 맨 앞에 서서 용감하게 내달렸다. 세차게 휘날리는 망토는 그들의 기세를 여실히 증명했다. 상대는 고작 60. 전원이 임전 상태에 있다 해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 이칼롯은 완벽한 승리를 직감하며 목책을 지나쳤다.
“...응?”
기이한 광경에 그는 움직임을 멈췄다. 목책 너머에는 레인저가 알려준 대로 각종 오두막이며 천막이 즐비했다. 중앙에 놓인 화톳불 자리에선 방금 전까지 사용했던 게 분명한 듯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산적들이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병장기 소리를 내며 달려왔는데도 오두막에선 누구 하나 나오려는 기색이 없었다. 아니, 정말 아무도 없는 것이다. 병사 하나가 천막을 헤집어 보더니 말했다.
“아무도 없습니다! 이부자리랑 옷가지는 그대로입니다만...”
병사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산적들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성채를 버리고 도주? 그렇다면 군대가 온다는 정보는 누구에게 들었지? 하지만 레인저에게 정보를 얻은 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 자리의 대화를 엿듣지 않은 이상, 이렇게 빨리 철수하기란 불가능했다.
“설마...내통자가 있었던 건가?!”
당황스러움은 점차 분노로 변질되어갔다. 이칼롯은 분에 겨워 오두막 문짝을 쾅 찼다. 산적들이 달아났다면 그 또한 실패라곤 할 수 없다. 그러나 이건 그가 바란 결과가 아니었다. 우두머리를 베고, 범죄자들을 소탕하고, 당당하게 개선하는 영웅의 모습이.
그러나 그의 혼란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한 병사의 목덜미에 꽂힌 까닭이었다.
“적이다! 적습이다!!”
그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고작 60밖에 되지 않는 도적들로, 정규군 100명에게 맞설 거라 누가 예상했겠는가! 그러나 곧 텅텅 빈 성채는 철수가 아니라 매복이었음이 밝혀졌다. 처음 날아온 한 발의 화살을 도화선 삼아 사방에서 화살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컥!”
“으헉!”
전열에 있던 병사들이 힘없이 쓰러졌다. 이칼롯 역시 어깨와 허벅지에 화살을 맞았으나 두꺼운 중장갑 덕에 모두 튕겨냈다. 그는 몸을 숙이며 적의 위치를 살폈다. 화살이 날아온 곳은 전방의 오두막 뒤, 뒤의 울타리 위, 그리고 양 측면 절벽 윗자락이었다.
“침착해라! 적의 수는 그리 많지 않다! 침착하게 응전하라! 루제빗 경! 후위를 지휘해 주십시오. 나머지는 나를 따르라!!”
자칫하면 공황상태에 빠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칼롯의 재빠른 판단에 병사들은 빠르게 평정을 되찾아갔다.
“돌격! 전위와 후위는 적에게 돌격하라! 중앙은 활로 응사한다!”
병사들이 일제히 전후로 나뉘었다. 이칼롯은 적들의 시선이 분산된 사이 방패로 몸을 가리고 앞으로 달려갔다. 곧 오두막 사이사이 몸을 숨긴 산적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가장 앞에 있던 남자를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카앙!
“....?”
이칼롯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에겐 믿을 수 없게도, 남자가 재빨리 활을 버리고 검을 뽑아 막은 것이다. 그런 기민한 동작은 비슷한 상황을 여러 번 겪지 않은 다음에야 불가능했다. 게다가 남자의 무장상태는 생각보다 훨씬 뛰어났다. 조금 전까지 쓰던 컴포지트 보우에 롱소드, 몸을 가린 스프린트 메일까지 - 산적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장구였다.
“이야아압!!”
검을 막아낸 남자가 그대로 반격해 들어왔다. 이칼롯은 방패로 남자를 밀친 후 틈새로 검을 찔러 넣었다. 이번에는 요행이 일어나지 않았다. 남자는 아랫배를 깊숙이 찔리고는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이칼롯은 주저 없이 다음 목표로 달려갔다.
뒤이어 곳곳에서 난전이 벌어졌다. 쇳덩이의 날카로운 경합음과 남자들의 비명이 골짜기를 가득 메웠다. 붉게 물든 대지 위로 화살비가 쏟아졌다.
골짜기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매복이라 해도 병력의 질이나 양은 이쪽의 우위, 밀릴 이유는 전혀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오산이었다. 막상 근접전에 들어가자 무너지는 쪽은 크렘벨 군이었다. 무장상태도 그랬지만 적들은 예상했던 것보다 솜씨가 대단히 뛰어났다. 전방에 나섰던 병사들이 대부분 쓰러지고, 금세 중앙이 노출됐다.
이칼롯은 최전방에서 홀로 고군분투하고 있었지만 그도 점차 몸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 쓰러뜨린 적이 넷, 아직도 적은 스무 명가량 남아 있었다. 그는 날아오는 화살을 방패로 막아내며 거침없이 전진했다. 여기서 쉬었다간 놈들의 활시위가 본진을 향한다. 하나라도 더 시선을 잡아둬야 했다.
티잉! 화살이 이번에는 투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칼롯도 이번만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값비싼 갑옷이 제 역할을 하는 순간이었다.
“전진!! 가만히 서 있다간 궁수의 표적이 된다! 루제빗 경!!”
전열을 이칼롯과 기사들이 막아서는 동안, 중앙의 병사들은 끊임없이 응사하며 절벽의 궁수들을 괴롭혔다. 궁수가 하나 둘 쓰러지고, 측면을 괴롭히는 적이 사라졌을 때가 반격의 타이밍이었다.
드디어 정체하던 중앙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쓰러진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일제히 돌격해 들어갔다. 상대도 지지 않고 맞섰지만, 숫자에서 너무 불리했다. 그들은 처음부터 40명 남짓한 병력이었다. 포위했다는 이점이 사라진 순간, 그들의 패배는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 이칼롯과 기사들의 공격을 어찌어찌 막아내던 그들은 중앙의 부대가 가세하자 순식간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후...후퇴!”
“그만, 이건 못 이겨! 이런 얘긴 듣지 못했다고!!”
졌다는 생각이 들자 적들은 앞다투어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골짜기 입구는 크렘벨 군이 점거한 상태, 그들에게 도망칠 퇴로는 남아있지 않았다.
“죽여! 전부 죽여!!”
“우와아아!!”
한 번 기세가 오르자 크렘벨 군의 진격은 파죽지세였다. 병사들은 궁지에 몰린 산적들을 사정없이 도륙하며 나아갔다. 산적들은 공황상태에 빠져 제대로 칼 한 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쓰러졌다.
“사...살려줘!”
퇴로가 차단되자 산적들이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 몇몇은 흥분한 병사들에게 목이 잘려나갔다. 이칼롯이 병사들을 제지하며 앞으로 나왔다. 원래대로라면 모두 죽여야 마땅하지만, 아직 물어보고 싶은 게 산더미만큼 쌓여 있었다.
“잠깐, 멈춰라! 멈춰! 전투는 끝났다. 우리가 이겼어! 그러니 다들 무기를 내려라.”
그의 외침에 병사들이 우레와 같은 함성을 질렀다.
“우와아아!!”
“우리가 이겼다!”
그러나 이칼롯은 함께 소리 지르지 않았다. 그가 바란 승리는 이런 게 아니었다. 왜냐하면, 적은 코간 산적단이 아니었으니까. 그는 패잔병 중 하나의 멱살을 움켜쥐고 물었다.
“네놈, 바른 대로 말해라. 조금이라도 허튼 낌새를 보였다간 바로 목을 날려주지. 알았나?”
“히...히익...모...목숨만 살려주십쇼...”
“너희들, 산적이 아니지? 산적이 이런 기량을 갖추고 있을 리 없어. 네놈들 정체가 뭐냐? 왜 우리를 습격한 거지?”
남자는 어찌나 겁을 집어먹었는지 오줌까지 흘렸다. 그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요...용병입니다. 남부 케이론에서 온...의...의뢰인이 여기서 기다리면 위그라프 후작의 잔당이 나타날 거라 하기에...”
망치로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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