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그날의 기억 2
그림자 탐정
본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무관하며 모두 창작에 의한 허구임을 밝힙니다.
문이 열리고 간호사가 복도로 나와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간호사는 두리번거리다 대기실 의자에 앉아 있는 한 남자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혹시, 남궁이한님 아니세요?”
그 남자는 멍하니 앞만 보고 있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간호사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시 한 번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물었다.
“남궁이한님 아니시냐고요?”
그제야 그가 눈을 깜빡거리며 간호사를 올라다봤다.
“남궁이한님?”
“아, 네. 제가 남궁이한입니다.”
이런 환자들을 많이 접해본 듯 간호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싱긋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러시죠. 저를 따라오세요.”
이한은 대답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간호사를 따라나섰다. 간호사는 상담실 앞에 서서 문을 가리켰다.
“안으로 들어가세요.”
“고맙습니다.”
간호사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이한은 방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온 이한이 문을 닫자 밝고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남궁이한 씨. 이 앞으로 앉으세요.”
이한은 의사를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 채 그가 가리키는 의자에 앉았다. 살짝 상기된 얼굴로 이한을 바라보고 있는 의사는 유수연이었다. 수연은 차트를 보고 이한임을 바로 알아봤지만 먼저 아는 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저는 정신의학과 전문의 유수연이라고 합니다.”
“네. 안녕하세요.”
“차트를 보니까 경찰이시네요. 오기 싫으신데 상부의 지시로 억지로 오신 것 같네요. 그렇죠?”
이한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들어오시기 전에 작성하신 문진표를 보니, 밤에 잠을 잘 못 주무신다고요? 악몽을 자주 꾸시고요.”
“네.”
고개를 약간 떨군 채 이한은 힘없이 짧게 대답했다.
“문진표도 간단하게 작성하셨던데 대답도 역시나 짧으시네요. 직장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계신 것 같은데 저한테 말씀해 보시겠어요.”
“아니, 뭐라고 해야 할지······,”
“안 되겠네요. 고개 좀 들어서 저를 좀 봐주시겠어요.”
“네? 아······.”
마지못해 고개를 들어 수연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한은 여전히 알아보지 못하는 듯했다.
“좋네요. 상담을 할 때는 눈을 좀 마주보는 게 좋아서요.”
이한에게 아는 체를 할까도 잠시 생각했지만 좀 더 공감대가 형성된 후에 밝히는 것이 낫겠다 싶었는지 수연은 차트로 눈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HRV(자율신경균형검사) 결과를 보니 교감신경 항진으로 불안, 초조상태 등 모든 기준치가 평균 최하로 나와 그동안 일상생활이 무척 힘드셨을 같은데. 스트레스 수치도 아주 높게 측정되었고요. 이 정도면 공황장애 증세도 겪으셨을 텐데요. 왜 이제야 오신 거예요.”
“그 정도입니까? 그저 우울증 정도로 생각했는데······.”
“본인은 잘 모를 수 있어요. 경찰이셔서 일반인들보다 더 못 느꼈을 수도 있고요. 일단 정밀 검사를 진행해보고 다시 얘기 나누죠. 나가시면 간호사가 안내해 드릴 거예요.”
“네. 감사합니다.”
무미건조한 말투로 말하며 이한은 일어섰다. 밖으로 나가는 이한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수연의 얼굴에는 반가움과 아쉬움이 묻어나 있었다. 그때 송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그래서요? 무슨 마음의 상처요?”
3년 전 이한과 만난 날을 떠올리던 수연은 송이의 말에 놀라 눈을 껌뻑이며 바라보았다.
“아, 미안해요. 이한 씨를 다시 만난 날이 생각나서······ 뭐라고 했죠?”
“이한형사님이 마음의 상처가 있어서 병원에 찾아왔다면서요? 무슨 마음의 상처요?”
“아, 그거요. 그건 말 못해요. 의사는 진료 중 알게 된 환자의 비밀을 타인에게 발설하면 안 되거든요. 비밀을 지켜야하는 의무가 있어요.”
“그런 게 있어요? 혹시 강박증이나 결벽증 같은 건가요?”
살짝 놀란 듯한 수연이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누구한테 들은 거예요? 아니면 그냥 말해본 건가요?”
“그걸 누구한테 들어요? 보통 정신과를 찾으면 그런 이유가 아닐까 해서 물어 본거죠?”
“그 외에도 많죠. 그 많은 것 중에 하필······ 아무튼 말 못해요.”
“말 못하신다니······ 더 물어보지도 못하겠네요.”
“미안해요. 내가 말을 꺼내놓고 괜히 궁금하게만 만들었네요. 송이 씨 앞에서 내가 별 얘기를 다 하네요. 이한 씨를 안다고 하니 나도 모르게 그랬나 봐요. 사실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서 대부분을 환자들 이야기를 들어주거든요. 그래서 더 말이 많았나 봐요. 송이 씨 덕분에 간만에 입 좀 털어내요.”
“입을 털어요?”
송이는 키득키득 웃으며 그림자를 내려다봤다.
‘아저씨, 전혀 기억 안 나세요? 강박증, 결벽증 때문에 병원에 가신 것 같은데······.’
‘그랬나? 나도 잘 모르겠는데.’
‘뭐 더 물어볼 건 없으시고요?’
‘박동식 경위에 대해 물어봐.’
‘네. 그럴게요.’
인사하고 가려던 수연에게 송이가 깜빡이 없이 물었다.
“박동식 형사님하고는 친하세요?”
“네? 그건 왜요?”
정작 물어놓고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송이는 바닥에 드리운 그림자를 보며 뭐라고 하냐고 물었다.
‘아빠 사건에 대해 물어보고 싶은데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그런다고 해.’
‘그게 말이 돼요? 더 이상할 것 같은데······.’
‘그냥 말해, 나도 더는 몰라.’
한참을 말없이 바닥만 보고 있는 송이를 보고 수연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송이 씨, 왜 그래요? 아까부터 자주 바닥을 내려다보던데······. 왜요? 동식 씨한테 할 말이라도 있어요?”
“아, 맞아요. 저희 아빠 사건에 대해 물어보고 싶은데 어떤 분인지 잘 몰라서요. 수연 언니하고는 편하게 말하겠는데 박동식 형사님은 좀 어려워서요.”
이해한다는 듯 수연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랬군요. 근데 어쩌죠? 나도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라서. 이한 씨랑 몇 번 만난 게 다에요.”
“그럼 이한형사님이랑 박 형사님은 절친이셨나 봐요?”
“그런 것 같아보셨어요. 이한 씨랑 만날 때면 항상 동식 씨 칭찬은 많이 했었거든요. 근데, 동식 씨랑 같이 몇 번 만나봤는데······ 아니, 아니에요.”
말을 흐리는 수연에게 송이는 무슨 일이 있었냐고 되물었다.
“아니에요. 나 때문에 괜한 선입견을 갖고 볼 것 같아서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것보단 송이 씨 아버지 일로 동식 씨한테 물어볼 것이 있다는 거죠? 근데 아까 얘기하는 걸 봐서는 편하게 물어봐도 될 것 같아 보이던데, 왜요? 뭐가 걸리는 게 있는 거예요?”
“걸리는 거요?”
수연은 송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송이는 또 고개를 숙여 그림자에게 물었다.
‘이제 뭐라고 해요?’
‘잠깐만. 나도 생각을 할 시간을 줘야지.’
‘지금까지 생각 없이 얘기한 거 아니잖아요.’
‘너 정말······ 아니, 됐다. 수연도 나처럼 뭐가 께름칙한 걸 느끼는 것 같아. 그게 뭔지 말해주면 좋겠는데······.’
“또 그러네요. 바닥에······ 어? 그림자가······.”
바닥에 드리운 송이의 그림자를 보고는 수연은 자신의 그림자와 번갈아봤다.
“그림자요? 아니······.”
“아닌가? 내 그림자랑······.”
“송이야!”
난감할 차에 민철이 대기실로 들어오며 송이를 불렀다.
“어, 왔어?”
민철이 다가오자 수연이 그림자에서 눈을 떼며 말했다.
“친군가 봐요? 그럼 나는 가볼게요.”
“아······ 네.”
좀 더 박 경위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림자가 노출될까봐 송이는 붙잡지도 못했다. 자리로 돌아가는 수연을 바라보며 민철이 물었다.
“누구야?”
“아저씨 친구.”
“그림자 아저씨 여자친구? 애인?”
“아니, 여사친.”
“아, 여사친. 그러고 보니 아저씨는 결혼 안 한 건가?”
송이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근데 무슨 일로 여기······ 아, 여기가 그림자 아저씨의 몸이 있는 곳이구나. 입원해 있는 거지?”
“눈치는 빨라서 좋네.”
“딱 보면 알지, 내가. 근데 아직 면회시간 아닌 거야? 얼마나 기다려야해?”
“딱 보면 안다면서? 지금 면회시간이라는 건 몰라?”
“지금 면회시간이야? 근데 왜 여기에 있어? 아, 면회 다 한 거야?”
“그것도 몰라?”
“야, 내가 그걸 다 어떻게 알아? 뭔데?”
화를 낼만도 했는데 그냥 넘어가는 민철이 웃겼는지 송이는 픽 웃더니 말했다.
“아저씨 동료 형사 분이 먼저 들어가서, 그 분이 나오면 들어가려고.”
“한 사람밖에 못 들어가는 구나. 알았어. 여기서 기다리면 되는 거지?”
그렇게 말하며 민철이 의자에 앉자 송이도 따라 앉았다.
“아저씨 상태는 어때?”
“몸, 아니면 정신?”
“말이 그렇게 되나? 둘 다. 너는 괜찮아?”
“한 번에 많이도 묻는다. 괜찮아, 아저씨랑 나는. 근데 아저씨 몸 상태는 그대로 인가봐. 더 좋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았나봐.”
“그래? 그럼 다행이네. 나빠지지는 않은 거잖아.”
“너 꽤 긍정적이다?”
송이가 힐끔 쳐다보며 말하자 민철이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나 원래가 긍정적이거든.”
“그건 네 생각이고.”
“얘가 또······ 아휴. 그런데 일이라는 게 면회였어?”
“아니. 면회도 하고, 또 알아내야 할 게 있어서.”
“그게 뭔데?”
“넌 아직 몰라도 돼.”
“아휴, 답답해. 이거 또 반복이네.”
“싫으면 돌아가던가?”
답답해 한 소리인데 계속 틱틱거리기는 송이가 얄밉고 화가 난 민철은 더는 참지 못하고 노려보며 눈을 치켜떴다.
“야, 무슨 똥개 훈련 시켜? 오라 가라.”
“너 운동 좋아하잖아.”
끝까지 놀리듯 말하는 송이였지만 민철은 꾹 화를 참아내며 말했다.
“적당히 해라. 이게 어떻게 운동이야? 난 제대로 배우고 싶거든, 아저씨한테.”
갑자기 송이가 바닥에 드리운 그림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알았어요. 얘가 먼저······ 그리고 얘는 아저씨, 아저씨 하면서도 인사도 안하잖아요.”
“야, 여기에 아저씨 있어?”
송이는 고개를 까닥거리며 넌 눈이 없냐고 핀잔을 주었다. 그제야 민철은 송이의 발아래를 살피고는 바로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그림자는 손가락으로 오케이를 보이며 인사를 대신했다.
“야, 임송이. 처음부터 아저씨가 있다고 말해줬으면 좋잖아. 난 중환자실에 가신 줄 알았지.”
“그걸 꼭 말해줘야 아니? 내 그림자만 보면 알 텐데. 눈치가 빠르다는 말은 취소해야겠다.”
“정말, 한마디를 안 져요. 아휴. 아저씨, 어떻게 이런 애랑 같이 다니세요? 아저씨가 보살이네, 보살.”
“야, 내가 어때서? 너보단 훨씬 낫지?”
“내가 뭐? 어?”
송이와 민철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중환자실 문이 열리고 박 경위가 나왔다. 박 경위를 본 이한엄마가 송이를 가리키며 말을 걸었다.
“저기, 아가씨.”
수연이 이한엄마를 말리며 일어나 송이에게 다가왔다.
“송이 씨, 동식 씨 나왔어요.”
“아, 네. 고맙습니다.”
민철이 불쑥 수연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이한형사님 친구시라고요? 저는 김민철이라고 합니다. 송이 친구에요. 아, 남자친구는 아니고요. 남사친이요.”
수연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누가 뭐라고 했어요? 반가워요. 나는 유수연이라고 해요. 남사친인데 여기까지 따라온 거예요?”
“예? 따라온 게 아니라······. 같이 운동······ 아니, 그게······.”
“운동도 같이하는 사이?”
수연의 말에 송이는 얼굴이 빨개져서는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언니. 정말 반 친구에요. 저는 면회 좀. 잠깐만요.”
가려던 송이는 민철의 팔을 잡아끌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쓸데없는 소리하면 나한테 죽는다. 그냥 조용히 있어. 알았지?”
“아니, 나는······.”
민철의 말을 끊으며 송이는 자신의 눈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냥 조용히 있으라고. 아저씨한테 너 감시하고 있으라고 할 거니까, 제발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아이, 참. 알았어. 알았으니까 어서 들어가.”
송이는 민철을 흘겨보며 중환자실로 향하다말고 다시 한 번 민철을 향해 입에 지퍼를 닫듯 손짓해 보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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