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분노의 주먹
그림자 탐정
본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무관하며 모두 창작에 의한 허구임을 밝힙니다.
이한의 트라우마 때문에 17층까지 계단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송이는 그간의 운동이 효과가 있었는지 거친 숨 한번 없이 오르고 있었다. 반면 박 경위가 중간 정도에 도착했을 쯤 잠시 쉬었다 올라가자면서 멈춰 섰다.
“힘드시면 지금이라도 엘리베이터 타고 먼저 올라가 계세요.”
그제야 송이도 크게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박 경위는 손을 내저으며 괜찮다고 잠깐 쉬었다가 다시 걷자고 했다. 민철은 형사라는 사람이 참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느껴진 박 경위는 민망했는지 차량 폭발사고로 몸이 좀 쇠약해졌다고 핑계 아닌 핑계를 대며 너스레를 떨었다.
얼마 전 폭발사고로 몸 여러 곳이 다치긴 했지만 큰 부상은 아니었다. 다만 죽음에 대한 공포로 인해 극심한 신경쇠약으로 며칠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그뿐 아니라 잠을 자려고 술에 의지해 몸 상태가 더 안 좋았다. 송이가 눈치 채고 툭 치며 민철에게 눈짓을 보냈다. 민철은 아무리 형사라도 몸이 불편하면 그럴 수 있다고 중얼거리며 어물쩍 넘어갔다.
그림자가 송이에게 말을 전해 달라고 했다.
“그날 이곳에 어떻게 온 거였어?”
“그날?”
“정인이 괴한한테 죽임을 당한 날 말이야.”
갑작스런 그날 이야기에 박 경위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림자를 내려다보았다.
“그게 무슨······. 아아, 나도 걱정 돼서 와봤지. 그때도 그렇게 말······. 아, 그래. 정신이 없었을 테니.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아니야. 그냥 궁금해서.”
뜬금없이 묻고는 그 이유를 얘기하지 않는 것이 수상했던 박 경위였지만 트라우마까지 앓고 있는 이한을 생각하면 그날 일을 계속 캐묻기도 그랬다. 이제 쉬었으니 움직이자는 박 경위의 말에 송이와 민철도 천천히 발을 뗐다.
이한은 사실 그날 박 경위가 왔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정인의 죽음 앞에 무너져 내린 이한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피에 온몸이 젖어 있던 정인의 모습뿐이었다. 박 경위가 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수연의 최면치료를 통해서였다.
최면치료를 받으며 그날의 일들이 명확하게 떠올랐다. 이한에게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날이었기에 그날의 일들은 머릿속 한쪽 구석에 어지럽게 내팽겨져 있었다. 그래서 더욱 기억하지 못했다.
정인을 부둥켜안고 울부짖고 있을 때 자신의 어깨를 흔들고 불렀던 이가 누구인지 그 당시엔 이한 자신도 몰랐다. 최면을 통해 그 사람이 동식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떻게 알고 왔는지 물어볼 겨를도 없었다. 응급차가 도착하고 정인을 구조대원들이 옮기는 가운데에도 이한 옆에 동식이 있었다. 그러나 이한은 까맣게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
응급차에 정인과 함께 올라타는데 옆에서 부축해주고 있던 동식의 신발이 이한의 눈에 들어왔다. 밑창에 붉은 핏자국이 묻어 있는 것이었다. 이한이 응급차에 올라타고 동식이 뒷걸음치며 뒤로 물러서는 발걸음마다 선연하게 신발바닥에 묻은 붉은 핏자국들이 이한의 눈에 보였다.
그 당시에는 눈에 보여도 의식하지 못했던 것들이 최면을 통해 선명해졌다. 그리고 박 경위와 이곳에 도착해 빌딩 앞에 섰을 때 이한의 머릿속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던 그날의 기억들이 또렷이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17층에 도착해 이한의 집으로 향하던 박 경위에게 그림자가 송이를 통해 말을 걸었다.
“이곳 기억해?”
“어? 그럼 네 집인데 내가 모르겠어?”
“아니, 그날 이곳에서 정인이 괴한의 칼에 죽었잖아.”
“그 얘기였어? 근데 왜 자꾸 그날 얘기를 꺼내는 거야? 이제 괜찮은 거야?”
송이도 괜찮은지 묻고 싶었지만 그 틈을 주지 않고 그림자가 말했다.
“나보다 넌 괜찮아?”
“그게······ 무슨 소리야?”
알 수 없는 그림자의 말에 박 경위의 눈과 목소리가 떨렸다. 그 모습에 송이가 뭔지 알겠다는 듯 입 밖으로 내지 말아야 할 말을 하고 말았다.
“형사님이 범인인 거예요?”
“뭐? 송이학생 지금 뭐라고 했어? 내가, 내가 뭐?”
“아니······.”
그림자가 송이의 말을 막았다. 그리고 뒤로 물러나라고 소리쳤다. 송이는 그제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꺼냈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입을 막으며 뒤로 물러났다.
“학생, 방금 나보고 범인이라고 했어? 이한이 그래?”
“아니요. 그게······.”
조금씩 박 경위의 실체를 밝히려했던 그림자였지만 송이가 앞서 터뜨린 바람에 더는 늦출 수 없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래, 맞아. 너야? 네가 정인을 죽인 거야?”
“무, 무슨 소리야? 이한. 왜 그래?”
흔들리는 눈빛에서 박 경위가 범인임을 충분히 인지할 정도였다. 그래도 직접 그의 입에서 범인이라는 소리를 듣고자 그림자는 재차 물었다.
“기억이 돌아왔어. 너와 이곳에 온 것도 그 이유이고. 그날의 기억이 맞는지 확인을 하고 싶었을 뿐이야. 이젠 솔직히 말해보는 게 어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 그런 이유였다면 실망이야. 난 널 도우러 여기 온 거야.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나도 널 도울 수 없어. 난 그만 가봐야겠어.”
눈을 어디에 둘지 몰라 흔들리는 동공을 주체 못하고 박 경위는 이곳을 피할 핑계거리를 생각해냈다. 그리고 천천히 뒷걸음치며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민철이 박 경위를 잡으려하는 것을 송이가 막았다.
“안 돼. 아저씨가 가만히 있으라고 하셨어. 아저씨가 하신데······.”
“아저씨가 뭘 어떻게 해?”
“넌 여기 있어.”
송이가 따라가며 박 경위에게 말을 걸었다.
“이대로 가면 인정하는 꼴이 된다고 하세요. 멈추세요. 어서!”
엘리베이터에 거의 다다를 쯤 박 경위는 돌아서서 송이를 바라보았다.
“송이학생, 이한한테 정확히 전해. 아니, 듣고 있지. 난 아니야.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취급을 받고 있는 게 힘들어서 그래. 너와 내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거였어? 어떻게 정인을 죽인 범인을 나라고······. 참 어이가 없어서. 그만하자. 널 보고 있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다.”
“그날 그럼 어떻게 알고 왔어? 그것도 사건이 발생하고 바로······. 넌 내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괜찮다고 했어. 일이 있어 오지 못한다고 했고. 그런데 정인이 살해당한 그 시간에 넌 거기에 있었어. 그리고 네 신발바닥에도 정인의 핏자국이 묻어있었고.”
송이의 말을 초조한 눈빛으로 듣고 있던 박 경위의 손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다. 뭔가 상당히 불안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명료했다.
“그건 그때도 말했잖아. 너랑 통화하고 느낌이 쎄해서 걱정돼 왔다고. 널 옆에서 부축한 걸 잊은 거야? 그때 묻었겠지, 신발에. 고작 그것 때문에 날 범인으로 모는 거야? 네가 내 친구가 맞아? 정말 실망이다. 더는 듣기 싫어. 아니, 다음에 얘기하자. 지금은 더는 못 들어주겠다.”
박 경위는 그렇게 말하고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송이가 박 경위에게 다가서려는 것을 그림자가 말렸다.
‘송이야, 떨어져. 동식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
‘그럼 그냥 이렇게 보낼 거예요?’
‘아니. 내 말을 전해줘.’
송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림자의 말을 박 경위에게 전했다.
“그것 밖에 없었겠어? 네가 증거를 인멸했다는 것도 알고 있어.”
“뭐?”
그림자의 말에 박 경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박 경위 자신도 느꼈는지 얼른 모자를 눌러 쓰며 고개를 숙였다.
“놀랐어? 나를 대신해 사건을 수사한다던 넌 증거를 인멸하기 급급했더라고.”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나는. 난 널 위해 수사를 했던 거야. 정신없고 힘들어하는 널 위해서 말이야.”
“계속 거짓말할 거야?”
그림자의 분노가 그대로 전해질 만큼 송이가 크게 소리치는 그때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박 경위는 서둘러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송이가 달려가 막으려했지만 그림자가 말렸다.
‘어쩌려고요? 알았어요, 그럼 계단으로······. 근데 언제 계단으로 따라가요.’
뒤에서 지켜보던 민철이 나서려는 것을 송이가 막아섰다.
“안 돼, 민철아.”
엘리베이터가 닫히는 것을 속절없이 지켜만 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림자가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쏘옥 들어갔다. 그러면서 계단으로 빨리 내려가라고 소리쳤다. 그 소리에 송이는 민철의 손을 붙잡고 비상계단으로 달렸다.
밀폐된 엘리베이터에 대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이한이었지만 생각할 틈도 없이 몸이 움직여 올라타고 말았다. 이한의 그림자가 올라 탄 것을 본 박 경위는 놀란 눈으로 경계하듯 뒷걸음치며 물러섰다.
그림자는 막상 올라탄 후에 극심한 고통에 후회했다. 머리를 감싼 채 몸을 웅크리며 고통스러워했다. 그 모습에 박 경위는 경계심을 풀고 여유로운 얼굴로 그림자에게 다가섰다.
“무슨 생각으로 탄 거야? 이 꼴을 하고. 그러니까 왜 그날 일을 다시 들쑤시고 그러냐고. 좋지도 않은 일을 말이야.”
자신의 말에도 꼼짝 않고 웅크린 채 괴로워하는 그림자를 보고 박 경위는 더욱 힘들어할 그의 모습이 궁금했는지 작심한 듯 말을 이어갔다.
“그래, 이렇게 둘만 있으니 솔직히 말해주지. 네가 죽었어야 했어. 사실 널 죽이려고 했는데 정인이 들어오는 거야. 난 이미 칼을 들고 있었거든. 그걸 본 정인을 그냥 둘 수가 없었지.”
박 경위의 말에 그림자의 몸이 부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흔들렸다. 계단으로 뛰어 내려가는 송이에게도 그림자의 고통이 느껴졌다. 민철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계단을 내려갈 수 있었다.
“정인을 처음 안 건 나였어. 너만 아니었으면 나와 결혼할 사람이었다고. 그런데 네가 내 여자를 가로챈 거지. 그뿐이야. 넌 사사건건 내 앞길을 막았어. 항상 네가 먼저였지. 난 매번 네 뒤꽁무니나 따라다니는 놈이 되어 있었다고. 그걸 네가 알아? 아니, 알면서 즐겼겠지. 그래서 정인도 나한테서 빼앗은 거잖아, 안 그래? 그래, 정인을 죽였어. 칼로 정인을 찌르면서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너 때문이라고······. 너 때문에 죽는 거라고 했어. 그러니까 다 너 때문이야. 그러니까 넌 죽어야 하는 거야. 그러니까 죽어! 이 새끼야!”
부들부들 떨며 웅크리고 있는 그림자를 향해 박 경위가 포효하듯 크게 소리쳤다. 그 순간 그림자가 서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박 경위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그림자는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쥐고 있던 펜을 달칵 눌렀다. 그때 펜에서 방금 전 박 경위의 말이 흘러나왔다.
“뭐야? 너······. 네가 그걸 어떻게 갖고 있는 거야? 너 일부러······. 그래서······ 트라우마도 거짓말이었어.”
그림자에게 어떤 대답도 들을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박 경위는 곧바로 그 펜을 뺏으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의 손은 그림자의 손에 잡혀 움직이지 못했다.
“너 뭐야? 네가 날 잡은 거야?”
박 경위는 그림자의 손을 뿌리치려 팔을 휘저었다. 그러면서 그림자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지만 주먹은 역시나 허공을 쳤다. 곧바로 그림자의 주먹이 박 경위를 향해 분노를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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