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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연 님의 서재입니다.

람의 계승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저스연
작품등록일 :
2015.03.21 02:01
최근연재일 :
2015.09.01 03:28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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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20 0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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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5)

DUMMY

석고상은 자신을 ‘메디치’라고 소개했다. 교단의 루치페리아와 달리 메디치는 살아있는 생명처럼 몸을 움직여 걸어 다녔다. 제리온, 이칼롯은 루치페리아와도 대화해본 적이 없기에 조각상이 움직이는 모습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특히 제리온은 금방이라도 불덩어리를 날릴 기세였다.

메디치는 둘이 경계하는 모습을 보고 피식 - 놀랍게도 입꼬리가 움직였다! - 웃었다.


-그렇게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무기도, 갑옷도 없는 제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하하하.


메디치의 목소리는 쾌활한 20대 청년의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석고상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말투나 행동이나 영락없는 인간이었다. 둘이 경계를 풀자 메디치는 씨익 웃더니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다시 한 번 인사드리죠. 제 이름은 메디치, 생텀가드입니다. 지금은 케리아돌의 둥지를 관리하고 있지요.


“드래곤의 집사? 생텀가드가?”


생텀가드란 고대에 활약했던 대(對)악마퇴치용 병기를 말한다. 그게 말을 하는 것도 신기한데, 집사 노릇까지 하고 있다 하니 뜨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메디치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뭐, 개인적인 사정입니다. 그보다 아직 그쪽의 소개를 듣지 못했군요.


“아아, 죄송합니다. 너무 경황이 없어서...”


일행은 차례로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했다. 메디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외우는 시늉을 했다. 소개가 끝나자 제리온이 대뜸 물었다.


“그건 그렇고, 아까부터 우릴 지켜보고 있던 모양인데. 거 먼저 말이라도 걸어주지 영 악취미네.”


그는 메디치에게 쭉 감시당한 기분이 들어 불쾌해했다. 메디치는 제리온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전과 다름없이 활기차게 악수를 청했다.


-지켜보고 있던 건 맞지만, 나쁜 의도는 없었습니다. 나이를 많이 먹다 보니 초면인 사람에게 선뜻 말을 건네기가 쉽지가 않아서 말이죠. 아하하!


그러나 메디치는 아무리 봐도 「초면인 사람에게도 스스럼없이 들이대는」성격 같았다. 그는 호쾌하게 웃다가, 이칼롯이 든 청동 활을 보고 말했다.


-아차, 케리아돌의 수수께끼를 푸는 중이셨죠? 제가 공연히 시간을 잡아먹었군요.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어서 일 보십시오. 이대로 있다간 해가 뜨고 말아요.


“...그것 말인데, 메디치님이 좀 알려주실 순 없는 겁니까?”


-하하, 그건 좀 곤란합니다. 이건 케리아돌이 무례한 모험자가 레어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설치한 장치입니다. 그 말은 즉, 입구를 찾아낼 정도로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출입을 허락한다는 뜻이기도 하죠.


이칼롯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 년을 넘게 산 생물이니, 그리 호락호락하게 만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일행은 메디치에게 도움받기를 포기하고, 대신 그녀에게 잘 좀 말해줄 것을 부탁했다.


“저희는 뭘 훔치거나 난동을 부리러 온 게 절대 아니거든요. 그냥 그분을 만나 조언을 좀 얻어갈까...하고.


-아아, 그 문제에 대해선 걱정하지 마십시오. 케리아돌은 취미로 살생을 저지르는 다른 드래곤들과는 다르니까요. 무례한 언동만 삼간다면 여러분에게 어떠한 위해도 가하지 않을 것입니다.


“휴우~, 그럼 다행이고요.”


이제 문제는 다시 시문의 해석 쪽으로 돌아왔다. 메디치는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그가 계속 지켜보고 있다는 점이 적잖이 신경 쓰였지만, 일행은 선반 주위에 둘러앉아 해석에 골몰했다.


“네 번째 문장은 일종의 경고문 같으니 재껴도 될 거 같은데.”


“사수...달...궤적...”


시간은 어느새 자정을 넘어가고 있었다. 귀청을 울리던 매미 소리가 사라지고, 귀뚜라미의 노랫소리가 고즈넉하게 들려왔다. 마리네와 디리터는 완전히 지쳐 널브러졌고, 제리온과 이칼롯은 영양가 없는 토론을 계속하고 있었다.

루도는 땅바닥에 드러누워 청동 활만 매만졌다. 뭔가 비밀 장치가 있는 건 아닐까 꼼꼼히 살펴보았지만, 내내 헛수고였다. 그는 깊이 탄식했다.


‘아~, 달의 축복이란 게 대체 뭐야? 그냥 떠있기만 한 걸 축복이니 뭐니 표현할 필요가 있나? 쳇, 그리고 이 쬐그만 활 가지고 뭘 하라는 건지, 면도칼보다도 작아 보이는데...’


이대로 가다간 날이 샐지도 몰랐다. 특히나 여름은 밤이 짧아 순식간에 해가 떠오른다. 점점 시간에 쫓기자 마음이 초조해졌고, 초조함은 점차 짜증으로 변해갔다.


“제기라알~.”


루도는 답답한 마음에 활을 쥔 팔을 화악 휘둘렀다. 그렇다고 던진 것은 아니고, 이리저리 기분 내키는 대로 흔드는 것뿐이었다. 팔을 휘두를 때마다 바람을 받은 활의 저항감이 느껴졌다. 이렇게 흔들고 있으니 활이 아니라 꼭 쇼텔 종류의 곡도(曲刀) 같기도 했다. 애초에 그 활은 활줄이 없어서 다른 도구로 착각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것은 어찌 보면 부메랑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말편자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도구들에 비해 그것은 그리는 곡선이 아주 섬세하고, 또 끝자락이 유난히 뾰족하다는 게 특징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초승달과 같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루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다른 사람들이 놀라 고개를 돌렸다.


“왜 그래? 똥 마렵냐?”


루도는 디리터의 농담을 가볍게 무시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달과 활이 그리는 접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바라보는 자에게만 빛을 줄지니...”


그는 달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옆으로 게걸음을 쳤다. 달은 그의 움직임을 그대로 좇았다.


“나는 사수...활을 들고 있지. 그리고 달이 하사하는 축복은...역시 달빛뿐이지!”


달빛에 눈을 맞추라.

루도는 이번에는 청동 활을 들어 달에 겹치도록 했다. 그는 마치 퍼즐 조각을 끼워 맞추듯이, 꼭 맞도록 거리를 조정했다. 만약 진짜 활이었다면 아무리 팔을 뻗어도 달의 크기에 맞추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손바닥만 하게 제작된 그 활은 약간 팔을 굽힐 즈음에서 달과 완벽히 맞아떨어졌다.

달과 활이 완전히 겹쳐지자, 연청색 빛이 활을 휘감기 시작했다. 루도는 빛을 발하는 그것을 보곤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와...와와와!!”


그가 소리를 지르자 동료들이 주위로 모여들었다. 마리네와 디리터가 말했다.


“뭔데? 무슨 일이야?”


“야, 너 괜찮냐?”


루도는 흠칫 놀라 둘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렇게 빛이 뿜어져 나오는데, 그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루도는 다시 활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어찌나 눈이 부신지, 정면으로 마주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루도는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문제를 푼 것 같아! 그런데 아무래도 활을 든 사람에게만 보이는 건가봐. 지금 막 활에서 빛이 쏟아지고 있어.”


“지...진짜? 그래서 지금 뭐가 보이는데?”


“기다려봐! 너무 눈이 부셔서 앞을 볼 수가 없어. 아, 점점 흐릿해지네.”


빛이 거의 사그라지자 루도는 조심스럽게 정면을 응시했다. 활의 상태를 확인한 그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려 침을 꼴깍 삼켰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푸른색의 불빛! 분명 활대뿐이었을 청동 활엔, 어느 샌가 빛으로 이루어진 활줄이 메어진 채 은은하게 발광하고 있었다.

루도는 떨리는 손목을 진정시키며 활줄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빛이 쪼개져 나와 화살을 만들었다.


“궤적을 따르라...”


활시위를 놓자 빛의 화살이 허공에 수놓아졌다. 그것은 정면으로 날아가다 순간 방향을 틀어 수직으로 치솟더니, 다시 급선회하여 숲의 한 귀퉁이에 곤두박질쳤다. 그 광경은 다른 일행에게도 보인 모양이었다. 다들 신비한 광경에 탄성을 터뜨렸다.

화살이 지나간 공간은 그 자체로 달의 가호를 받은 듯, 빛을 발하며 어둠을 걷어내고 있었다. 그 푸른색의 궤적은 화살이 꽂힌 다음에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빛을 발산했다. 일행은 그 빛을 건드렸다간 마치 살아있는 뱀장어처럼 놀라 도망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허리를 숙이며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물론 입은 전혀 조심스럽지 않았다.


“루도 최고, 오우~ 펠아람의 아이!”


“우와, 대단하다. 어떻게 알아낸 거야?”


“그냥 때려 맞춘 거겠지. 뭘 알고 그랬겠어?”


“...루도, 네게 경의를 표한다.”


화살이 꽂힌 자리엔 원래 건너편을 확인하기 힘들 정도로 가시덤불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었다. 그런데 빛이 관통하자 덤불이 알아서 갈라지더니, 폭이 3미터는 될 법한 오솔길이 생겨나는 것이었다. 길의 끝엔 커다란 동굴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게 어디의 입구인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첫 번째 시험을 통과하셨군요. 축하드립니다.


그때까지 말이 없던 메디치가 손뼉을 치며 다가왔다. ‘첫 번째’라는 말에 루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엥? 첫 번째라니...그럼 이런 게 더 있단 말인가요?”


-아직 하나 더 남았지요. 시문은 4행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았습니까?


“스스로 구원한 자만이...”


메디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는 처음처럼 웃거나, 과장스런 제스처를 취하진 않았다. 그는 어쩐 일인지 어깨가 다소 처져 있었고, 표정 역시 시무룩했다. 굳이 말하자면, 그는 루도가 시문을 해석한 게 그다지 기쁘지 않은 모양이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입구까지 안내해드리죠. 솔직히 말하면 저는 여러분이 문제를 풀지 못하길 바랐습니다만...


그러자 마리네가 물었다.


“어째서요? 역시 케리아돌님이 저희를 만나기 싫어하시는 건가요?”


-그건 아니지만...두 번째 시험이 조금...악취미라서요.


드래곤의 악취미란 어떤 수준을 말하는 걸까. 특이하게도 메디치의 걱정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사람은 제리온이었다. 아무것도 몰라 속 편한 넷과 달리, 그는 드래곤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신장만 해도 몇 미터에 달하는 크기에, 지능은 인간을 가볍게 상회할 정도, 마법사들이 온갖 미사여구로 치장했다 뿐이지 드래곤은 사실 괴물이라 불러도 이상함이 없었다.


‘음...역시 도망칠 궁리도 해놔야 하나? 아니, 드래곤에게서 도망칠 수 있을 리가...그럼 싸워야 되는 건가?’


오솔길을 걷는 내내 제리온은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어 안절부절 못했다. 하지만 막상 두 번째 시험이 찾아왔을 때, 가장 손쉽게 통과한 것도 그였다.


***


으리으리한 성채나, 혹은 금으로 덧씌워진 저택이 나타나리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드래곤의 레어라는 것은 소박했다. 커다란 동굴 안에는 가재도구는커녕 램프 하나 놓여 있지 않았다. 물론 동굴 속으로 들어감에도 습기가 차있지 않고 통풍이 잘 된다는 점은 상당히 특이하긴 했다.

동굴 자체는 일직선으로 되어 있어 방향을 헤맬 일은 없었다. 한 10분 정도 내려갔을까? 동굴의 폭이 점점 좁아지는가 싶더니, 대리석으로 만든 석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석문은 그자체로도 빛을 발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주변은 대낮처럼 환했다.

메디치가 말했다.


-내려오면서 느끼셨겠지만 케리아돌 레어는 딱히 복잡한 트랩 같은 건 없습니다. 이 방만 지나가시면, 바로 그녀의 응접실이지요. 말하자면, 이게 방문객을 걸러내는 최후의 장치라는 것입니다.


그의 충고는 자못 비장하기까지 했다. 여기까지 온 건 훌륭하다, 그러나 목숨을 부지하고 싶으면 이쯤 해서 돌아가라는 듯이.

석문에는 밖에서 입구를 찾을 때와 마찬가지로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스스로 구원하라. 그것은 오직 그대만의 아픔이니라.-


“...이것도 힌트인가? 너무 두리뭉실한데.”


석문은 아까처럼 특별한 장치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밀고 들어가면 되는 구조였다. 즉, 안에 무언가가 있다는 말이다. 메디치가 석문의 문고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이 너머의 공간은 케리아돌이 직접 건 주문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러분, 입구의 장치는 찾지 못한다고 해서 딱히 위해가 가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앞은 다릅니다. 여기 들어갔던 방문객 중 상당수가 폐인이 되었고, 혹 통과했다 해도 평생 후유증을 안고 살아간 사례가 많습니다. 그래도 들어가시겠습니까?


일행은 침묵으로 결의를 다졌다. 긴장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메디치가 별거 아닌 일로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되지도 않았다. 다만 물러나기엔 너무 많이 들어와 버렸다. 류이너스 교단을 찾아간 것도, 안개송곳니에게 쫓긴 것도, 몇날 며칠을 걸려 에메랄드 섬을 찾은 것도 - 모든 것은 진실을 알기 위함이었다.

무거운 정적이 감돌자 디리터가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콧방귀를 뀌었다.


“뭐야, 난 또 괴물 따위에게 통째로 잡아먹힌다는 말이라도 할 줄 알았더니. 여긴 다들 자폐증 걸린 놈들뿐이니 무사통과겠네?”


그의 농담에 다들 헛웃음을 터뜨렸다. 미소 띤 얼굴을 서로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한결 마음이 차분해지는 느낌이었다. 이칼롯이 모두를 대표하여 말했다.


“...아무래도 여기까지 와서 돌아갈 사람은 없는 듯합니다.”


-그렇다면야...하지만 케리아돌에게 용무가 있는 건 클로람님이었지요? 그럼 다른 분들은 굳이 들어가지 말고 여기서 기다리셔도 될 텐데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오래전부터 나와 있었다. 이미 5년이 넘게 생사고락을 같이 한 전우다. 제리온이 말했다.


“루도가 통과하는 걸 내가 못 할 리가 없잖아. 아니면 뭐 다 같이 뒤지던지.”


-...좋습니다. 행운을 빕니다.


쿠우우우우...요란한 소리와 함께 석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메디치는 문을 열어주고 나서 일행이 들어갈 수 있게 몸을 비켜주었다. 맨 앞에 선 루도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옅은 미소를 띠며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밖에서 들여다봤을 때 석실은 귀족의 거실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훌륭하게 꾸며져 있었다. 바닥에는 자수가 새겨진 융단이 깔려 있고, 여러 명이 앉을 수 있는 가죽소파나 흔들의자 따위가 구석에 놓여 있었다.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에서는 아까 청동 활의 그것과 같은 푸른 불빛이 방 안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들어가기 직전 루도는 고개를 돌려 내려왔던 동굴 복도를 응시했다. 복도는 몇 미터만 넘어가도 완전히 어둠에 삼켜져 버렸기 때문에, 둥그런 암흑의 형상이 마치 입을 벌리고 있는 짐승의 아가리처럼 느껴졌다.

나아가느냐, 돌아가느냐. 선택의 갈래에서 그 칠흑의 구덩이는 루도에게 있어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진실을 알지 못하는 한 영영 저 암흑에서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라 확신했다.

그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서 석실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화아악-!

석실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불빛이 픽 꺼지더니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어둠이 들이닥쳤다. 하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짧은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루도는 불이 꺼진 게 아니라, 어둠이 방 안을 잠식해 들어간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입구로 되돌아가려 했지만 아무리 뒷걸음질쳐도 닿지 않았다. 벽을 짚으려 손을 뻗어도 황망하긴 마찬가지였다. 분명히 10평 남짓한 방이었을 텐데, 마치 거대한 벌판 한가운데 선 기분이었다.


‘입구가 사라졌어...이것도 마법의 일종인가?’


루도는 검을 뽑은 채 주변을 경계했다. 이렇게 어둠에 둘러싸인 상황이다 보니 측면이나 후방의 공격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만약 자객이라도 숨어 있다면 꼼짝없이 당할지도 몰랐다. 루도는 어둠에 눈이 익을 때까지 기다릴 생각으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때였다. 어깨를 붙잡히는 감각에 루도는 소스라치게 놀라 등을 돌렸다.


“아...?!”


순간 몸에 힘이 쫙 빠졌다. 무릎은 나사 빠진 탁자마냥 부들부들 떨렸고, 검은 쥐고 있는 게 고작이었다. 숨이 막혀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루도는 제자리에 멈춰 선 채 어둠 속에 서 있는 남자를 응시했다.

분명 한 치 앞도 내다보기 어려운 칠흑 속이었을 텐데도, 그 남자의 머리카락, 얼굴, 손가락의 주름까지도 똑똑히 인식할 수 있었다. 그리고 피범벅이 된 셔츠와, 칼에 베여 반쯤 벌어진 목까지도.


“루도오...”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목숨이라도 바치겠다고 빌었었다. 그의 미소와, 따뜻한 체온과, 부드러운 목소리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건 결코 그가 바란 재회의 형태가 아니었다. 어째서....어째서 죽을 때 모습 그대로란 말인가. 어째서 그런 처참한 모습이어야 한단 말인가.


“라...람...”


루도는 떨리는 손으로 람카디스의 얼굴을 매만졌다. 오싹하리만큼 싸늘한 냉기와 함께 핏물이 뚝뚝 묻어나왔다.


“라암-!”


처음에는 흉측한 몰골이라 망설였지만, 그건 틀림없는 람카디스였다. 루도는 순간 가슴이 울컥하여 그를 끌어안으려 했다. 그런데 루도가 다가가려 하자, 람카디스는 그를 야멸치게 밀쳐냈다.

어찌나 세게 밀었는지, 루도의 상체가 크게 휘청거렸다. 그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말을 더듬었다.


“라...람...왜 그래요? 나예요! 루도!”


그러자 람카디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가 말할 때마다 목의 상처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루도...루도오...루도오...내 아들.”


“예, 저예요. 람! 보고 싶었어요!”


“잘도 그런 말을 하는구나아...! 난 이렇게 시체가 되어 땅속에 묻혔는데! 바로 너 때문에!”


“...네?”


람카디스의 목소리는 모기만 하다가, 점차 힘이 붙어 급기야 고막이 울릴 정도로 쩌렁쩌렁해졌다. 루도는 다시 그를 끌어안으려다 그 노기 띤 눈빛에 놀라 우뚝 멈춰 섰다. 엄청난 적의! 누구도 아닌 람카디스가, 누구도 아닌 자신에게 그런 눈빛을 보내자 루도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람카디스는 계속해서 피를 튀기며 말했다.


“너...너만 없었다면! 너만 없었다면 나는 지금쯤 데루루피아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을 텐데! 네가 모든 것을 망쳐놨어!! 더러운 펠아람의 아이. 너를...그때 너를 구해주는 게 아니었어. 그냥 골목 한구석에서 죽어 썩게 내버려둬야 했다고! 으아...으아아...! 상처가, 상처가 아프다. 증오스럽다. 루도! 네가 증오스러워어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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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 람의 계승자 - ep.5 - 사냥감의 반전(4) +2 15.05.05 922 24 23쪽
217 람의 계승자 - ep.5 - 사냥감의 반전(3) +3 15.05.04 936 22 23쪽
216 람의 계승자 - ep.5 - 사냥감의 반전(2) +2 15.05.04 868 22 21쪽
215 람의 계승자 - ep.5 - 사냥감의 반전(1) +1 15.05.04 775 24 20쪽
214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5) +2 15.05.04 710 24 15쪽
213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4) +2 15.05.04 720 25 23쪽
212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3) +3 15.05.03 846 29 18쪽
211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2) +3 15.05.03 764 22 23쪽
210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1) +2 15.05.03 855 23 20쪽
209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7) +5 15.05.03 795 28 25쪽
208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6) +2 15.05.03 894 24 22쪽
207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5) +4 15.05.02 938 29 21쪽
206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4) +1 15.05.02 884 27 20쪽
205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3) +2 15.05.02 690 24 21쪽
204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2) +2 15.05.02 768 24 24쪽
203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1) +2 15.05.02 586 24 22쪽
202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6) +3 15.05.02 696 28 18쪽
201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5) +5 15.04.29 863 24 19쪽
200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4) +1 15.04.29 937 24 26쪽
199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3) +1 15.04.29 789 24 24쪽
198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2) +3 15.04.29 812 26 18쪽
197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1) +1 15.04.29 758 24 17쪽
196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8) +4 15.04.28 905 28 16쪽
195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7) +3 15.04.28 840 25 20쪽
194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6) +3 15.04.27 712 26 19쪽
193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5) +3 15.04.27 756 22 17쪽
192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4) +2 15.04.27 731 22 18쪽
191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3) +1 15.04.27 731 30 18쪽
190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2) +2 15.04.27 758 27 19쪽
189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1) +2 15.04.27 791 31 18쪽
188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完) +1 15.04.27 600 33 18쪽
187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5) +4 15.04.26 734 24 17쪽
186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4) +1 15.04.26 930 28 16쪽
185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3) +2 15.04.26 739 26 20쪽
184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2) +6 15.04.23 779 28 15쪽
183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1) +3 15.04.23 840 26 19쪽
182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2) +2 15.04.23 756 25 17쪽
181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1) +3 15.04.23 767 26 15쪽
180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0) +1 15.04.23 683 25 22쪽
179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9) +3 15.04.22 811 29 16쪽
178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8) +3 15.04.22 847 27 15쪽
177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7) +1 15.04.22 777 29 18쪽
176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6) +1 15.04.22 792 23 18쪽
175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5) +2 15.04.22 765 29 15쪽
174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4) +3 15.04.22 911 25 18쪽
173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3) +5 15.04.21 767 27 16쪽
172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2) +2 15.04.21 923 25 14쪽
171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 +3 15.04.21 807 25 17쪽
170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8) +3 15.04.21 730 24 21쪽
169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7) +2 15.04.21 703 19 15쪽
168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6) +4 15.04.20 752 24 18쪽
167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5) +2 15.04.20 657 20 18쪽
166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4) +1 15.04.20 768 23 17쪽
165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3) +2 15.04.20 739 24 16쪽
164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2) +3 15.04.20 809 20 16쪽
163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1) +1 15.04.20 821 22 21쪽
162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6) +1 15.04.20 830 29 14쪽
»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5) +2 15.04.20 712 25 18쪽
160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4) +3 15.04.19 866 28 18쪽
159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3) +3 15.04.19 948 28 18쪽
158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2) +3 15.04.19 901 26 22쪽
157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1) +5 15.04.19 1,211 46 22쪽
156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10) +6 15.04.18 901 26 21쪽
155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9) +3 15.04.18 772 26 18쪽
154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8) +1 15.04.18 657 24 19쪽
153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7) +2 15.04.18 687 26 18쪽
152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6) +1 15.04.18 748 27 17쪽
151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5) +4 15.04.18 713 23 16쪽
150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4) +1 15.04.18 670 24 17쪽
149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3) +2 15.04.18 754 22 17쪽
148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2) +3 15.04.16 849 29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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