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예전과 다른 일상
그림자 탐정
본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무관하며 모두 창작에 의한 허구임을 밝힙니다.
사고가 있고 10일이 지나 송이는 평범한 일상 속으로 돌아왔지만 예전 같지만은 않았다. 정애리와 다시 거리를 두게 되었고 항상 곁에서 수다스럽게 말을 걸어오던 유민정도 입을 닫은 지 꽤 시간이 흘렀다.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왔지만 그 자리에 없는 것은 기정뿐이었다. 그 하나로 그들의 일상은 예전과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송이의 살이 더 올랐다. 삼시 세끼를 다 챙겨먹는 것도 아니었지만 밤에 폭식하기 시작했다. 잠자리에 들었다가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냄비를 들고 밥솥의 남은 밥을 모두 퍼서 냉장고의 반찬들을 넣어 비벼 먹곤 했다.
몇 번을 엄마에게 들켜 혼도 났지만 엄마의 잔소리도 등짝 손맛도 폭식을 막진 못했다. 그림자도 나서서 말리지 않았다. 아니, 한동안 묵언수행이라도 하는 듯 한마디도 않고 있었다. 그렇다고 송이가 그림자에게 말을 걸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 그리고 주말이 찾아왔다. 주말에도 일을 하러 나간 엄마를 대신해 송이는 집안일을 도맡아야 했다. 아침부터 식사 준비에 설거지, 청소와 빨래. 그렇게 오전 하루를 다 보내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김민철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송이야, 집이야?”
“응.”
“그림자 아저씨하고는 어때?”
송이는 아무 말 없이 휴대전화를 귀에 댄 채 멍하니 창밖만을 바라보았다.
“내 말 안 들려? 그림자 아저씨랑 얘기는 해봤어?”
귀찮은 듯한 목소리로 송이가 되물었다.
“무슨 얘기?”
“얘가 정말······. 내가 물어봐달라고 했잖아. 언제부터 운동 시작할 거냐고?”
“그랬어?”
“야, 정신 좀 차리고 다녀. 너희들 요즘 왜 그래? 그건 사고였다고. 너희들 잘못이 아니야. 아니, 우리 잘못이 아니라고. 기정이가 그렇게 된 건······ 슬프고 가슴 아프지만 언제까지 이러고들 있을 거야? 그림자 아저씨도 아직 그런 거야? 아니면 너만 그런 거야?”
“몰라. 다 귀찮아.”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는 송이였다.
“이럴 때일수록 운동을 하면······.”
방금 전 힘없던 얘가 맞나 할 정도로 송이가 버럭 화를 냈다.
“운동, 운동. 그만해! 넌 지금 그게 그렇게 중요해? 그러면 네가 직접 아저씨한테 말해. 아저씨도 그날 이후로 말 한마디 안하고 있으니. 네가 직접 물어보라고. 난 안해, 운동. 너나 많이 해. 그러니까 그 일로 전화하지 마. 그건 학교에서 얘기해도 되는 거잖아, 끊어.”
전화를 끊으려는 송이를 다급하게 불렀다.
“야, 임송이. 끊지 마.”
“또 왜?”
“아니······ 잠깐만. 할 얘기가 있, 있어.”
“빨리 말해. 난 이제야 겨우 쉬고 있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뭐하고 있었는데? 설마 공부하고 있었다는 건 아니겠지?”
남의 속도 모르는 소리에 송이는 소리를 와락 질러댔다.
“시끄러워! 할 말이나 해?”
“아흐, 귀청 떨어지겠다. 왜 그렇게 소리를 질러? 아니, 나는······ 그래, 네가 걱정 돼서 전화한 거야. 운동은 핑계고······. 그날 너······ 아니, 학교에서 널 보면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애처럼 보였단 말이야. 그래서 주말이라 잘 지내나 싶어 전화해본 거고.”
“그걸 네가 왜 걱정하는데? 신경 꺼. 무슨 일을 저질러? 아, 내가 사고라도 칠 것 같아 보였어? 무슨 사고?”
마음을 알겠지만 송이의 입에서는 좋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니······ 왜 말을 그렇게 해. 난 네가 그냥 걱정돼······ 아니, 아니다. 너 이러는 거 보니까, 괜찮은 것 같네. 내가 괜한 걱정을 했다. 알았어, 주말 잘 보내고 학교에서 보자.”
“그래, 내 걱정할 시간에 너나 신경 써. 너도 힘들 거 아니야. 괜찮은 척 그만하고. 힘들면 힘든 내색도 내고 그래. 다른 친구들처럼······. 너도 직접 봤잖아.”
“뭐야? 나 걱정해 주는 거야?”
송이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아휴, 걱정이 아니라······ 됐어. 그만 끊어. 피곤타.”
전화를 끊지도 않고 그냥 바닥에 내려놓았다. 잠시 민철의 목소리가 들리다 끊겼다. 송이는 다시 창밖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 찰나에 민철의 얼굴이 떠올랐다. 무슨 이유로 전화를 했을까 생각하니 갑자기 송이의 볼이 붉어지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동안 듣지 못했던 그림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생각이 맞아.”
“아저씨, 자꾸 내 생각을 읽으실 거예요? 어! 말했다. 아저씨, 지금 말한 거예요?”
“그래, 말.”
“나는 하도 말이 없어서 이제는 말을 못하는 줄 알았잖아요.”
“사돈 남 말 하네.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나한테 말도 걸지 않았으면서. 뭐, 말 걸어도 말 못했을 거야. 아니, 안했을 거야.”
“근데 왜 말 건 거예요? 이제 좀 괜찮아진 거예요?”
“너는?”
“제가 먼저 물어봤거든요.”
“여전하네. 이제 좀 괜찮아졌나보네. 나도 이제 좀 정신을 차려보려고.”
“저는 아직인데······. 아저씨는 어른이라 그런 건가요?”
“아니. 나도 힘든 건 마찬가지야. 그렇다고 뭐가 달라지는 건 없으니 이제 정신 차리고 시작해야지.”
“시작이요? 무슨 시작이요?”
“기정이를 그렇게 만든 놈들을 벌줘야지.”
“그건 교통사고로 사고처리가 다 됐잖아요. 직접 보시고는 왜 그런 말을 하세요?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무슨 소리야? 기정이가 왜 무단횡단을 했겠어? 신호가 바뀐 줄도 모르고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다고. 그건 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내 예상으로는······.”
그림자는 말을 하려다 얼버무리며 더 잇지 않았다.
“예상, 예상 뭐요? 왜 말하다 말아요?”
“아니, 기정한테 무슨 일이 있었을 거라고. 그 일에 로망스클럽의 그자들이 연관되어 있을 거야. 클럽의 깡패들과 일진들······ 그리고 소희와 석진. 그들은 기정이 왜 그랬는지 알고 있어. 그걸 밝혀 그들 모두를 법에 심판을 받게 해야지.”
“아저씨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기정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아저씨도 모르시는 거예요? 그 깡패들을 우리가 무슨 수로 법에 심판을 받게 해요? 아저씨는 그림자에요. 저는 학생이고요. 우리가 무슨 수로요? 그때 내가 조금만 더 빨리 기정한테 전화를 했다면······.”
꺼내지 말아야 할 말을 한 것 같아 송이는 급히 말을 멈췄다.
“네가 잘못한 게 아니야. 다 이 아저씨 잘못이야. 내가 좀 더 빨리 판단해서 처리했으면 그런 일은 없었을 거야. 너의 잘못이 아니니, 그런 생각 마.”
“아니에요. 아저씨도 그런 말 마세요. 아저씨도 최선을 다하셨잖아요. 제가 괜한 말을 꺼냈네요. 죄송해요.”
“아니야. 우리, 자책은 하지 말자.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만 생각하자, 어?”
“알겠어요. 근데 우리······ 아니, 제가 할 수 있을까요? 차라리 반대였으면 나았을 텐데. 내가 그림자고, 아저씨가 나였으면······.”
“방금 말했는데 자책하지 말자고. 그건 너의 잘못도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운명이지. 너와 나의 운명. 내가 너의 그림자가 된 이유가 분명 있을 거야. 이유 없는 존재는 없으니 말이야.”
“이유 없는 존재라고요?”
“그래, 생명에게는 존재의 이유가 있어. 너 그리고 나 우리 인간 모두 존재의 이유가 있고, 그 이유로 살아가는 거라고 생각해.”
“그 말 참 심오하네요. 철학 좀 공부하셨나 봐요?”
“철학? 에이, 무슨 철학까지. 그냥 내 생각을 말한 거지.”
“그래요? 존재의 이유라······. 그럼 저도 존재의 이유가 있을까요?”
“당연하지. 지금 당장은 그걸 모를 수도 있어. 그렇다고 없는 건 아니야.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그래서 그 이유를 찾아 우리 인간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게 아닐까 싶고. 언젠가는 그 이유를 찾게 될 거야. 아니, 보이게 될 거야. 지금 너와 나의 존재의 이유는 분명해. 이번 사건을 해결하라는 것.”
“이번 사건······. 기정이 사건 말이군요.”
그림자는 오케이를 만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렇지. 그렇다고 너에게 강요할 수는 없어. 넌 아직 학생이고. 위험할 수도 있어서. 기정이 그랬던 것처럼······.”
그림자의 목소리에서 송이는 자신에게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저씨는 알고 있는 거죠? 기정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걸요, 그렇죠?”
“그건 나중에······ 아니, 네가 알면 좋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야. 그것보다 나는 혼자 움직일 수가 없어. 너와 떨어지면 너와 나 모두 위험하고. 그렇다고 그런 이유로 너한테 같이 하자고 강요할 수도 없고. 방금도 말했지만 이 일은 위험할 수도 있어. 나 같은 형사가 해야 하는 일이고. 그래서 너한테 미안하기도 해.”
“무슨 말인지 이해해요. 알겠어요. 도울게요. 근데 정말 우리······ 아니, 제가 무슨 도움이 될까요? 우리 둘이서 뭘 어떡해요?”
“맞아. 난 그저 그림자일 뿐이고. 넌 학생이고. 한계가 있지. 그래서 도움을 받아야겠어.”
“도움이요? 누구한테요? 아, 친구들이요. 근데······.”
“아니. 너희 친구들이 아니고. 내 친구······ 아니, 동료.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동료······ 아, 그 경찰 말이군요. 지능범죄수사대에 있다는? 아저씨랑 같이 근무했다는······ 이름이 뭐였더라?”
“박동식 경위.”
“아, 맞다. 박동식 경위. 근데 잘 모르겠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가 모든 기억을 잃었잖아.”
“그래서요? 그래도 그때 좋은 기억들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내가 그런 말을 했어?”
“아닌가? 왜 난 그렇게들은 것 같지···”
“아무튼, 맞아. 좋은 기억들이 조각조각 떠올라. 그런데······.”
이번에도 뭔가를 말하려다 주춤하며 말을 잇지 않자 송이가 살짝 삐친 말투로 또 그런다며 무슨 이유인지 물었다.
“뭐야? 이제 바로 아는 거야?”
“그럼요. 보이지 않으니 아저씨의 목소리가 더 잘 들리는 거 있죠. 아저씨의 목소리 떨림으로 다 알겠는데요, 이제.”
“그래? 아이, 이제 거짓말도 못하겠네.”
“뭐예요? 저한테 거짓말한 적 있는 거예요?”
“아니, 아니야.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을 못하겠네.”
송이는 피식 웃어 보이며 말했다.
“저도 말이 그렇다는 거죠, 뭐?”
그림자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제 그만 웃고 말씀해 보세요. 왜요? 좋은 기억만 있는 게 아니에요?”
“아니야, 그게.”
박 경위가 송이를 미행한 사실을 그림자는 미처 말하지 못했다.
“그럼요?”
“왜 자꾸 나에 대해 다 알려고 그래? 우리 적당히 거리를 두자고. 나의 매력에 빠지면 빠져나오기 힘들다. 그러니······”
기가 찼는지 송이는 손뼉까지 치며 껄껄 웃었다.
“뭐야? 그렇게 웃을 것까지는 없잖아. 아이, 참.”
“왜요? 웃으라고 한 소리 아니었어요?”
그림자는 헛웃음 치며 말했다.
“그래, 웃자. 웃어. 아무튼 박동식 경위를 만나봐야겠어. 어떻게 만나야 할까 그걸 고민하고 있거든. 무작정 네가 찾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만약에 나랑 친한 사이라면 병원에 오지 않을까?”
“병원······ 아, 그러네요. 그런데 그 할머니······아니, 아저씨 엄마 말이에요. 안 만나 보셔도 돼요?”
“이젠 만나봐야겠어.”
“이제요?”
“응. 내 어머니라면 내가 알아보겠지. 그러면 무슨 기억이라도 돌아오지 않을까?”
“네, 그러세요. 그럼 병원에 가보는 걸로 할까요?”
“그러자. 나도 잘 있는지 보고.”
“아저씨야, 이렇게 멀쩡히 있는 거 보면 아저씨의 몸도 건강한 거 아닐까요? 단지 의식이 없는 거지.”
“그러면 다행이고. 병원엔 갈 수 있겠어?”
“왜요? 아, 엄마가 시킨 일은 거의 다했어요. 병원에 갔다 와서 마른 빨래만 정리하면 돼요.”
“참, 너무한다. 집안일을 어떻게 너한테 다 시키냐? 아무리 밖에서 일을 한다고 해도, 이거 너무 한 거 아니야?”
“됐어요. 빨리 갔다 오죠. 저녁 준비도 해야 한다고요.”
“아이, 참. 그래, 알았다.”
새로 이사 온 집은 방이 두 개로 연결된 구조로 되어 있어, 안쪽은 송이의 엄마가 바깥쪽은 송이가 쓰고 있지만 송이의 방은 거실처럼 사용되고 있었다. 연립주택 5층 꼭대기 층이라 송이와 그림자는 현관문을 나와 한참을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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