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검사들의 여자
그림자 탐정
본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무관하며 모두 창작에 의한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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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거지까지 끝낸 송이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온다는 핑계로 집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제야 민철에게 전화한 송이는 금남천으로 나오라는 말만하고 끊었다. 그리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송이가 답답한 듯 그림자의 목소리가 커졌다.
“왜 그리 고집이야?”
“괜찮다고요. 금남천까지 멀지도 않고요.”
“그래도······.”
“누가 저한테 신경이라도 쓰겠어요. 그때는 모텔 근처라 술 취한 아저씨들이 많았지만 여긴 집밖에 없잖아요. 염려 마세요.”
“아무튼 너도 참. 알았다.”
더 말해도 소용없다는 걸 느낀 듯 그림자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운동할 겸 뛰어갈까요?”
“아니, 무릎에 무리가 갈 수 있으니까, 그냥 걸어.”
“제가 그 정도에요?”
“그 정도 아니야. 하체보다 상체가 더 무겁기 때문에 그러는 거니까, 비율적으로 말이야.”
“그게 그 말이죠. 뚱뚱하다는 거잖아요. 좋게 말해 주셔서 고맙네요.”
“아니라니까, 정말. 넌 조금 비만일 뿐이야. 운동하면 나아질 거야.”
“그냥 뚱뚱하다고 하셔도 돼요. 뚱뚱한 게 뭐 죈가요? 정신과 치료 받는 것도 부끄럽고······ 뭐라고 했더라, 아! 창피한 일 아니라면서요. 이것도 같은 거라고요. 저도 뚱뚱하다고 절대 부끄럽거나 창피하지 않아요.”
송이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누가 뭐라고 했어? 그래, 너 뚱뚱해. 됐어. 꼭 그 소리가 듣고 싶다니 해주는 거니까, 오해 말고.”
“치, 됐어요. 그나저나 운동만 하면 되는 거예요? 다이어트하려면 식단도 조절해야 한다고 하던데······.”
“당연하지. 특히 밤에 음식섭취는 불가야, 앞으로. 야식은 더더욱 안 되고.”
“아시면서 왜 그러세요? 저는 스트레스를 먹는 걸로 푼다고요. 그것도 못하면 정말 미칠 거라고요.”
“안 미쳐. 운동을 하잖아. 스트레스 쌓이면 말해. 그때그때 바로 운동으로 풀면 돼.”
“치, 정말. 알았어요.”
그들은 운동 얘기를 나누며 금남천에 도착했다. 만나기로 했던 민철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 안 왔나 봐요. 우리 먼저 하죠. 걷기만 하면 돼요?”
“일단 걷는 것부터 시작하고. 호신술도 조금씩 가르쳐줄게.”
“그냥 호신술만 배우면 안 돼요? 호신술도 운동이잖아······.”
송이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그림자가 말했다.
“유산소 운동을 해야 해. 호신술로는 살 못 빼.”
“치, 무 자르듯 싹둑 잘라 말하지 말라고 하시더니 잘도 그러시네요.”
“뭐? 야······. 너 듣기는 다 들었구나?”
“들으라면서요?”
“아이쿠, 알았다. 내가 말을 못한다. 어찌 이렇게 당당한지. 집에서 보는 그 임송이인가 자꾸 헷갈린다.”
“매번 그 얘기하실 거예요? 몇 번을 말씀드려야 해요?”
“아, 알았어. 미안. 그래, 아는데 나도 모르게······. 다시는 그 얘기 안 할게.”
“치, 못됐어. 정말.”
“너도 그 치 좀 안하면 안 되냐? 그리고 못됐어도. 무슨 유행어도 아니고.”
“왜요? 듣기 싫으세요? 그럼 그런 말을 안 꺼내시면 되잖아요, 매번.”
“네네. 알겠습니다. 아이고, 무서워라.”
“치, 하나도 안 무서우면서······. 또 놀리기나 하고.”
눈을 흘기는 송이를 보고 그림자는 걸걸 소리 내어 웃었다.
“정말 못됐어.”
“미안, 미안. 너 놀리는 재미가 쏠쏠해서 그랬어. 앞으로 엄마 얘기는 되도록 안 할게.”
이번엔 송이는 말대꾸하지 않고 그냥 피식 웃고 넘겼다. 송이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민철의 전화였다. 전화를 받은 송이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저 멀리서 민철이 손을 흔들며 달려오는 것을 보고는 전화를 끊었다.
“저기 민철이 오네요.”
“어, 보여. 해맑게도 웃는다. 뭐가 좋다고.”
“그러게 말이에요.”
“아이고, 참.”
헛웃음을 지는 그림자에게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아니라고만 하자 송이는 툴툴대며 뭐가 또 아니야 라고 말했다.
“야, 그건 반말이다.”
“혼잣말이거든요.”
“그러냐? 쩝······.”
송이가 바닥에 드리운 그림자를 보며 말하고 있는 동안 민철은 벌써 와서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그걸 모르고 고개를 든 송이는 민철을 보고 깜짝 놀라 뒷걸음쳤다.
“야, 너 뭐야? 왔으면 왔다고 말을 하지.”
“뭘 그렇게 놀라? 나는 그림자 아저씨랑 얘기하고 있는 것 같아서 기다렸지.”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배려가 깊었······.”
또 삐딱하게 말하려는 것을 그림자가 나서서 말렸다.
‘야, 그러지마. 임송이, 왜 그래?’
말하는 중에 또 한소리를 들은 송이는 입 밖으로 소리 내어 그림자에게 말했다.
“제가 또 뭘요?”
“너 뭐하냐? 나한테 말하는 거야? 아저씨한테 말하는 거야?”
송이는 고개 숙인 채 눈만 치켜 올려 민철을 흘겨봤다.
“딱 보면 몰라? 아저씨한테 한 말이지. 존댓말 했잖아. 내가 너한테 그러겠니?”
“그건 그러네. 아저씨, 안녕하세요. 저 왔어요.”
그러려니 포기한 얼굴로 민철은 고개를 돌려 그림자에게 손을 흔들어보였다. 그림자도 손은 흔들어 화답했다.
‘송이야, 나도 안녕이라고 전해줘.’
딴 짓을 하며 송이는 그림자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야, 임송이. 내 말 못 들은 척할 거야? 됐다. 괜히 심술은······.’
그림자는 양손을 들어 민철에게 흔들어보였다. 그 모습에 민철은 환하게 웃으며 따라 손을 흔들었다.
‘치, 아주 케미가 좋으시네요.’
‘네가 내 말을 전달 안하니 이렇게라도 해야지. 근데 왜 내 말을 전달 안하는데?’
‘인사하는 것까지 제가 전달해야 해요? 앞으로 제 입이 쉬지 않고 떠들어야 할 것 같은데요. 저도 피곤하거든요, 전달하는 거.’
‘그게 또 그런가?’
얄밉긴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아 그림자는 웃어넘겼다. 송이가 정색하며 왜 웃느냐고 묻자 그림자는 웃음기를 애써 잡으며 말했다.
‘아니야. 그래, 알았어. 이제 민철이랑 운동을 같이 하면 좋을 것 같은데. 내 말 좀 전달해 줄 수 있겠어?’
‘처음부터 이러셨어야죠.’
‘그래, 미안하다. 정중히 부탁을 했어야 했는데 숙녀 분께 말이야.’
‘또 놀리시는 거죠?’
‘아니야. 미안하다고 했잖아. 정말이야. 내가 처음부터 정중하게 부탁을 했어야 하는데 지시처럼 들렸을 것 같아. 내가 사과할게.’
‘알았어요. 말씀하세요.’
그림자가 진심어린 목소리로 정중하게 말하자 송이도 한풀 화가 꺾인 듯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송이는 민철에게 말했다.
“아저씨가 너한테 할 말이 있대.”
대답하며 민철은 그림자를 내렸다보았다.
“내가 말하는데 왜 아래를 봐?”
“아저씨가 말하는 거라며? 그냥 말해. 아저씨, 말하세요.”
“벌써 말했거든.”
“그럼 말해.”
민철은 고개는 움직이지 않고 눈만 치켜 올려 송이를 보고는 다시 아래를 봤다. 송이는 하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는 하체 훈련을 중점적으로 해야 해. 달리기와 계단 오르기로 허벅지 근육을 키우고 웨이트를 이용해 강화운동을 하면 좋겠지만 그건 바로 힘드니까 스쿼트로 대신해도 될 거야. 일단 오늘은 달리기부터 시작하자.”
“야, 아저씨 말을 전달하는 거지 네가 말하는 게 아니잖아. 말이 좀 짧다.”
“그냥 들어. 나도 피곤하거든. 그냥 아저씨 말을 그대로 전달하는 게 편할 것 같아서 그래.”
마음대로 하라는 듯 민철은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림자를 보며 말했다.
“근데 무술은 안 가르쳐 주세요?”
그림자를 내려다보고 있던 송이는 고개를 들어 말했다.
“격투기 무술은 하체운동이 어느 정도 됐을 때 알려줄게. 대신 하나 조건이 있어. 복수는 하지 않는다고 약속해줘.”
“아저씨······.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것 때문에 제가 여기에 있는 건데······.
***
룸으로 들어온 여자에게 오진태 대표는 달려가 허리를 깊게 숙이며 인사했다.
“아이고, 어떻게 이런 누추한 곳까지 직접 오셨습니까?”
“오랜만에 뵙네요, 오 대표님.”
“예, 이렇게 또 뵙게 될지 정말 꿈에도 몰랐습니다. 아, 여기는 미래은행 박민도 영업본부장입니다. 그리고 여기는 도무철 변호사고요. 도무진 국장 동생입니다.”
“아하, 네. 그러시구나. 어쩐지 낯이 익다 했어요. 반가워요, 도무철 변호사님. 아, 본부장님도요.”
그녀는 턱을 살짝 끄덕이며 도도하게 인사했다. 반면 박 본부장은 그녀 앞에서 고개를 연신 숙이며 인사했다.
“저도 만나 봬 너무나 반갑습니다. 이렇게 뵙게 되다니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말로는 많이 얘기 들었습니다.”
“좋은 말은 아니겠네요. 그렇죠?”
본부장의 얼굴이 그새 굳어져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손을 내저었다.
“아이, 아닙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사모님에 대한 말씀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그녀는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지만 그의 말에 미간이 좁혀지는 것이 확연히 눈에 띠였다.
“사모님이요?”
오 대표가 본부장의 어깨를 툭 치며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대표님, 이 친구가 잘 몰라서 말실수를 했습니다. 어서 사과드려.”
“죄송합니다, 대표님.”
뭘 잘못 말했는지도 모른 채 박 본부장은 눈치껏 바로 허리를 굽혀 고개를 조아렸다.
“제가 온 이유는 아실 거예요. 이번 일 제가 나서지 않지만 신경 써서 보고 있다는 거 알고 계실 거예요. 그러니 문제없이 잘 마무리 하실 거라 믿어도 되겠죠? 그렇죠, 오진태 대표님?”
“아이고, 물론이죠. 우리 권 대표님이 뒤에서 딱 버티고 계시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대표님.”
권 대표라는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오 대표와 본부장 그리고 도 변호사를 둘러보고는 말을 이었다.
“흠, 그래요. 저도 잘 부탁드려요.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시고요. 여기는 제가 결제하고 갈 테니 마음껏 즐기고 가세요.”
남자들은 동시에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표시를 보냈다.
“역시 권 대표님이십니다. 감사합니다.”
권 대표는 손을 살짝 들어 보이며 룸 밖으로 나갔다. 미키 정이 뒤따라 나섰고 오 대표도 쪼르륵 따라 나갔다. 룸에 남아있던 도 변호사가 박 본부장 옆으로 와서는 물었다.
“정말 모르고 하신 말씀이세요?”
“뭐가요?”
“정말 모르시나보네. 사모님 소리요? 그거 제일 듣기 싫어하신다고 했는데. 형님······ 아니, 오 대표님한테 얘기 못 들으셨어요?”
“그래요? 말해줬나? 아니, 모르겠네.”
“앞으로 또 보실 일이 있을까 모르겠지만 또 보시게 되면 말조심하셔야겠어요. 엄청 무서운 여자라고 들었거든요.”
“그래요? 알고 있는 것 있으면 좀 말해 봐요.”
“검사들의 여자라는 말 못 들어보셨어요?”
“검사들의 여자······.”
본부장은 처음 들어보는지 고개를 갸웃거렸고 도 변호사는 그런 그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며 말했다.
“정말 하나도 모르시네. 저 분이 검사들의 여자라고 불리는 분이라고요. 검사들을 한 손에 쥐락펴락하는 여자라는 말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 설마?”
도 변호사는 눈을 찡긋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에요?”
“생각하시는 게 맞습니다. 돈줄로도 유명하잖아요. 대부업 말이에요. 우리 종잣돈도 다 거기서 나온 거 모르셨어요? 그 많은 자본금을 그 짧은 기간에 어떻게 만들었겠어요. 안 그래요? 뭐, 다는 아니지만.”
“그래요? 와우, 대단한 여자네. 근데 왜 사모님이라고 하면 질색을 하는 겁니까?”
“아직 미혼이에요, 미혼. 사모님이라고 하면 검사들의 여자라는 말이 떠오르나 보죠. 제발이 저린 법이니까요.”
본부장은 그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코웃음을 지었다.
“그러네요, 듣고 보니. 도 변도 오늘 처음 보는 겁니까?”
“예. 저도 처음이에요. 오 대표님한테 말로만 들었지. 얼마나 대단한지 사람들 앞에 잘 나서지도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아까도 보셨잖아요. 이 어두운데 커다란 선글라스 쓰고 있는 걸요. 옷도 남자처럼 정장차림이고.”
“그러네요. 딱 들어왔을 때 포스가 장난 아니더라고.”
“네, 맞아요. 저도 그렇게 느꼈습니다.”
“여기 서서 뭐해?”
도 변호사와 박 본부장은 깜짝 놀라며 뒤돌아봤다. 그들은 소파에 앉을 생각도 못하고 자리에 서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룸으로 돌아온 오 대표는 그런 그들을 뒤에서 잠시 지켜보다 부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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