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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연 님의 서재입니다.

람의 계승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저스연
작품등록일 :
2015.03.21 02:01
최근연재일 :
2015.09.01 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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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5.12 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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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3)

DUMMY

“우리가...AOC를?”


꿈같은 얘기였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일행은 군 편재 내에서도 최말단이었다. AOC라는 게 발령되면 응당 소집되어야 할 대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소집대상이 발령권자로 격상된 것이다. 직권의 힘으로만 따지면 람카디스는 물론이요 델키아의 영주(일행이 ‘우리 영주님’이라며 찬양을 마지않는)보다도 위에 있다. 특무별동대가 창설될 때만 해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하다 보니 왕의 비호를 받는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새삼 실감이 났다.

물론 공문화된 권력보다도 중요한 것이 사람들의 인식이다. 하물며 일행도 자신들의 격상된 계급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을 정도인데, 타인이 일행의 말을 고분고분 들어줄지가 의문이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은 레인스터에 도착했을 때 실제로 드러났다.


상업도시 레인스터. 이런저런 인연이 되어 벌써 네댓 번은 넘게 왕래한, 그런 익숙한 도시였다. 람카디스의 손을 잡고, 혹은 디리터와 몰래 가출한 채로, 아니면 카이안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거닐던 거리. 그러나 아쉽게도 어린 시절을 추억하게 만드는 아코디언과 만돌린 소리는 전화에 파묻혀 사라진 뒤였다. 대신 그 자리는 병사들의 병장기 소리와 군악대의 연주로 메워졌다.

레인스터의 분위기는 얼마 전 라키시아에서 느꼈던 이질감이 한층 짙어진 느낌이었다. 민간인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골목 곳곳은 겁먹은 표정의 병사들이 채우고 있다. 상인들의 호객소리는 장교의 외침으로 대체되었고, 노점상이 자리 잡고 있던 거리에는 화톳불이 시뻘건 잿가루를 뿌려대고 있었다.

얼핏 보기엔 양쪽 다 역동적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전의 레인스터가 「사람이 사는 도시」였다면, 지금은 「사람이 죽는 도시」가 되어버렸다. 루도는 병사들의 눈에 비친 공포를 보며 전쟁이 실제로 눈앞에 닥쳤음을 실감했다.


“싸우기도 전에 사기가 바닥을 치네. 이래선 수성하나마나겠는데.”


“야, 유미르네. 목소리 좀 낮춰서 말해.”


“흥, 적어도 용병은 싸울 때도 도망칠 때도 열정적이라고. 이렇게 어쭙잖게 빌빌대다 죽어갈 면면보다는 백배 낫지. 정규군이라는 것도 참 한심해.”


“...군인도 결국 사람이야. 곧 죽을지도 모르는데 의연한 게 이상한 거지.”


유미르네는 타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연방 병사들을 도발해댔다. 그러나 병사들은 힐끗 불만의 눈초리만 건넬 뿐, 항의한다거나 하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그 태도가 너무나도 무기력했기 때문에 그들을 변호하던 루도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왕실기사단이 와준다니 다행이네. 아마 이곳 사람들은 그것만 믿고 있을 거야.”


“음? 아아.”


카이안의 말마따나 레인스터 수비대는 지원군이라는 실끈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만 같았다. 성문부터 거주지구에 이르기까지, 도시 전체에 만연한 공포는 일행을 위축시키기에 충분했다.


“근 1년 만이네. 이렇게 돌아오게 될 줄은 몰랐는데.”


레인스터에 도착하자 일행은 둘로 갈라졌다. 루도와 유미르네는 카이안을 따라가기로, 나머지 사람들은 AOC를 위해 시장관저를 방문하기로 했다. 이는 괜히 우글우글 몰려가 크리드를 당혹스럽게 하지 말자는 의도였는데, 어쩐 일인지 카이안과 앙숙인 유미르네가 동행을 선택해버렸다. 카이안은 그녀의 존재가 영 거북했으나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평정을 지켰다.


“어라...카이안 도련님 아니십니까?”


마당을 쓸던 하인이 그를 발견하고는 반색했다. 루시올라 가문의 집은 예나 지금이나 귀족치고는 수수한 크기의 벽돌건물이었다. 정원은 로샤단 길드의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는데, 겨울이 와서인지 땅바닥엔 죽은 풀들만 무성하게 흩어져 있었다.

카이안이 말했다.


“오랜만이에요 지터. 부모님은요?”


“안에 계십니다만...그보다 도련님 여긴 어쩐 일로?”


“나중에 얘기할게요. 시간 없어요.”


그는 급히 정원을 가로질러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지켜보던 두 사람은 하인의 눈초리가 난감했지만, 대충 무시한 채로 그의 뒤를 따랐다.

루도는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크리드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두꺼운 정복을 입은 채로 거실 탁자에 앉아 건틀렛(Gauntlet)을 손질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갑주를 쥔 그의 어깨는 무인이라기보단 수공업자에 가까웠다. 특히 오랜 병환으로 움푹 들어간 두 눈이 반가움에 앞서 측은함을 느끼게 했다.


“아버지!”


“...카이안이냐?”


1년 만에 찾아온 자식이건만 크리드는 놀라는 기색조차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럴 기력이 없는 것인지도 몰랐다. 크리드는 앓고 있던 지병이 악화되어 몇 년 전부터 휴양을 하고 있었다. 기사직은 일찌감치 은퇴한 뒤고 그는 책을 읽거나 꽃을 가꾸는 등 소일거리만 하며 지내고 있었다. 의원들은 노환으로 체력이 떨어진 탓이라고 했지만,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딸 안젤리카를 잃은 슬픔이 건강에 영향을 준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안젤리카 루시올라. 개의치 않으려 해도 집안 곳곳에 남아 있는 그녀의 흔적에 루도는 애잔한 감정을 느꼈다. 특히 거실계단에 걸린 그녀의 초상화는 생전의 그녀가 그랬듯 루도에게 미소를 건네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루도와 크리드만이 아는 비밀로, 카이안은 그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어린 나이에 요절한 딸이 있다는 정도랄까?


“이거 반가운 손님을 데리고 왔구나. 루도 클로람, 2년 만인가?”


“아,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루도는 으레 그러듯 ‘건강해 보여 다행입니다’란 인사말을 꺼내려다 황급히 말을 돌렸다. 크리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쭈뼛거리는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어서 다과라도 준비해야겠군. 아, 식사는 하고 왔나?”


“아, 아버지,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에요. 어서 이 도시를 빠져나가야 한다고요.”


순간 크리드의 상체가 우뚝 멈춰 섰다. 마치 그의 시간만 정지해버린 것처럼...그러나 몇 초 후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그런데 학업은 어찌하고 온 게냐? 카이안. 아카데미가 휴교라도 한 것이냐?”


“그건 아니지만...지금 공부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아버지! 이제 곧 아스트리카가 쳐들어온다고요. 어서 피난을 가지 않으면...”


“소란 떨지 말거라. 손님들 있는데 무안하구나.”


그의 의연한 태도에 카이안은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 마치 전쟁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어조를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크리드는 현실을 외면한 것도, 전쟁의 양상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담담하기까지 했다. 지금의 크리드는 아버지로서가 아닌, 한 명의 기사로서 카이안을 대하고 있었다.


“난 아무 데도 가지 않는다. 너야말로 어서 안전한 곳으로 피하려무나. 네 어미도 지금쯤 퀴넨에 도착했을 게야.”


“아, 아버지는요? 아버지는 어떻게 하실 건데요?”


“기사가...등을 돌리고 달아나면 영지는 누가 지킨다는 게냐.”


크리드는 스스로의 운명을 매듭짓듯이, 초연하게 말했다. 그것은 마치 유언을 남기는 것만 같아 카이안은 목이 메었다. 그를 구하려고 이 먼 길을 달려온 것이건만, 설득할 방법이 떠오르질 않는다. 아니, 오히려 크리드의 결정에 납득해버린 자신을 부정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래도, 이제 가족이 죽는 광경은 보고 싶지 않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제가 아버지를 놔두고 어떻게 떠나요?”


“떠날 수 있어. 네겐 네 인생이 있으니까. 그리고 아직 내가 죽은 것도 아닌데,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는구나.”


“그치만...그래도...”


카이안은 입속에 멍울져오는 것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한 걸음 뜻을 굽힌다 쳐도 아버지를 두고 달아나고 싶진 않았다.

그때 잠자코 있던 유미르네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강 건너 불구경하던 사람마냥 심드렁하게 말했다.


“요는 이거네. 저 신사는 기사의 사명감 때문에 떠날 수 없는 거고, 이 도련님은 효심이 지나치게 지극한 거고. 와우! 그럼 레인스터가 함락되지만 않으면 만사형통이네. 어디 기적이 일어나지 않으려나?”


경박하지만 그녀의 말이 정답이기도 했다. 레인스터만 사수해낸다면 카이안도, 크리드도 무사할 것이다. 그리고 두 부자의 문제를 떠나서도 도시는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일이 이렇게 되자 시장관저로 향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지가 궁금해졌다. 레미나와 이칼롯이 있으니 문제는 없겠지만...

루도는 잠시 크리드와 이야기를 나눈 뒤 밖으로 나왔다. 카이안이 또 무슨 돌발행동을 할지 불안하긴 하지만, 훌륭한 양아버지가 있으니 걱정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정원 울타리 문을 나서고 있자니 아까 마주쳤던 하인이 그를 불러 세웠다.


“저어, 카이안 도련님과 함께 오신 분들이죠? 실례가 안 된다면, 혹시 왜 돌아오셨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예? 아아, 뭐.”


루도는 카이안과 크리드의 대화를 여과 없이 설명해주었다. 곧 피난 얘기가 나오자 하인의 표정에 깊은 시름이 싹텄다.


“주인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던가요? 하긴 그렇게 설명하는 편이 더...”


“예? 무슨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요?”


하인은 말하기에 앞서 조심스럽게 집 안의 동태를 살폈다. 그는 몇 번이나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야 말했다.


“그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물론 건강하셨어도 주인님은 남아계셨을 테지만.”


“그게 무슨 소리죠?”


“주인님의 몸 상태가..그다지 좋지 못합니다. 무리하게 움직였다간 병이 악화되지요. 마나님만 피난 보내신 것도 그 때문입니다. 거실에서는 아마...평안을 가장하고 계셨을 겁니다. 남에게 걱정 끼치는 걸 굴욕으로 아시는 분이라...”


루도는 낮게 탄성을 터뜨렸다. 쇠약해진 것 같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안 좋은 상태였을 줄이야. 일이 왠지 안 좋은 쪽으로만 흘러가는 것 같았다.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자니 다시 하인이 말했다.


“저...손님의 얼굴은 몇 번 뵌 적이 있습니다. 카이안 도련님을 만나러 오신 적이 있지요? 그리고 얼마 전에는 현상금도...아, 제가 실례를 했군요. 여하튼...도련님을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루도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굳이 당부하지 않아도 카이안은 지킬 테지만, 왠지 사명감에 몸이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돌발적으로 이루어진 레인스터행이 어느새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특무별동대 로샤단은 자의든 타의든 차츰 전쟁에 깊숙이 관여해가는 중이었다.

풀어야 할 문제가 너무 많았다. 루프리모의 아이, 안개송곳니의 위협, 흑연기사단, 리크나이츠의 존속. 이것들을 모두 해결하려면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할 조건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레인스터가 절대 함락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



레인스터는 북부지방에서 가장 상업이 발달한 도시이다. 그러나 자체 특산물이 발달했다기보다는 중계무역을 담당하는 거점으로서의 역할이 큰데, 이러한 유동인구가 많다는 특성 때문에 통치체계도 독특하게 발전했다.

일반 영지와 달리 레인스터는 영주와 상회장, 감찰사 3인이 균형을 이루는 과두정의 시스템을 지니고 있다. 일단 도시에서 나고 자란 시민들은 영주인 할라이데 백작의 통치를 받는다. 반면 토착 거주민 외에도 도시를 왕래하거나 장기 거주하는 상인들이 많은데, 이들은 이바르도 상회장이 관리한다. 그리고 중간에 왕실에서 파견한 감찰사가 있는데, 그는 두 세도가의 중간에서 중립을 유지하고, 폭정이나 독과점이 일어나는 것을 막는다.

이러한 시스템은 얼핏 할라이데 가문에 불리해 보이지만, 상인들이 벌어들이는 자금 중 상당량을 관리명목으로 상납받고 있으니 결국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셈이다.

그렇다면 전쟁이 발발했을 때엔 어떨까? 당연히 대부분의 병권은 영주인 할라이데 백작이 쥐고 있다. 소수의 사병편성이 가능하다는 것만 빼면 상회장의 권리는 감찰사보다 못한 셈이다.

그런데 지금 이 시스템에 균열이 일어났다. 일행이 시장관저에서 언성을 높이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럼 다른 사람을 책임자로 앉히면 될 것 아뇨? 자식이라든지, 하다못해 친위대 대장이라도 있을 거 아니야!”


“배, 백작에겐 아들이 없소. 그렇다고 일개 기사를 지휘관으로 격상시킬 수는...”


“당신 지금 무슨 상황인지 알고 하는 말이야? 흑연기사단이 코앞까지 와 있다고!!”


“설마 이곳으로 올 줄 누가 알았겠소! 차라리 AOC로 집결하는 다른 영주에게 지휘권을 위임하는 게 낫다고 생각해 기다렸던 것뿐이오!”


관저 내에는 이바르도 상회장뿐 아니라 감찰사 파블로, 수비대 대장 및 다수의 귀족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꼬리 내린 개처럼 몸을 움츠린 채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레미나가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AOC는요?”


“.....”


“왜 병사가 이것뿐이죠? 다른 영지에선 대체 뭘 하고 있는 건가요?”


“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공주님...”


이바르도는 비굴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그의 벗겨진 머리에선 개기름 때문인지 광이 번쩍번쩍 났다. 레미나는 재차 해코지를 하려다가, 그만 가슴만 답답해져 손사래를 쳤다.

이번에는 수비대 대장으로 보이는 사내가 입을 열었다.


“손을 놓고 있었던 건 아닙니다. 봉화는 피워 놓았고...”


“봉화만 피운 거겠죠!”


“하지만 공주님...책임자가 사라진 이상 AOC는 유명무실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위그라프 후작...아니, 할라이데 백작님만 살아계셨더라도...”


할라이데의 이름이 나오자 제리온이 다시금 미간을 찌푸렸다. 로샤단이 한 번의 승리에 도취되어는있 사이, 레이시는 바로 다음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할라이데 백작은 암살당했다. 그것도 바로 사흘 전에. 최초 발견자는 그의 아내였다. 그녀는 집무실 소파에 기댄 자세로 죽어있는 그를 보곤 비명을 질렀다. 백작의 목젖에는 새끼손가락만 한 비수가 꽂혀 있었다. 성안은 즉시 비상사태에 돌입했고, 암살자를 붙잡기 위해 모든 병사들이 투입되었다.

그러나 수색작업은 헛수고로 끝났다. 아무런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기에 내부자의 소행이 아니냐는 추측마저 나올 정도였다.

그리고 채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흑연기사단의 진군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발 빠르게 움직이는구만, 안개송곳니 놈들. 제대로 한 방 먹었어.”


제리온은 짜증이 솟구쳐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의 노골적인 태도에 귀족들은 언짢은 얼굴이었지만, 바로 옆에 레미나 공주가 있는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 상태로 흑연기사단을 막아내기란...어려울 겁니다. 그러니...”


이바르도는 최대한 엄숙하게 말하려 했지만, 온몸에 묻어나는 비굴함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제리온이 그의 말을 끊었다.


“그래서 뭐, 항복하자느니 그딴 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겠죠?”


“무, 물러서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오. 어설픈 항전으로 시민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는 없소이다.”


“아니, 아니야. 당신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전혀 모르고 있어.”


제리온은 입술을 비죽이 내민 채 이바르도의 코앞까지 걸어갔다. 모두가 풍경화처럼 굳어있는 가운데 오직 행동하는 이는 그뿐이었다. 자연히 시선은 그에게 쏠렸다.

마리네가 중간에 이칼롯에게 말려달라는 눈짓을 보냈으나 그는 팔짱을 낀 채 관망하기만 했다. 오만불손한 태도가 문제다 뿐이지 제리온이 하는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


“우리가 공주님까지 모시고 이 도시에 온 이유가 뭔지 아쇼? 여기가 함락되면 리크나이츠가 끝장나기 때문이야. 국왕 폐하는 수도까지 포기하고 왕실기사단을 이쪽으로 돌렸다고. 알아?”


“하지만 왕실기사단이 도착하려면 일주일은 족히 남지 않았소. 그때까지 어떻게 버티란 말이오.”


“고작 일주일만 버티면 되는데 항복할 궁리나 하고 있어?!”


그의 일갈에 이바르도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이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해서도, 자신의 무능함이 부끄러워서도 아니었다. 이 늙은 남자는 그저 처음 보는 새파란 젊은이가 자신에게 큰소리친다는 것에 발끈하고 있었다.


“어, 어쨌든 현재 이곳의 책임자는 나요. 당신네들이 왈가왈부할 사안이 아니란 말이오!”


“상회장님, 저희 권한에 대해서는 이미 설명드린 것으로 압니다.”


이바르도의 허세는 이칼롯의 조용한 반박에 막혀 쪼그라들었다. 그런데 이바르도가 위축되자 지금까지 가만히 듣고 있던 한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감찰관인 파블로였다.


“그 권한이라는 것 말인데...솔직히 의구심이 좀 드는군요.”


“무슨 뜻이신지?”


“당신들이 하는 말이 왕명에 버금가는 위력을 갖는다니, 솔직히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리크나이츠 역사상 이런 파격적인 권한이 있었는지요? 아니, 그전에 왕하직속특무별동대라는 게 정말 존재하긴 하는 겁니까?”


파블로는 전쟁문제 이전에 로샤단의 존재를 놓고 꼬투리를 잡고 있었다. 그러자 레미나가 정색하며 말했다.


“제가 있는데 감히 그런 망언을 내뱉으시는군요. 아니면, 이 레미나 리크나이츠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겁니까?”


파블로가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그러나 천천히 내려가는 그의 어깨에서는 가식이 뚝뚝 묻어나왔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공주님. 하지만 저희 입장도 좀 생각해 주십시오. 이런 특무부대의 창설은 단순히 인장 하나만으로 증명이 되는 게 아닙니다. 정식 법문화를 통해 포고령을 내리는 게 먼저 아닌지요.”


“그건 그렇지만...사태가 그리 여유로운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었답니다. 그래서 공주인 제가 직접 온 것이고요.”


“그것도 좀...그렇지요. 그간 수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솔직히 저희들은 바로 얼마 전까지도 공주님이 돌아가신 줄로만 알았는데요.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 권리행사를 하시면...”


순간 레미나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어 분노를 억눌렀다.

파블로의 말뜻은 이러했다. 갑자기 들이닥쳐 감 내놔라 대추 내놔라 하는 무뢰배들을 자긴 못 믿는다. 그리고 5년 만에 나타나 공주 행세랍시고 하는 이 여자도 역시 못 믿겠다.

그는 국왕의 인장을 보여줘도 위조 아니냐고 으름장을 놓을 사람이었다. 이런 타입은 자기 입맛에 맞는 말만 골라 듣고, 심기를 긁는 말에는 귀를 완전히 닫아버린다.

차분히 설득하는 게 올바른 방법이겠지만, 레인스터에 남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감찰관, 왕실모독죄라는 거 알고 계신가요?”


‘..우와!’


마리네와 디리터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 레미나의 입에서 왕실모독죄가 나올 줄이야! 항상 자신을 낮추던 그녀로서는 파격적인 발언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그녀는 파블로만을 겨냥해서 한 이야기겠지만...왕실모독 이야기가 나오면 목숨이 열 개라도 모자랄 사람이 이 자리에 있었다.

마리네는 숨을 죽이고는 조심스럽게 제리온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말이 없었는데, 살짝 벌어진 입이며 쉴 새 없이 깜박이는 눈이 충분히 당황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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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5) +4 15.05.05 931 26 24쪽
222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4) +2 15.05.05 762 23 23쪽
221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3) +1 15.05.05 643 22 15쪽
220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2) +2 15.05.05 772 24 18쪽
219 람의 계승자 - ep.5 - 빗속으로(1) +4 15.05.05 686 23 15쪽
218 람의 계승자 - ep.5 - 사냥감의 반전(4) +2 15.05.05 922 24 23쪽
217 람의 계승자 - ep.5 - 사냥감의 반전(3) +3 15.05.04 936 22 23쪽
216 람의 계승자 - ep.5 - 사냥감의 반전(2) +2 15.05.04 868 22 21쪽
215 람의 계승자 - ep.5 - 사냥감의 반전(1) +1 15.05.04 775 24 20쪽
214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5) +2 15.05.04 710 24 15쪽
213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4) +2 15.05.04 720 25 23쪽
212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3) +3 15.05.03 846 29 18쪽
211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2) +3 15.05.03 764 22 23쪽
210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1) +2 15.05.03 855 23 20쪽
209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7) +5 15.05.03 795 28 25쪽
208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6) +2 15.05.03 894 24 22쪽
207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5) +4 15.05.02 938 29 21쪽
206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4) +1 15.05.02 884 27 20쪽
205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3) +2 15.05.02 690 24 21쪽
204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2) +2 15.05.02 768 24 24쪽
203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1) +2 15.05.02 586 24 22쪽
202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6) +3 15.05.02 696 28 18쪽
201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5) +5 15.04.29 863 24 19쪽
200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4) +1 15.04.29 937 24 26쪽
199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3) +1 15.04.29 789 24 24쪽
198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2) +3 15.04.29 812 26 18쪽
197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1) +1 15.04.29 758 24 17쪽
196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8) +4 15.04.28 905 28 16쪽
195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7) +3 15.04.28 840 25 20쪽
194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6) +3 15.04.27 712 26 19쪽
193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5) +3 15.04.27 756 22 17쪽
192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4) +2 15.04.27 731 22 18쪽
191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3) +1 15.04.27 731 30 18쪽
190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2) +2 15.04.27 758 27 19쪽
189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1) +2 15.04.27 791 31 18쪽
188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完) +1 15.04.27 600 33 18쪽
187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5) +4 15.04.26 734 24 17쪽
186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4) +1 15.04.26 930 28 16쪽
185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3) +2 15.04.26 739 26 20쪽
184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2) +6 15.04.23 779 28 15쪽
183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1) +3 15.04.23 840 26 19쪽
182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2) +2 15.04.23 756 25 17쪽
181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1) +3 15.04.23 767 26 15쪽
180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0) +1 15.04.23 683 25 22쪽
179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9) +3 15.04.22 811 29 16쪽
178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8) +3 15.04.22 847 27 15쪽
177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7) +1 15.04.22 777 29 18쪽
176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6) +1 15.04.22 792 23 18쪽
175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5) +2 15.04.22 765 29 15쪽
174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4) +3 15.04.22 911 25 18쪽
173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3) +5 15.04.21 767 27 16쪽
172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2) +2 15.04.21 923 25 14쪽
171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 +3 15.04.21 807 25 17쪽
170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8) +3 15.04.21 730 24 21쪽
169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7) +2 15.04.21 703 19 15쪽
168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6) +4 15.04.20 752 24 18쪽
167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5) +2 15.04.20 657 20 18쪽
166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4) +1 15.04.20 768 23 17쪽
165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3) +2 15.04.20 739 24 16쪽
164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2) +3 15.04.20 809 20 16쪽
163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1) +1 15.04.20 821 22 21쪽
162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6) +1 15.04.20 830 29 14쪽
161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5) +2 15.04.20 712 25 18쪽
160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4) +3 15.04.19 866 28 18쪽
159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3) +3 15.04.19 948 28 18쪽
158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2) +3 15.04.19 901 26 22쪽
157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1) +5 15.04.19 1,211 46 22쪽
156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10) +6 15.04.18 901 26 21쪽
155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9) +3 15.04.18 772 26 18쪽
154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8) +1 15.04.18 657 24 19쪽
153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7) +2 15.04.18 687 26 18쪽
152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6) +1 15.04.18 748 27 17쪽
151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5) +4 15.04.18 713 23 16쪽
150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4) +1 15.04.18 670 24 17쪽
149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3) +2 15.04.18 754 22 17쪽
148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2) +3 15.04.16 849 29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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