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흰 가운의 비서실장
그림자 탐정
본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무관하며 모두 창작에 의한 허구임을 밝힙니다.
버스에 탄 송이가 자리에 앉으며 투덜댔다.
“어떻게 택시 한대가 안 보이냐고. 아이, 정말.”
송이의 뒷좌석에 앉은 민철이 작게 말했다.
“어쩔 수 없잖아. 그 생각까진 못했으니. 아저씨가 미리 좀 말해 줬······.”
송이가 눈을 흘기자 민철은 입을 막으며 그림자를 내려보다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그림자가 송이에게 말했다.
‘민철의 말이 맞아. 내가 미리 애기해줬어야 했어.’
‘그래도 못 따라 갔을 거예요. 여기가 워낙 외진 곳이라 택시 잡기도 힘들고요. 미리 예약해둘 수도 없었잖아요.’
‘역시 무리였어. 차를 가지고 이동하지 않고서는 힘들 거라 생각은 했는데······.’
‘그러셨어요? 저희가 학생이라 운전을 할 수도 없고······. 아! 수연언니가 운전을 할 줄 아시잖아요. 차도 있고. 언니한테 부탁을 해보는 건 어때요?’
그림자가 바로 대답하지 못하자 송이가 말했다.
‘왜요? 미안해서요?’
‘미안하기도 하지만 그건 내 사치고. 수연 씨는 일도 하고 있고, 일 마치고 어머니랑 나를 살피러 병원에도 가는데 운전수까지 되어달라고 할 수는 없잖아.’
‘그러네요. 수연언니는 안 되겠네요. 그럼, 어쩌죠? 저희가 운전면허를 딸 수도 없고.’
‘그건 좀 더 고민해보고.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쉬자.’
‘왜요? 운동해야죠. 아직 많이 늦지도 않았는데요.’
‘운동······ 시간이 그런가? 그냥 오늘은 좀 쉬는 게 어때?’
‘안 돼요. 아저씨가 말했잖아요. 하루라도 운동을 빼먹으면 안 된다고요. 그러니까 운동하러 가요. 네?’
‘자식, 언제는 쉬자고만 하더니······. 아니다. 알았어. 대신 오늘은 좀 빡셀 거야. 각오해.’
‘네에!’
속으로 크게 대답한 송이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송이의 입매는 올라가있었지만 눈에는 눈물이 맺혀있었다. 창가에 비친 송이의 얼굴을 본 민철이 걱정스레 물었다.
“너 지금 울어?”
송이는 얼른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아니야. 눈에 뭐가 들어가서 그런 거야.”
“그래? 근데 아저씨가 뭐라고 그러셔? 내 말 듣고 화나셨나?”
“아니야. 네 말이 맞다고 하셨어.”
“내 말이 맞다고?”
말없이 송이는 고개만 끄덕였다.
“단단히 화가 나셨구나. 아저씨, 그런 뜻이 아니라······.”
송이는 뒤돌아보며 민철의 말을 막았다.
“민철아.”
“어? 왜?”
“아저씨 화 안 나셨어. 내 말 그대로 아저씨가 잘못했다고 하셨다고. 그러니까 그냥 넘어가자. 아저씨 지금 혼자 생각하실 게 있다고 하시니까 조용하게 해드리자. 아, 운동하러 금남천으로 갈 거야.”
“운동? 아······ 그래, 알았어. 근데 앞으로 어떻게 할지는······ 아하, 생각하고 계신다고 했지. 그래, 조용히 있을게.”
그제야 송이는 다시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민철이 갑자기 송이의 어깨를 툭툭 쳤다.
“송이야, 전화. 벨소리 안 들려?”
“어! 전화? 어머.”
송이는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네. 근데 무슨······. 아! 아빠 일로 전화주신 거······ 아니에요? 그럼······. 지금요? 무슨 일로 그러시는데요? ······알겠어요. 네. 도착해서 전화 드릴게요.”
민철은 송이가 전화를 끊자마자 물었다.
“누구 전화야?”
“방기철 형사님.”
“방기철이면······ 그때 장미공원에서 봤던 그 형사?”
“응. 나를 만나고 싶대.”
“너를? 왜?”
“모르겠어. 무슨 일이냐고 물었는데도 직접 만나서 얘기해야 한다고만 하잖아.”
“무슨 일인데 그러지······.”
그림자에게 송이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아저씨, 제 얘기 들으셨어요?’
‘어, 들었어. 어디서 만나자고 한 거야?’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지 뭐예요.’
‘그래서 만나기로 한 거야?’
‘집으로 오는 길이냐며 무작정 기다리겠다고 하잖아요. 일단 알겠다고 하고 도착하면 전화하겠다고 했죠.’
‘무슨 일일까?’
‘그러니까요. 바로 집으로 가야할 것 같아요.’
‘그래. 그러자.’
***
서울 도심의 최고층빌딩 정문 앞에 차가 멈춰 섰다. 차에서 오진태 대표가 내리자 도어맨이 달려와 차키를 받았다. 오 대표는 곧바로 빌딩 안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엘리베이터는 빠른 속도로 올라갔다. 밖으로 보이는 한강의 야경은 그자체로 장관이었다.
최고층에 내린 오 대표는 한 객실 앞에 서서 문을 두드렸다.
“비서실장님, 오진태입니다.”
문이 열리고 흰 가운을 입은 남자가 그를 맞았다.
“들어와요.”
오 대표는 허리 숙여 인사하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흰 가운을 입은 남자는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거실 소파에 앉아 탁자 위의 와인 잔을 들어 마셨다. 오 대표는 그의 옆으로 가서는 눈치를 보며 서 있었다.
“왜 서서 그래요? 저쪽으로 앉아요.”
“예, 비서실장님.”
그제야 오 대표는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한잔 할래요?”
“죄송합니다. 차를 가지고 와서.”
“대리 부르면 되잖아요. 자 받아요.”
“예, 그럼.”
오 대표는 벌떡 일어나 술잔을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진태 씨는 와인 안 마셔봤어요?”
“예? 아닙니다. 와인 잘 마십니다.”
“그래요? 근데 왜 술을 그렇게 받아요. 잔 내려놔요. 와인은 그냥 바닥에 내려놓고 받는 거예요. 그게 맞는 격식이에요.”
“아······ 그렇습니까? 몰랐습니다. 예.”
머쓱하게 웃으며 오 대표는 잔을 비서실장 앞에 내려놓았다. 비서실장은 혼잣말을 하며 와인을 따랐다.
“참, 그 나이 먹고도······.”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니에요. 마셔요.”
“예, 감사합니다.”
오 대표는 와인 잔을 들어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마셨다.
“그냥 편하게 마셔요. 우리가 한두 번 본 것도 아니고.”
“아닙니다. 저는 이게 편합니다.”
“알아서 해요. 근데 무슨 일로 보자고 한 겁니까?”
“어르신 건강은 어떠신지 궁금해서······.”
“그게 왜 궁금한데요?”
“왜 궁금하다니요? 그 골방에서 고생하실 거 생각하면 제가 다리를 펴고 잠을 편히 잘 수가 있어야죠. 다 아시면서 그러십니까?”
비서실장은 조금 남은 와인 잔의 술을 말끔히 마시고는 입을 뗐다.
“그걸 알면 잘 좀 합시다, 이번엔. 예?”
“그럼요. 그래서 총알도 착착 준비 중에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르신 의중은 어떠신지가······.”
눈치를 보며 말을 흘리는 오 대표를 비서실장이 힐끗 쳐다봤다.
“그게 궁금했군요?”
“아니, 겸사겸사······. 그리고 저는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르신을 위해 이렇게······ 아니, 아닙니다.”
매섭게 비서실장이 노려보자 오 대표는 손을 내저으며 바로 꼬리를 내렸다.
“지금 그 공치사나 하자고 만나자고 한 겁니까? 당신이 그 자리에 있는 게 누구 덕인지는 알고 있죠?”
“그럼요. 어르신 덕분이지 않습니까.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딴 생각 말고 어르신이 하라는 대로만 해요. 당신은 그거면 됩니다.”
“알죠. 잘 압니다.”
“더 할 말 없으면 그만 가 봐요.”
“벌써요? 급한 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기분이 상한 듯한 비서실장의 입에 가시가 돋친 듯 그의 음성 하나하나가 날카롭기만 했다.
“내가 당신처럼 한가한 사람으로 보여요? 일분일초를 허투루 쓰지 않는 사람이라고, 내가. 몰랐어요?”
“그거야 알지만······ 알겠습니다. 그러니 어르신 의중만이라도 좀 알려주시죠.”
“그건 곧 알게 될 겁니다. 그러니까 돌아가서 맡은 일이나 잘해요.”
“그럼, 제가 한번 찾아가 봬도 되겠습니까?”
“당신이?”
어이가 없다는 듯 비서실장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럴 수 있으면 그렇게 해봐요. 어르신이 당신을 만나주실지 모르겠지만.”
“아, 예. 알겠습니다. 그럼.”
실망스런 얼굴로 오 대표가 고개 숙여 인사하고 나가려는데 비서실장이 불러 세웠다.
“진태 씨.”
“예, 비서실장님.”
“그동안 고생한 거 잘 압니다. 서운한 게 있다는 것도요. 그건 나중에 우리 세상이 되면 다 보상 받을 수 있어요. 그러니 너무 조급하게 굴지 말아요. 그러다 진태 씨가 다칠까봐 걱정 돼 하는 말이니, 새겨듣고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무슨 소리긴? 말 그대로지. 진태 씨, 잘 해봅시다. 예?”
“아, 예. 비서실장님.”
“그래요, 가 봐요.”
객실을 나온 오 대표는 생각에 잠겨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안에서 선글라스를 쓴 여자가 내리며 오 대표를 반갑게 아는 채했다.
“어머, 오 대표님 아니세요?”
“누구?······.”
선글라스를 벗으며 그녀가 싱긋 웃어보였다.
“어, 권 대표.”
“뭐야, 이제야 알아본 거야? 이그, 실망이다.”
권 대표라는 그녀가 오 대표의 팔을 툭 치며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권 대표가 여기는 어쩐 일이에요?”
“왜요? 저는 여기 오면 안 되는 거예요?”
“아니, 그게 아니라. 혹시 비서실장님 만나러 온 건가하고······.”
그녀는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이며 말했다.
“오 대표님도 비서실장님 뵙고 가는 길?”
“맞아요. 근데 무슨 일로 비서실장님을 만나러 온 겁니까?”
“그거야 나도 모르죠. 비서실장님이 찾으신 거라.”
“비서실장님이 찾아요?”
오 대표는 깜짝 놀라 물었지만 권 대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큰 눈을 깜빡이며 고개만 까딱했다.
“무슨 일로 부르신 건 모르고?”
“그렇다니까요. 그런 오 대표님은 뭐예요? 비서실장님하고는 언제부터 알고 지낸 사이?”
“아니······ 예전에 좀······ 어, 나는 이제 가봐야 해서 들어가 봐요.”
“오 대표님, 나중에 봬요.”
권 대표는 선글라스를 다시 쓰고는 비서실장이 있는 객실로 향했다. 오 대표는 서둘러 엘리베이터에 타서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나야. 권 대표가 비서실장님을 만나러 왔는데 무슨 일이지 좀 알아봐. 권민희 대표라고. 몰라? 아이, 씨. 검사들의 여자라고 유명한 권 대표를 몰라? 그래, 그러니까 알아봐. 무슨 일로 비서실장님을 만나러 왔는지. 그리고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도. 알겠지? 그래.”
***
버스에서 내린 송이와 민철은 송이의 집으로 가고 있었다. 송이는 방기철 형사에게 전화를 계속 걸고 있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아저씨, 전화를 계속 안 받는데요?’
‘무슨 일이지? 일단 집 앞으로 가보자.’
‘네.’
송이가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자 민철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 전화해보지 않고?”
“계속 전화를 안 받으셔서. 그냥 집 앞에서 기다려보려고.”
“아저씨는 뭐라고 그러셔?”
“아저씨 생각이야.”
“근데 말을 왜 그렇게 해? 꼭 네 생각처럼.”
“나도 같은 생각이라서 그렇지. 별게 다 시비야.”
“시비가 아니라······. 근데 왜 전화를 안 받지? 아저씨가 뭐라고 안 그러셔? 왠지 느낌이 쎄한데. 방 형사님은 믿을 수 있는 거야? 만나자는 이유도 설명 안하더니 이젠 전화도 안 받고. 박동식 형사님도 죽었다고 했잖아. 설마······ 방 형사님이?”
“그게 무슨······. 잠깐만. 아저씨 왜요?”
민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림자가 말을 걸어와 송이는 관련된 일이라 생각해 깜짝 놀라선 물었다. 그 모습에 민철도 덩달아 놀라 송이에게 물었다.
“왜 그래? 아저씨가 맞다고 그래? 그렇지? 내 뇌피셜이 맞는 거야, 그치?”
“아니야. 잠깐 조용해봐.”
송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그림자에게 말했다.
‘죄송해요. 다시 말씀해 주세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지금 누군가 우릴 미행하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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