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청탁의 대가
그림자 탐정
본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무관하며 모두 창작에 의한 허구임을 밝힙니다.
6년 전, 박동식 경위가 휴대전화를 보며 지능범죄수사대로 들어왔다. 그는 입 꼬리가 올라간 채로 휴대전화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궁이한 경위가 다가와 어깨동무하며 물었다.
“뭐가 그리 좋아서 싱글벙글 일까?”
“어? 어, 이거 봐봐.”
동식은 휴대전화를 이한의 얼굴 앞으로 가져가 사진을 보여주며 말을 이었다.
“예쁘지? 오늘 소개팅 할 여자야.”
“오호, 소개팅. 어디 보자······. 와우, 미인이네.”
“그치? 이번엔 진짜 잘해 보려고. 그래야 이 형님이 장가를 가지 않겠냐. 어?”
그렇게 말하며 동식은 호탕하게 웃었다.
“그래, 국수 좀 얻어먹게 빨리해라.”
이한도 동식의 어깨를 토닥이며 크게 웃었다. 동식은 소개팅 시간이 다가올수록 긴장도 되고 기분이 좋았던지 하루 종일 상기된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이한도 자신의 일처럼 함께 기뻐해주고 응원해주었다. 소개팅 시간에 맞춰 퇴근 준비를 하고 있을 때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네, 지능범죄수사대 박동식 경위입니다.”
전화를 끊는 동식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무슨 전환데 그래?”
“어? 아니······. 아니야.”
“시간된 거 아니야? 빨리 가봐야지.”
“어. 그래야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동식은 말과 다르게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이한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야, 동식아.”
“어? 왜?”
“뭐가 왜야? 너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니야. 아무 것도.”
“뭐가 아니야? 네 얼굴에 다 쓰여 있는데. 무슨 일이야? 소개팅 안 가?”
“아, 맞다. 그렇지······.”
“이 자식 이상하네. 하루 종일 소개팅 한다고 좋아했던 놈이 왜 이리 시큰둥해? 무슨 일 있는 거야? 왜 소개팅 취소됐어?”
“아니야. 그게 아니라······. 저기 이한, 미안한데. 나 대신에 소개팅 좀 나가줄래?”
뜬금없는 동식의 부탁에 이한은 깜짝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뭐? 내가 나가라고? 미쳤어? 내가 왜? 싫어.”
“아니. 내가 좀 일이 생겨서 시간에 맞춰서 못 갈 것 같아서 그래.”
“그럼 시간을 늦춰. 아니면 내일 만나자고 하던지.”
“아니······ 그러지 말고. 네가 나가서 1시간만······ 아니, 30분만 여자 분······. 어, 이름이 정인, 이정인이야. 정인 씨한테 잘 좀 얘기해줘라. 최대한 빨리 약속장소에 갈 테니까. 어?”
“싫어. 내가 왜? 나 그런 자리 정말 싫어. 그것도 내가 소개팅 하는 것도 아니고. 미안하지만······.”
동식은 이한의 손을 움켜쥐며 간절히 애원한 듯 부탁했다.
“이한, 부탁한다. 오늘 아니면 소개팅을 6개월 뒤에나 할 수 있단 말이야. 유학 갔다가 잠시 들어온 거라 이번에 못하면 놓칠 것 같아서 그래. 어? 부탁해.”
“그 정도로 마음에 든 거냐? 사진만 본 거 아니었어?”
“야, 사진만 봐도 딱 알지. 그러니 부탁한다. 어?”
“아이, 알았어. 가능한 빨리 와. 아니, 무슨 일인데? 내가 그걸 대신 하면 안 되는 거야?”
“그랬으면 그걸 부탁했겠지.”
“아, 그건 그러네. 알았어. 최대한 빨리 와라.”
“그래, 고맙다.”
소개팅 장소를 알려주고 동식은 곧바로 지수대를 뛰쳐나갔다. 그때 박 경위의 얼굴 앞으로 손이 보이며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경위님,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어, 왔어?”
“이게 뭡니까? 대낮부터 술이십니까?”
“술은? 그냥 반주 정도지.”
박 경위는 빈 잔에 술을 따라 마시고는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먹었다. 그리고는 앞자리에 앉은 남자를 보며 물었다.
“알아보라는 건?”
“경위님 말씀이 맞더라고요. 미래은행 컨소시엄이 서소동 민간개발 사업자로 선정됐고요. 그 컨소시엄 뒤에 미라클이라는 자산관리회사가 있었습니다. 근데 경위님은 이걸 어떻게 아신 겁니까?”
남자의 물음에 박 경위는 대답하지 않고 곧바로 다른 것은 더 없는지 물었다.
“아, 네. 자금을 추적해봤는데, 대부분이 사채시장 쪽에서 들어온 것 같았습니다.”
“사채? 사채 돈을 갖다 썼다는 거지. 대단하네. 얼마나 수익이 나는 사업이라는 거야. 그 사채업자는 누군지 알아봤어?”
“미스골드캐피탈이라는 곳이었습니다. 그곳 대표가 권민희라는 여자고요.”
“권민희? 권민희······. 어디서 들어본 것도 같은데······.”
손가락으로 이마를 툭툭 치며 술병을 잡으려는데 앞에 있는 남자가 얼른 술병을 잡아 박 경위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박 경위는 그에게 옅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술을 들이켰다.
***
모니터 앞에 앉은 수연은 파일내용을 읽어 내려가다 송이 옆에 드리운 그림자에게 물었다.
“미스골드캐피탈? 여기가 돈줄인 거야? 이한 씨.”
“맞을 거야. 권민희 대표. 내가 그동안 조사하고 있었던 여자였어.”
“정말? 이제 완전히 기억이 돌아온 거야?”
“아니. 그동안 내가 조사했던 자료들을 조금씩 훑어보고 있었어. 그럼 조금이라도 내 기억들이 돌아올 것 같아서 말이지. 근데 내가 최근까지 조사했던 사람이 권민희라는 사람이었더라고. 강미남 클럽에서 들었던 이야기들을 도태로 자료를 찾아보니 거기에도 권민희 대표의 돈이 흘러들어간 것 같았어. 그게 미스골드캐피탈이라는 곳이고. 미래은행 컨소시엄을 움직이는 실세 중에 한 곳인 거지. 그리고 오진태 대표가 있는 미라클 자산관리회사도 말이야.”
“그럼 이한 씨는 그동안 이 재개발사업에 대해 조사를 하고 있었던 거야?”
“아니, 그건 아니야. 누군가의 제보를 받아 알아보려던 참이었던 것 같아. 권민희 대표는 그 전에 다른 사건으로 조사 중이었던 거고.”
“다른 사건이라는 게 뭔데?”
“그게······.”
***
장국을 먹고 있던 박 경위는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되물었다.
“뭐? 이한이 깨어났다는 거야?”
“그건 모르겠습니다. 남궁 경위에게 연락이 왔다는 얘기가 있어서요.”
“그 얘기 누구한테 들었어?”
“정보원들 사이에서 흘러나온 얘기라 자세히는 저도 모릅니다. 아시잖습니까? 근데 깨어나면 안 되는 겁니까? 기억이 돌아오면 경위님께······.”
남자가 눈치를 보며 말하려는데 박 경위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을 잘랐다.
“아니야. 그런 게. 그리고 그럴 리 없어.”
“그래요? 그럼, 남궁 경위가 어디에 있는지 아시는 겁니까? 어디 병원입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그건 나도 몰라.”
“근데 왜 그럴 리 없다고 하시는 겁니까? 정보원들 귀에 들어간 거면 뭔가 알아보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코마상태였다는 게 다 술수 아니겠습니까? 사실은 깨어 있는데 의식이 없는 척하는 거죠.”
“왜 그런 짓을 하는데?”
“그거야······. 몰래 수사 중인 게 있는 거겠죠? 그날 남궁 경위도 그곳에 있었던 걸 보면 같이 죽이려했던 게 아니겠습니까? 의식이 돌아왔다는 걸 알면 또 죽이려들게 뻔하니 그런 게 아니겠어요. 사실 뭐······.”
박 경위는 검지로 입을 가리며 그 남자의 말을 막았다.
“조용. 여기 듣는 사람 많다.”
“아, 네.”
그는 고개를 앞으로 숙이며 작은 소리로 말을 이었다.
“굳이 죽이려는 이유가 있으십니까? 우리가 아니어도 그를 죽이려하는 자가 있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걸 알았으면 내가 미쳤다고 그런 부탁을 했겠어?”
“아, 모르셨군요. 그럼 무슨 이유로······.”
“사사건건 내 앞을 가로 막은 놈이라고. 내 인생의 건림돌이란 말이야. 이번 참에 조용히 보내려고 했던 것뿐이지.”
“단순 그 이유뿐이란 말입니까?”
“왜? 그러면 안 돼?”
“아니······ 그래도 두 분이 워낙 돈독하셨지 않습니까? 저는 또 다른 앙금이 있나 싶었죠.”
“뭐? 5년 전 사건?”
뭐라도 알고 있는 것 같아 박 경위는 그에게 넌지시 물었다.
“아, 예. 그때 일로 싸우신 걸 우연히 봤습니다. 회식이 있던 그날 말입니다.”
그는 5년 전 이한과 동식에게 있었던 일을 꺼냈다.
화장실을 갔다가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나오는데 동식과 이한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서 그도 그 자리에 끼려고 했지만 갑자기 목소리가 커져 싸운 듯해 무슨 일인가 싶어 멀리서 지켜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그걸 소문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럼, 그걸 또 아는 놈이 누군데? 너하고 나 밖에 없잖아. 네가 아니면 내가 그걸 소문냈겠어, 그럼?”
동식은 이한이 소문을 냈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동식아, 왜 이러는 거야? 술 취해서 그런 거면 여기서 그만해. 말 같은 소리를 해야 들어주기나 하지. 그만 들어가자.”
“자식이, 사람을 술주정꾼으로 만드네. 야, 나 하나도 안 취했어. 말해봐? 너잖아. 그럼 그게 왜 동료들 입에서 나오느냐 말이야?”
“야,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만하자고. 그날 너한테 그렇게 말하고 난 다 잊었어. 내가 그 일을 내 입 밖으로 내뱉었으면 내가 네 아들이고, 동생이다. 아니, 지수대에서 나갈게. 정말이야. 믿어줘. 내가 뭐하려고 그런 짓을 하겠어? 됐다, 난 들어간다.”
들어가려는 이한의 팔을 동식이 잡아챘다.
“왜?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나보다 먼저 진급하려고 그런 거잖아? 넌 항상 내 앞에 있어야 하니깐, 아니야? 내가 좀 앞서 가려면 넌 꼭 그렇게 날 밀어내더라고. 이번도 그거 아니었어?”
“너 정말······. 그 말 진심인 거야? 그동안 우리 사이가 그것 밖에 안 되는 거였어? 어!”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것도 서운한데 그동안 자신을 그런 놈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 동식에게 이한은 불같이 화를 내며 그의 멱살을 잡아챘다.
“그래, 이제 본색이 나오네. 그래, 쳐봐. 치라고 새끼야!”
“이 자식이······.”
그날 일을 회상하듯 박 경위와 그는 술을 들이켰다.
“제가 말리지 않았다면 정말 큰 싸움이 날 뻔하지 않았습니까?”
박 경위는 술잔을 내려놓으면서도 아무 말이 없었다.
“그렇게 싸우시고 며칠 안 돼서 바로 또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지내시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잘 얘기가 됐구나 싶었죠.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겁니까? 마음에 여전히 그날의 앙금이 남았던 거였습니까?”
“네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해? 넌 모른다, 내 마음. 이 치욕스런 마음을······.”
그렇게 말하고는 술잔에 술을 따라 박 경위는 단숨에 들이켰다.
***
수연은 놀란 눈으로 송이를 보고는 다시 그림자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동식 씨가 연루되어 있다는 소리야?”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래. 오진태 대표를 선배로 알고 만난 날······. 그자의 청탁을 들어주기로 한 것 같아.”
“아니라고 했잖아.”
“맞아. 아니라고 했지. 나도 그렇게 믿었고. 근데 내가 정리한 수사 자료들을 보고 그날이 떠올랐어. 그리고 내 정보원에게도 확인을 했고.”
“정말이야?”
그림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청탁을 받고 증거물을 빼돌렸다는 사실을 알고 곧바로 박 경위를 찾아갔어.”
5년 전, 내사 중이던 사건을 조사하던 이한은 동식을 지수대 옥상으로 불렀다.
“너 뭐야? 아니라고 했잖아?”
“다짜고짜 그게 무슨 소리야?”
“백 회장 말이야. 결국 오 선배의 청탁을 들어준 거였어? 왜 그랬어? 나한테까지 왜 거짓말 한 거냐고?”
당황한 듯 했지만 동식은 모르는 눈치였다.
“너······. 아니야. 무슨 소리야? 내말을 못 믿는 거야? 믿는다면서? 너는 믿는다고 했잖아.”
“그래, 믿었어. 너는 아니라고. 나한테 거짓말했을 리 없다고. 근데······.”
“뭔데 그래? 어디서 이상한 소리 듣고 그런 거면 이러지 마. 내 말 믿어, 이한. 왜 그래?”
“권민희 대표가 있는 미스골드캐피탈이라고 알아?”
“그게 누군데?”
“정말 몰라?”
“모르니까 묻지?”
“내가 조사 중인 사건의 용의자 중 한 명인데, 그 사람의 자금을 추적하다 검은 돈이 너한테 흘러들어간 정황이 포착됐어. 아니, 확인됐어.”
“그게 무슨 소리야? 난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모른다고.”
억울하다는 듯 동식은 이한을 쳐다봤다.
“그래, 모를 수 있겠지. 세탁된 돈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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